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코가 붉은 피 같은 존재라면 미도리는 이름처럼 대책 없는 녹음의 싱그러운 존재다

 

키즈키의 죽음 후 대책 없이 스무 살이 되어 버린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목적지도, 결말도 없이 걷는다. 그건 마치 영혼 없이 어떤 의식을 치르는 것 같다

 

이렇다 할 마음을 내보이지도 못했는데 나오코는 요양소에 들어가 버리고 이것이 방황인지 먼지의 흐름인지도 모른 채 하루하루를 보내는 와나타베 앞에 청량감 같은 미도리가 나타난다

 

감독인 트란 안 홍의 마지막 영화를 제외하고 다 본 것 같다. 그러니까 트란 안 홍의 영화를 감돌고 있는 색채를 너무 좋아한다. 그의 영화기저에 깔린 깊고도 밝은 우울감이 좋다

 

씨클로, 에서도 나는 비와 함께 간다,에서도 절망을 넘어서는 우울감에 정신은 녹아버리고 몸은 산산히 부서지는 경험을 했다. 그 사이에 흐르는 필름 카메라에서나 볼 법한 색감이 우울함에 번지는 물감 같다

 

와타나베와 나오코의 닿을 수 없는 붉은 우울을 정화시키는 것이 미도리다. 하지만 우울이란 밝음 속에 숨어 있는 우울이 더 단단하고 크다. 미도리는 와타나베만 있어주면 된다. 약속을 해 놓고도 만나러 나오지 않아도 남는 게 시간이라 괜찮아, 자산 같은 시간에 책이나 읽으면 돼(이런 대사는 없지만 하루키의 소설 속 주인공들의 스타일을 떠올렸을 때),라고 해버리는 와타나베를 미도리는 좋아한다. 미도리는 그게 사랑이다

 

하루키의 문체를 영화의 문채로 옮기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많은 영화감독이 포기를 했다. 아마 30년은 더 인기가 있을 노르웨이 숲을 영화로 만들기로 했을 때 트란 안 홍 역시 고민이었을 것이다. 다른 감독의 이전의 토니 타키타니에서 하루키의 문체를 영상으로 뿜어내야 하기에 한 공간에서 세트를 전부 바꿔가며 촬영을 했고 음악은 유이치 사카모토가, 미야자와 리에가 쓰러질 듯 말 듯 정말 멋지게 에이코와 히사코를 다 표현했다

 

하지만 가장 좋은 하루키의 영화는 이창동의 버닝이었다. 그건 정말 영화가 하루키의 소설을 읽은 기분이었다. 장면 사이에 온통 은유로 가득했다. 영화가 재미있다고 느끼는 건 다른 건 없고 몇 번씩 되풀이해서 보기 때문이다. 책도 영화도 10번 넘게 봤는데 하루키를 한 번 만나러 가면(기미 다 다이스키) 사인(절대 안 해주는)이라도 하나 받을래나

 

마지막 영화로 도쿄 기담집에 실린 하나레이 만(베이)이 영화가 되었다. 받아 놓고 아직 보지 못했는데 늘 그렇듯 기대가 된다. 상실의 시대 속 미도리는 현실감은 제로다.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인물이다. 그래서 더더욱 사랑스럽다. 키코의 파릇한 모습을 보는 재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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