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매일 먹는 계란찜을 먹다가 슬퍼졌다. 한 숟가락 퍼먹고 좀 슬프더니 두 숟가락을 떠먹을 때는 많이 슬퍼서 눈물이 한 방울 흘렀고 세 숟가락을 떠먹을 때는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눈물은 전조도 없이 마치 비가 내리듯이 눈을 아프게 하면서 흘러내렸다.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을 보면 머리에 난 종양 때문에 죽은 아내의 시체를 팔아버린 돈으로 비싸서 잘 사 먹지 못하는 귤을 사 먹는다. 남편은 아내가 살아생전 그렇게 좋아하던 귤을 아내가 죽고 나서야 사 먹을 수 있는 귤을 먹으며 무너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64년도에 죽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서 견뎠다면 귤이 저렴해져서 모두가 겨울이 되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날이 올 텐데. 어떻든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그깟 귤 따위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
바나나가 귀한 시절이 있었다. 바나나를 먹는 아이들은 잘 사는 집의 아이들뿐이었다. 바나나를 어쩌다 먹는 날이면 자랑이라도 하듯 바나나 껍질을 버리지 않고 들고 다니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은 원숭이도 그렇게 대들지 않을 정도로 바나나가 넘쳐난다. 이깟 바나나 그 당시만 잘 버티고 버티면 지금은 얼만든지 먹을 수 있다.
김수영 시인이 시를 적기 위해 닭을 키우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닭을 키워보니 너무 힘들고 고된 것이다. 시를 팔아서 닭을 키워야 할 판이었다. 그럼에도 닭은 계란을 낳고 계란은 얼만든지 먹을 수 있었다. 누구나 다 계란 정도는 마음껏 먹을 수 있다. 그것에 남자, 여자를 나누거나 부자와 그렇지 못한 사람을 나누지도 못한다. 계란은 어린이든 어른이든 모두가 맛있게 먹을 수 있다. 계란찜 정도 매일매일 이렇게 먹을 수 있다.
하루키의 단편 소설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를 읽으면서 ‘아픔’에 대해서 생각을 했다. 마음의 아픔이 아니라 육체, 신체적으로 받았던 아픔에 대해서 기억을 떠올려봤다.
여러 번 있었지만 중학교 1학년 때 나는 길거리를 걸어가다가 다친 적이 있었다. 길거리에 소형 트럭을 정차해놓고 트럭에서 밑으로 모래를 퍼 나르는 인부의 삽질에 오른쪽 귀가 찍혀 귀의 밑 부분이 간당간당해진 적이 있었다. 띵 하는 머리를 울리는 공명이 한차례 들더니 그 소리가 사라졌을 때 나는 땅바닥에 쓰러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삽질을 하던 인부 아저씨가 트럭에서 내려서 나를 일으켰는데 오른쪽 귀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프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아저씨는 나를 부축해서 가까운 종합병원 응급실로 옮겼고 가는 도중에 동생을 우연찮게 만나서 집에 이야기를 하라고 했다. 응급실에 가면서 거울을 스쳤는데 나의 얼굴이 스티븐 킹의 캐리가 피로 덮어쓴 얼굴처럼 보였다. 얼마 뒤에 어머니와 큰 이모가 응급실에 뛰어 들어왔는데 신발도 짝짝이로 신고 울며불며 나를 찾았다. 다행히 피도 닦고 귀에도 붕대를 감은 상태였다. 동생이 집에 가서 오빠의 얼굴이 피로 물들어서 울면서 말을 했던 것이다. 그때 중학생이었지만 잠시 나를 둘러싼 사람들이 나를 걱정하고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귀의 밑 부분이 덜렁덜렁 떨어질 것 같아서 바느질을 했고 그 뒤로 삽에 찍혔으니 뇌에 문제가 있을 수 있어서 검사도 받았다. 인부 아저씨는 좋은 사람이었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고 가족을 위해 밤낮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매일매일 찾아오기에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 덕분에 나는 학교에서 일찍 집에 올 수 있었고, 불행히도 소풍을 가지 못해서 개근상을 받지 못했다. 잠을 자다가 잠꼬대로 몸을 틀어서 붕대 감은 오른쪽 귀가 베개에 닿으면 아파서 잠이 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아팠던 고통의 기억은 감쪽같이 사라진다. 아픔이라는 실체에 대해서 정확하게 기억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직도 귀에는 그 흉터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하지만 흉터를 남길 만큼 아팠던 기억은 이제는 없다. 시간이 지나면 많은 것들이 감쪽 같이 사라지고 만다.
만약 그때 뇌에도 삽에 찍힌 여파가 닿아서 어떻게 되었거나 죽었다면 이렇게 남아서 그런 기억을 추억처럼 떠벌릴 수도 없다. 살아남아서 지금까지 버티다 보니 계란찜을 자주 먹을 수 있다. 계란찜을 좋아하니까 식당에서 파는 화려한 계란찜이 아니라 계란과 물과 소금으로 소박하고 간단한 계란찜을 먹는다. 살아있어야 이 별것도 아닌 계란찜을 먹으며 하루 종일 받았던 힘든 것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고작 일 년도 살지 못하고 죽어버린 정인이는 이 흔한 계란찜도 한 번 먹어보지 못했다. 64년의 귤도 아니고, 80년대의 바나나도 아니다. 작금의 시대에 이깟 계란찜도 한 번 먹어보지 못하고 죽은 걸 생각하니 정말 슬프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부터 뭘 해야 할까. 초고도화된 현대시대에 맞게 정인이 이야기를 하고, 해시태그를 달고 정인이의 이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옆 사람에게 전달하면 된다. 혁명은 이렇게 밑에서부터, 작은 것에서부터 일어나서 들불이 된다. 모든 역사의 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제는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선배가 와서 내가 쓴 글을 이렇게 보더니 이래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문제는 구조가 잘못되었으니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1, 2, 3 순번을 매겨가면서 원인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해답에 이르려면 위에서부터 바꿔야 한다는 말을 했다. 이 선배는 잘 나가는 회사에 다니며 늘 올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이다. 욕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 대신 욕보다 더 심한 말을 한다. 그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바르고, 정도를 걷고, 주제의식이 강하고 착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착하고 못됐고는 본인이 정하는 게 아니라 타인이 보고 말해주는 거지만 정작 그 선배는 알지 못한다. 목사라 불리는 정광훈도, 스님이라 불렸던 혜민도 그렇다. 욕 한 마디 할 줄 모르고 남들에게 널리 이로운 인간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그 선배는 나와는 다르게 책을 많이 읽었다. 아니 나도 책만큼은 열심히 읽지만 읽는 책이 다르다. 나는 소설과 수필과 시집이 대부분인데 반해 그 선배는 자기 개발서를 아주 많이 읽는다. 그런 사람들은 책으로 모든 것을 배운다. 책으로 주식이든 경제든 심지어 감성이나 감정적인 부분도 책으로 배운다. 책만 읽어서 지식이 머리에 차곡차곡 쌓인다. 쌓이기만 할 뿐 어떤 식으로든 배출이 안 되니까 뚱뚱해지고 비대해지기만 한다. 생각만 하고 말만 할 뿐 전혀 바꾸기 위해 어떤 무엇도 하지 않는다.
구조를 바꾸고 위에서부터 달라져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예전에 촛불시위를 할 때 나는 최초로 몇 명 보았다. 그들 대부분이 교과서로 혁명을 배우고 교과서로 개혁을 배운, 소위 엘리트들이었다. 내가 사는 도시의 촛불시위에 나는 한 주 빼고 다 참석을 했다. 조깅 코스를 그쪽으로 정하고 시간에 맞게 거기까지 40분 정도 달려가서 30분 정도 큰 소리를 내며 동참을 하고 팜플랫을 받아서 40분에 걸쳐 다시 달려왔다. 빠진 한 주는 몸살 때문에 못 갔지만 받아온 팜플랫으로 일하는 곳의 문에 차곡차곡 붙여놨었다.
구조를 비틀고 사회를 변혁해야 하는 우두머리 집단을 바꿔야 한다는 원론적인 말을 하는 엘리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런 말만 했지 촛불시위에 나타난다던가, sns를 통해 해시태그를 단다던가, 구조를 바꿔야 하는 어떤 무엇도 하지 않는다. 선배님? 구조를 바꾸고 싶다면 생각만 하지 말고 뭐라도 하십시오. 제발 뭐라도 해라, 그렇게 해서 그 무엇을 해서 위의 구조를 바꾼다면 그 선배는 1호가 될 것이다. 아마 역사적으로, 세계적으로 혁명을 혁명적이게 한 사람으로 이름을 떨칠 것이다.
하지만 혁명이란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생각만 가지고, 혀만 끌끌 차고 있어봐야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5년 후에도 바뀌지 않고 똑같은 말만 하고 있다. 배달하는데 10분 내에 꼭 해야 하는 것에서 법으로 그걸 바꾼 것도 밑에서부터 시작해서 한 정당의 한 의원을 통해서 사람들이 이루어낸 쾌거였다. 촛불시위 때 그렇게 불만으로 말만 많았던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바뀐 정부를 향해 그저 불만 섞인 말만 하고 생각만 하고 있다. 아마 5년 후에도 지금과 똑같은 생각으로 말만 할 것이다.
아픔이라는 게 무엇 때문에 아팠다는 기억은 있지만 아픈 기억은 소멸하고 만다. 아픔이라는 게 기억이 나면 좋겠지만 인간은 일정기간이 지나면 죽을 것 같았던 아픔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그 아픔 때문에 아파했었군, 하는 기억만 남을 뿐이다. 정인이도 그렇게라도 기억을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정인이 사건을 꼭 같이 슬퍼하지는 않아도 된다. 슬퍼하는 건 계란찜을 먹으며 내가 할게.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또는 갈 수 있는 사람들이 정인이를 추모하러 가면 된다. 하지만 같이 퍼트리는 건 할 수 있다면 하자. 그것이 혁명의 최소 단위일 테니까. 바뀔 수 있는, 변화할 수 있는 기본이니까. 얼마간은 계란찜을 먹으며 그 어린 정인이의 웃음이 생각날 것이고 나는 슬픔에 젖을 것 같다. 정인아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