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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봉틀과 금붕어
나가이 미미 지음, 이정민 옮김 / 활자공업소 / 2025년 9월
평점 :
가케이 할머니는 여느 때처럼 요양 보호사인 밋짱의 도움으로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돌아가는 길에 밋짱으로부터 "이제껏 살아온 날들을 돌아봤을 때 행복한 인생이었다고 생각하세요?" 하는 질문을 받고 그때부터 자신의 인생이 어땠는지 돌아본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

(사진, 책표지)
이 소설의 작가 나가이 미미(1965년생)는 56세라는 늦은 나이에 문단에 데뷔해 2021년 제45회 스바루문학상을 수상한 독특한 이력으로 인해 일본에서도 화제가 된 바 있다. 작가의 첫 작품인 이 소설은 한 치매 환자의 독자적 관점으로 삶을 회고하는 유머스런 문장들이 일본 독자들의 큰 주목을 받았다고 알려진다. 또 요양 보호사로 일하며 거동이 불편하거나 치매에 걸린 노인들을 현장에서 직접 돌보는 경험을 한 적도 있었기에 소설 속 가케이 할머니는 이런 경험 속에서 탄생한 캐릭터인 셈이다.
소설 속 주인공인 가케이 할머니는 치매를 앓고 있다. 치매 환자들의 공통적인 안타까움은 지난 일들을 완전히 망각하거나 희미한 기억의 끝자락을 잡고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현실과 과거를 오락가락한다는 데 있다. 거의 매일 내 스마트폰을 울려대는 실종자 신상공개 대부분이 바로 이런 부류다.
치매 환자가 집을 나가면 과거 속에서 헤메다가 현실의 통로로 들어오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과거 치매를 앓았던 나의 큰아버지도 사촌형 병원집을 나가 결국 귀가하지 못한 채 객사하고 말았다. 온 가족과 고향 친척들이 며칠 동안 찾아나섰지만 행방이 묘연했는데, 남의 집 건물 옥상에 신발을 벗은 채 편히 잠자는 모습을 누군가 발견하고 신고함에 따라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 이후 사촌형은 그 충격에서 벗어나려 애쓰다가 병원과 건물을 통째로 매각,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이렇듯 치매는 환자 본인뿐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고통을 남긴다. 물론 치매에 걸렸다고 머릿속이 늘 안개로 가득한 것은 아니므로 오해는 금물이다.
가케이 할머니는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했던 아픈 과거의 그림자가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선물용 상자를 만드는 직공이었다. 상자는 '만주'나 화과자 등을 담는 용도로 사용됐는데, 아버지는 직공 중에서도 가장 하급下級 취급을 받았기에 밖에서 당한 설움을 집에 오면 아내에게 폭행하는 것으로 풀었다. 통상 심리적으로 약자는 자신보다 약한 상대를 골라 못되게 군다.
맞고 사는 걸 감수하면서 가정을 지켰던 그녀의 어머니는 가케이를 낳고선 바로 사망했다. 이후 아버지는 매춘부 출신인 계모를 들였다. 이 계모는 가케이 남매를 눈엣가시처럼 여겼으며 특히 어린 가케이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장작으로 두들겨 팼다. 잠지리에 들면 내일은 제발 눈뜨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을 정도였다. 심지어 계모는 아버지가 없는 틈을 타 젊은 놈이랑 바람을 피며 가케이를 오빠한테 떠넘겼다. 오빠는 어린 동생 가케이를 덩치가 산만한 큰 개(다이大짱)의 젖을 물렸던 것이다.
"나는 다이짱의 젖을 먹고 자랐어. 철이 들고 나서도 한동안은 다이짱의 젖을 빨았지. 그냥 기억이 나. 밋짱, 이건 비밀이니까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내가 다이짱을 뭐라고 불렀는지 알아? 엄마. 나는 다이짱을 엄마라고 불렀어"(33쪽)

(사진, 다이짱)
이런 계모이니 가케이를 집에서 식모처럼 부려 먹었고 당연히 학교엔 보내질 않았다. 그럼에도 가케이는 신문 읽는 모습이 하도 근사해서 혼자서 신문 읽는 연습을 했다. 계모의 눈을 피해 헌 신문 위에 열심히 글씨 쓰는 연습을 했던 것이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했다. 가케이의 절실함이 돋보이는 무척 인상적인 대목이다.
또 오빠가 데려온 애 딸린 남자와 강제로 결혼했지만 아들 겐이치로가 태어난 직후 마치 수증기처럼 증발해 버렸다. 남편은 전처와의 사이에 아들 미노루가 있었는데, 가케이와 겨우 여덟 살 차이뿐인지라 결코 엄마라고 부르지 않았다. 왜 이런 남편과 결혼까지 하게 됐을까?
남편은 오빠의 파친코 가게 단골손님이었다. 전처가 아들을 남겨둔 채 도망가자 자포자기 상태에서 파친코를 자주 즐겼던 관공서 근무자였다. 가게를 찾는 손님들을 속이는 악덕업소라서 오빠는 떼돈을 벌었지만 반면에 순진한 남편 같은 사람들은 빈털털이가 되고 말았다. 더구나 갚지 못한 빚까지 남아서 동생 가케이를 이 호구에게 떠밀듯 맡겼던 것이다. 소설에선 이를 '역담보'라고 말한다.

(사진, 밤일의 결과)
남편이 증발하고 난 뒤 깨달은 것이 있었기에 가케이는 일치감치 남편을 포기했다. 남편이 다니던 관공서를 찾아갔을 때 직장상사로부터 전해들은 '그토록 예쁘고 야무진 전처'라는 말에 스스로의 자격지심이 발동했을지도 모른다. 곧바로 포기하고 재봉틀을 돌렸다. 하루도 빠짐없이 재봉틀 페달을 밟았다. 생계 때문이다. 아니, 빈둥거리며 놀고 있는 남편이 버리고 간 미노루 때문에 부아가 치밀어 더욱 그러했다.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려보자
소설의 주인공인 가케이 할머니의 삶을 돌이켜보면 나쁜 일만 있었다고 비관적으로 평가할 수 없을 것 같다. 좋았던 일도 나빴던 일도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이또한 지나가리라'라는 속담에 담긴 의미처럼,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희망이라는 밧줄을 놓치지 말자. 내 삶에서 행복했던 기억, 사랑받았던 기억을 다시 되새기며 힘을 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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