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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민수 경제사 특강 2 - 무박 3일 밤새워 읽는 ㅣ 최고민수 경제사 특강 2
최고민수(박민수) 지음 / 경이로움 / 2025년 8월
평점 :
'최고민수 경제사 특강'은 총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적 순서대로 정리를 하다 보니 중상주의 이전과 이후로 구분해 봤다. 제1권은 고대 문명 탄생부터 출발해 고대 그리스, 로마 그리고 중세시대를 중심으로 풀어낸다. 제2권은 중상주의로부터 대두된 경제와 산업 발전을 중심으로 다룬다. 주요 경제학자들의 경제이론과 경제학 원론에서 언급되는 주요 경제 이슈를 역사적 진실과 함께 엮어 설명한다. - '프롤로그' 중에서

(사진, 책표지)
책의 저자 최고민수(박민수)는 유튜브 채널 '침착맨'에 출연해 민수 밈을 일으키며 MZ세대에게 최고민수란 애칭으로 친근하게 다가섰다. '오히려 좋아 고맙다'란 밈의 창시자로 이후 '빠니보틀', '캡틴따거', '조나단' 등 여러 유튜브에 출연해 예능감을 뽐내기도 했다. 이 책의 모티브가 된 '경제사 특강' 영상은 145만 뷰를 넘어섰다. 사실 그는 여의도 증권유관기관 27년 차 직장인이자 주식 투자 전문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책은 45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세계사를 뒤흔든 중요 역사적 사건 중 경제학적으로 의미 있는 것들이다. 방대한 역사적 내용을 핵심만 요약하고 압축해서 독자들의 이해도를 높였다. 딱딱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경제학 내용들을 쉽고 편하게 저자만의 수다와 만담 방식으로 풀어냈다.
절대 국가 왕의 힘, 중상주의
중세 봉건사회는 종교가 최우선이었다. 스콜라 철학에 기반해, 가톨릭적 신앙에 맞는 걍제체제를 유지하는 게 중요했다. 9~16세기의 스콜라 철학은 기톨릭 신학 중심 철학 사상으로 물질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중세 봉건 경제는 지주들이 잉여농산물 을 물물교환하는 정도였다. 경제체제라고 하기엔 매우 빈약한 수준이었다.
마침내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신선한 깨달음에 도달하게 되었다. 즉 향신료, 비단, 도자기 등의 사치품과 금이 밀려들며 '부자가 좋구나!'를 절감하게 되었다. 이에 사치품을 거래하기 위한 상업의 발달과 함께 부의 축적과 자본에 비로소 눈을 뜨게 되자 상비군을 보유한 절대왕권이 강화되면서 15~18세기 중상주의가 싹트게 되었다.
중상주의(무거울 중重, 헤어릴 상商)는 한 나라의 부富는 그 나라가 보유한 화폐(금은)에 의해 좌우된다. 대내적으로는 상공업을 중요시하고, 대외적으로는 보호무역, 식민지주의 등을 통해 국가의 부를 증대하려 한다. 즉, 중상주의는 상업 발전을 중시하자는 논리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
근대 경제학의 출발은 애덤 스미스에서부터다. 경제학을 학문적 반열에 올린 선구자이기에 그러하다. 원래 그는 대학에서 '도덕감정론'를 강의하던 사회철학자였지만 자신의 대표작인 <국부론>을 저술하며, 최초로 당시의 중상주의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왕이 잘 살기 위해 정부가 인위적 간섭을 하고 독점기업만 몰아주면 발전이 어렵다고 했다.

(사진, 간섭하지 마라)
애덤 스미스의 경제학은 노동가치설에 기반한다. 노동가치설은 상품의 가치는 노동시간(노동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는 학설이다. 상품의 실체는 노동의 결과물이다. 상품 가치는 생산에 드는 노동시간에 비례한다. 10시간 들인 상품 A보다 20시간 들인 상품 B가 더 가치 있다. 노동시간=상품 가치다. 중상주의가 중시한 중금주의를 배격한다. 화폐는 그저 교환수단일 뿐이다.
나폴레옹이 러시아로 간 까닭
이탈리아 반도 앞에 있는 프랑스 영토 코르시카 섬 출신인 나폴레옹은 군사학교를 거쳐 포병장교가 되었다. 프랑스대혁명 이후 혼란기를 거치며 그는 일약 국민 영웅으로 떠올랐다. 루이 16세 왕을 처형한 시민혁명은 주변 왕정국가(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들에게 불안감을 안겼다. 자국에도 혁명이 번질까 우려가 되었던 것이다. 이에 주변국은 프랑스에 침략전쟁을 일으켰다. 이때 이 전쟁들을 승리로 이끈 인물이 바로 나폴레옹이었다. 이후 그는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황제 대관식을 갖는다.
프랑스는 대혁명 혼란기를 거치며 세습 절대왕정이 붕괴된 후 알거지가 되었다. 그런데, 주변국의 침범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전쟁 배상금을 받아 나라 곳간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당시 프랑스인들은 나폴레옹에 열광했다. 이를테면 '전쟁=부자'라는 공식이 만들어지면서 나폴레옹은 전쟁을 가성비 높은 비즈니스로 만든 셈이다.
나폴레옹의 결단
아메리카 루이지애나 땅을 매각
징병제 도입
맨몸으로 전쟁 참전(현지 식량 조달)

(사진, 현지 식량 조달)
그런데, 나폴레옹은 영국 해군에 두번이나 무릎을 꿇어서 복수를 벼르다가 꼼수를 부렸다. 섬나라인 영국은 유럽 대륙 국가들과의 무역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인데, 나폴레옹이 이같은 교역을 금지하는 '대륙 봉쇄령'을 발표했다. 그러자 영국도 해상 역봉쇄령으로 맞불을 놓았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질 좋은 공산품을 판매하고 있었기에 오히려 답답한 쪽은 유럽 대륙 국가들이었다.
가난한 러시아는 영국에 목재와 곡물 등을 팔아야 살수 있었기에 프랑스 황제 말을 듣지 않고 영국과 교역을 재개했다. 분노한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공격하기로 결정, 조랑말을 타고 알프스를 넘어갔다. 계절을 잘못 골랐다. 알프스를 넘는데 지체되고, 러시아의 겨울은 혹독했다. 러시아군은 전투를 기피하며 후퇴를 거듭했는데, 청야전술을 구사하며 주위를 모두 불태웠다. 결국 프랑스군은 추위와 배고픔으로 주력을 거의 잃고 철수하기 바빴다. 겨우 목숨을 구한 나폴레옹도 권좌를 잃고 만다.
독일의 하이퍼인플레이션
1차 대전(1914년 7월~1918년 11월)이 끝나고 전승국 대표들이 파리에 모였다. 전쟁을 일으킨 패전국 독일에 군사력 축소와 함께 엄청난 규모의 전쟁 배상금을 내도록 결정했다. 1년 간 지속됐던 파리 강화회의는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미국 등이 회의를 주도했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체결한 조약으로 인해 독일은 영토의 15%를 잃었다. 독일은 징병제도가 폐지되고 육군 10만 명과 해군 1만 5천 명만 보유해야 했다.
독일 한해 세입은 60~70억 마르크였는데, 승전국에 대한 배상금은 1,320억 마르크였다. 22년 치 독일 세입에 해당했다. 승전국은 이 돈을 장기 분할 상환하라고 결정했다. 독일은 너무 가혹한 조치라고 주장했다. 당시 영국 재무성 대표로 참여한 경제학자 케인스(존 메이너드 케인스)도 독일 경제를 파탄 낼 거라며 경고했다. 엄청난 배상금을 물리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베르사유 조약 수정을 요구했으나 영국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자, 대표 자리에서 물러났다.
케인스의 예언대로 독일 경제는 파탄 난다. ‘배상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었던 독일 정부는 화폐를 마구 발행했다. 그 결과 물가는 엄청나게 올랐고 대규모 실업 사태와 극심한 불황에 빠졌다.’ 경제적 공황은 히틀러 나치당의 1당독재를 낳았다. 결국 나치 독일은 배상금 지급을 거부하고 2차 대전을 일으키게 되었다. 히틀러는 1차 대전에서 빼앗지 못한 프랑스 파리를 점령했다.
인플레이션은 가난한 사람들의 부를 빼앗는다. 전쟁 배상금 때문에 독일은 마르크화를 엄청나게 발행했다. 늘어난 만큼 환율은 급격히 무너졌다. 전쟁 전 1달러당 4.2마르크였던 환율이 1923년엔 1달러당 120억 마르크가 되었다. 마르크화의 가치하락은 '수입품 가격이 오르고' 물가상승(인플레이션)을 부채질했다.

(사진, 마르크화 무한 발행)
관세법이 악화시킨 대공황
미국의 스무트-홀리 관세법은 리트 스무트와 윌리스 홀리에 의해 추진되었다. 본래 이 법은 글로벌 과잉생산으로 농산물 가격 하락에 힘들어하던 농민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 후버 대통령의 공약 사항으로 '농산물 관세'를 인상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입법 과정에서 2만여 개가 넘는 공산품까지 확대되었다. 평균 관세율이 이전 40%에서 59.1%로 상승했다. 최고 400% 관세를 물리기도 했다.

(사진, 대공황 당시 뱅크런)
스무트-홀리 관세법으로 인한 글로벌 무역 감소는 결국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악화로 이어졌다. 대공황의 원인으로 과잉생산, 실업자 문제 등을 꼽지만, 스무트-홀리 관세법의 영향도 컸다. 보복관세 등으로 생산한 물건이 팔리지 않아 재고가 쌓이고 기업 파산, 노동자 해고로 이어졌다. 비단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까지 동반해 대공황으로 글로벌 경제가 망가졌다. 미국의 실업률은 1929년 3%에서 1933년 25%까지 늘었다. 전 세계 무역량은 1929년부터 1933년까지 1/3로 줄었다.
리먼 브라더스 파산
모기지론은 장기(15~30년) 주택담보대출이다. 모기지론은 개인의 신용도에 따라 구분된다. 신용이 좋으면 프라임, 신용이 낮으면 서브프라임이 된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은 신용도가 낮거나 금융 거애 기록이 없는 개인 대상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이다. 신용도가 낮은 이들은 경기가 나빠지면 대출을 상환하지 못할 우려가 크다.
미국은 닷컴 붕괴 이흐 후퇴하는 미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저금리와 화폐 공급 확대 정책을 펼쳤다. 기준금리가 낮아지고 유동성이 흘러넘쳤기에 금융기관들은 돈벌이 수단으로 금리가 상대적으로 높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에 눈독을 들였다. 대출 경쟁이 치열해지자 까다로운 대출조건을 서로 경쟁적으로 완화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출을 상환하지 못할 위험성이 덩달아 커진 것이다. 한편, 저신용자 모기지론 대출은 2002년 말 6%에서 2006년 21%까지 급속히 증가했다. 이중 90%는 변동금리 대출이었다.
미국 정부도 관련 법령의 개정을 통해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의 활성화를 유도했다. 패니메이, 프레디맥 같은 모기지 전문 대출회사에 모기지(저당권)를 구입하도록 했다. 일반인들에게는 대출하지 않지만 은행 등 대출기관의 모기지를 매입함으로써 금융권이 주택대출을 늘릴 수 있도록 도왔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인기는 집값 상승으로 이어졌다. 미국 정부는 주택경기 과열을 막고자 2004년 6월부터 기준금리를 17차례나 올렸다. 그 결과 기준금리가 1%에서 5.25%까지 올랐다. 기준금리가 오르자 모기지론 대출금리도 덩달아 올랐다. 금리 인상으로 인해 대출자들은 대출이자를 내지 못함에 따라 2007년엔 연체율이 20%까지 상승했다.
리먼 브라더스는 증권계 투자은행이었다. 공격적인 경영을 펼쳐 미국 4대 투자은행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2008년 공격적인 부동산 투자가 화근이 된다. 부동산 담보증권 영업을 유행시킨 리먼은 2000년대 들어서 모기지를 기초자산으로 한 부채담보부증권 등 파생상품을 만들어 레버리지 효과를 누렸다. 그러나 미국 부동산이 침체되자 발목이 잡혔다. 파산 10개월 전 주당 67달러였던 주가는 1달러 미만으로 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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