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부분이 아즈미와 아유키 그리고 후타바의 가장 즐거운 순간이지 않았나 싶다. 그렇지만 행복한 순간은 꿈처럼 아주 순식간에 지나간다. 휙 이렇게,  샤 브 샤 브가 익어가는 것처럼 지나간다. 후타바와 아즈미 그리고 아유키는 혈연으로 연결되어있지 않고, 상처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피보다 더 진한 거 같아서 영화를 보고 나면 후타바의 왼손으로 한방 먹은 것 같이 먹먹하다.

목욕탕 하면 아버지와의 추억이 나에게는 가장 많다. 주말 저녁이면 늘 아버지와 함께 대성탕으로 가서 목욕을 하고 아버지의 등을 밀었다. 아버지의 시원하네, 힘 좋네, 같은 말이 듣고 싶어서 그만, 할 때까지 악을 쓰고 밀었던 유년의 기억이 있다. 아버지는 그다지 시원하지는 않았지만 가는 팔로 등을 미는 아들에게 어떤 한 마디를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무뚝뚝하고 표현이 서툰 아버지도 목욕탕에서 홀가분해지면 아, 시원하네, 우리 아들, 잘 미네, 같은 말로 하고 싶은 말을 대신했다.

아버지의 죽음의 순간을 나는 옆에서 지켜봤는데 눈물을 흘리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병실에서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나는 그저 덤덤하게 옆을 지키고 있었다. 가끔 정신을 잃어갈 때에는 나도 모르게 아버지의 허벅지를 힘껏 꼬집었다.

목욕을 하고 나오면 아버지는 나를 세워놓고 수건을 착 펼쳐서 머리를 탁탁탁 털어주고 몸을 닦아 준 다음 몸을 바짝 말리라 하며 우유를 하나 손에 쥐여주고는 아버지는 그제야 자신의 몸을 닦았다. 목욕을 나오면 아버지는 문방구에 들러 늘 프라모델을 사주었다. 그걸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만들곤 했다. 목욕을 끝낸 노곤한 피곤함을 느끼며 프라모델이 완성되었을 때 나는 잠이 들었다. 그렇게 주말 저녁을 기다렸다. 잠에서 깨어났을 땐 아버지는 먼지가 되었고 나는 어른이 되었다.

아버지와 소원하게 된 순간이 아마도 같이 목욕탕에 가지 않았을 때가 아닌가 하다. 허벅지를 힘껏 꼬집으면 잃어가던 정신이 들어오는지 아프다며 나에게 욕을 했다. 왜 나를 싫어하느냐며 나에게 욕을 했다. 하지만 그건 아버지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고 끝끝내 말을 하지 못했다. 뭐랄까 이렇게라도 아버지를 어딘가에서라도 언급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기억하지 않고 아무도 모르는 내 아버지가 조금은 안 됐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후타바가 아즈미에게 도망치지 말고 용기 있게 맞서야 한다고 한 말이 비록 따돌림을 하는 그 아이들에게 맞서라는 건 아니다. 용기를 내서 맞서야 하는 것은 어쩌면 상황이 될 수도 있고, 시간일지도 모르고 또 사람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아닌 것 같지만 우울하다. 인스타그램에 반짝반짝 즐거운 사진만 올라오는 사람들도 상처 받고 우울하기 때문에 즐겁고 행복한 순간의 사진으로 그것을 잊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목욕탕에 가면 모두가 발가벗고 엇 비슷하다. 옷을 입고 있지 않으니 누가 부자인지, 쌍스러운 말을 어느 정도 쓰는지 알 수 없다. 모두가 비슷하게 보인다. 하지만 그들 모두 하나씩의 고민과 상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모두가 그것을 숨긴 채 가슴에 품고 하루를 으샤 으샤 열심히 보낸다. 모순에 모순을 거듭하는 게 인생이다. 평범한 가장이 금요일마다 식도락을 찾아 떠나는 일본 드라마 '제츠메시로드'에서도 인생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이 있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읽기 전의 내가 읽은 후 달라져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후타바와 아즈미 그리고 못난이 아유키, 밉지 않은 오다기리 조가 한없이 뿜어내는 사랑스러운 연기를 보고 난 후 고요하게 요동치는 나 자신의 가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가끔 영화에서처럼 가장 슬픈 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행복한 슬픔이 이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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