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점심시간이 된다. 더워서 그런지 밥맛도 없고, 먹을 것도 없다. P와 S, 이렇게 셋이서 늘 밥을 같이 먹는다. 그 생활을 한 2년쯤 했더니 이젠 뭐 먹을지 정하는 것도 고통스럽다. 주변에 식당이 많은 듯한데 왜 먹을 건 없는 걸까? 하나씩 따져보자.

1. 왕비성, 중국집
촌스러운 이름부터 이 집이 심상치 않으리란 걸 말해준다. 그리 뚱뚱한 편은 아니라도 짜장이나 짬뽕 하나만으로 점심을 떼우면 오후 늦게부터 배가 고파 죽겠기에, 볶음밥 정도는 먹어줘야 한다. 그런데 이집 볶음밥은 정말이지 맛이 없다. 김치랑 밥, 참기름을 넣고 비벼도 그보다는 맛있겠다 싶을 정도. 짜장과 짬뽕이 맛있는 것은 아니지만 볶음밥의 맛은 삶이란 원래 고통스럽다는 석가의 말을 떠오르게 한다. 불행하게도 우리 회사 근처에는 중국집이 여기밖에 없다.

2. 강남설렁탕
설렁탕과 도가니 등을 파는 집이다. 도가니는 1만원을 받으니 평소에 못먹고, 가면 주로 설렁탕을 먹는다. 근데 이 설렁탕, 정말 대단한 설렁탕이다. 쓸 걸 안썼는지, 아니면 재료를 넣었는지 맛이 무미건조 그 자체다. 당연히 한번 간 뒤에는 안가야 하지만, 혹시나 그새 정신을 차렸나 싶어 석달쯤 후에 가봤더니 그때 그맛 그대로다. 그럼에도 식당이 안망하는 건 유동인구가 많아서 처음 가는 사람이 속아서 가거나, 아니면 도가니탕은 그런대로 괜찮던지 둘 중 하나일 거다. 아니면 빌딩 주인이라서 임대료 걱정이 없든지.

3. 가마솥식당
식당 이름을 옮겨적다보니 참 운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가마솥식당, 제목만으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곳은 한식 전문이다. 대충 다 한다. 여기 음식의 특징은 '무난하다'는 것. 물론 탕 종류를 시키면 쓴맛을 보지만, 욕심 안부리고, 큰 기대도 안한 채 비빔밥이나 김치찌개 등을 먹는다면 속상할 일은 없을 듯.

4. 장터국수
맛으로 따지면 이곳이 가장 낫다. 브랜드 네임에 걸맞는 성실함을 보이는 이 식당은 하지만 늘 사람들로 미어터져-다른 데 갈 곳이 없으니 여길 갈 수밖에-12시 이전에 가지 않으면 줄서서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우리 소장은, 그 인간성 나쁜 소장은 점심 먹으려고 일어나면 꼭 시계를 쳐다보며 눈을 부라리는 버릇이 있어서 12시 전에 가는 건 힘들다. 그래서배고픔을 참고 아예 늦게 장터국수에 가거나, 아니면 다른 식당에 간 뒤 장터국수 맛이라고 자기 최면을 걸어가며 먹는 수밖에는 없다.

5. 이서방삼계탕
주인이 이씨인지조차 의심스러운 이 집은 여름 한철에는 인기다. 삼계탕 한그릇에 9천원을 받는데, 아무래도 닭이니까 맛이 기본은 한다. 한달에 한번 정도 가는 편인데, 다른 삼계탕집과 달리 닭을 아주 작고 귀여운 걸 쓰는 듯하다(그래도 다리가 하나인 닭을 쓰진 않는다). 그래도 먹고 나면 배가 부르고, 서비스로 인삼주도 한잔씩 준다.

6. 이조부대찌개
에어콘이 빈약해 가기 꺼려지는 이 집은 부대찌개 전문점을 표방하는 듯하지만 없는 메뉴가 없다. 심지어 칼국수나 제육덮밥 같은 것도 메뉴에 있는데, 그러다보니 간판에서 추구하는 부대찌개의 맛이 일류가 아니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간이 안맞을 때가 많아 "고추장을 달라"고 해 우리가 넣거나, 소금을 넣거나 하기도 한다. 손님이 직접 조리사가 되는 체험을 하는 건 아무 식당이나 가능한 건 아니다. 이씨조선이 왜 망했는지 이유를 알 것 같다.

7. 김가네왕만두
김밥으로 유명한 김가네를 표절한 듯한 이곳은 괜찮은 분식점이다. 라면은 내가 끓이는 라면맛의 70% 정도는 되고, 공기밥을 시켜서 국물에 말아먹을 수도 있다. 김밥은 동그란 김밥 안에 햄과 당근이 무성의하게 들어있어 해괴한 맛을 내며, 칼국수에서는 빨래 빤 물의 냄새가 난다. 그럼에도 내가 '괜찮은'이라는 표현을 쓰는 건 자포자기를 해서다. 지금까지 쓴 걸 다시 보니 모든 식당을 후지다고 욕해놓았다. 그렇다면 난 과연 뭘 먹고 살았단 말인가. 해서 조금 관대해지기로 했고, 그게 김가네 왕만두에 대한 후한 평가로 이어진 것이다. 그래도 두렵다. 점심 시간이 오는 게.  "이것도 먹고싶고 저것도 먹고싶은데 뭘 먹을까?" 하는 고민을 하면 좋은데 "여기 음식은 못참겠고 저기 음식은 먹기싫다. 그래도 먹기싫은 정도가 덜한 곳이 저기니까 저기를 가자" 식이 되어버렸다. 우리 회사 주위는 도대체 왜 이모양일까.

댓글(5)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줄리 2005-08-01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도시락이 좋아요. 밥 위에 반찬 하나 올려서 가져가도 사먹는것보다 훨 맛있고 든든하더라구요. 그래두 한식은 웬만하면 다 맛있지 않나요? 니콜키크더만님 입맛이 까다로우신가봐요^^ "이씨조선이 왜 망했는지 이유를 알 것 같다" - 너무 오바시다. ㅎㅎㅎ

날개 2005-08-01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점심시간에 메뉴 정하는거 정말 고통이죠..ㅎㅎ 우린 사다리를 활용했었습니다만..

니콜키크더만 2005-08-01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사다리를 타신다고요. 그것도 좋은 방법일 듯 싶네요.
줄리님/맞습니다. 제가 좀 입이 까다롭습니다. 그리고 이씨조선 얘기는 좀 오버지요.

ceylontea 2005-08-09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사원식당이 좋아요.. 그런데.. 지금 있는 곳은 사원식당이 없어서 항상 골라서 사먹어야 하니 귀찮아요... 그렇다고 도시락 싸오는 것은 더 귀찮고..
정말.. 점심 먹는 것 또한 전쟁이지요...

니콜키크더만 2005-08-15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론티님/사원식당이 있으면 약간의 불만은 있을지언정 뭘 먹을까 고민하는 일은 없겠지요. 점심을 매번 사먹으려면 그것도 참 힘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