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슈슈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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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만 보이는 오키나와. 푸른 산호와 활짝 핀 꽃들과 거대한 수풀과 멋진 모양의 나무들이 장관을 이룬 오키나와. 하지만 그건 사람의 입장에서 보는 오키나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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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호는 자기가 살기 위해 촉수를 뻗어 옆의 산호를 죽인다. 잘 알겠지만 트러플 역시 주위를 다 죽여가며 양분을 빨아들인다. 오키나와의 어떤 나무는 다른 나무를 휘감아 죽이고 그 자리에 자신이 살아간다. 식물의 잎이 화려할수록, 컬러가 알록달록할수록 그들은 극한으로 몰려 자기방어의 최후 수단인 형형색색으로 표현한다. 꽃이 예뻐 보이는 건 인간의 눈에나 그렇지 그 속에 살고 있는 것들은 실은 지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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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겐 낙원처럼 보여도 자연 속 생물들에겐 지옥일지도 몰라, 자연이란 그런 거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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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게 보이는 일상이지만 그 속에서 지옥 같은 매일을 보내는 아이들의 이야기, 하루를 견디기 위해 하루를 죽을 수밖에 없는 아이들의 이야기다. 빛과 같은 하나의 희망은 오직 릴리슈슈의 음악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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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슈슈의 모든 것, 이 영화는 잔인함에 입각한 잔인하고도 잔인한, 더없이 잔인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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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짝이었던 친구를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자위행위를 시키는 잔인함. 같은 여자아이의 발가벗긴 사진을 미끼로 원조교제를 시키는 잔인함. 원조교제를 하면서 어른의 지갑을 훔치는 잔인함. 하늘을 날고 싶어 그대로 자살을 해버리는 잔인함. 자식을 버리는 잔인함. 같은 반 친구를 강간하는 잔인함. 자신의 머리를 밀어버리는 잔인함. 오키나와에서 교통사고를 내고도 잘못을 돌리는 잔인함. 살아가는 이유인 릴리슈슈의 음악 앞에서 친구를 찌르는 잔인함.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잔인함으로 덮여있다. 그 잔인함이 무척 견고하고 단단하여 영화를 보다 보면 그 잔인함이 인간 만이 낼 수 있는 것이라 무섭고 서늘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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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함이란 인간만이 낼 수 있고, 그 잔인함은 호기심에서 발현했을 수 있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이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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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근래 우리나라 영화 ‘박화영’처럼 아이들이 나오는 아이들 영화인데 아이들이 볼 수 없는 영화다. 영화 속 아이들은 절망과 희망을 손바닥과 손등처럼 같이 지니고 다닌다. 잡힐 것 같으면서도 잡히지 않는 희망의 희미한 줄기의 릴리슈슈의 노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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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호흡. 우주는 창조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 자리에서 존재해 있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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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가 되고 싶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 소설을 적고 싶다,라고 하면 평범한 삶을 택해라, 평범하게 살아라, 그게 너에게 도움이 된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다. 그런데 평범하게 사는 건 쉬운가. 평범하게 살면 지옥에서 벗어날까. 평범하다는 건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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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이 되고, 대기업에 들어가서 진급하면서 결혼해서 아들딸 낳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 그 속도 실은 지옥일 텐데. 뉴스를 장식하는 사건 사고의 대부분은 평범하게 보였던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인데. 평범이라는 것이 깨져 버리면 이어 붙이는 건 어렵다. 어려운 게 아니라 불가능하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마도 죽을힘을 다해 그 평범함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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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이라는 방어막을 앞세워 어른이 뭔데 아이들의 꿈을 다 막으려 할까. 치유를 받고 소통을 할 수 있는 방법이 돈과 굴종시키는 것과 무사유여야만 한다는 생각. 평범하게 사는 것, 안전한 직장을 얻는 것, 무난한 인간관계를 가지는 것을 강요한다면 그것이 지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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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버둥을 쳐도 벗어날 수 없는 아이들. 하루키의 어둠의 저편에도 이런 대사가 나온다. ‘너는 도망칠 수 없다’ 그건 소설 속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이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서 도망 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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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소리를 듣는 것.
남들이 보지 않는 것을 보는 것.
매일 조금씩 읽고 음악을 듣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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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영화는 잔인하게 흘러 잔인하게 끝난다. 잔인한 음악만을 남겨둔 채 스스로에게 잔인하기만 했던 아이들의 무표정한 얼굴이 잔상에 남는 영화. 릴리슈슈의 모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