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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의 철학 ㅣ 틈새
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마이너스(Miners) 옮김 / 해밀누리 / 2025년 9월
평점 :
이 책은 오늘날 독자들에게도 여전히 살아 있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걷고,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우리의 일상은 자연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소로는 숲길을 거닐며 이 질문들에 답하려 했고, 그의 답은 2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신선하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

(사진, 책표지)
책의 저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미국 메사추세츠주 콩코드 출신의 사상가, 수필가, 시인이자 자연주의자였다. 그의 대표작 <월든>에서 보여주었듯이, 그는 문명사회의 소란과 물질적 욕망을 벗어나 자연과 더불어 사는 단순하고 자율적인 삶을 실험했다. 단순히 자연을 관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속에서 인간 존재의 본질과 사회제도의 모순을 통찰했다. 이 책 <걷기의 철학>은 그런 사유의 결정체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책은 소로의 여러 산문을 묶은 모음집으로 그의 정신세계가 가장 진하게 담겨 있는 책 중 하나이다. 메사추세츠 자연사, 와추세트로의 산책, 여관 주인, 겨울 산책, 산림 수목의 차이, 걷기, 가을빛, 야생의 사과, 밤과 달빛 등 아홉편의 에세이가 수록되어 있다.
'메사추세츠 자연사'에서 그는 주변 자연의 세밀한 관찰을 통해 땅과 기후, 생명체들이 어우러지는 질서를 묘사하며, 인간이 자연과 맺는 근본적인 관계를 보여주었다. '와추세트로의 산책'에선 산을 오르며 풍경과 인간 정신이 어떻게 맞닿을 수 있는지를 서정적으로 풀어냈다. '겨울 산책'에선 계절의 변화 속에서 삶과 죽음, 고요와 활력을 함께 사유했다.
또 '산림 수목의 차이'에선 식물학적 관찰을 넘어 나무와 숲이 지닌 상징적 의미를 탐색했으며, '걷기'에선 걷기를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자유와 영혼의 회복을 위한 가장 근본적인 행위로 격상시켰다. 이어서 '가을빛', '야생의 사과', '밤과 달빛'에서는 계절의 아름다움, 자연 속에서 자라난 사과의 생명력, 달빛이 비추는 밤의 사유를 통해 인간이 자연과 맺는 내밀한 대화를 보여준다.
특히 초월주의 운동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으며, 단순한 생활과 자연 속 사색을 통해 삶의 본질을 찾으려 했던 소로에게 걷기란 도시와 사회의 제약을 벗어나, 존재의 본질을 회복하는 사색과 철학의 길이었다. 책 속 '걷기' 편은 그의 사상을 대표하는 글인 셈이다.
젊은 시절엔 살과의 전쟁을 치른다고 눈뜨면 바로 아파트 인근 올림픽공원으로 나가 뛰었다. 아내와의 약속 때문에 시작했으나 날씬한 몸매와 맑은 정신을 얻을 수 있었기에 아침 달리기는 지속되었다. 점점 달리는 거리가 길어지면서 학창시절 개교기념일 단축 마라톤 행사에 강제 동원되어 개거품을 토하며 뛰던 거리 정도는 이젠 껌깞 정도가 되었다.
자신감이 잔뜩 생긴 탓에 마라톤 도전에 나섰다.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에 마치 홀린 사람처럼 여러 차례 참가했다. 전문가의 지도없이 단순 반복적인 나홀로 훈련에만 의존했던 내 몸에 무리가 왔다. 무릎, 허리, 발목과 발바닥 등에 몰려온 통증은 당분간 뛸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하고 말았다. 이후 언젠가부터는 아침 산책을 여유롭게 즐기며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내가 지금 '소로의 걷기 철학'을 읽는 것 또한 아침 산책의 연장선이다.

(사진, 옮긴이의 말)
메사추세츠 자연사
진정한 과학자는 더 섬세한 감각으로 자연을 안다. 그는 다른 이들보다 더 잘 냄새 맡고, 맛보고, 보고, 듣고, 느낀다. 그의 경험은 더 깊고 정교하다. 우리는 추론이나 연역, 또는 철학에 대한 수학의 적용으로 배우지 않는다. 직접적인 교류와 공감으로 배운다.
과학은 윤리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계략이나 기술로 진리에 이를 수 없다. 베이컨주의조차 다른 방법론과 마찬가지로 불완전하다. 기계와 기술의 모든 도움에도 불구하고, 가장 과학적인 사람은 여전히 가장 건강하고 친절한 사람일 것이며, 인디언이 지녔던 더 완전한 지혜를 가질 것이다.

(사진, 메사추세츠 자연사)
와추세트는 참으로 매사추세츠의 전망대였다. 지도처럼 길이와 너비가 한눈에 들어왔다. 동쪽과 남쪽으로는 바다의 평평한 지평선이 열렸고, 북쪽으로는 뉴햄프셔의 익숙한 언덕들이 보였다. 북서쪽과 서쪽으로는 전날 저녁 처음 모습을 드러낸 후삭 산맥과 그린 산맥이 안개 낀 듯 푸른 윤곽을 드러냈다. 그것들은 마치 아침 바람에 흩어질 구름 둑처럼 실체 없는 듯 보였다. (67쪽)
겨울 산책
겨울에 따뜻함은 곧 모든 미덕의 상징이다. 늪과 웅덩이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는 우리 주전자에서 오르는 김만큼이나 소중하고 가정적이다. 겨울날의 햇살과 들쥐들이 담벼락 옆을 오가는 풍경, 숲길에서 지저귀는 박새의 노래와 비교할 수 있는 불은 어디에도 없다. 따뜻함은 여름처럼 땅에서 복사되는 것이 아니라, 태양에서 직접 온다. 눈 덮인 골짜기를 걷다가 등 뒤에서 그 광선을 느낄 때, 우리는 특별한 은총에 감사하며, 그 외딴 곳까지 우리를 따라온 태양을 축복한다.
이 지하의 불은 모든 이의 가슴에 제단을 두고 있다. 가장 추운 날, 황량한 언덕 위를 지나는 여행자도 어떤 난로나 아궁이보다 더 따뜻한 불을 외투 자락 안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건강한 사람은 계절의 보완물이며, 겨울에는 여름이 그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다. 그의 가슴속에는 남쪽이 있다. 모든 새와 곤충은 그곳으로 이주했고, 따뜻한 샘 주위에는 울새와 종달새가 모여든다.

(사진, 겨울 산책)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는 19세기 중엽 미국에서 활동한 수필가로, 자연을 삶의 스승으로 삼았던 철학자이기도 하다. 영국의 산업혁명이 한창인 시대, 기계 문명이 인간의 생활을 급격히 바꾸고 물질적 번영이 진보로 칭송받던 그런 시기에 살았다. 그럼에도 소로는 이런 흐름에 거리를 두고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풍요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묻고 또 물었던 것이다. 사회가 강요하는 길을 거부하고 자연과의 교감을 삶의 중심에 두었다. 그래서 숲 속에 오두막집을 짓고 지냈다.
이 책의 여러 편 에세이들 중에서 소로의 정신세계가 가장 잘 드러난 글은 바로 '걷기' 편이다. 이 편에 담겨 있는 글 중에서 인상적인 글귀들을 소개하려 한다. 그의 걷기는 인간 정신의 자유와 자연과의 합일合一임을 느낄 수 있다. 사회와 제도의 여러 제약에서 벗어나 존재의 본질을 찾고 회복하려는 구도자의 삶 그 자체인 것이다.
걷기
나는 단 하루라도 방 안에 머물면 곧바로 녹슬어버리는 사람이었다. 때때로 오후 4시, 이미 하루를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 되어 몰래 산책에 나설 때가 있었다. 땅거미가 햇살과 뒤섞이는 그 시간에 길을 나서면, 마치 무언가 속죄해야 할 죄를 저지른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142쪽)
소로가 말하는 걷기는 병자病者가 정해진 시간에 마치 약을 삼키듯, 또는 아령을 흔들어대는 운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걷는 그 자체로 하루의 과업이자 모험인 셈이다. 더욱이 걷기는 낙타처럼 해야 한다고 말한다. 낙타는 걸으면서 동시에 돠새김질 하는 유일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한 여행자가 워즈워스의 하녀에게 주인의 서재를 보여 달라고 하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여기가 도서관이고, 주인의 서재는 바깥에 있답니다"
그렇다. 바깥은 사색과 사유의 현장이자 지혜와 지식을 쌓는 공간인 셈이다. 단순한 운동의 관점이라면 굳이 바깥에 나가 걷지 않아도 된다. 트레드 밀 위에 올라 자신의 등급에 맞는 속도로 걸으면 될 일이다. 나 또한 집안에서 트레드 밀을 이용해서 땀을 잔뜩 흘리는 걷기를 하기도 했다. 바깥에 나가 걸을 만큼 시간이 충분하지 않거나 비가 오는 날씨에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걷기는 자연의 내음과 숨소리가 전혀 없다. 그래서 나도 자연을 벗 삼아 걷으며 힐링받는 걸 좋아했다. 물론 그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햇볕과 바람 속에서 야외에 오래 머물면, 의심할 여지 없이 성격은 다소 거칠어진다. 얼굴과 손에 그러하듯, 인간 본성의 섬세한 부분 위에도 더 두꺼운 각질이 자라나며, 힘든 육체노동이 손의 미묘한 감각을 앗아가는 것과 같다. 반면 집 안에만 머무른다고 해서 피부가 얇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부드러움과 매끄러움은 얻을 수 있으며, 특정한 인상에 대한 감수성은 더욱 예민해진다. 아마 우리가 햇볕을 덜 쬐고 바람을 덜 맞았다면, 지적·도덕적 성장에 필요한 어떤 자극에도 더 민감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두꺼운 피부와 얇은 피부의 비율을 올바르게 맞추는 문제는 언제나 미묘하다. 내 생각에는 그것은 머리에서 떨어지는 비듬처럼 곧 흩어져 사라지는 문제에 불과하다. 자연의 치유책은 낮과 밤, 여름과 겨울, 생각과 경험의 비율 속에서 발견된다. 우리의 사유 속에는 그만큼 더 많은 공기와 햇살이 깃들게 될 것이다. (145쪽)
소로의 글은 계속 이어진다. '우리가 걷는다는 것은 곧 들판과 숲으로 발걸음을 옮긴다는 뜻'이다. 어떤 철학 학파들은 숲으로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숲을 자신들에게로 불러들여야 했다. 그들은 플라타너스 숲과 산책로를 조성하고, 공기에 개방된 주랑 현관에서 햇볕을 받으며 걸었다. 억지로 숲을 향해 걷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몸으로는 숲속 1마일을 걸어 들어갔는데, 정신은 그곳에 이르지 못했을 때, 소로는 불안해진다고 말한다.
오후 산책은 아침의 모든 일과와 사회적 의무를 잊는 시간이어야 한다. 그러나 때때로 마을의 기운이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을 때가 있다. 어떤 일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돌아, 몸은 숲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도달하지 못한다. 내 정신은 흐트러져 있다. 산책은 나의 정신을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 숲에 있으면서 숲 밖의 일에 사로잡혀 있다면, 내가 숲에 있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소위 선한 일들조차 이토록 나를 얽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나는 오히려 전율을 느낀다. _’걷기’ 중에서 (146쪽)

(사진, 성지 순례자)
무엇을 위해 걷는가?
책 속에는 자연을 향한 관찰자의 섬세한 눈길과 인간 사회를 비판하는 철학자의 날카로운 통찰이 공존하고 있다. '무엇을 위해 걷는가?'라고 우리들에게 주어진 화두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수필가이자 철학자인 소로도 숲길을 걸으며 이 질문들에 답하려 했다. 소로의 발걸음을 따라 숲속으로 들어가 본다면 인간 사회를 성찰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모두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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