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약국의 딸들

.

 

어림짐작으로 이 글을 보는 사람은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은 읽어봤으리라 생각하에 말을 하려고 한다. 나는 김약국의 딸들은 읽어 봤지만 토지는 읽다 실. 패. 했다. 톨스토이의 부활도 대작이지만 어쩌면 토지가 더 대작일지도 모른다. 이 글을 보는 사람들은 토지도 읽어보고, 김약국의 딸들도 한 번 더 읽어보길 바란다

.

 

편견으로 김약국의 딸들은 인간이 가지는 잔인함, 그리고 무력함, 인간이 인간에게 행 할 수 없는, 더 없는 잔인함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잔인함이란 인간이 언제나 가지고 있는 것으로 어떤 무엇인가에 의해서 불이 붙으면 자제를 잃고 절제가 어려워 본성에 의해 움직이고 본능에 의해 사고하며 생각하기를 꺼려 하게 된다. 어떤 무엇인가에는 나 이외의 타인, 그리고 환경이 내가 아닌 나를 변하게 만든다

.

 

인간의 욕망과 타락과 욕심이 얼마나 무서운가. 그것이 너무나 명료하게 드러난다. 불륜을 저지르고 살인을 하고 폭력이 난무하지만 동네 사람들은 남편이 아내를 폭행하는 것을 그저 보고만 있다. 그건 딸의 엄마도 마찬가지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할 줄 아는 건 신령님께 그저 비는 무지뿐이다. ‘까마귀야 까마귀야 돈 좀 갖다 주라’ 

행복은 신이 갖다 주리라는 믿음

.

 

한 마디로 비극이다. 이런 비극도 없다

.

 

장녀 용숙은 일찍 과부가 되고, 그녀의 아들 동훈을 치료하는 병원 의사와 정을 통한다. 이 사건 때문에 용숙은 고통을 받지만 용숙은 돈의 노예가 된다. 둘째 용빈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며 교육을 받지만 애인의 배신으로 상처를 받고 결혼에서 멀어진다. 셋째 용란은 관능적인 몸매와 미모를 가지고 있지만 본능적으로 움직이다 집안일을 도와주는 하인과 애욕에 빠졌다가 아편쟁이에게 시집을 가서 매일 두드려 맞는다. 김약국 집은 점점 몰락해가고 재산이 다른 사람의 손에 옮겨가면서 넷째 용옥은 전혀 정을 나누지 못하는 남편과 별거하다 시아버지가 겁탈을 하는 바람에 피하여 뱃길에서 죽어버리고, 시간이 지나 집에서 쫓겨났던 하인이 돌아와 용란에게 같이 도망칠 것을 제시하지만 이 사실을 안 남편인 아편쟁이에게 하인(황해)과 용란의 어머니(황정순)는 살해당한다. 그로 인해 용란은 정신이 나가게 된다

.

 

말 그대로 김약국의 딸들은 비극을 그리고 있다. 세상에 이런 비극이 있을까. 소설과 영화는 조금 다르다. 소설은 터널의 입구가 전혀 보이지 않는 아주 암울한 비극의 절정으로 끝나는데 영화는 비극 속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뉘앙스로 끝을 맺는다. 유현목 감독은 문예영화의 시초라 일컫는 ‘오발탄’을 만든 감독이다

.

 

60년대 영화에는, 그럴 수밖에 없지만 배우들이 열연을 했다. 용빈으로 나오는 엄앵란은 여러 영화 중 김약국의 딸들에서 아주 예쁘게 나온다. 불륜을 저지르는 장면이나 미쳐버려 칼을 들고 살해를 하는 장면은 정말 미치지 않았나 할 정도로 연기를 해내고 있다. 영화가 소설과 다른 점은 당시의 통영의 풍경을 자세하게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소설을 읽으면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지만 그 상상 속의 바다가 한정적이기도 하다. 영화 김약국의 딸들에는 생생한 60년대 통영의 모습과 생생한 방언을 들을 수 있다. 말띠 신부에서 신여성으로 나왔던 최지희가 이 영화에서는 대사도 많이 없지만 몸짓과 눈빛으로만 용란을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다. 정말 일어나서 박수쳐주고 싶다. 영화는 비극에 대해서 이런 대사를 하면서 끝이 난다

.

 

보세요, 저기, 저 물 푸는 노파를 보십시오. 저 노파가 물 푸는 고요 귀신을 타고 바가지를 내던져 버릴 수가 있을까요. 물을 푸야죠. 안 푸면 배는 가라앉고 생명은 죽는 것입니다. 인간이 사는 곳에 어디 비극이 없는 곳이 있을까요. 미칠 것만 같은 슬픔과 괴로움을 삼키며 극복을 했을 때 비로소 인간은 비극을 짓밟고 살 수가 있는 거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