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 알렌의 영화는 어느 시점부터 마치 홍상수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홍상수는 배우고 똑똑한 지식인들의 찌질함을 대놓고 표방하는 반면 우디 알렌은 드러나지 않는 찌질함을 대사로 쏟아내는 것 같다. 인간 그 하나로 자신을 표출하기 힘들어서 과정에서 프로이트, 디킨즈, 토마스 홉스와 논리와 명료한 해석과 해법과 지성을 들먹인다


하지만 결국 영혼이 움직이는대로 이성과 논리는 사랑이라는 기묘한 감정에 끌리게 되고 결국 속에 있는 찌질함이 드러난다. 찌질함이 나쁘냐?라고 한다면 또 잘 모르겠다. 찌질함은 옳고 그르고의 문제도 아니고 맞고 틀리고의 문제도 아니다. 찌질함이란 발을 디디고 있는 불확실성과 비슷하다. 찌질함으로 생활이 끊어지지 않고 죽 이어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찌질함 때문에 상대방으로 하여금 인상을 찌푸리게 해서 인생의 실패를 늘 안겨주기도 한다


찌질하다,를 찾아보면 ‘지지리도 못난 놈‘이란 뜻이다. 으이그 이 못난 놈은 찌질한 놈으로 통하는 것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찌질한 놈들이 영화나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되어 나타나게 되었다. 우디 알렌의 영화들 속에는 찌질한 주인공이 자신의 사랑 또는 삶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많다. 또 주인공은 원래 사랑하는 사람이 늘 있다. 약혼자라든가 애인이라든가


찌질함으로 무장을 한 주인공을 좋아하는 약혼자는 새로운 사랑에 의해서 걷어 차이게 된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차이는 약혼자는 대체로 똑똑하고 현명하며 예쁘거나 잘 생겼고 차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주인공이 그들에게 버림을 받는 것처럼 영화는 흘러간다. 아주 교묘하게 영화를 잘 만드는 우디 알렌이다


우디 알렌의 초기작들을 보면 본인이 직접 등장하여 찌질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한국의 지지리도 못난 놈을 홍상수가 잘 만들어낸다면 아마도 미국의 찌질함은 우디 알렌이 아닌가. 그 와중에도 매직 인 더 문라이트 속에서 엠마 스톤이 몸을 살짝살짝 흔들며 춤을 추는 장면은 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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