https://youtu.be/jvEkbf7kLuk  


 카페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카페는 지하에 있었고 버스 정류장이 있는 곳이라 사람이 늘 많았다. 따뜻한 느낌이 나는 색으로 칠해진 벽돌로 파티션을 만들어 놓아서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모든 테이블이 독립적이어서 비밀 공유에 열을 올리는 학생들에게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카페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블랙박스라고 하자. 블랙박스는 당시의 안전지대(옷) 같은 느낌이라고 해두자. 블랙박스에는 늘 조관우의 겨울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겨울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마치 딴 세상에 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가요 중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목소리에 이런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얼굴은 어떤 얼굴일까. 같은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가면 수순처럼 따라오는 겨울 이야기 속 두 여인에 빠져든다. 블랙박스가 바로 추억의 노래가 흐르는 카페가 아닌가. 블랙박스에서 겨울 이야기의 테이프를 계속 튼 사람은 아르바이트를 하는 여자애였다. 눈이 크고 안경을 썼고 포니테일의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오는, 얼굴이 동글동글하고 작은 몸에 목소리가 큰 여자애였다. 당시의 카페에서는 카페만의 유니폼을 입고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잘 어울리는 여학생이었다.     


 카페에는 요즘과는 달리 사이다와 우유도 팔았다. 요즘처럼 혼자서 당당하게 카페에 앉아서 음료를 마시며 창의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주로 친구와 가서 커피를 제외한 음료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주문을 하면 아르바이트가 서빙을 했다. 한 번 주문하고 세 시간이 되면 재주문을 하거나 나가야 했다. 나는 고등학교 사진부여서 필름 카메라를 들고 자니며 여러 사진을 담았는데 봄이면 내가 있는 고장을 찾아서 오는 제비를 많이 찍었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얼굴이 동글동글한 여자애를 보기 위해 사진부 애들과 함께 블랙박스를 거의 매일 가서 우유와 사이다를 열심히 마셨다. 블랙박스에 가면 그 여자애가 있었고 조관우의 겨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저 그 정도만으로 너무나 행복했다. 학교 축제 준비로 출품할 사진에 대해서 블랙박스에서 회의를 자주 했다. 나는 제비를 사진으로 담는 걸 좋아했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와서 기와집 같은 곳 처마에 집을 짓고 새끼를 낳아서 열심히 새끼들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제비는 신기하기만 했다. 새끼들은 주둥이를 벌리고 짹짹 울어댔다. 어른들은 떨어지지 말라고 제비 집 밑에 판자를 대주기도 했다. 밖으로 나가면 겨울이 오기 전 제비들은 스텔스처럼 도로에 바짝 붙어 비행을 했다. 셔터를 누르지만 필름 카메라가 제비의 비행을 담지는 못했다.      


 그렇게 우유와 사이다를 마시며 제비 사진들을 테이블에 늘어놓고 축제에 출품할 사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그 여자애가 와서 사진에 대해서 이것저것 질문을 했다. 그 계기로 우리는 좀 친해지게 되었다. 그 여자애는 우리 학교와 멀리 떨어진 여고에 다니고 있었다. 소설 태백산맥을 좋아하고 퐁네프의 연인들을 심도 있게 본 문학소녀였다. 늘 블랙박스에서 나는 테이블에 앉아서, 그 애는 테이블 옆에 서서 잠깐씩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밖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별거 아닌데 너무 떨렸다. 그날 그 애는 안경을 벗고 머리를 풀고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나왔다. 퐁네프의 연인들을 좋아한다는 그 애를 데리고 나는 주성치 영화를 보러 갔다. 라면이 오맹달과 주성치의 입으로 들어가 코로 나왔다. 유치했지만 그 애는 주성치 영화는 찰리 채플린을 닮았다고 했다. 멀리서 보면 온통 희극인데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했다.


 주성치 영화를 알아봐 주니 내심 뿌듯했다. 그리고 영화 보고 나와서 바닷가에 앉아서 그 애가 들고 온 조관우 2집 리메이크 앨범을 같이 들었다. 조관우가 겨울 이야기를 부르고 슬픈 인연을 부르고 님은 먼 곳에를 불렀다. 조관우 얼굴 어떻게 생겼어? 나도 몰라, 이렇게 미칠 것처럼 멋지게 노래를 부르는데 얼굴이 뭐가 중요해. 우리는 그런 대화를 나눴다.    

 

 그 애와 두 번을 더 만났다. 두 번째 만났을 때 손을 잡았다. 주로 그 애가 이야기를 하고 나는 듣는 쪽이었다. 그 애는 말할 때 단어 같은 것도 신중하게 생각해서 말을 했다. 경구, 인식, 소유, 질서의 파괴 같은 말을 적절하게 사용했다. 문학소녀답게 릴케와 루 살로메의 이야기를 했고, 모딜리아니와 잔 에뷔테른의 사랑에 대해서도 들려주었다. 나는 입을 벌리고 경청하는 학생이 되었다.     


 노래방에 갔을 때 조관우의 겨울 이야기를 6번 정도 번갈아가며 불렀다. 내가 부를 때는 조관우를 따라 하는 내 목소리가 듣기 싫어서 죽을 것 같았지만 그 애가 잘한다고 치켜세워서 계속 불렀다. 그 애는 내가 찍은 제비 사진을 좋아했다. 그래서 사진 뒤에 글자를 써서 주기도 했다. 3번째 만나고 헤어질 때 이제 블랙박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블랙박스에 갈 일도, 또 겨울 이야기를 들을 일도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삐삐로 연락을 주겠다고 하고서는 그날이 마지막이 되었다. 그 애의 삐삐로는 연락이 되지 않고 그대로 추억은 하이얀 눈처럼 무화되었다. 근래에 도시에서 사라졌던 제비가 코로나 덕분인지 다시 비행을 하기 시작했다. 제비의 비행을 보니 블랙박스에서 조관우의 겨울 이야기를 내내 들었던 그 애가 문득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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