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음악이나 팝가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쩐지 자신이 없어져 버렸다. 요즘은 정말 눈이 번쩍 뜨일정도로 전문적으로 지난 팝 가수들의 근황이나 그들이 걸어온 길을 들려주는 유튜브가 많아서 나처럼 그저 예전에 들었던 것들로 썰을 푼다는 건 허구에 가까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누가 그랬던 것처럼 사실이 있어도 그걸 기억하는 사람들은 전부 자기만의 방식으로 진실이라고 믿기 때문에 기억을 일단 편집을 해버리면 그 속에 허구가 들어가게 된다.


어떻든 오늘 올릴 글을 실컷 적어 놓은 다음 다른 이야기를 올리려고 한다. 일전에 휘트니 휴스턴의 다큐 영화 ‘휘트니’를 봤다. 이 영화는 다른 다큐 영화처럼 주인공의 모습을 카메라로 들이대고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녀를, 휘트니를 알고 지냈던, 휘트니와 가장 가까웠던 주위의 사람들, 가족 내지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이다. 그러면서 휘트니의 성장과 나락을 동시에 보여준다.


다큐 영화라는 건 일반 상업영화보다 사실에 근접해 있다.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고 다큐 영화는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다큐멘터리를 촬영을 하고 난 다음 편집을 하는 과정에서 어쩌면 허구가 스며들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큐영화라고 해서 모든 다큐 영화가 사실이지만 그것이 반드시 진실만을 말한다고 할 수는 없다. 뉴스도 마찬가지다. 뉴스도 사실을 전달하고 있지만 진실이 아닌 경우를 우리는 그동안 허다하게 봐왔다. 뉴스라는 건 이미 1분이라도 지난 사건을 편집해서 사실을 말하기에 완전한 진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영화 ‘휘트니'는 카메라를 따라 보는 이가 휘트니의 근 거리에서 뱅뱅 맴돌며 조금씩 휘트니를 알아간다. 근접하지 않고 주위 사람들의 눈을 통해서 휘트니를 들여다보기 때문에 더 극적이기도 하고 더 안타깝기도 하다. 덜 극적이거나 덜 안타깝지 않다. 영화 속 휘트니는 더 행복해 보이고 더 불행해진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회사에서 오시는 시간에는 종종 버스정류장까지 마중을 나갔다. 버스정류장 근처에는 레코드점이 있어서 밖으로 난 스피커를 통해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잔뜩 들었다. 레코드점 이름은 ‘나라 레코드'였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신나라 레코드를 따라 한 모양이었다.


나라 레코드점에서는 늘 팝송이 흘러나왔다. 아버지가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스피커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었다. 거기서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를 처음 들었다. 주인아저씨는 60대로 얼굴에 큰 사마귀가 있었고 느릿느릿 걸었다. 아직 할아버지는 아닌데 할아버지들이 입는 바둑판무늬 같은 조끼를 늘 입고 있었다. 주인아저씨는 팝에 대한 지식이 많았고 팝을 늘 듣고 있었다.


쪼그리고 앉아서 스피커에 귀를 이렇게 갖다 대고 있으면 운 좋게도 들어오라고 해서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어보라고 했다. 그 이후로 주인아저씨와는 좀 친해지게 되었다. 팝가수들의 가십도 들을 수 있었고 그들이 실린 잡지책도 볼 수 있었다. 그때는 집집마다 가구풍 전축이 유행을 하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가난했지만 아버지는 나에게 내가 좋아하는 음반을 왕왕 사주었다. 덕분에 나는 최호섭이 주제가를 부르는 태권브이 앨범도 나라 레코드에서 사주고, 어머니가 좋아하는 패티김의 음반도 거기서 사서 포장을 하기도 했다. 


6학년 때 선물로 받은 미니카세트에 휘트니 휴스턴의 3번째 앨범을 넣어서 들었을 때 그 기분이 미미하지만 아직도 가지고 있다. 뭔가 여기 이곳, 어촌에서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고 휘트니가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도 대부분 몰랐지만 미국 땅에서 이역만리 떨어진 이곳의 작은 마을의 어린 녀석이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를 듣고 있다는 생각에 아주 우쭐했다. 와 이렇게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있다니, 하며. 매일 헤드 셋을 끼고 휘트니의 노래를 들었다. 휘트니처럼 노래를 부르려면 도대체가, 같은 생각을 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만큼 힘든 것이 없는데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꽉 움켜잡는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있다니. 내가 만약 흑인이고 거리에서는 흑인은 늘 핍박당하고 놀림당하고, 커서 취직을 하고 싶어도 제대로 된 일자리는 없고 청소를 하거나 잡일을 해야만 하고. 그런데 교회에 가면 작은 어린 흑인 여자아이가 영혼을 건드리는 목소리로 가스펠송을 부르는 걸 듣는다면 어떻게든 이 힘든 시기를 견뎌낼 수 있을 것만 같은데. 흑인이라면 휘트니의 노래를 듣고 그런 생각이 들 것만 같았다. 쓸데없는 생각이지만 휘트니가 아직 살아서 노래를 부른다면 미국에서 버젓이 일어나는 인종차별 사건이 덜하지 않을까.



후에 음악 감상실에 가게 되면서 풍부한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카세트테이프가 오래가지 못한다고들 했지만 그때 구입한 휘트니의 앨범을 아직도 이렇게 잘 듣고 있다. 늘어짐 하나 없이. 그랬는데 영화 '휘트니'를 보면 남편의 폭력과 마약으로 점점 망가져가는, 엉망으로 변해가는 휘트니의 모습을 보는 건 힘든 일이었다. 도대체 가장 사랑해서 만난 사람에게 가장 심한 폭력을 당한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가족이라는 건 나에게 힘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나에게 악마가 되기도 한다. 삶이 이렇게도 어렵다.


https://youtu.be/8_90KE0it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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