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가 체질에 아주 잠깐씩 등장하는 아랑은 다큐멘터리 감독 은정의 선배이다. 아랑은 은정에게 사람에 대해서, 여자에 대해서, 배우에 대한 다큐를 제안했고 은정은 이소민을 담기로 한다. 아랑이라는 캐릭터는 극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랑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은정은 아마도 자신 안에 감춰진 자신과 대면하는 일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은정의 주위에는 자신보다 자신을 더 잘 아는 친구들과 이반인 동생이 있지만 그들 모두가 은정의 금이 간 마음이 깨질까 봐 누구도 먼저 은정을 위로하려 들지 못한다. 은정은 아무 일 없는 척, 무사안일하게 지내지만 에고를 드러내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두가 은정은 힘든 일을 겪고도 잘 지내는 것처럼 본다. 친구들과 동생은 은정의 힘듦을 알지만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은정은 점점 더 자신이 가둬놓은 자신 속으로 들어간다

 

그때 불쑥 아랑이 나타나 방법을 ‘제시’한다. 은정의 아주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하지 못했던 제안을 아랑은 하게 되고 은정은 마음을 먹고 자신 속에 감춰진 자신을 마주하는 일을 한다. 은정이 결심하게 된 계기는 이수민의 다큐를 찍는 도중 자신의 이야기를 해보라는 이수민의 말에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홍대에게, 나는 어떤 사람이었더라?라고 묻는 장면을 화면 속에서 보게 된다

 

저 모습이 진짜 나의 모습일까. 이미 죽은 홍대를 살아있는 것처럼 대하는 모니터 속의 자신을 보며 자신은 홍대가 죽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척하며 지냈던 것일까

 

아랑의 권유로 정신상담소를 찾은 은정은 최근의 눈물을 흘렸던 기억을 떠올려 보라는 말에 은정은 기억하려고 했지만 기억이 없다. 그건 아마도 병실에서 투병을 하면서도 은정에게 투정을 부리지 않았고 밀어내지 않았던 홍대가 죽었지만 은정은 그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고 마치 내일이라도 다시 살아나서 올 거라고 믿어 버린다. 은정은 그래서 슬퍼서 펑펑 울면서 지내기보다 그저 덤덤하게 보내기로 한 것이다

 

홍대의 죽음에도 덤덤하기만 했던 은정이가 환영을 보는 상황이 지속적으로 이어진다면 자라온 환경에 그 원인을 있을지 모른다는 의사의 소견에 의해서 은정은 어린 시절을 기억한다. 기억 속의 엄마와 함께 그저 평범하게 지낸 놀이터에서의 기억을 떠올리고 슬프지도, 아프지도 않은 감정인데 그만 눈물을 펑펑 흘리고 만다. 왜 그날이 떠오르는지 자신도 알지 못한다. 특별하지도 않고 덤덤하게 흘러가는 평범한 일상의 하루에 은정은 오열을 한다

 

선생님 제가 왜 이런 거죠?

의사는, 괜찮아요, 문제가 없어요.라고 말한다.

은정은 어릴 때에도 힘이 들면 엄마에게 기대고 싶은데 놀이터에서 먼 산을 바라보며 무표정으로 앉아 있는 엄마를 본 후 자신의 힘듦이 엄마를 더 아프게, 힘들게 할지도 모른다고 받아들인다. 그 뒤로 은정은 덤덤함 속에 자신을 가둬둔다

 

우리는 어른이 되고 난 후 자신을 감춰두고 지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회사에서는 회사에 맞는 나로, 모임에서는 모임에 맞는 나로, 친구들에게 맞는 나로, 아이에 맞는 나로, 회식에 맞는 나로, 집으로 와서 혼자인 시간이 되어도 폰 속으로 들어가 그 속에 맞는 나로 지내고 만다. 슬픈 일이 있어야만 눈물이 흘러나오는 우리는 그저 평범하게 흘러가는 이 하찮은 일상에 감격해서 펑펑 울 수는 없는 것일까

 

아랑은 잠깐 등장하지만 후배인 은정을 굉장히 아낀다. 은정은 선배인 아랑 덕분에 가둬둔, 감춰진 자신과 대면을 하게 된다. 나의 주위를 둘러보면 극 중의 이런 사람이 없는 것이 아쉽고, 이런 사람이 될 수 없는 나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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