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이 내게 속삭여 주셨다. 요즘은 왜 503호 여자 얘기 안하냐고. 그 여자와 난 끝났다. 시작도 안했는데 끝이라니 황당하기 그지없지만, 그게 사실인걸 어쩌란 말인가. 물론 503호는 아무것도 모른다. 모든 건 내 마음속에서 시작되었다가 끝난 거니까.

끝이 난 이유는 간단하다. 언젠가 집에 오는데 차가 한대 서고, 거기서 503호 여자가 나왔다. 남자가 나오고 503호는 인사를 한다 (503호 그러니까 무슨 스파이 번호 같다). 남자가 나보다 잘생겼다기보다 차가 좋았다. 그렇다고 그랜져나 오피러스 같은 건 아니고 회색의 EF 소나타였는데, 그 광경을 보고나니 그다음부터 503호에게 다른 마음을 먹을 수가 없게 된다. 눈이 작고 가자미처럼 찢어진 그 남자에 비하면 503호의 미모가 아깝지만, 그렇다고 해서 얼굴도 평범하고 차도 없는 나랑 사귀는 건 더더욱 말이 안된다. 차 한대에 이렇게 기가 죽다니, 과연 나답다.

둘은 어쩌면 사귀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인사를 한 것으로 보아 선을 봤을 수도 있고, 그리고 소개팅을 했을 수도 있다. 한번 만나고 다시는 안만날 사이일 수 있음에도 내가 지레 포기한 이유는, 둘이 잘 안될 확률에 기대서 뭔가를 기획한다는 게 싫기 때문이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여우처럼, 내 마음 속에서도 합리화기제가 작동되기 시작한다. 503호는 그렇게 대단한 미모는 아니며, 키도 그다지 크지 않다. 내가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녀가 내 옆의 옆의 집에 산다는 이유 때문이지, 여인들로만 이루어진 섬에 내가 착륙했다면 굳이 그녀에게 관심을 둘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어느 분의 글에서 읽었는데 원래 이상형이라는 건 주위 여자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가.

마음에서 지웠을 뿐인데도 굉장히 마음이 허전하다. 누군가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 그게 나로 하여금 삶의 희망과 재미를 불어넣어줬는데. 이제는 누구를 마음에 담아 두어야 할까. 그런 생각으로 아파트 벤치에 이십여분간 앉아서 책읽는 척을 했다. 잠복결과 우리 동에는 그다지 미인이 살지 않는 듯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몇명 젊은 여인이 있지만 내 타입은 아니며, 내 타입이 아니라는 것은 다른 남자의 타입일 수도 있지만 그러기가 힘들다는 뜻일 것이다. 이럴 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가지. 다른 아파트로 원정을 가거나 아니면 일을 열심히, 몸바쳐서 하는 것. 전자는 이상한 놈으로 오인받고, 후자는 내가 싫다. 제3의 길, 그걸 한번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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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8-16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동에는 그다지 미인이 살지 않는 듯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흠... 너무 이른 판단은 아닌지...

그나저나..이제 아파트 벤치에 앉아서 책읽는 (척하는) 남성분을 보면...
니콜키크더만 님이 생각날 거 같슴다~

잉크냄새 2005-08-16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3의 길이 모색되면....저에게도 알려주시길...

니콜키크더만 2005-08-23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카루님/앗 혹시 저희 아파트에 사시나요?
잉크냄새님/모색 중입니다만 아직 뚜렷이 떠오르는 게 없네요^^

icaru 2005-08-28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아니요..(..)

2005-09-06 1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