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인문학 수업 - 역사, 문화, 경제, 인구, 산업이 교차하는 도시 이야기
도시연구소 지음 / 믹스커피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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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성장하는 도시, 완성형 도시를 선택해야 한다.개인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내가 100의 성과를 달성했다고 하면, 어떤 도시에서 이뤘는지에 따라 결과는 천지 차이다. 성과가 쌓이다 보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막대한 차이를 발생시킨다. 개인적인 성과뿐만이 아니다. 성장하고 성숙한 도시들은 그렇지 못한 도시에 비해 부동산 가격도 더 큰 비율로 상승한다. - '들어가며' 중에서


책의 저자 도시연구소는 통계나 지도만으로 도시를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골목을 직접 걸어 보고, 새벽 시장의 비린내와 부산한 활기. 점심 무렵 쏟아져 나오는 직장인들, 불 꺼진 공단의 적막을 몸으로 느끼고 나서야 비로소 그 도시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렇게 밟아 본 도시가 5년간 전국 100여 곳이 넘는다. 그렇게 걷다 보니 하나의 답에 다다랐다. 우리가 어디에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다.

총 2부로 구성된 책은 지도가 포착하지 못한 도시의 운명사(1부), 생존에서 풍요로, 도시의 선순환 구조(2부)에 걸쳐 홍콩과 싱가포르를 꿈꾸는가(부산), 삼성전자, 도시의 일자리를 바꾸다(수원), 로마와 어깨를 견준 세계적인 메가시티(경주), 도시 선순환 구조의 시작, 서울의 집값은 비싼게 아니라 정직한 것 등 모두 마흔여섯 가지의 도시 이야기를 전한다.

역사, 문화, 경제, 인구, 산업이
교차하는 도시 이야기

홍콩과 싱가포르를 꿈꾸는가

국내 광역시 중에서 가장 먼저 인구 자연 감소를 겪은 것도 모자라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며 가장 늙은 도시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일자리가 사라지니 인구가 줄어들고 인구가 늙어 가니 도시 전체의 활력이 떨어지는 지독한 악순환의 고리에 갇혀 버린 것이다.    

대한민국 제2의 도시인 부산은 이대로 주저앉을 만큼 연약한 도시가 아니다. 낡은 제조업이 떠나간 빈자리를, 천혜의 자연환경인 바다와 관광 산업으로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부산이라는 공간이 품고 있는 특유의 문화적 저력을 보여 준다. 

과거의 바다가 무거운 화물을 실어 나르며 땀 흘리던 치열한 생존의 현장이었다면, 오늘날의 바다는 문화를 소비하고 여유로운 여가를 즐기는 낭만적인 공간으로 그 성격을 완전히 바꿨다. 해운대와 광리 해변을 따라 늘어선 화려한 마천루는 홍콩이나 싱가포르에 견줘도 손색없는 아름다운 스카이라인을 자랑하며 국내외 관광객과 자산가들의 발길을 끌어당긴다..

빛고을, 새로운 엔진을 찾아서

최근 뜬금없이 '호남반도체' 이슈로 떠오른 광주는 멈춰 선 성장의 엔진을 다시 돌리기 위해 치열한 고민을 이어가고 있다. 대규모 복합쇼핑몰 유치에 열을 올리며 광역 상권의 기능을 강화하려 애쓰고 있으며, AI 중심 도시라는 새로운 비전과 광주형 일자리(광주글로벌모터스)를 통해 제조업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과감하게 실험하고 있다.

내 젊은 시절, 이 도시는 '예술을 사랑한다'는 뜻을 지닌 '예향藝鄕의 도시'로 불리었다. 전라도全羅道라는 지명은 전주와 나주의 앞글자를 따서 만든 것에서 알수 있듯이, 호남의 거점 도시사 아니었던 광주는 조선 시대엔 나주목의 관할 하에 놓인 광주군에 불과했다. 그러나, 도청이 나주에서 광주로 이전하는 행정적 조치로 인해 수많은 공무원들이 따라 이동하고 덩달아 늘어나는 소비를 감당할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까지의 광주는 전형적인 소비 도시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후 광역시로 부상할 수 있었던 변곡점은 바로 '제조업의 육성'이었다.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차)를 광주 경제의 심장으로 유치하는 데 성공해 배후에 하남공단, 본촌공단 등의 대규모 산업 단지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던 것이다. 전남 지역의 수많은 농촌 인구가 안정적인 생계를 위해 광주시로 대거 유입되었던 거다.   

삼성전자, 도시의 일자리를 바꾸다

현재 수원의 인구는 약 120만 명에 달한다. 광역시 중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울산(약 110만 명)을 넘어선 수치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여전히 기초자치단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지만, 실질적인 체급과 위상은 이미 오래전에 광역시의 규모를 넘어섰다. 

부산이 바다를 품고, 대구가 섬유를 짜내며, 울산이 육중한 중공업으로 도시를 키워 왔다면, 수원은 18세기 정조의 꿈과 현대 기업의 혁신이 만나 탄생했다.조선 시대 최초의 계획 도시에서 출발해 글로벌 대기업의 심장부로 자리 잡기까지, 수원은 일자리가 한 도시의 운명을 어떻게 진화시켰는지 보여주는 이상적인 모델이다.

최근 내 큰딸 부부도 고양시에서 수원시로 이사를 했다. 사위가 LG 디스플레이를 퇴사하고 삼성으로 이직함에 따라 회사 인근의 구축 아파트를 구입, 수리를 거쳐 입주했다. 처음엔 전세로 살 계획이었는데 이곳 여러 단지들을 다녀본 후엔 고양시에 비해 훨씬 더 활동적인 모습 속에서 더 밝은 미래가 보였던 모양이다.     


강남을 넘어서 경제력, 일자리와 젊은 세대


도시의 선순환 구조를 움직이는 첫 단추는 언제나 일자리다. 화성은 이 첫 단추를 단순히 잘 끼운 정도를 넘어, 가장 튼튼하고 값진 단추로 꿰었다. 2023년 기준 화성시의 지역내총생산은 약 95조 원에 달한다. 대한민국 경제의 중심이라 불리는 서울 강남구를 제치고 전국 1위를 차지한 수치다. 

지방의 기초자치단체가 어떻게 강남의 경제력을 뛰어넘을 수 있었을까. 그 배경엔 삼성전자, 현대차, 기아차라는 글로벌 대기업의 핵심 생산 기지가 잘;하고 있다. 화성 동탄엔 삼성전자 나노시티가 반도체를 생산하고 있으며, 서쪽 우정읍의 기아차 화성 공장에선 완성차가 생산 출하되고 있다. 또 향남제약단지를 비롯한 수천 개의 중소 협력 업체들이 도시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렇다. 단순히 서울로 출퇴근하는 베드타운이 아니라 서울의 일자리 규모를 위협할 정도의 완벽한 자족自足 도시인 셈이다. 

썩어도 준치, 변하지 않는 입지의 힘

부천은 이대로 속절없이 쇠락의 길을 걷다가 소멸하고 말 것인가. 그렇게 비관하기엔 아직 이르다. 부천에겐 다른 수많은 신도시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시간을 뛰어넘는 절대적인 무기가 하나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바로 서울과의 물리적인 거리다. 아무리 화려하고 쾌적한 신도시라 할지라도, 출퇴근길에 감내해야 하는 1분 1초의 물리적인 거리는 결코 쉽게 극복되지 않는다. 부천은 지리적으로 서울의 양천구(목동), 강서구(마곡), 구로구(디지털단지)와 찰싹 붙어 있다. 일자리는 없지만 입지가 좋은 곳임에 틀림 없다.

지하철을 타고 몇 정거장만 이동하면 서울의 핵심 업무 지구에 닿을 수 있는 압도적인 접근성을 지녔다. 인천의 송도나 청라국제도시가 아무리 훌륭한 인프라를 자랑할지라도 아침저녁 서울까지 왕래해야 하는 출퇴근의 편리함은 부천을 따라잡기엔 역부족이다. 부동산 시장에 통용되는 불변의 진리 "입지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선순환의 고리가 끊긴 자리

전주는 여전히 매력적인 공간이다. 한옥의 곡선은 수려하고 음식은 깊은 맛을 내며, 도시 전체에 고즈넉한 품격이 흐른다. 하지만 낭만과 감성만으로는 도시를 온전히 성장시킬 수 없다. 전주가 과거 조선의 풍패지향豊沛之鄕(한나라 고조 유방의 출신지)이라는 빛나는 영광을 뛰어넘어, 앞으로도 지속 가능한 미래 도시로 뻗어 나가기 위해선 한복을 입은 관광객을 친절히 맞이하는 것 이상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그렇다. 도시의 경제가 중요한 뮨제이다. 말끔하게 넥타이를 맨 비즈니스맨과 작업복을 입은 엔지니어들이 스스로 모여들 수 있는 새로운 먹거리를 창출하는 것이 서서히 멈춰 가는 전주의 경제 엔진을 다시 힘차게 돌릴 수 있는 있는 유일한 열쇠가 아닐까 싶다. 

도시 선순환 구조의 시작

‘도시’라는 거대한 생명체가 어떠한 원리로 호흡하고 팽창하며 또 늙어가는지 거시적인 흐름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름하여 ‘도시의 선순환 구조’라는 성장 과정이다. 앞서 살펴본 도시들의 눈부신 성공과 뼈아픈 실패 역시, 결국 이 선순환의 고리가 제대로 이어졌느냐 혹은 끊어졌는가에 따른 결과물일 뿐이다

양질의 일자리가 사람을 부르고, 모여든 인구가 상권과 인프라를 팽창시키며, 그렇게 잘 갖춰진 인프라가 다시 새로운 일자리와 자본을 끌어당기는 이 거대한 톱니바퀴의 원리는 대한민국 모든 도시의 생존을 관통하는 절대적인 공식이다.

중요한 건 '젊음의 밀도'

일자리가 인구를 부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도시의 운명을 제대로 살펴보려면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한다. 단순히 인구의 총량만 본다면 '수박 겉 핥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과연 이 도시에 누가 살고 있는가를 현미경으로 살펴봐야 한다. 만약 경제 활동과 무관한 노인들만 많이 살고 있다면 이 도시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 질적인 분석이 필요한 거다.   

도시를 움직이는 실질적인 인구는 15세에서 64세 사이의 경제 활동을 하는 계층인 ‘생산가능인구’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20대 후반에서 40대까지 이르는 젊은 층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 유입되지 않는 도시는 움직이지 않는 낡은 시계와도 같다. 인구 증가라는 숫자 속에 조용히 숨겨진 ‘젊음의 비율’이야말로, 도시의 미래 가치를 결정짓는 강력하고도 새로운 척도인 셈이다.

서울의 완성형 생태계 진화 단계

1단계(일자리)~ 한국 경제의 컨트롤 타워
2단계(인구와 재정)~ 마르지 않는 자본의 우물
3단계(인프라)~ 지하에 흐르는 황금 혈관
4단계(상권과 문화)~ 욕망의 최전선
5단계(학군)~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벽
6단계(지속 가능성)~ 스스로 진화하는 도시

서울, 도시 분석의 '모범 답안지'

서울은 대한민국을 넘어 글로벌 관점에서도 도시를 분석하는 데 있어 완벽한 ‘모범 답안지’다. 어떤 도시는 일자리는 훌륭하지만 학군이 아쉽고, 또 어떤 도시는 교통망은 훌륭하지만 상권이 약하다. 도시의 경쟁력을 육각형 그래프로 그렸을 때 대부분 한두 군데는 찌그러져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서울은 일자리, 인구, 교통, 상권, 학군, 그리고 미래 지속 가능성까지 모든 지표가 최대치를 기록하는 유일한 도시다. 그렇기에 서울은 대한민국 부동산의 절대적인 기준점이 된다. 집값이 전국에서 가장 비싼 이유는 결코 투기 때문이 아니라 도시 진화 단계의 핵심 요소들을 가장 완벽하고 높은 수준으로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서울 집값이 비싼 게 아니라 지극히 정직한 가치를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를 자꾸 정치적으로 재단하려는 정치 집단이 있다. 자신들도 이 도시에 아파트를 몇 채 소유하고 있으면서 말이다. 인위적으로 서울 아파트에 무리하게 규제하는 행위는 '미친 짓이자 독재자의 무식한 횡포'인 것이다. 오히려 안보에 나태함으로써 북의 공격에 파괴되는 불행을 걱정하는 게 맞을 것이다.


도시 인류는 생존의 노마드

무릇 인간은 자신들의 생존 확률이 가장 높은 곳으로 향하기 마련이다. 원시 때의 인류의 선조들도 마찬가지였다. 먹고 쉴 수 있는 안전한 장소를 찾아 계속 이동했다. 서울의 팽창과 지방의 소멸 현상의 이면에도 이같은 생존이 자리잡고 있다.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생존지를 찾아 발걸음을 옮기는 도시 인류는 현대의 노마드인 셈이다. 내가 살 곳은 어디일지를 고민하는 모든 분들에게 팩의 일독을 권한다.

#인문 #재테크 #부동산 #도시이야기 #도시인문학수업 #도시연구소 #믹스커피 #원앤원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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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 범죄 실화, 살인자의 얼굴을 읽는 법
박진규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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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를 창간하기 위해 중장년 사내 셋이 모였다. 치안본부 간부 한 명, 전직 총경이자 퇴직후 새로운 잡지를 창간하려던 출판사 대표, 그리고 이 잡지의 주필로 참여한 희곡작가가 그들이다. (중략) <수사연구>는 그렇게 탄생했고, 그들은 <수사연구>를 대한민국 경찰 수사과에세 사랑받는 유일한 잡지로 키워나갔다. 그리고 그 사이 많은 취재기자가 이곳을 거쳤다. - '프롤로그' 중에서


책의 저자
박진규는 수사 전문지 <수사연구>의 취재기자 겸 편집장으로 동잡지의 취재기자(2017년)로 입사 후 갱티고개 미제 살인사건, 주식부자 사기꾼 부모 살인사건, 신정동 미제 살인사건 등 다수의 살인사건을 취재했다. 2020년대에 들어서는 다수의 사이버 성범죄, 피싱 및 투자 사기, 마약 관련 사건을 주로 취재하고 있다.

총 11개 사건파일들로 구성된 책은 파란 우산, 노란 모자, 미니스커트(파일1), 박카스와 썩은 바나나(파일2), 돈을 세는 남자(파일3), 박수무당과 킬러(파일4), 모텔 안, 지름 1mm(파일5), 묘지 옆 그 소년(파일6), 12층과 7층(파일7), 수박의 무게 5kg(파일8), 얼굴 없는 사이코패스들(파일9), BJ의 초대장(파일10), 베테랑 형사의 눈물(파일11) 등의 실제 사건의 취재 내용을 담고 있다.

얼마 전 샘플북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했던 파일1~3에 대한 리뷰를 등록한 바 있다. 본 리뷰에선 이를 제외하고 나머지 여덟개 사건파일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리뷰글을 쓰려 한다. 참고로 일전에 작성한 리뷰를 링크로 달았다.  https://blog.aladin.co.kr/736098143/17491321   

박수무당과 킬러

죽음의 현장은 정말 기괴했다. 한바탕 요리라도 한 것처럼 사체死體 주변에 뿌려진 토마토케첩과 마요네즈, 그리고 머리 위에 흩뿌려진 겨잣가루까지. 형사는 범행 현장에서 용의자에 대한 단서를 발견했다. 바로 아들이 사망한 아버지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였다. 편지의 발송지는 교도소이며, 아들은 아버지에게 앞으로 열심히 살 것을 약속하는 내용이었다. 이를 읽은 형사는 아들을 사건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아들의 과거 직업은 '박수무당'이었다. 현재는 강남 인근 PC방의 야간 아르바이트로 살아가고 있었다. 살인은 아들의 단독 범행이 아니었다. 아들 곁에 한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스스로 전문 킬러라고 뻥카를 남발하며  아들의 살인을 조종했다. 심지어 범행에 필요한 도구뿐만 아니라 범행 방법까지 휴대폰으로 지시했던 것이다.

범죄는 2019년 1월 초에 자행되었는데, 피살자는 충남 서천에 거주하던 60대 중반의 독거노인이었다. 전처前妻는 이곳에서 비교적 멀지 않은 군산에 살고 있었는데, 부자 간의 관계는 좋지 않았고 평소 아들이 자주 아버지에게 돈을 요구했음을 증언했다. 피살자는 동절기에도 보일러를 켜는 대신 보온 텐트를 치고 지낼 정도로 자린고비였음이 밝혀졌다. 모든 정황이 살인범은 아들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독거노인의 집 근처에 설치된 CCTV를 통해 흐릿한 화면을 입수했고 영상 속엔 피살자의 아들과 공범자(자칭 '전문 킬러')가 나타났으므로 확실한 증거물이 확보된 셈이었다. 이에 수사팀은 용의자 체포에 돌입해 마침내 두 사람 모두 체포했다. 현장 증거물 수집하던 형사는 피살자 아버지가 아들 앞으로 남긴 유서였는데, '모든 재산을 아들에게 준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살인 사건이란 말인가?        

모텔 안, 지름 1mm

수사팀은 피의자로 지목되는 인물의 주거지 주변에 잠복했다. 예상대로 라면 초저녁에 집으로 귀가해야 했는데 그날 따라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차 안에서 잠복해 긴 시간을 보내며 대기해야만 했다. 화장실 다녀오는 것도 조심스러웠고, 저녁도 배달 음식으로 차 안에서 해결했다. 

“그때 무슨 생각을 하셨어요?”
“〈극한직업〉이요.”
홍 팀장이 대답했다.
“〈극한직업〉, 영화요?”
“네, 그때 흥행하던 영화가 마약반 형사들이 나오는 〈극한직업〉이었거든요. 우리끼리 차에서 피의자를 기다리는데, 그 영화 속 한 장면이랑 진짜 너무 똑같았어요. 진짜 우리 직업이 ‘극한직업’이 맞구나, 이런 생각도 했고, 그런 대화도 나눴죠.”

지금 수사팀은 모텔 객실 내에 설치한 지름 1mm 정도의 렌즈가 침대 위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그대로 녹화해 이를 해외 서버에 연결하여 돈벌이하는 소위 실시간 중계 음란 사이트 사업을 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인물을 추적 중이다. 체포영장까지 발부받았음에도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어 서버 자체를 폭파해 버리면 증거물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에 신중해야만 했다. 이 피의자가 사용하는 차량을 조회한 결과, 법인 명의였으며 과거 웹하드 사이트를 관리하던 회사였다.

결국 그날 피의자가 귀가하지 않아서 수사팀은 인근 모텔을 숙소로 잡았다. 이틀 후 수사팀은 재차 잠복했는데, 저녁 8시 반 경에 피의자 차량이 나타나자 신속하게 추적해 피의자를 체포했다. 그는 반항하지도 않았고 고개를 푹 숙이기만 했다. 압수수색에서 30대의 초소형 IP 카메라와 그의 컴퓨터에서 모텔 생중계 사이트를 운영한 흔적을 확보할 수 있었다.

피의자는 경찰 조사에서 본인이 주범임을 인정했다. 경찰이 눈치를 채고 있다는 짐작이 들었지만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란 생각에 초소형 몰카 설치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실토했다. 그는 2018년 8월부터 2019년 2월까지 영남, 충청 지역의 10개 도시를 순회하면서 모텔 객실에 불법촬영 카메라를 설치했다고 밝혔다. 또 모텔 생중계 사이트 오픈은 2018년 11월 부터였다고 실토했다. 

이에 수사팀은 공범에 대한 수사에 돌입했다. 의외로 피의자는 컴퓨터에 해박한 사람이 아니었다. 웹하드 사업을 할 때 알고 지냈던 웹사이트 전문가를 동업자로 포섭했던 것이다. 헤당 사이트를 관리하는 동업자 또한 체포영장을 받아 마침내 검거했다. 이후 수사팀은 전국 모텔에서 불법촬영 카메라를 수거했는데, 그 규모가 10개 도시 30개 숙박업소의 총 42 객실에 설치되어 있었다. 우리들의 사생활은 이렇게 범죄에 노출되고 있다.    

얼굴 없는 사이코패스들

2020년대 초 김대규 형사를 인터뷰했던 때보다 텔레그램 마약 판매 시장은 한층 더 진화해 있었다. 저자는 첫 인터뷰 시작부터 당황했다. 수사팀이 체포했던 마약 드로퍼가 백수나 마약중독자가 아닌 평범한 국가직 신분으로, 휴가를 이용해 부업으로 마약 드로퍼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 외국인 노동자들은 한국의 마약 거래에 끼어들지 않았다. 한국에서 체포되는 베트남이나 태국인 마약 사범들은 자기들까리 마약을 즐기다 체포되는 식이었다. 하지만 동남아 거물급 마약상들이 한국의 마약상과 교류하며 국내의 자국민들을 드로퍼로 고용해 마약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더 취재하다 보니 예전처럼 건물이나 우체통 등에 마약을 숨긴 것이 아니라 산에서 땅을 파고 대량의 마약을 묻어둔 후 유통했음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좌표를 통해 해당 산으로 와서 땅에 묻힌 마약을 찾아가는 식이었다.

사이버범죄가 무서운 이유는 대면 범죄가 아니기에 대부분의 범죄자들이 큰 죄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온라인의 삶은 눈속임이 쉽다. 우리의 삶은 편집, 가공되고 범죄에 노출되거나 범죄에 이용되기도 한다. 동시에 직접 만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진다. 단지 자신의 경제적 이득을 위해 상대의 자산을 빼 왔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사이버에선 사이코패스로 변질되는 느낌이 강하다. 

BJ의 살인 초대방

수원의 한 개인 방송 BJ는 라이브 음방을 좋아하는 시청자를 직접 집으로 초대해 함께 방송을 했다. 그의 집엔 10대 가출 청소년들이 모여들기 시작, 그들만의 아지트가 만들어졌다. 친구가 없는 20대 남성 또한 BJ 방송의 시청자였고 그의 아지트로 찾아갔다. BJ는 어수룩한 이 남성 명의로 인터넷 결합 상품을 신청하거나 휴대폰을 개통하는 식으로 착취하기 시작했다. 이후 착취는 잔혹한 폭행으로 이어졌다.

부부는 집으로 찾아온 경찰에게 20대 남성이 다른 곳으로 놀러 갔다고 변명했다. 하지만 형사들은 이 말을 믿지 않고 CCTV를 확인했다. 부부는 늦은 밤 핑크색 캐리어를 끌고서 집을 나선 후 아파트 공사가 중단된 공터를 향해 걸어간다. 갈 때는 힘겨운 발걸음이었지만 돌아올 땐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형사들은 부부의 모습에 분노했다. 그들이 무엇을 버렸는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인천에 거주하는 20대 초반 남성으로 BJ의 개인 방송을 즐겨보았고, 놀러 오라는 초청을 받고 20대 중반의 남성 BJ가 거주하는 수원까지 찾아갔다. 그곳은 남성 BJ 외에 그의 아내와 여러 명의 가출 청소년들이 함께 살고 있었던 것이다. BJ는 본능적으로 뜯어먹을 먹잇감임을 알아채고 피해자 명의로  부부의 휴대폰을 개통했고, 어리숙한 이 남성의 할머니를 찾아가 쌀, 고기, 김치 등을 챙겨 가기도 했다. 문제는 이후 피해자는 그의 가족과 연락이 두절되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가족은 BJ의 연락처와 집 주소를 알고 있었기에 수원남부경찰서에 실종신고를 했다.     

새삼 깨닫지만 수사라는 과정은 정의의 사도가 나서서 단숨에 끝내는 역동적인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절차가 기본이다. 하나하나 증거를 찾아가고, 감정이 아닌 이성을 통해 범인의 존재를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수사를 추진하는 동력은 역시 피 끓는 정의감이라는 생각도 든다. 밤을 새우면서 범인을 추적하고, 범인을 잡은 다음에는 그의 입에서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형사들은 스퍼트를 올린다. 

보통 사람의 체력이나 에너지만으로는 힘든 과정이다. 그들이 그 과정에서 항상 하는 말은 “나쁜 놈이니까 잡아야죠”나 “억울한 사람의 혼을 달래줘야죠” 같은 식이었다. 이 취재를 마무리하면서 차 팀장이 내게 했던 말도 역시 비슷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범죄 이야기는 추리소설보다 더 미스터리하다

책 속의 여러 범죄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 경각심을 일깨운다. 범죄자는 특유의 직감으로 약한 먹잇감으로 판단되는 피해자를 낚아챈다. 피해자는 뭔가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느끼지만 후환이 두려워 그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다가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 잃게 된다. 범죄는 늘 우리들 가까이 있음을 경계해야 할 일이다. 추리소설이나 범죄실화에 관심이 많은 분들에게 책의 일독을 권한다.

#범죄실화 #수사연구 #사건이보이는것보다가까이있다 #박진규 #매경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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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명치료는 사양하겠습니다 - 오래 사는 시대, 우리는 어떻게 떠날 것인가
양성관 지음 / 히포크라테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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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결과 자체가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었다. 오래 고통받는 죽음, 남에게 짐이 되는 죽음, 끝내 자신마저 잃어버리는 죽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흔히 말하는 ‘마지막 네 가지 소원’이 있다. 사람들이 ‘좋은 죽음’의 조건으로 꼽은 것들이다.

스스로 삶을 정리하고(85.8%), 신체적·정신적 고통 없이(85.4%), 가족이나 지인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84.7%), 가족과 함께하는 것(76.8%)이다. 이 소망을 간단히 표현한 말인 ‘9988234’가 있다. 99세까지 팔팔(88)하게 살다, 2~3일만 앓고, 4일째 편안히 죽는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우리는 자신의 힘이 아니라 기계에 기대어 연명하고, 가족 곁이나 집이 아니라 병실에서 생을 마감한다. - '프롤로그' 중에서


책의 저자 양성관은 가정의학과 전문의로 2008년부터 20년 가까이 환자 20만 명을 진찰하고 10권의 책을 썼다. 쉽고 재미있게 풀어낸 저자의 이야기 속엔 아프고 소외된 이들을 보듬는 따듯한 시선과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울림이 있다.

이 책은 생의 마지막을 둘러싼 현실과 제도, 법과 의학을 이야기한다. 중환자실과 응급실, 호스피스와 요양원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선택들을 다룬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이별을 맞는다. 문제는 단 하나다.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마지막을 맞이할 것인가?”

총 여섯 편의 이야기를 담은 책은 병원에서 죽는 시대(1편), 살리는 마음, 남겨진 시간(2편), 법정에 선 죽음(3편), 그가 스위스로 간 까닭(4편), 마지막보다 긴 시간(5편), 용기와 죽음(6편) 등을 통해 생의 마지막, 즉 죽음을 둘러싼 사회의 현실과 제도, 그리고 법과 의학을 이야기한다. 우리 모두는 결국 한 가지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나는 어떤 마지막을 원하는가?"  

병원에서 죽는 시대

급성 감염병으로 인한 사망이 줄자 감염병에 유독 취약했던 영우아 사망률도 급격히 덜어졌다. 인류 역사상 감염병 예방과 치료만큼 인간의 수명을 극적으로 바꿔놓은 사건은 없었다. “위대한 사망률 전환”이었다. 단 100년 만에 기대수명은 2배 이상 늘어, 2023년 인류의 기대수명은 73.2세에 이르렀다. 우리는 오래 살게 되면 당연히 더 행복해질 거라고 믿었다.

삶이 길어진 만큼 생과 죽음 사이에서 늙고 병드는 시간도 함께 늘어났다. 의학의 발달은 비록 생명을 구했지만, 그 생명을 언제까지 이어갈 것인가 하는 새로운 숙제를 남겼다. 갑작스러운 죽음이 아닌, 서서히 찾아오는 노화와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시대, 연명延命 사회가 시작되었다. 그 결과 연명의료, 호스피스, 안락사, 간병과 같은 낯설지만 피할 수 없는 질문이 생겨 났다. 또한 새로운 시대는 죽음의 ‘시간’뿐 아니라, 죽음의 ‘장소’까지 바꿔놓았다.

잡에서 임종을 맞은 사람은 6멍 중 1명에 불과하고, 4명 중 3명이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여러 해 전의 일이지만 내 아버지도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한 후 그곳에서 타계했다. 이러한 흐름을 사회적·제도적 논의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계기가 있었다. 한 사건, 그리고 그에 대한 법원의 판결이었다. 1997년 12월 4일 술에 취해 화장실에 가다 넘어져 머리를 다친 남성을 부인이 퇴원시킨 사건에 대해 대법원 판결은 해당 의사를 살인방조죄로 처벌했던 ‘보라매병원 사건’은 ‘임종의 장소’에 관한 문제를 넘어, ‘연명의료’를 어디까지 허용하고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후 의사는 환자를 집으로 보내고 싶어도 법적 책임을 떠올렸고, 보호자는 집으로 모시고 싶어도 혹시 자신이 가족을 포기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했다. 그 사이에서 환자의 뜻은 자주 뒤로 밀려났다. 병원은 생명을 지키는 공간이었지만, 동시에 죽음을 내보내지 못하는 공간이 되어갔다. 과연 이런 현실이 진정한 사회복지일까?

살리는 마음, 남겨진 시간

병원에서 사망하기 전까지 내 아버지는 아무런 의식조차 없이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병상에 누워만 있었다. 이는 삶의 연장이 아니라 단지 죽음을 연기한 것에 가깝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제 자신이 바라는 방식으로 죽음을 맞기 어려워졌다. 그 배경에는 의료 제도의 변화, 법적 책임, 가족의 기대, 그리고 죽음을 실패로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췌장암이 발병하여 병원에서 수술받앗으나 3년 만에 재발한 69세의 이광수 씨는 나라 전체가 가난했던 1950년대에 출생해 작은 기업을 일군 인물이었다. 진통제를 맞으며 온갖 통증을 견뎌내던 그는 “선생님, 이번 설을… 집에서 보내고 싶습니다.”라고 요청했다.

말기 암 환자가 외박을 하는 건 쉽지 않다. 그는 진통제와 수액을 링거로 공급받고 있었는데, 퇴원하려면 이를 모두 중단해야 했다. 또한 말기 암 환자는 언제든지 갑자기 상태가 나빠질 수 있다. 생존 예후 점수로 봐도, 한 달도 어려웠다. 분명해 보이는 사실은 이번 설이 그의 마지막 명절이 될 듯했다. 그는 저자의 가운을 붙잡고 마지막 소원을 간곡하게 부탁했다.

이에 저자는 수액과 진통제를 조정하고 몇 가지 당부를 한 뒤 집에 다녀올 수 있도록 조치했다. 죽음을 앞둔 환자가 익숙한 집의 냄새를 맡고, 자식들의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런 것들은 병원에서 절대로 해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 의료가 마지막까지 해야 할 일이 반드시 더 많은 치료를 더 오래 이어가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남은 시간을 다시 삶의 자리로 돌려보내는 데 있다.
 
죽음을 막을 수 없다면, 적어도 죽음이 오기 전까지의 시간은 환자의 것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이광수 씨는 저자에게 치료의 의미를 다시 가르쳐 주었다. 치료는 병을 낫게 하고 생명을 연장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고통을 덜고 남은 시간을 환자의 삶으로 지켜주는 데까지 이어진다.

법정에 선 죽음

보라매 병원 사건이 발생한 지 11년 후, 또 한 번 한국에서 죽음의 방식을 바꾸는 사건이 벌어졌다. 2008년 2월 16일, 76세의 김 할머니가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서 기관지 내시경 검사 도중 예기치 않은 출혈로 인해 기도가 막히고 심정지가 왔다. 심폐소생술로 심장은 다시 작동했지만 이미 뇌는 심각한 손상을 입었기에 이후 식물인간 상태가 되고 말았다. 회복이 되지 않자 보호자인 딸과 사위는 연명치료 중단을 병원에 요청했다. 평소 김 할머니는 이런 치료를 원치 않는다고 평소 자주 말해왔던 것이다. 그렇지만 병원은 이를 동의하지 않았다. 결국 법정 공방에 들어갔다. 의사는 '생명권'을, 가족은 '자기결정권'을 내세웠다. 대법원 판결로 한 달 후인 6월 23일에 김 할머니의 인공호흡기는 제거되었다. 이런 사건은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다.  

의료 윤리에 반한다는 인식 때문에 의료 현장에선 여전히 무의미한 연명치료가 반복되고, 환자와 가족의 고통이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면서 의학계의 인식도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다. 병원마다 윤리위원회가 설치되었고, 연명의료 중단 기준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마련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연명의료는 단순한 의학적 처치를 넘어 윤리와 법, 가족의 선택, 환자의 가치관이 함께 고려되어야 할 문제로 다뤄지기 시작했고, 한국도 ‘세브란스 김 할머니 사건’을 계기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제도를 도입했다. 하지만 이는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불확실한 죽음, 확실한 순간

얼마 전에 읽은 한 소설에선 한 가정의 엄마이자 아내이며 말기 암 환자인 여주인공이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한국에선 불가능한 안락사安樂死를 위해 스위스 행 비행기를 타고 가서 현지 의료센터에서 제공하는 약을 먹고 가족들을 뒤로 한 채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내용이었다.

안락사는 그리스어에서 파생된 합성어로 '좋은 죽음'이란 뜻을 지녔다. 하지만 죽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기에 단지 ‘나쁜 죽음’과 ‘덜 나쁜 죽음’만 있을 뿐이다. 의료조력사망이나 적극적 안락사라는 선택의 의미는 죽음을 앞당긴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찾아올지 알 수 없고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불확실한 죽음’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확실한 순간’으로 바꾸는 데 있다. 마지막을 둘러싼 결정은 병실의 어느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간병과 돌봄의 시간 속에서 서서히 형성된다.

마지막보다 긴 시간

74세 박정순 할머니는 체력이 한계에 이르자, 돌보던 남편을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2018년까지 한국 언론에 노출된 기록에 따르면 살해 뒤 동반 사망 등을 포함한 사망자 수는 111명에 달했다. 간병 살인은 단순한 범죄가 아니다. 고립과 빈곤, 절망과 분노가 뒤엉켜, 백척간두의 절벽 끝에서 가족이 가족을 죽이는 비극이다. 긴 병은 효자를 만들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치매는 오래된 전구 같다. 처음에는 이따금 깜빡이다가, 나중에는 아주 드물게 켜진다. 희미해지던 세상이 끝내 사라지고 만다. 치매 약은 있지만 병을 고치지 못한다. 증상 완화나 악화 속도를 조금 늦출 뿐이다. 암과 달리 치매에는 ‘완치’라는 목표가 없다. 치매는 멈추지 않고,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다. 치매의 고통은 한 사람의 병으로 시작해 결국 가족 모두의 삶으로 번진다.

용기와 준비

어떤 대화나 의논도 없이 임종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 병원 침상에서 하늘 나라로 떠난 내 아버님도 그랬다. 당시 상장기업 대표이사를 맡고 있던 나는 회사 소유주인 회장의 양해를 얻어 임종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버님이 다니시던 성당의 신부님에게도 미리 이를 알려 드렸고, 급격히 악화된 아버지의 상태를 감안해 긴급하게 아내에게 연락해 대구 소재 병원으로 내려오도록 했다. 물론 형제들에게도 연락했다. 제일 먼저 도착한 아내와 작은딸은 나와 함께 임종 장면을 지켜볼 수 있었다.

임종 직전에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결국 대부분의 연명의료 결정은 가족이 내린다. 특히 심폐소생술이나 인공호흡기는 한번 시작하면 중단하기 어려워, 사전 결정이 필수다. 실제 연명의료 중단과 유보의 결정도 환자의 뜻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에서 가족 동의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훨씬 많다. 죽음은 혼자 준비할 수 없다. 자신의 뜻을 미리 생각하고 가족과 나누어야 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삶의 마지막을 생각해야 할까.


죽음의 선택은 단순한 통계가 아니다. 특히 마지막이 다가올수록 그 간극은 더 커진다. 부모는 나이와 병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조금씩 받아들이지만, 자식은 아직 부모의 죽음을 상상해 본 적이 없어 그 죽음을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 부모의 고통을 지켜보는 일보다, 부모를 포기했다는 죄책감이 더 견디기 어렵다. 그래서 자식은 머리로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으로는 끝내 놓지 못한다.

난 아버님의 연명치료가 사망으로 종료된 후 장례식을 끝낸 다음, 그동안 많은 고통과 시간을 함께 해준 가족들과 함께 회식을 가진 후에 아내와 두 딸 앞에서 나의 뜻을 분명하게 전했다. 나는 할아버지처럼 결코 연명치료를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는 사전에 아내와 미리 상의한 내용이었다.

마지막을 이야기할 시간

의사로서 저자는 많은 마지막을 보았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었다. 의사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죽음을 막는 일이 아니라, 남은 시간을 지켜주는 일이었다. 고통을 덜고 불안을 줄여, 삶의 마무리를 도왔다. 이제 질문이 바뀌어야한다. '나는 어떤 마지막을 원하는가?'


#인문 #교양철학 #사회복지 #연명치료 #연명치료는사양하겠습니다 #양성관 #히포크라테스 #동아시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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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09-15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명치료 동의 여부는 제일 먼저 환자 자신이 결정해야 될 것입니다.주변에서 겪어본 바에 의하면 자식들의 경우 연명치료 여부에 따라 부모님이 좀 더 사실 수 있다고 한다면 일반적으로 비용이 들더라도 연명치료에 동의하는 편이죠.특히 평소에 삶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부모님들이라면 더 더욱 연명치료 거부를 선택하기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급작스러운 병세 악화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기 어려울 것에 대비해서 부모님들이 미리 자녀와 의사에게 연명치료 거부에 대한 의견을 명확히 하실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한비자, 권력의 법칙 - 감정과 관계에 휘둘리지 않고 조직을 움직이는 법 ㅣ 서가명강 시리즈 46
이강재 지음 / 21세기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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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의 인생을 뒤흔든 전환점은 누군가 그가 쓴 책을 진나라에 전달하면서 시작되었다. 훗날 진시황이 되는 진나라 임금이 '고분'과 '오두' 편을 읽고는 “아아, 내가 이 사람을 만나 직접 교유할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구나!”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때 제나라의 직하학궁에서 한비와 동문수학했던 이사가 “이는 한비가 지은 글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이에 진나라는 오직 한비를 얻기 위해 급히 한나라를 공격했고, 한비를 사신으로 보낼 것을 한나라에 요구했다. - '들어가는 글' 중에서



책의 저자 이강재는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논어>, <맹자> 등 동양 고전의 지혜를 현대적으로 해석해 왔으며, 강좌 '논어와 현대사회'로 전국 최다 수강생을 기록하며 교육부 장관 표창을 받는 등 대중들과 소통하는 대표적 고전학자다.


총 4부로 구성된 책은 리더십은 인격이 아니라 설계다(1부), 감정을 지우고 시스템으로 장악하라(2부), 사람이라는 변수를 제거하는 기술(3부), 리더의 품격은 어디에서 오는가(4부) 등을 통해 한비자가 강조한 법의 기본 정신을 우리들에게 알려준다.


한비자는 법가法家의 사상을 집대성한 인물인데, 이전에 법가를 대표하는 사람은 단연코 상앙(기원전 390~ 기원전 338년)이다. 상앙은 '상군商君'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사마천은 <사기>에서 '상군열전'을 따로 둘 정도로 행적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상앙은 위나라 군주의 후궁이 낳은 아들로 성은 공손, 이름이 상鞅이다. 당시엔 위魏가 최강국이었고 혜왕惠王이 군주였는데, 재상 공숙좌의 천거에도 불구하고 나라 일에 중용하지 않았다. 워낙 상앙의 능력이 출중한 탓에 중용하지 않을 바엔 죽여서 후환을 미리 없애라는 공숙좌의 건의까지 있었고, 심지어 이를 상앙에게도 알렸다. 그럼에도 상앙은 중용하지 않으면 죽이지도 않을 거라고 판단하고 타국으로 도피하지 않았다.


스승인 공숙좌가 사망한 후 상앙은 진나라 효공이 인재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진나라로 입국해 효공을 섬기게 되었다. 그는 법률에 근거한 통치를 강조하며 법령을 제정했다. 법령엔 전국을 열 집, 다섯 집 단위로 조직해서 상호 감시, 적발토록하는 연좌제와 고발하는 사람에겐 포상을 하고 고발하지 않은 사람에겐 동일한 형벌을 주는 제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법 시행 초에 백성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상앙이 벌인 일화는 유명하다. 3척 길이의 나무를 성城의 남문 부근에 세워놓고 이를 북문으로 옮기면 거금인 열 금을 주겠다고 공고했다. 이를 아무도 믿지 않자 이후 오십 금으로 인상, 마침내 한 인물이 이를 옮기자 정말로 상금을 주었다. 이에 백성들은 나라가 내건 약속을 믿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상앙은 한비자에게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인격이 훌륭한 리더는 왜 실패하는가?


대부분의 인간들은 변덕이 죽 끓듯 한다. 리더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 본연의 속성을 결코 벗어날 수 없기에 그렇다. 이렇게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이나 기분에 휩싸여 변덕을 부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충분히 먼저 헤아릴 수 있을 법하다.


이렇듯 불완전한 리더의 판단에 기댄 정치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를 미리 깨달은 한비자는 사람 중심의 통치인 '인치人治'의 맹점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객관적인 시스템인 법에 의한 통치인 '법치法治'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판단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한비자의 통치술이다.  


한비자 '괴사詭事' 편에 따르면, 현실 세상은 늘 올바른 정치의 길과 거꾸로 돌아간다. ‘괴사’란 일이 상식과 완전히 어그러져 부조리하게 뒤틀린다는 의미로, 시스템이 무너진 조직에서는 법을 철저히 준수하고 윗사람의 명령에 복종하는 성실하고 충직한 사람이 도리어 세상으로부터 ‘고루하고 융통성 없다’는 비판을 받는다. 


반면 윗사람을 가볍게 여기고 법령을 교묘히 무시하며 사리사욕을 채우는 영악한 자들이 ‘유능하고 충직하다’며 칭송받는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형벌과 규율을 두려워하지 않고 멋대로 날뛰는 무법자들이 조직을 위한 열사로 추앙받고, 말만 번지르르할 뿐 현실에선 아무런 쓸모도 없는 자들이 포부 큰 대인으로 과대평가받는 것이 서글픈 현실이라 지적했다. 이는 마치 현재의 한국 정치판을 보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진짜는 없고 사이비만 득세를 하는 이런 풍토는 하루빨리 사라져야 할 것이다.


보상과 책임은 어떻게 권위를 만드는가


한비자의 통치 철학에서 부국강병을 이루고 군주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핵심 수단은 '술術'이며, 술의 가장 근본적인 형태가 바로 상과 벌을 적절하게 주는 '신상필벌信賞必罰'이다. 리더의 손아귀엔 반드시 이 두 가지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인 셈이다.


중형重刑을 내리는 궁극적인 목적은 단순히 사람에게 고통을 주려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이 저지른 간악한 죄를 초기에 엄중하게 처벌함으로써, 온 나라에 사악함이 퍼지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려는 고도의 통치술이다. 만약 형벌이 가볍다면 백성들은 책임을 묻는 군주의 권위는 물론 사회 질서를 얕보고 서슴없이 죄를 범하기 때문이다. 

또 무서운 형벌로 백성들의 범죄를 사전에 적극적으로 막지 않다가 죄를 범한 뒤에야 비로소 그들을 처벌하려 드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백성을 잡기 위해 교묘하게 함정을 파놓고 그들을 궁지로 내몰아버리는 짓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 바로 한비자의 주장이자 정당하다는 발언인 셈이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들은 그 법을 깨부수고 이상한 법을 만드는 데 혈안인 정치 집단을 목도하고 있다.

나라를 개혁하거나 회사를 개혁하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기존의 권력자가 개혁을 원하지 않으면 현실적인 벽에 막혀 좌절되고 만다. 이미 한비자가 위나라에 경험했듯이 개혁을 주장하는 법술지사와 반대편에 서 있는 중인은 절대 양립할 수 없는 관계였다. 즉 문고리 권력인 중인들이 법술지사를 군주에게 추천할리 만무하다. 중인의 권세는 날로 강해지고 군주의 비위를 맞추며 조직의 이익을 독점함으로써 법술지사는 오히려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무너지는 조직은 언제나 '예외'를 적용해왔다

많은 리더들은 안정성을 내세우며 유연성이란 유혹이나 함정에 빠진다. 이에 대해 한비자는 철퇴를 가한다. 즉 원칙에 위배되는 한 번의 예외例外라도 용인되는 순간, 나라의 통치 시스템은 붕괴의 길로 접어든다고 생각했다. 원칙보다 관계가 우선되고 감정이 기준보다 앞설 때 구성원들은 더 이상 원칙을 신뢰하지 않고 덩달아 리더의 권위도 힘을 잃기 때문이다.

타인의 평판만을 근거로 능력자라 판단하여 높은 자리에 올리는 예외를 허용하게 되면 조직은 흔들릴 수 있다. 타인이 칭찬한다고 상을 주고 비방한다고 벌을 주다 보면, 상을 좋아하고 벌을 싫어하는 인간의 본성상 사람들은 마땅히 해야 할 공적인 행동은 버려두고 사적인 뜻으로 패거리를 형성하는 데 몰두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땅에 가장 대표적인 집단이 바로 정치 패거리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듯 싶다. 아무튼 이렇게 관리를 등용하게 되면, 조직의 구성원들은 오직 서로 사귀고 인맥을 관리하는 일에만 힘을 쏟을 뿐 규칙을 따르려고 하지 않게 된다. 결국 망하는 일만 남게 될 뿐이다.

일류 리더는 사람이 아닌 시스템의 지혜를 이용한다

조직이 위기에 처하거나 성과가 부진할 때, 흔히 리더들은 스스로 팔을 걷어붙이고 실무 현장에 뛰어든다. 리더 본인이 가장 뛰어나고, 가장 많이 알고, 충분히 잘 통제할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훌륭한 리더십의 최종 기착지는 '내가 없어도 되는 조직'을 완성하는 데 있다.

한비자는 '팔경八經' 편을 통해 리더의 수준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하급의 군주는 자기 능력을 다하고, 중급의 군주는 다른 사람의 힘을 쓰고, 상급의 군주는 다른 사람의 지혜를 가져다 쓴다고 말했다. 즉 삼류 리더는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짜낸다고 이를 고갈시키는 반면, 일류 리더는 남이 가진 지혜를 최대한 끌어다 쓴다.  

한비자는 “한 사람의 힘으로는 많은 사람을 당하지 못하고 한 사람의 지혜로는 모든 것을 다 파악하지 못한다”고 경고했다. 아무리 뛰어난 천재 리더 한 명이라도 세상의 복잡한 모든 변수와 실무를 통제할 길은 없고,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의 유능함에 기대어 조직 전체를 끌고 가는 것은 온 나라 사람들의 지혜를 모아서 쓰는 것만 못하다는 것이다. 삼류 리더가 스스로 모든 것을 챙기느라 혼자서만 지쳐갈 때, 진정한 일류 리더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구성원 각자의 지혜가 발휘되도록 판을 깐다.

법과 사람은 공존할 수 있는가

지금 우리 사회는 법률의 가치를 놓고 끊임없이 논쟁 중에 있다. 심지어 법률가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마저 있다. 시대에 걸맞는 법률적 판단의 주체는 국민(시민)이어야 한다는 비교적 설득적인 주장도 있다. 한비자가 살던 전국시대는 군주의 권한이 절대적으로 집중되어 전쟁이 빈번해 백성의 삶은 매우 피폐했다. 민주적 원칙이라곤 없었다. 따라서 한비자의 이론을 현대인의 삶과 사법 시스템에 대입하긴 무리가 따른다. 그럼에도 법가 사상은 사회 질서 확립에 있어 즉각적인 효율과 결과를 보여준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많은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인문 #동양철학 #역사 #중국사 #고전 #한비자권력의법칙 #이강재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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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우지 않아도 괜찮아 물리학 ㅣ 물화생지 문해력 기르기
이승재.오영훈 지음, 오얼수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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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물리학도라면 반드시 거치게 되는 고전역학, 전자기학, 양자역학, 열역학에 담긴 통찰을 소개합니다. 여기에 더해 물리학의 궁극적인 목표 중 하나인 현대 우주론을 함께 다룹니다. 고전역학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사물의 운동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저는 고전역학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 소개할 모든 물리학 분야가 결국 고전역학을 토대로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 '책머리에' 중에서



책은 두 사람의 공저자에 의해 저술됐다. 이승재는 물리학 박사로 천체물리학을 연구하여 그 결과물을 국제 학술지 <천체물리학 저널>에 게재했으며, 현재 국내 게임사에서 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공저자 오영훈은 반도체 엔지니어로 지구환경과학과 물리학을 복수 전공했으며, 현재 대만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고 있다.


총 여섯 개 파트로 구성된 책은 고전역학1(파트1), 고전역학2(파트20, 전자기학(파트3), 양자역학(파트4), 열역학(파트5), 일반상대성이론과 현대 우주론(파트6) 등에 통해 뉴턴 역학, 다체多體의 운동, 사물의 회전, 전자기장, 난해한 양자역학, 열역학,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 현대 우주론 등을 설명한다. 


변하는 것은 왜 어려울까?


우리는 변화를 여려워하지만, 막상 바뀌고 나면 그 상태를 유지하는 일은 의외로 어렵지 않은 경우가 많다. 유지하고 싶은 고집. 즉 '관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당연한 상식인 '관성의 법칙'이다. 자동차가 움직이는 이유는 바퀴가 구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엔진, 연료, 변속기, 구동축, 기어 등 정교한 내부 장치 때문이다.


아무런 장치가 없는 평범한 야구공을 공중에 던지면 잠시 날아가다가 땅에 떨어진다. 특별한 장치가 없는 공은 던지는 행위를 통해 상태가 변해 날아가는 공으로 바뀌었다. 그렇다. 야구공은 우리의 손이 움직이던 방향으로 날아가기를 택했다. 바로 이것이 사물이 가진 관성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지금은 당연하게 여기는 관성이라는 개념이 널리 받아들여질 때까지는 험난한 여정이 있었다.


문과 출신인 내가 이 책을 이유가 바로 이런 숨은 스토리들에 지적 호기심이 많은 탓이다. 먼 옛날 서양인들의 세계관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람이 있다. 천동설天動說로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상에 속한 존재들은 정지 상태가 가장 안정적이므로 별도의 힘을 받지 않으면 운동을 멈추어야 함을 주장했다. 던져진 창이 날아가다가 땅에 떨어지고, 바람을 받지 못하면 돛단배는 나아갈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란 설명이었다. 약 2천년 동안 서양인들의 세계관에 이는 뿌리 깊게 박혀있었다.


그러나 16세기의 천문학자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지동설地動說로 인해 천동설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는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지구는 어째서 계속 움직일 수 있느냐에 대한 해답이 필요했다. 여기서 17세기의 물리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모든 물체는 원래의 움직임을 유지하려는 성질이 있다'고 한 단계 발전시켜 주장했다. 나아가 모든 물체의 운동이 이런 성질을 가졌다고 설명했다.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질문이 등장했다. 어째서 우리는 지구가 움직이고 있음을 왜 느낄 수 없는가?란 것이다. 천동설 신봉자들의 질문을 살펴보자. 그들은 이런 질문을 했다. 항해하는 배 위에 있으면 배가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지구 위에 있는 우리는 왜 지구가 움직이고 있음을 느끼지는 못하는가?


갈릴레이는 이는 오해에서 비롯된 주장이라고 말했다. 만약 큰 배의 선실 내부에 있어서 바깥 풍경을 볼 수 없다면 선실 안을 돌아다니는 모든 과정에서 배가 움직인다고 느낄 수 없고 구별하기가 힘들다고 답했다. 또 지구가 움직이고 있을지라도 그 위에서 우리가 움직임을 느낄 방법은 없다고 설명했다.



'갈릴레이의 배' 실험은 물체가 서로에 대해서 움직이더라도 그것은 상대적인 움직임일 뿐, 어느 하나가 멈춰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가 움직이는 게 아니란는 '상대성원리'를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 갈릴레이의 상대성원리는 관성의 법칙과도 매우 잘 맞아떨어진다. 즉 모든 물체는 각자의 입장에선 정지해 있는 것과 다름없으며 그저 서로 상대적인 움직임만 있을 뿐이다.     


용수철을 사랑하는 물리학자들


용수철龍鬚鐵, 이를 풀이하면 '용의 수염을 닮은 쇠'란 뜻이다. 상상 속의 동물인 용의 수염을 떠올리며 이런 용어를 개발한 선인先人의 상상력도 정말 신기하다. 이 발명품은 15세기 경 유럽에서 탄생했다고 알려진다. 시계 같은 정밀기계의 부품으로 들어가며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이젠 볼펜, 침대, 자동차, 건물의 내진설계 등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


용수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되려는 성질이다. 이를 '복원력'이라 부른다. 17세기 물리학자 로버트 훅은 실험을 통해 복원력은 용수철이 늘어나거나 줄어든 길이에 정비례한다는 사실을 발견, 이를 수식으로 나타냈다.



또 다른 특징은 바로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용수철에 매달린 물체의 속력 역시 물체가 현재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정확하게 결정된다. 또 매달린 물체의 운동에너지를 탄성 잠재력에너지로 변환했다가 다시 운동에너지로 변환될 수 있는 특징은 용수철로 하여금 단순히 힘을 발생시키는 장치를 넘어 에너지 저장의 역할을 가능하게 한다.   


원래 상태로 돌아가려는 용수철과 현재의 움직임을 끝까지 밀고 나가려는 물체의 전혀 다른 두 성질이 만나 이토록 역동적인 진동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역시, 서로 다른 방향성이 팽팽하게 공존하기에 동적이고 아름다운 풍경을 빚어내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회전의 미학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관성을 지니고 있음을 앞서 살펴보았다. 이러한 관성은 물체의 회전운동에서도 유사하게 작용한다. 외부의 돌릴 힘이 없는 상태라면 가만히 있는 물체는 계속 가만히 있고, 돌고 있는 물체는 그 회전을 유지하려 한다. 물리학에선 이를 관성모멘트라고 부르는데, 일반적으로 물체의 질량이 클수록 커지는 성질을 지녔다.

마치 체조 경기의 평행봉 처럼 보도블록 가장자리 턱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는 아이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넘어질 듯 말 듯 스릴을 즐기던 아이들은, 몸이 옆으로 기울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면 자연스럽게 양팔을 옆으로 쫙 펼친다. 우리 모두 대부분 어릴 적에 다 해본 장면이다. 


왜 그럴까? 팔을 몸통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뻗으면 몸 전체의 관성모멘트가 커지고, 그 결과 몸이 옆으로 갑작스럽게 돌아가며 넘어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은 물리학 이론을 모르더라도, 관성모멘트를 이용해 넘어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이런 마법같은 기술은 이미 본능적으로 아는 셈이다.
 

당연한 것은 없다

패러데이와 맥스웰을 비롯한 많은 물리학자 덕분에 인류는 전자기력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추게 되었고, 빛의 정체 또한 밝혀낼 수 있었다. 그런데, 전자기장을 만들어내는 주체인 전하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모든 물질이 원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원자는 또다시 양전하를 가진 원자핵과 음전하를 가진 전자로 이루어져 있음을 안다.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어떤 과정을 거쳐 탄생했을까?

고대 그리스인들은 호박을 마찰시키면 뭔가 신비로운 성질이 깃들어 깃털이 달라붙게 된다고 생각했다. 18세기에 들어 이 전기적 성질이 실을 통해 대전帶電된 물체에서 그렇지 않은 물체로 옮겨갈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 이때부터 물리학자들은 전기를 띠며 흐르는 무언가가 내부에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전하를 양전하와 음전하로 분류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전하電荷에 대한 이해가 현대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맥스웰 방정식(전기장과 자기장에 관한 연립방정식)이 완성되고 한참 뒤의 일이다. 1897년, 영국 물리학자 조지프 존 톰슨이 전자를 발견한 것이 전환점이 되었다. 19세기 중후반에 들어 사람들은 진공상태의 관 양쪽에 고전압을 걸어 한쪽을 음극, 반대쪽을 양극으로 만들면 음극 쪽에서 음전하를 띤 무언가가 튀어나온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를 음극선이라 불렀다. 톰슨은 음극선의 경로에 전기장과 자기장을 걸어가며 성질을 분석, 그 정체가 질량을 가진 입자란 결론을 내렸다. 이후 어니스트 리더퍼드의 살험을 통해 원자핵의 존재가 밝혀지고, 원자가 양전하를 가진 원자핵과 음전하를 가진 전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오늘날의 원자모형이 탄생했다.   

물리학은 우리가 경험하는 전자기 현상들을 어떻게 전자를 통해 설명할까? 스마트폰에 자꾸 먼지가 달라붙어 곤란했던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이는 반드시 먼지가 대전되어 있기 때문은 아니다. 전기적으로 중성인 먼지도 스마트폰에 달라붙을 수 있다. 중성인 물체가 어떻게 정전기력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 나일론 천으로 유리 재질의 스마트폰 화면을 닦게 되면 마찰에 의해 스마트폰 표면이 대전되고, 그로 인해 전기장이 형성된다. 그리고 이 전기장은 근처 먼지 내부의 전하 분포를 변화시켜 부분적인 대전을 일으키게 된다. 구체적인 과정은 물질의 특성에 따라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달릴 수 있다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현대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데 당시 물리학자들에게는 너무나도 낯선 것이었다. 뉴턴 역학은 일상의 물리법칙들을 설명해왔고, 물리학자들은 체계가 완성되었다고 믿었지만, 아인슈타인이 그 체계를 다시 세운 것이다. 그러나 한계가 있음에도, 물리학자들은 뉴턴 역학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속도가 빛에 비해 충분히 느린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여전히 훌륭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뉴턴 역학을 폐기한 것이 아니라 더 넓은 틀로 확장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물리학이 발전하는 주요한 방식이다. 기존 이론이 설명하는 세계를 포함하면서, 그 너머까지 밝힐 수 있는 깊은 이론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특수상대성이론은 물리학의 흐름을 바꾼 거대한 전환점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20세기 물리학이 가져온 혁명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같은 시기, 물리학의 다른 영역에서 진정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 원자론의 마지막 퍼즐

양자역학이 탄생하게 된 것은 결국 원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다. 보어의 원자모형은 수소 원자의 스펙트럼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모형은 수소가 아닌 다른 원소들의 분광 스펙트럼을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또 당시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던 여러 가정에 의존하고 있다는 약점도 존재했다. 해결할 수 없는 아래의 문제들이 있었다.

첫째는 원소의 주기성이다. 1869년 주기율표라고 불리는 표를 러시아 화학자 멘델레예프가 제작했다. 모든 원소는 원자 번호와 화학적 성질에 따라 주기적으로 반복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규칙은 그의 경험에 의해 발견되었지만, 왜 그런 주기성이 나타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둘째는 원자들이 자기장 속에 있을 때 벌어지는 현상인 제이만효과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1896년 네델란드 물리학자 피터 제이만은 자기장이 원자의 스펙트럼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를 하던 중 자기장이 스펙트럼 선을 두껍게 만드는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했다. 이는 하나의 선이 여러 개로 갈라지며 나타나는 것이었다.  


어쩌면 완전한 물리학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지평선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단순히 결핍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리학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가장 중요한 것은 완벽한 정답이 아니라,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태도였으니까. 혼란과 충돌은 실패의 흔적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갔다는 증거이다. 완전하지 않기에 계속될 수 있다.

물리학은 세상 만물의 이치를 탐구한다

이밖에도 책은 열역학과 일반상대성이론 및 현대 우주론에 관한 설명을 이어간다. 나는 학창 시절에 과학, 물리학 같은 학과목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 신문기사나 독서 중에 알기 못하는 용어나 이론이 나오면 인터넷을 활용해 검색해서 최소한의 지식을 습득해 왔다. 그래서 부족한 과학 지식을 채우고자 이 도서를 읽게 되었고 정말 유익한 공부 시간이었다. 나처럼 문과 출신이라 과학 분야에 약한 모든 분들에게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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