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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진화
에밀 루카 지음, 마이너스 옮김 / 해밀누리 / 2025년 9월
평점 :
내 책은 사랑이 성性과 완전히 무관함을 입증하고자 노력한다. 사랑처럼 강력한 감정이 역사 시대, 그것도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생겨났다는 나의 주장은 매우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진화에 대한 외적인 믿음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인간 본성의 불변성을 당연하게 여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 '서문' 중에서

(사진, 책표지)
책의 저자 에밀 루카(1877~1941년)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사상가이자, 철학자, 문학비평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유럽이 급변과 혼란을 겪던 20세기 초반에 인간 내면의 감정과 문명적 발전의 관계에 깊은 관심을 두었다. 사랑이라는 보편적이면서도 복잡한 주제를 선택해 이를 심리학, 철학, 문명사 등의 교차점에서 탐구하고자 했다. 대표작인 <사랑의 진화>는 학문적 이론서가 아니라 사랑이란 감정이 어떻게 인류의 정신적 삶을 형성했는지를 조망한다.
전체 3부로 구성된 책은 성적 본능, 사랑, 성性과 사랑의 결합이란 주제를 놓고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성적 본능에선 플라톤, 시인들, 그리고 기존의 저작물을 활용했으나 이어지는 사랑, 성性과 사랑의 결합에 관한 주제는 거의 전적으로 독창적인 연구에 기반을 두었다.
성적 본능
중세中世의 여명기로 서서히 떠오르던 세대에게 성적 본능의 충족은 다른 어떤 욕구를 채우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쉬웠다. 별다른 계획이나 준비 없이 순간적 충동에 따라 그 욕망을 풀고 어렵사리 얻어야 하는 생활필수품을 확보하는 데 힘을 쏟을 수 있었다.
원시와 선사 시대의 인간은 철저히 현재에만 살았다. 내일이나 모레에 닥칠지 모르는 굶주림은 아랑곳하지 않고 먹을 게 있으면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그들의 생각은 짧고 얕았다. 임신과 출산은 주술의 결과라고 여겼다. 오늘날까지도 호주의 일부 원주민은 생식과 출산의 관계를 알지 못한다. 원시인들에게 기억되는 것은 단지 "여자가 아이를 낳는다"는 사실 뿐이었다. 또 모든 아이에게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만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역사 시대의 여명기까지 성관계는 무질서하고 되는 대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모든 여성은 같은 부족 안에서 모든 남성에게 속했다. 물론 이같은 가정假定이 모든 부족에 동일하게 적용되었다고는 단정할 수 없다. 후대의 민속학자들은 오늘날 일부 부족 사회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를 부정했다. 그러나 역사가 해로도토스는 역사 시대에도 에티오피아나 카스피해 연안처럼 서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무분별한 성관계가 존재했다고 기록한다. 아무튼 성관계가 집단혼, 아내 교환이나 대여, 또는 유사한 형태로 이루졌다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다.
최초의 인류 가족은 모성애를 가진 어머니를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그녀가 자연스러운 우두머리로 받아들여졌다. 이 구조는 생식과 출산의 인과관계가 밝혀진 이후에도 오래 지속되었다. 지중해 연안의 나라들, 특히 크레타와 이집트에선 여성적 요소가 지배적이었다. 이는 셈족이나 아리아족 같은 동방 민족들의 자연 종교에도 반영되었으며, 그리스 신화 속에서도 무수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이후 수많은 타협과 제한을 거쳐, 무질서한 성관계는 마침내 일부일처제로 귀결되었다. 그리스 사회가 일부일처제를 채택한 이유는 에로스적 열정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필요 때문이었다. 가장 중요한 동기는 합법적인 자손을 확보해야 한다는 요구였다. 재산을 가진 이는 당연히 합법적으로 상속할 아들을 원했다. 단순히 재산의 문제가 아니라 죽은 이는 제사 음식을 원했고, 이는 오직 합법적인 남자 후손만이 할 수 있었다.
고대엔 남성이 여성에게 품는 정신적 사랑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플라톤은 "비천하고 타락한 에로스"와 "신적인 에로스"를 대조했다. 고전기古典期의 견해에 따르면, 아름다운 영혼은 오직 남자의 몸에서만 벌견될 수 있었다. 여성은 낮고 동물적인 영역에 속했다. 그녀는 감각적 쾌락과 종족 번식을 위해 운명 지어진 존재였다.

(사진, 플라토닉 사랑)
플라토닉 사랑은 철학적으로는 이데아로 개념화된다. 그러나 이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헬레니즘적 정신에 따라 객관적이고 영원한 원형으로 이해된다. 플라토닉 사랑의 완성은 결국 지식이었다. 플라토닉 사랑은 본질적으로 비인격적이다. 그것은 특정 인간에 대한 정신적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적 아름다움 숭배의 독특한 표현이었다.
사랑
금욕주의적 여성들의 사례를 살펴보면, 우리는 진정한 영성이 아니라 종종 병적病的인 상태를 본다. 이 시기의 여성 신비주의자들은 불순한 정신에 의해 움직였으며, 관능적 열정을 종교적 언어로 포장했다. 그들에게 종교적 상징과 형상은 성적 욕망의 배경이자 배출구였다.
이러한 현상은 12~13세기, 위대한 신비주의의 시대에 특히 두드러졌다. 수녀언 전체가 히스테리적 열병에 휩사였고, 여성들은 경련으로 몸부림치며 서로를 채찍질하고 주야로 찬송가를 부르며 환각을 보았다. 신의 사랑과 악마의 유혹이 뒤섞인 광경이었다.
여성들은 형이상학적 사랑을 모방했으나 왜곡했다. 정신적, 신격화적 사랑 대신, 성적 충동을 천상적 언어로 치장했을 뿐이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자주 진정한 신비주의자로 오해받았으나, 실상은 달랐다. 심지어 쇼펜하우어조차 마담 귀용을 "위대하고 아름다운 영혼"이라 칭했지만, 본질은 감각적 열정이었다.
결론적으로, 남성의 신격화된 사랑은 여성의 감정생활에서 평행 현상을 찾을 수 없다. 여성의 감정은 형이상학적 사랑으로 승화되지 못했고, 결국 자연적 충동과 병적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다음으로 성적 신비주의자를 살펴보자.
성적 신비주의는 그 자체로 모순이다. 진정한 신비주의는 성性과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억압된 성이 비밀리에 번성하며 영혼 전체를 점유할 때, 그 결과가 종교적 언어로 해석되곤 한다.성적으로 곶된 주체가 자신의 황홀경에 종교적 의미를 덧씌우는 것이다. 이러한 황홀경의 대다수가 성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소위 '신비주의'라 불리는 것이 상당 부분 성적 충동의 일탈 또는 잘못된 해석에 불과하다고 저자는 단언한다.

(사진, 형이상학적 에로티시즘)
저자가 강조한 “형이상학적 에로티시즘”은 주목할 만한 개념이었다. 이는 사랑을 단순한 욕망이나 본능으로 환원하지 않고, 인간이 영혼의 깊이에서 경험하는 초월적 현상으로 격상시킨 사유였다. 이 개념은 발표 당시부터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지금까지도 철학적·문명사적 의미를 탐구하는 데 중요한 문제의식을 던졌다. 우리들은 이를 통해 사랑이 단순한 개인적 감각을 넘어, 인류 문명의 발전과 긴밀히 얽혀 있는 거대한 사상적 주제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성性과 사랑의 결합
사랑은 인간의 고유한 영역이며, 동시에 인간 정신의 힘이자 본질이다. 가장 심오한 감정인 사랑 속에서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의 연결이 예감된다. 따라서 기독교 신비 중의 신비-신이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연인으로서만 세상에 다가가시며, 사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시는 것-은 오직 사랑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우리는 숭고한 것을 사랑 외의 다른 기능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위대한 에로티시스트란 감정을 본질로 삼는 내적 존재이며, 그 감정을 극한까지 끌어올리고자 하지만 결국 인간 감정의 불완전함에 좌절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기실현을 향한 의지에 의해 이끌리지만, 그 최종적 비극은 인간의 한계라는 수레바퀴에 부서지는 것이다.
작가 에밀 루카는 사랑이 본질적으로 비극과 분리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자 했다. 모든 깊은 감정은 스스로 억제할 수 있는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그 한계를 넘어 무한을 향해 나아가려는 갈망을 품는다. 인간의 감정 생활은 무한한 진화를 지향한다.

(사진)
그러나 가장 낮고 동물적인 단계에서는 단순한 욕구만이 존재하며, 이는 쉽게 충족된다. 굶주림, 갈증, 성적 욕망은 큰 노력 없이 해결되며, 따라서 이 첫 단계에는 비극이 없다. 그러나 영혼을 압도하는 더 깊은 감정은 쉽게 달랠 수 없다.
위대한 사상가의 지식에 대한 갈망, 신비주의자의 종교적 열망, 예술가의 미적의지, 그리고 열정적인 연인의 사랑과 갈망은 언제나 현실의 한계를 넘어 무한을 지향한다. 이 땅의 세계는 결국 “비천한” 행위와 감정, 그리고 “비천한” 인 간들의 영역일 뿐이다. 이러한 한계를 견디지 못하는 연인은,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 - 형이상학적 사랑의 세계 -를 창조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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