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델타 보이즈’는 개인적으로 객관적으로 볼 수 없는 영화였다. 객관의 시각을 창작하고 영화적 구성과 대사와 개연성과 클리셰를 따지고 볼 수 없었다. 뭐야? 이 찌질한 것들은, 하며 보다가 어? 이건 나의 이야기잖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비판을 할 수 없는 영화가 되었다
.
너 그 얼굴로 가수가 되겠어? 그 실력으로 노래 한 곡 부를 수 있겠어? 어?
가수가 꿈이라고 입 밖으로 말 할 수 없어서 꿈을 접고 살았던 주인공 녀석들이 노래 하나를 연습해서 끝내 그 하나를 부르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
영화 델타 보이즈는 정말 이입이 되고 말았다. 찌질하고 잘 하는 거 하나 없고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고, 어디 방해만 안 되면 다행인 인간이었던 나는 글을 쓰고 싶어서, 야 문학 전공도 아니면서 글은 무슨, 야 그 실력으로 무슨 글을 쓰냐? 같은 소리를 듣다 보니, 나 글 쓰고 싶은데,라는 말을 그동안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시간을 어떻든 내서 늘 어딘가에서 불안하게 등을 구부리고 앉아 글을 썼던 기억이 가득하다
.
2015년에 닥치는 대로 쓴 단편소설 여러 편을 들고 지역 시인(의사를 하면서 나이가 많은)에게 들고 가서 보여주었다. 너의 글에는 감동이 없다. 이런 글은 백날 써봐야 빛을 보지 못한다. 감동이 있는 글을 다시 써와라. 나는 그 후에 다시는 그 시인을 찾아가지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글을 쓰고 있다고 말을 하지 못했다. 먹고사는 게 중요한 때에 팔자 좋게 글이나 쓴다고? 10년 넘게 공모전, 글 카페에 글을 올리고 욕 들어 먹기를 수 십 번? 수 백 번은 되었다
.
델타 보이즈는 노래 하나를 부르고 싶어서 장사를 때려치우고, 생계를 살짝 포기하고,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가족에게 고통받는 모습도 너무나 이입이 되어서 아 씨발 진짜 이 새끼들 이게 연기야 실제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주인공 녀석들은 영화 속에서는 노래 하나를 부르고 싶었겠지만 실제로는 영화 하나를 만들고 싶어서 열정으로 덤벼든 것 같다. 주인공 녀석들은 후에 ‘튼튼이의 모험’으로 다시 뭉쳐 레슬링 그 하나를 하고 싶어서 또 처절한 고군분투를 한다. 이 아름다운 새끼들
.
델타 보이즈는 독립영화답게 250만 원으로 영화를 만들었지만 나에게는 2조5억배 재미있고 좋은 영화였다. 생활밀착 찌질한 그들의 연기는 너무나 리얼했고 정말 저건 찌질한 나잖아,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요즘도 매일 닥치는 대로 글을 쓰는 건 열 개 중에 하나를 건지는 것보다 백 개 중에 하나를 건지는 게 낫기 때문이다. 일류 인생만 인정받는 건 이상하다. 삼류인생보다 일류 인생이 좀 더 인정을 받으면 된다. 삼류소설이 일류 소설보다 덜 인정받으면 되는 것이지 삼류는 안 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
영화 델타 보이즈는 자칫 발을 헛디디면 삶을 포기해야만 할 것 같은 위태위태한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의 노래에 매달리는 찌질한 녀석들의 이야기다. 슬프고 짜증나고 찌질하다 해도 하나에 매달리고 픈 이야기. 바로 나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