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게리온은 넷플릭스를 통해 다시 방영되면서 에반게리온이라는 이름만 알고 있고 에반게리온을 듣기만 했던 요즘 아이들이 보면서 물밑에서 다시 에반게리온에 대해서 술렁거렸다


에반게리온을 어릴 때 봤을 때 충격이었고 볼수록 충격의 연속이었다. 초호기가 야수화되어 사도를 뜯어 먹는 장면이라든가, 특정 지을 수 없는 사도의 모습이라든가, 화면 가득 메우는 엄청난 피칠갑의 파도라든가. 무엇보다 관계, 관계, 관계에 대해서 뭐지? 뭐지... 뭘까


왜 이런 중대한 전투에 투입되는 에반게리온에 탑승해야 하는 최고의 파일럿이 14살의 미성숙한 중학생들일까. 뭐 이런 것들이 당시에는 굉장한 의문이었고 뒤에 따라오는 네르프는? 제레? 리리스? 온통 궁금증 투성이었고 구 극장판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을 보고 난 후에는 전부 충격적으로 죽어버리니까 에반게리온의 팬들은 충격의 연속이었다


근래에는 에반게리온을 해설해놓은 일반인들의 지식이 엄청나고 에반게리온만 파고드는 유튜버들도 있고 안노 감독의 그 정교함을 잘 파헤친 글과 방송이 많아져서 이제는 모르면 찾아보면서 보면 궁금증은 어느 정도 해결이 된다


아야나미 레이가 표층적이라면 아스카 랑그레이는 심층적이다. 레이는 감성을 소거하고 이성으로만 사람을 대하니까 이성만 표출하는 겐도는 쉽게 상대를 할 수 있지만 감정을 드러내는 신지에게는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하는지 혼란스럽다


아스카는 밝음을 넘어 되바라지고 지기 싫어하고 직언에, 좋아하는 건 바로 표출한다. 이미 그 나이에 대학의 학습을 다 끝내고 독일어와 영어 일본어를 구사하면서 에바2호기에 탑승한다. 아스카는 신지만큼 복잡한 심층세계를 가지고 있다. 아스카의 엄마 역시 에반게리온의 코어에 영혼이 녹아있다


에반게리온이 미숙한 중학생들 탑승해야 하는 이유는 에반게리온 코어가 그 아이만을 원하기(후에 바꿔탑승하기도 하고 두 명이 동시에 탑승하기도 한다) 때문이다. 그래서 0호기에 탑승하는 레이는 늘 싱크로가 100프로가 되지 못한다. 0호기가 레이가 맞지 않아 혼자서 각성하는 장면을 보면 알 수 있다


레이는 사도이며 신지의 엄마의 모습을 본따 만든 클론이라 지금 내가 죽더라도 나와 같은 클론이 나올 거라는 것을 알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그렇기에 누군가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신 극장판 에반게리온을 보면 레이가 자신을 구하러 온 신지에게 웃음을 딱 한 번 보인다. 20년 만의 웃음, 딱 한 번의 웃음이었다. 그것이 또 다른 카타스트로프의 대재앙이 될 것을 그 누구도 몰랐다. 이 시리즈는 종교의 골자를 지니고 있으며 울트라맨의 굉장한 팬인 안노가 울트라맨을 오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제 다 알게 되었다. 기동전사 건담의 창시자 토미노 요시유키에게 작화를 배웠던 안노는 이데온에서 처음으로 시행된 서커스를 보듯 전투하는 작화법을 적극 활용했다는 것도 우리는 알게 되었다


여러 해설과 해석이 많지만 내가 에반게리온을 보고 든 느낌은, 인류를 위협하는 사도라는 것이 처음에는 형태가 기묘하다가 나중에는 형태가 없거나 지정할 수 없다가 마지막에는 인간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카오루와 레이처럼. 결국 인간을 위협하는 것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또 다른 인간이다. 공포라는 건 어릴 때는 형태가 모호한 것에 대해서 막연하게 느끼지만 어른에 가까울수록 구체적인 사람의 모습에서 공포를 느끼게 된다


선과 악은 대립하고 있는 것 같지만 선과 악의 모체는 같다. 하루키의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읽어봐도 결국 기호사와 계산사는 대립하는 것 같지만 위로 올라가면 꼭짓점은 같은 근원을 띠고 있다. 인간을 위협하는 것은 인간이며 인간을 사랑하는 것 또한 인간이다


영화의 배경은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어떤 시대적 배경이지만 중간 중간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가고 전철을 타고 다니며 도시락을 까먹고 체육을 하는 모습이 나온다. 에반게리온 속 그런 평범한 일상이 실은 우리가 얼마나 바라고 원하는 삶인지 알게 된다. 일단 죽고 나면 평범한 삶도 그 무엇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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