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전에 은행에 갔었다. 동네 은행이지만 일하는 직원원들이 7명, 6명? 정도 되는 것 같았다. 한 명 빼고는 다 여성이었고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1년 전 오늘은 한국의 모든 은행원들이 마스크를 쓰고 있지는 않았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은행의 모습은 몹시 기이하고 낯선 풍경이어야 하겠지만 마치 아침에 눈이 떠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모습이 되었다. 그것은 아무래도 1년 동안 마스크 생활에 인간이 흡수되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흡수를 하는 것은 시간이고 우리는 시간 속에 흡수되는 동시에 적응이라는 모멘텀을 형성하게 되었다.

 

은행의 풍경 속에는 투명 칸막이가 생겨났고 마스크를 한 채 직원들은 고객을 응대했다. 초기에는 고객을 상대하는 직업군에서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이유로 마스크를 벗기도 했지만 1년이 지나는 동안 사람들은 마스크에 적응이 되었고 이제는 마스크를 벗거나, 쓰지 않으면 은행에는 발을 들일 수 없게 되었다. 마스크를 쓰고 하루 종일 고객을 응대한다는 것이 대단해 보였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감염병 일선에서 환자들과 선별 진료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위대한 것이다.

 

미세먼지가 많은 날입니다, 물을 많이 드시고... 같은 뉴스 앵커의 당부를 듣고 마스크를 마음껏 벗고 물을 마시는 행위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은행에서 일하는 직원들도 마스크를 하루 종일 쓰고 있다가 점심밥을 먹을 때 잠깐 벗는 정도가 되었고 사람들은 불편하지만 불안하지 않는 방법을 선택했다. 1년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우리 주위에는 많은 것들이 변했고 앞으로 1년 그 이전의 일상으로는 다시는 돌아가지는 못 할 것이다. 감염병 시대에 빈익빈 부익부는 더 벌어져 저소득층 아이들은 1년이 넘게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이 후에 분명하게 표가 날 것이다.

 

은행에 앉아서 볼일을 보고 있는데 문을 열고 한 아이와 엄마가 들어왔다. 아이는 남자아이로 5살? 4살? 정도 되어 보였다. 아이는 엄마의 손을 잡고 엄마에게 종알종알거리다가 은행 문을 열고 들어와서 은행의 로비에 들어오니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조용해졌다. 아이도 감염병 시대에 맞게 적응을 한 것이다. 마스크를 쓰면 나 좋을 대로 집에서처럼 마음대로 떠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 버렸다. 아이는 엄마가 볼일을 보는 동안 엄마 옆에서 한 손에 들린 아이언맨을 가지고 놀며 조용하게 엄마의 볼일을 기다렸다. 남자아이는 마스크를 썼지만 너무 귀엽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옆의 할머니 고객이 여느 때 같으면 고개를 돌려 아이를 보며 이런저런 관심을 보였을 텐데 그런 모습은 이제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행을 나와 아파트 단지를 지날 때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그네를 타고 있다. 엄마는 그네를 밀어주고 아이들은 신나는 듯 그네에 올라타서 재미있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가 마스크를 뚫고 놀이터를 휘감았다. 적막할 줄만 알았던 놀이터가 아이들의 소리로 인해 순간 봄날의 곰처럼 변했다. 


어린이들은 고아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어린이였으니까 의도를 가지고 좋아하기보다 그냥 보이는 그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을까. 특정한 장면이나 특정한 모습이나. 그러고 보면 어린이들은 대체로 좋아하는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대부분 고아다. 내가 어린이였을 때 좋아한 ‘프란다스의 개’의 네로도 고아다. 할아버지와 단 둘이 산다. 그 속에 역시 버려진 파트라슈가 들어온다. 라푼젤 역시 고아며 각종 공주들 역시 부모에게 버려지거나 부모가 없다. 김영하 소설가도 그랬지만 해리포터도 고아다. 엘사 역시 모두에게 버려져 홀로 지낸다. 헨젤과 그레텔도 계모와 친부에게 버려진다. 아이들은 이런 고아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건 고아가 좋아서라기 보다 고아가 되는 게 무섭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거라고 한다. 아이는 고아가 되지 않더라도 고아가 되는 시간이 있다. 아이의 하루는 어른의 하루 같지 않다. 고작 3, 4년 정도 살아왔기에 하루라는 시간은 몹시도, 아주, 너무 길다. 그 긴 시간에 엄마와 떨어져 낯선 곳에서 낯선 친구들과 낯선 선생님들과 몇 시간 동안 고아가 되어 지낸다. 그러다가 저녁에 엄마를 만나게 되면 그렇게 반기고 기분이 좋아 죽는다. 인생은 위험한 것 투성이다. 나를 미워하는 친구를 만날 수 있고 요즘처럼 때리는 선생님을 만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아이에서 어른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금이 가게 된다.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위험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어쩌면 더 위험한 삶이 어른의 삶이다. 어른이 되면 낯선 사람과 사랑을 하게 된다. 대체로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위험하기도 하다. 마음이 맞아 매일 일하는 동안 이야기가 잘 통해 잠까지 자는 사이가 되었다. 하루는 모텔의 침대에서 그녀가 이렇게 묻는다. 나와 결혼하기 위해 이혼은 언제 할 거야? 세상은 위험천만한 곳이다. 


나는 아이들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싫어하지도 않는다. 아이들에게 내가 먼저 달려가지는 않지만 나에게 달려오는 아이들과는 곧잘 어울린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게 되면 최선을 다해 같이 어울려 논다. 개인적으로 이유를 달자면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현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비현실 같기 때문에 꼭 소설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을 마음껏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몇 시간 같이 있어주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할지도 모르지만 이미 어른들도 아이들의 시기를 거쳤다고 생각하면 길어진 시간 동안 아이들과 있어야만 한다면 조금이라도 힘든 것에서 벗어날지도 모른다.  


감염병 시대에 모두가 화가 나 있어서 성냥을 그으면 그대로 폭발할 것 같은 사람들이 많아졌다. 여기저기서 얼굴도 모르는 불특정 소수를 향해 독버섯을 뱉어버리는 사람들은 대체로 어른들이다. 그들은 자신보다 나약하고 힘없는 상대를 골라 폭력을 행사했다. 편의점에서 취식은 금지되었지만 안 된다는 아르바이트에게 먹던 라면을 집어던진다든가, 9시 이후에는 장사를 안 한다는 주인을 폭행한다든가, 모두가 자신보다, 자기들보다 힘없어 보이면 폭력을 행사한다. 물리적인 힘을 사용한다. 그리고 가장 나약한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아이들은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말이 무색하게 아이들을 폭행하는 어른들이 늘어났다. 


정인이를 죽인 혐의를 받고 있는 양모의 반성문을 보면 '짜증'이라는 말이 아주 많았다. 글을 쓸 때 김영하는 이 '짜증'이라는 단어를 될 수 있으면 남용하지 말라고 했다. '짜증'이라는 단어를 풀어헤치면 수많은 감정들이 있다. 화가 나고 울화가 치밀고 기분이 안 좋고, 등등. 그런데 우리는 이 많은 감정을 그저 '짜증'이라는 한 단어에 묶어서 사용해버리기 일쑤다. 정인이 양모의 반성문은 반성이라기보다는 반성 그 이외에 중점을 두고 있다. 아마도 법은 또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릴지도 모른다. 오늘은 날이 풀려 봄날이 되었다. 봄날이라고 착각할만한 날이다. 이렇게 겨울의 틈을 벌려 따뜻한 날 모두 행복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행복해도 괜찮지 않을까. 아이들은 전쟁 속 폐허에서도 늘 행복했는데 지금 아이들은 이 풍족한 세상에서 어른들 때문에 왜 행복하지 못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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