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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느린 작별
                    정추위 지음, 오하나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8월
                    
                  평점 :
                    
                    
                    
                    
                    
                    
                    
                    
                    
                    
                    
                 
                
            
            
            
        
 
        
            
            
            
            
            
            
            
일상생활을 돌보는 일이 날로 어려워지리라는 사실 정도는 일찍이 예상했지만, 몸은 그대로인 채 마음이 점점 사라지는 사람을 지켜보는 것만큼은 정말이지 혼자 감당하기에 너무 힘들었다. 외출 후 집에 돌아오면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는 그를 볼 수 있었지만, 예전처럼 열렬히 반겨주는 눈빛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내가 습관적으로 말을 걸고 수다를 떨어도 그는 좀처럼 내 말을 귀담아듣거나 대꾸하지 않았다. - '들어가며' 중에서 

책의 저자 정추위(1950년생)는 대만의 세계적인 언어학자다. 국립 타이완 사범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브라운 대학에서 언어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대만의 가장 권위 있는 국립연구소인 중앙연구원에 들어가 평생 언어 연구에 종사했다. 정년을 2년 앞둔 시점에 40여 년간 동고동락했던 남편이 치매 진단을 받았다. 
총 3개의 장으로 구성된 책은 우리의 긴 작별이 시작되었다, 하루를 버티는 법, 안녕 오랜만이야 등의 에세이 글을 담고 있다. 남편을 하루하루 잃어가는 사랑과 슬픔, 매일 덮쳐오는 불안과 무기력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생의 의지가 담담하고 절제된 문장으로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우리의 긴 작별이 시작되었다
남편 푸보는 수학 교수였을 만큼 논리적이었고 외동딸과 아내의 다정한 대화 상대이자 반려자였지만 날이 갈수록 언어와 기억을 잃자 저자는 서둘러 은퇴하여 집에서 남편을 돌보는 24시간 대기조이자 전천후 보호자로서의 삶을 이어간다. 남편은 있으나 동반자가 없는 시간을 겪어내는 가운데 저자 본인도 서서히 심신이 병들어간다.    
푸보의 기억이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무너질 일만 남았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그 사실을 떠올리기만 해도 여전히 눈물이 날 지경이다. 도대체 그의 마음속에는 이제 무엇이 남아 있을까? 그의 인생 마지막까지 이 잔인한 병 앞에 함께 서 있는 것 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는 자신이 무기력함을 느낄 뿐이다.
매일 밤 주방을 점령하던 푸보가 새로운 목표물을 발견했다. 화장실이다. 그곳에서 가장 집착한 물건은 휴지였다. 한동안 휴지에 대해 편집증 증세를 보였다. 외출 전 반드시 휴지를 충분히 챙겼는지 확인했다. 이는 외투와 바지 등 모든 호주머니에 휴지를 충분히 쑤셔넣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외출시 들고 나가는 크로스백 안에도 휴지를 집어넣기 시작했다. 이 습관은 계속되어 그 범위가 날로 커져 갔다. 식당의 냅킨, 화장실의 휴지 등은 모두 남편의 상하의 주머니와 크로스백을 가득 채웠다.
휴지 사태에 이어 화장실의 물건들을 온통 어질렀다. 칫솔, 양치 컵, 비느, 수건, 핸드 타월 등이 제자리에 있는 법이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스킨, 로션, 선크림 등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는다.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항상 있었던 저자의 사적 물건들이 제자리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이같은 침범에 대해 저자는 거울 앞에서 이렇게 되뇌기만 했다.   
“심호흡하자, 심호흡. 절대로 흥분하면 안 돼. 그이는 환자잖아.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일부러 그럴 수도 없는 상태야. 침착해야 해. 침착해.”
하루를 버티는 법 
집에서 난강 기차역까지는 고작 수백 미터 거리로 걸어서 10분 정도면 충분하다. 약속 때문에 함께 외출하려면 이보다 더 충분한 시간을 갖고 미리 준비해야 했다. 예전엔 '여행' 소리만 들어도 아무리 피곤해도 잠자리에서 금방 일어나지만 지금은 억지로 깨우기를 수차례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후 '씻기', '옷입기' 등도 여간 쉽지 않다. 마지막으로 식사 때도 기차 안에서 마시면 되는 커피를 계속 고집한다. 여행은 아직도 시작되지 않았는데 이미 저자의 몸은 땀으로 범벅인 상태다.
푸보는 퇴직 후 꽃을 가꾸고, 독서를 하고, 등산과 산책을 즐기며 매우 여유로운 날들을 보냈다. 저자도 부모님이 모두 타계하시고 외동딸마저 독립시키고 나니 남편 푸보와 저녁 식사를 함께 하고 대화를 나눈 후 1시간 정도 드라마를 시청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러나 병세가 심해진 푸보는 모든 일에 흥미를 잃어 그 어떤 것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종일 집 안에 앉아 멍하니 창밖만 응시했다. 이에 율동, 나무 심기, 퍼즐, 종이접기, 색칠 공부, 만두 빚기 등과 같이 머리와 손을 함께 사용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2022년 10월 17일, 남편과 마지막으로 집에서 함께 보내는 날이었다. 요양기관에 입소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일까? 우리의 고통이 시작된 때가. 남편 푸보는 이해할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협조할 수 없어서 고통스럽고, 아내인 저자는 그런 그를 보는 게 가슴 아프고 막막해서 고통스러웠다. 
밤새 극도의 흥분 상태였던 푸보는 속이 불편했는지 몇 번이고 용변을 보았고, 그때마다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오후에 전쟁처럼 치른 목욕은 이미 소용없어진 지 오래였다. 우리는 또다시 그의 하의를 가위로 잘랐고, 그는 선 채로 몇 번째인지도 모를 용변을 보았다. 
예전부터 이런 일이 생길 때면 남편의 다리에 묻거나 밟아서 청소하기 힘들어질까 봐 용변을 최대한 손으로 받아내곤 했다. 그런데 그날은 저자가 미처 손을 뻗기도 전에 이런 일을 겪어본 적도 없던 외동딸이 먼저 아무 망설임 없이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받아내는 것이었다. 그 순간 울음이 터졌다. 눈물이 앞을 가리는 와중에도 아빠를 향한 딸의 사랑이 보였다. 나는 이 장면에서 한참이나 울었다.
안녕, 오랫만이야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저자는 요양시설로 남편 면회를 갔다. 조명 빛을 마주 보고 서 있던 탓에 푸보가 바로 앞까지 온 후에야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반면 그는 내 얼굴을 일찍이 보고 있었을 텐데도 나를 향해 그저 예의 바른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아주 작은 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 오랜만이야.” 그 순간 눈치챘다. 그는 내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으며 그저 오랜만에 만난 친구 정도로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이제 나를 모른다. 내가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지, 자신이 지금 어디에 와 있는지, 자신의 원래 집은 어디였는지도. 그런 그의 마음속에 이제 무엇이 남아 있을까? 우리의 딸은 기억하고 있을까? 아직도 그리워하는 무언가가 있을까?(161~2쪽)
포근한 햇살 아래에 있던 푸보가 천천히 한쪽 손을 뻗어 외동딸 란란의 외투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치매 아빠가 마침내 딸을 알아봤다는 둥 호들갑 떨 것도 없었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치매는 돌이킬 수 없는 병이라는 걸. 이제는 그가 잘 먹고 잘 자고 몸 아픈 데 없이 평온하게 살아준다면 더 바랄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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