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디콘, 퀸의 베이스였던 존 디콘은 프레디 머큐리가 죽어 버리자 그대로 퀸을 떠나 활동을 접고 만다. 브라이언 메이가 주축으로 퀸을 이끌었지만 존 디콘은 프레디 머큐리 없는 퀸을 미련 없이 떠난다. 아니 음악계를 떠나고 만다. 존 디콘에게 그 어떤 부와 명예, 각종 명성은 시시하고 의미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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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의 전설인 레드 제플린, 이 위대한 밴드에서 드럼을 치던 최고의 드러머 존 본햄, 존 본햄은 술꾼으로 유명했다. 소문처럼 술을 너무 좋아해서 기타리스트 지미 페이지 집에서 보드카를 연거푸 40잔을 내리 마시고 잠이 들어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그해가 1980년. 레드 제플린은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을 때였다. 드러머는 많고 새로운 드러머를 영입하면 되겠지만 존 본햄을 대처할 드러머는 없다며 그대로 레드 제플린을 해체해버린다. 존 본햄이 없는 레드 제플린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역시 부와 명성, 인기는 시시한 것이었다. 레드 제플린으로 음악을 같이 할 수 없다면 그저 시시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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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은 록을 하던 뮤지션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 정통 록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인도에서 10년간 기숙학교에서 보냈던 프레디는 학창시절에 밴드를 결성하고 키보드를 연주하면서 음악 활동을 했다. 프레디는 퀸으로 록의 ‘틀’을 깨버렸지만 음악계는 퀸을 이상한 ‘것’으로 치부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퀸의 음악을 찾아서 듣기 시작했고 퀸이 움직이는 곳으로 따랐다. 틀에서 벗어나거나 틀을 깨버리면 사람들에게 공격을 받는다. 우리는 내색 안 하지만 우리와 다르면 잔인할 정도로 무섭게 공격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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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마지막 ‘라이브 에이드’ 공연은 실제를 그대로 되살렸다. 피아노, 피아노 위의 콜라까지 그대로 재현을 했다. 퀸은 음악평론가들에게 늘 저평가를 받았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틀을 깬 록을 했기에 불분명한 음악이라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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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퀸은 이에 휘둘리지 않고 하드록, 글램록, 프로그레시브, 펑크, 디스코, 오페라 록 등 새롭고 신선하고 때로는 기괴한, 지구상에 나와 있는 모든 음악을 건드렸고 멋지게 해냈다. 그리하여 사람들 마음을 움직였고 상업적으로 슈퍼밴드가 되었는데, 그럼으로써 음악평론가들에게는 더욱 쓴소리를 듣는 저평가 그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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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도 모든 음악을 앨범에 다루었고 다양한 음악을 접목시킨 가수가 있었다. 그 가수도 퀸의 굉장한 팬이었고 자신의 앨범도 퀸의 앨범 카버를 오마주 하기도 했다. 그가 바로 신해철이다. 신해철은 프레디 머큐리만큼 노래를 기가 막히게 부르지는 못하지만, 그래서 무릎팍 도사에 나와서도 도사에게 핀잔을 들어 먹었지만 신해철의 앨범을 들어보면 이 사람은 정말 음악을 사랑했구나, 이 사람의 돌파구는 음악이었구나,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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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철의 음악을 신랄하게 저평가 한 여러 사람이 있지만 그중에는 언니네 이발관의 이석원도 있었다. 당시에 회사원이었던 이석원은 그 좋은 머리로, 그 글빨로 신해철의 음악에 대해서 오목조목, 길게도 써서 공격을 했었다. 후에 이석원이 음악을 하면서 신해철의 음악에 빠져들게 되어 그때를 반성하고 그 일화를 라디오 같은 곳에 나와서 이야기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신해철을 찾아가 용서를 빌고 화해를 함으로 나중에 언니네 이발관 3집 광고의 내레이션을 신해철이 맡아서 해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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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철이 이 세상에 없기에 비로소 그의 음악이 명반에 오르고 재평가를 받고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부분은 안타깝지만 퀸 역시 프레디 머큐리 사망으로 퀸의 음악이 재평가를 받는 기회를 얻었다. 이 두 그룹을 꾸준하게 지지한 음악평론가가 있었는데 임진모였다. 그는 시종일관 이들의 음악이 주는 즐거움, 놀라움에 대해서 책과 입으로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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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예술이지만 음반은 산업이기에 프로 가수가 되면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울 수만은 없다. 그렇지만 퀸 이나 신해철을 보면서 음악 그 이외에는 시시한, 그래서 음악이 아니면 가족으로 눈을 돌렸던 이 미치도록 그리운 예술가들의 음악을 듣는다는 건 일상의 작은 기쁨이 확실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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