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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일단 소재면에서 기존의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것만큼 특이하다. 이미 '위저드 베이커리'에서 인간들의 주문에 따라 마법의 빵이 만든다는 약간은 판타지적 소재나 아가미로 숨을 쉬고 등에 비늘을 돋아난 '아가미'의 곤 이야기가 그렇다. '파과' 역시 60살이 넘은 살인청부업자 조각를 소재로 하고 있는데 신선한 소재도 그렇지만 탄탄한 구성으로 책을 펼치는 순간 단숨에 읽어내려간다.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느낌이랄까...
'파과'- 조각이 과일가게에서 산 몇 개의 복숭아. 먹고 싶은 마음으로 산 것이 아니었기에 냉장고에 넣고도 금세 잊어버린다. 한참 후 냉장고에서 꺼낸 복숭아는 시커멓게 말라비틀어진, 정체를 알 수 없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당도를 뽑내던 절정의 맛은 사라져버리고 보기 흉하게 변해버린, 그래서 버릴 수밖에 없이 된 과일이 파과가 아닐까. 그건 바로 주인공 조각의 모습이고 삶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인생에서 웃음을 보였던 때가 있었는가. 지독한 가난과 많은 형제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녀, 결국은 한 입을 덜기위해 당숙집에 보내졌지만 일부러 언니의 보석을 훔치려 한 것이 아니었지만 제자리에 갖다놓으려다 오빠에게 들키고 굴욕적인 말에 그만 오빠를 때려눕힌다. 여기에서부터 조각의 타고난 킬러의 본성이 드러난듯 싶다. 킬러가 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쫒겨난 조각은 류를 만나게 되고, 자신을 지키기위해 미군병사를 단숨에 죽인 그녀를 류는 방역업자로 훈련을 시킨다. 그녀에게는 이세상에 류밖에는 없었다. 류 역시도 죽음을 당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조각은 돈을 받고 살인을 하는 영화에서나 보았던 킬러의 삶을 외롭고 고독하게 살아가야만 했다.
영화 '레옹'이 떠오른다. 그 역시 완벽하게 킬러의 역할을 다한다. 그는 결코 인연을 만들지 않는다. 남들과 철저하게 차단된 삶을 살아간다. 조각과 류의 삶도 레옹과 같았다. '지킬 것은 만들지 말자'며 철저히 혼자의 삶 속으로 살아간다. 그녀에게 지킬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레옹'은 결코 인연을 만들지 말아야했다. 이웃집 소녀 '마틸다'를 받아들이게되면서 결국 그는 죽게 된다. '조각'역시 살인청부를 받고 건설업자의 가정부로 들어가 목표를 제거하지만 그녀를 본 그의 아들을 그대로 두고 떠난다. 그것이 실수였을까. 그 아이는 자라서 조각이 일하는 업체의 또다른 방역업자 '투우'가 되어 돌아온다. 투우는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다. 조각은 투우의 방해를 받고 결국 둘의 죽음을 향한 싸움을 하게 된다. 몸은 이미 날렵했던 예전의 조각이 아니었다.
'파과'라는 의미를 되새기며 싸움 장면에서 투우의 승리를 점쳤지만 냉장고의 형체를 알 수없게 된 과일은 아직 버릴 때가 되지 않았나보다. 그녀는 죽지 않았다. 죽기 직전 투우는 몹시 궁금했단다. 약을 꼬박 챙겨주는 그 이유를 알고 싶었을뿐이라고..
류를 만나면서 지킬 것은 만들지 않은채 철저하게 혼자만의 고독한 삶을 살아갔던 그녀에게 찾아온 변화가 있었다. 길 잃은 늙은 개를 데려와 키우게 되고, 방역과정 중 파지를 줍는 할아버지를 돕고, 자신을 치료해준 강박사의 가족을 보호하게 되었던 것이다. 자신 이외의 인간에게 시선을 돌리고 감정을 드러낸 것이다. 그녀에게 주어졌던 모든 상실을 살아가기 위해 투우와의 싸움에서 살아남은 것일까. 그녀는 한 팔을 잃기 전에 망설였던 네일아트를 받게 된다. 한 팔이었기에 반값만 지불한 채....
60살이 넘은 노년의 조각은 이제 세상과의 소통을 위한 첫걸음을 시작하게 되리라. 두 손을 가졌음에도 들어가기를 망설였던 네일아트를 한 손만 남게 되었을 때 네일아트를 받았듯이 남은 인생을 서툴지만 분명 세상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파과'같이 형편없이 흉물스럽게 변한 그녀의 삶이었지만 아직 버릴 때가 되지 않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