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가끔 유튜브로 오래전 오락실 게임 채널을 본다. 갤러그라던지, 너구리 같은 게임들. 


아이들은 단음처럼 소박한 음향이 나오고 홀린 듯 동전을 밀어 넣으며 내 차례가 되기를 기다렸다. 동전을 넣는 순간 묘한 음이 들리면서 게임을 시작된다. 아이들(오락실을 차지하는 손님 대부분이 아이들과 학생들이었다, 왜 그런지 어른들은 오락실을 찾지 않았다, 아마도 어른들은 어린이였을 때 이런 게임 같은 것을 모르고 자라온, 그래서 기기 속 게임에 동전을 넣어가며 열을 올리는 아이들을 몽땅 호러블 한 것으로 간주했을지도 모른다)은 게임기의 손잡이를 잡는 순간 게임을 이기기 위해서 고군분투한다. 


게임을 하는 동안만은 진지해진다. 무서운 선생님의 수업시간보다 더 진지해진다. 동전을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동전이 내 손에서 게임기 속으로 이동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해서 오락기와 나 사이의 엔트로피가 증가한다. 눈에 드러나지 않는, 기묘한 흐름의 세계로 들어간다. 띠리리리 하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화면에 보이는 게임을 이겨야만 한다는 의지가 올라온다. 하지만 세상은 내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어린 시절에 알아 버리게 된다. 


단음의 똥파리들 소리가 미묘하기 달라지는 중독에 한차 한차 더욱 강력해지는 똥파리들이 나타날 뿐 결국에는 내 쪽에서 죽어야 게임은 끝이 난다. 절대 이길 수 없다. 아주 간단한 이치지만 우리들은 그동안 잘도 갤러그에 빠져서 져야만 하는 게임에서 승리의 목표 속으로 계속 달려들었다.


갤러그는 하면 늘지만 이기지는 못 한다. 똥파리들을 다 죽였을 때 나는 음향과 다 죽이지 못했을 때 들리는 음향의 차이가 있다. 하다 보면 회차가 두 자리를 넘기고 40차, 50차 까지도 도달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에는 지고 만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에잇 뭐야, 하고 넘기기보다 이 지기 위한 순차적 반복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


다음 회차를 위해 여러 번 이겨야만 하지만 한 번 져버리면 동전을 다시 넣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모아 놓은 주머니 속의 동전이 다 없어지도록 갤러그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지는 것을 뻔히 알고 있지만 동전을 소비해가며 도전을 했다.


인간의 인생이란 반드시 이기기 위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지기 위해서 오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이에서 어떻게 지는가 하는 방식에서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확정 지어질 수 있다. 바로 헤밍웨이가 간파한 것이다. 지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도전을 하고 실패를 맛보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

갤러그를 하기 위해 매일 삼사십 분씩 학교 앞의 오락실에 들러 동전을 밀어 넣으며 오늘도 지는 순간 가방을 울러 매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른들의 눈으로 보면 참 부질없는 짓이다. 그렇지만 게임을 하는 동안 조금씩 실력이 늘어간다. 그리고 동전을 밀어 넣는 횟수도 점차적으로 줄어든다. 게임에서 지고 나면 허탈해하고 고개를 숙이고 집으로 오지만 다음 날이면 어제보다 나은 회차를 넘기리라는 동기부여가 된다. 그리고 기대를 가지고 오락실의 문을 당당하게 연다.

어제까지의 풍요로움이 오늘 한순간에 먼지가 되어 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절망에 빠져 허덕이게 된다. 연애시대 은호의 말처럼 고요한 물과도 같은 일상에 작은 파문이라도 일라치면 우리는 쉽게 허덕인다. 우리 인생은 너무 약하여 금방 부서지는 장난감과 같다. 여러 번 이겨도 한 번 지면 모든 것이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나는 절대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지만 그런 일은 예고 없이 어느 순간 다가온다.


힘이 들지만 그럴 때마다 주머니의 동전을 꺼내서 갤러그 오락기에 집어넣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무너지기 전까지 그동안 쌓아놓은 개개인의 비교할 수 없는 금자탑이 있어서 다시 하면 된다. 오늘은 누구에게나 처음이라 힘들어서 질 수 있지만, 내일이 되어 다시 오늘을 맞이하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한 발 더 나아가 있다. 인생이란 꼭 이 기기 위해 치열하기보다는 덜 지기 위해 일상 하나하나가 소중하게 쌓인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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