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상고사 - 대한민국 교과서가 가르쳐주지 않는 우리 역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 시공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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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천 년간 한국에서 가장 인상적인 역사가는 신채호였다. ‘1천 년간’이란 표현을 사용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다. 그것은 지난 1천 년간 역사학계가 숨기고 감춘 진실을 그가 소리 높여 외쳤기 때문이다. 평생 역사 연구와 독립운동을 하며 지독한 가난에 찌들어 살다가 여순형무소(뤼순형무소)에서 뇌출혈로 초라하게 사망했지만, 그의 외침은 지난 1천 년간 이 땅에서 나온 가장 인상적인 외침이었다. - ‘프롤로그’ 중에서




이 책 <조선상고사>는 민족주의 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 선생(1880~1936년)이 10년 실형을 받고 감옥에 투옥된 지 3년째인 1931년 6월부터 <조선일보>에 <조선사>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글을 엮은 것이다.


총 10편으로 구성된 책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그의 역사관을 시작으로 대단군조선, 삼조선, 부여의 시대를 설명한다. 이는 단군, 기자, 위만, 삼국이라는 기존의 역사인식 체계를 대신하는 역사인식인 셈이다. 또 김부식의 <삼국사기>와는 달리 한민족韓民族 전체 관점에서 고구려·백제·가야·신라의 역사를 서술한다.


역사의 정의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적으로 전개되고 공간적으로 펼쳐지는 정신적(心的) 활동 상태에 관한 기록이다. 세계사는 세계 인류가 그렇게 되어온 상태에 관한 기록이고, 조선사는 조선 민족이 그렇게 되어온 상태에 관한 기록이다.


무엇을 ‘아’라 하고 무엇을 ‘비아’라 하는가? 깊이 파고들 것 없이 쉽게 말하면, 주관적 입장에 선 쪽이 ‘아’이고 그 이외는 ‘비아’다. 조선사람은 조선을 ‘아’라고 하고, 영국·러시아·프랑스·미국을 ‘비아’라고 한다. 반대로 영국 등은 자신들을 ‘아’, 조선을 ‘비아’라고 할 것이다.


조선 민족의 구별


고대 동아시아 종족은 우랄 어족중국 어족의 두 파派로 나뉘었다. 한족 · 묘족 · 요족 등은 후자에, 조선 민족 · 흉노족 등은 전자에 속한다. 조선 민족이 분화하여 조선 · 선비 · 여진 · 몽골 · 퉁구스 등이 되고, 흉노족이 분화하여 돌궐(신강족) · 헝가리 · 터키 · 핀란드 등이 되었다.


오늘날 몽골 · 만주 · 터키 · 조선 4개 민족 간에는 유사한 어휘들이 많이 존재한다. 이는 몽골제국 시대에 상호 작용이 많았던 탓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고대사를 보면, 조선과 흉노의 인명 · 지명 · 관직명이 동일한 경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들이 상고 시대에 동일한 어족이었음을 증명하는 셈이다.


조선 민족의 동진東進


인류의 발상지를 두고 파미르고원이라는 설몽골초원이라는 설이 있지만, 아직까지 이 문제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조선 민족이 어딘가에서 동진을 해왔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우리 고어에선 왕의 성씨를 해解라고도 하고 왕의 칭호를 ‘불구래弗矩內’라고도 했다.


해解는 태양이란 뜻에서 나온 것이고, ‘불구래’란 칭호는 태양의 빛이 붉다는 데서 나온 것이다. 천국을 환국桓國이라 한 것은 광명처럼 환하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처음에 조선 민족은 서쪽 파미르고원이나 몽골 등지에서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 동진東進을 해왔다. 이들은 불함산(백두산)을 광명신이 거처하는 곳으로 생각하고 이 부근을 ‘조선’이라고 불렀다. 조선이란 말은 광명을 의미하는 고어古語에서 나왔는데, 이를 후대에 조선朝鮮이라 표기하게 되었다.


대大단군왕검의 건국


조선 민족이 여러 아리라(강江 유역)에 분포하면서 이들 사이에 공통적인 신앙이 유행했다. 이른바 단군 신앙이다. 조선 민족은 우주의 광명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태백산 수림樹林을 광명신의 근거지로 생각했다. 이후 번성한 인구가 각지로 퍼져나가자, 각 집단은 자신들의 거주지 부근에 태백산 수림을 모방한 수림을 조성하고 이를 ‘수두’라 불렀다. 수두는 신단神檀이란 뜻이다. 해마다 5월과 10월에 수두에서 제사를 지냈다. 이때 한 명을 뽑아 제주祭主로 삼았다.


제주를 수두의 중앙에 앉히고 ‘하느님’, ‘천신’이라 부르며 제사를 올렸다. 소를 잡아 수두에서 제사하고 소의 발굽으로 길흉을 점쳤다. 발굽이 갈라져 있으면 흉하고, 붙어 있으면 길하다고 생각했다. 중국의 팔괘에 나오는 음획과 양획의 기원이 바로 이것이다.


수두를 받는 부락들은 연합하여 외세의 침입에 항거했으며, 이때 가장 큰 공을 세운 부락의 수두를 최고의 수두로 숭배했다. 이를 신수두라 불렀으며, 다른 수두들은 그 휘하에 속했다. 삼한 역사에 나오는 소도가 바로 수두이다. 단군은 ‘수두 하느님’의 의역이다.


(사진, 은나라와 한민족)


평양의 옛 이름은 왕검성이다. 신라 <선사仙史>(화랑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에선 “평양은 신선인 왕검의 땅”이라 했고, 북위 역사서인 <위서魏書>에선 “2천 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었는데 아사달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조선이라 했다”고 했다. 왕검은 ‘임금’이란 뜻이며, 고대 조선에선 단군왕검을 종교적 교주로 신봉했다는 말이다.


기원전 10세기경부터 대략 오륙백 년간은 대단군 조선의 전성시대였다. 기원전 5,6세기경에는 불리지弗離支란 인물이 조선 군대를 통솔하고 오늘날의 하북 · 산서 · 산동성 등을 정복했다. 그는 산서성 대현 부근에 국가를 세우고 불리지국이라 명명했다. <주서>의 불령지弗令支와 <사기>의 리지離支는 바로 이 불리지국을 가리킨다. 상고 시대엔 산동반도와 요동반도가 육지로 연결되어 있어서 발해는 큰 호수였다. 불리지는 산동을 정복한 뒤 발해를 중심으로 상업을 진흥시켰다.


기원전 7세기 말에 조선은 고죽국을 통해 불리지국과 연합하여 연나라와 진晉나라를 정벌했다. 그러자 연과 진은 제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제나라 군주 환공은 명재상 관중과 명장 성보의 보좌를 받아 당시 중국을 제패하고 있었기에 조나라 · 위나라 · 허나라 · 노나라 등의 10여 국가를 이끌고 연나라를 구출했다. 이리하여 조선은 군대를 철수하고 불리지 땅을 잃었다. 그래서 공자는 “관중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피발披髮을 하고 좌임左袵을 했을 것”이라고 했다. 피발은 조선에서 머리를 뒤로 묶어 길게 땋는 것을 말하고, 좌임은 조선에서 왼쪽으로 옷을 여미는 것을 말한다. 비록 과장이 심하긴 하지만 이 전쟁의 결과는 <관자>에 기록되어 있다. 아무튼 조선은 서북 지방을 잃고 장기간 침체에 빠진 것은 사실이다.


기존의 학교 역사는 단군의 역사를 거의 신화 수준으로 가르쳤다. 하지만 중국 <위서>에 기록된 것처럼 , 고구려 건국 이전 2천년이 단군왕검의 원년이다. 아사달은 어디일까? 신채호 선생은 현재 하얼빈의 완달산을 가리키며, 이곳은 북부여의 고토古土로 단군왕검의 상경上京이었다고 말한다. 안시성 유적인 아리티가 중경, 지금의 평양은 남경이었다.


삼조선의 명칭 유래


기존 역사서에서는 삼조선 분립 사실을 빠뜨렸을 뿐 아니라 삼조선이란 용어를 단군 · 기자 · 위만의 세 왕조로 잘못 해석했다. 삼조선은 신 · 불 · 말, 세 한韓이 분립한 것으로, 신한은 대왕大王이고 불한과 말한은 부왕副王이었다. 삼한이 삼경에 각각 주재하며 조선을 통치했다. 신한 · 말한 · 불한은 이두로 진한 · 마한 · 변한이라 표기됐고, 신조선 · 말조선 · 불조선은 이두로 진조선 · 막조선 ·번조선으로 표기됐다.


신조선왕 모갑은 오늘날의 동몽골 지역을 공격, 선비족을 정벌하고 연나라를 공격해 현재의 하북성 친황다오시, 북경 부근, 산서성 대동부 등지를 모두 차지함으로써 불리지 때의 고토를 회복했다. 이에 두려운 연나라왕은 신조선에 매년 조공을 바쳤다. 하지만 후계왕 모을은 연나라 진개 장군의 공격을 받아 많은 영토를 빼앗겼다. 이후 신조선의 모정왕은상곡, 어양 등자를 회복하고 동몽골 일대의 선비족을 복속시켜 국위를 회복했지만 흉노족 연제모돈의 난을 만나 국력이 쇠약해지고 말았다.


불조선은 신조선과 연합했다가 연나라에 패해 요동, 요서, 우북평 일대를 잃었다. 기원전 200년에 왕위에 오른 기준은 투항했던 위만의 배신으로 인해 도성인 왕검성을 버리고 잔여병력으로 바다 건너 월지국을 습격해 왕위를 찬탈했지만 마한 여러 나라 연합군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말조선의 초기 도읍지는 평양이었다. 말조선은 이후 국호를 말한(마한)으로 변경하고 월지국(현재의 공주 인근으로 추정)으로 천도했다가 불조선왕 기준에게 멸망당했다.


고구려의 발흥


고구려 시조는 주몽이다. 추모왕으로 불린 그는 타고난 용력과 탁월한 활쏘기 솜씨를 지녔으며, 과부 소서노의 재산을 발판으로 호걸들을 불러 모았다. 왕검 이래의 신화를 교묘히 이용하여 난생 신화를 만들어 고구려를 건국했을 뿐 아니라, 안으로는 열국의 신뢰를 받아 조선을 정신적으로 통일하고 밖으로는 자신의 영웅담을 중국 각지에 전파하여 중국 제왕과 인민들이 자신을 교주로 숭배하도록 만들었다.


전성시대의 고구려는 요동을 차지한 뒤, 지금의 개평현 동북쪽 약 70리에 환도성丸都城(제1환도성)을 수축하고 서쪽 경영의 거점으로 삼는 한편, 국내성 · 졸본성과 함께 삼경三京으로 삼았다. 환도성의 위치에 대해 후세인들의 논쟁이 많았는데, 신채호 선생은 환도성이 3개나 있었는데 이를 구별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라고 말한다.


고구려 광개토태왕


광개토태왕은 지금의 개평 부근에 있었던 제5도읍인 안시성으로 천도한 뒤, 선비족 모용씨와 10여 년간 전쟁하면서 항상 상대의 허점을 이용해 선비족 군대를 기습적으로 격파했다. 요동 땅에서부터 지금의 영평부인 요서까지 차지하니, 불패의 명장으로 불리던 후연왕 모용수도 패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뒤를 이은 후연왕 성盛과 희熙 같은 중국 역사상의 대大 영웅들도 다들 꺾이고 말았다. 그래서 그들은 수천 리의 영토를 고구려에 내줄 수밖에 없었다.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그 존호처럼 광대한 영토를 개척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중국의 사관들은 외부와의 전쟁에서 패한 사실을 숨기는 습성이 있어서 항상 후연이 승리한 것처럼 기록했다고 한다.


(사진, 중국 사관들의 습성)


고구려 vs 수나라


통상 세력과 세력이 만나면 충돌하기 마련이다. 고대 동아시아의 패권은 고구려와 중국의 수나라 간에서 전쟁으로 나타났다. 서기 597년(고구려 영양왕 8년), 수나라의 문제는 중국을 통일한 지 9년이었다. 계속된 풍년과 풍족한 군비軍備로 자만심이 가득했던 수나라는 모욕적인 서한을 고구려에 보냈다.


(사진, 을지문덕전)


을지문덕 장군은 수나라 군대의 약점을 탐지하고자 항복 사신이 되어 수나라 진영에 들어가 내부를 살피고 돌아왔다. 이때 우문술 등의 부대에서 굶주린 기색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후 수나라 군대를 유인할 목적으로 접전을 벌이다가 거짓으로 도망가는 척했다. 이에 우문술 등은 매우 기뻐했다. 이러는 사이 수나라군은 살수(현재의 청천강)를 건너 평양성까지 당도했다.


성 안은 이미 텅텅 비어 있었다. 이후 우문술은 정예병을 이끌고 공격을 개시했다가 화살과 돌멩이가 비오듯 쏟아지자 철군을 시작했다. 살수에 도착하니 배가 한 척도 없자 얕은 강물임을 확인하고 건너기 시작했다. 수나라 군대가 강의 중간에 도착하기 전에 상류에서 모래주머니를 무너뜨렸다. 그러자 물이 거세게 밀고 내려왔다.


이런 상태에서 을지문덕 부대가 후미를 습격했다. 수나라 군인들은 칼과 활에 맞아 죽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하루 낮과 하룻밤 동안 450리를 달려 압록강에 도착한 후에 강을 건너 달아났다. 30만이 넘었던 우문술의 군대는 겨우 2700명만 생존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살수대첩’이다.


고구려 vs 당나라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에게 대패한 수나라는 국력의 쇠퇴로 결국 패망하고 만다. 이후 새로운 왕조 당나라가 들어서고, 당은 약 20년 간 전쟁 준비를 한 후 당나라 대군들은 고구려 땅으로 침입했다. 당시 양만춘이 이끄는 안시성을 빼앗은 다음 곧바로 평양을 습격한다는 전쟁 계획을 수립했지만 수성전을 펼치는 안시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양만춘의 결사대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었다. 당시 안시성 전투는 고대 동아시아의 역사적인 전쟁이었다.


양만춘이 쏜 독화살이 당태종의 눈에 명중되어 결국 당나라는 철군을 결정한다. 당태종은 ‘요동 전쟁을 그만 두라’는 유훈을 남기고 죽는다.


(사진, 김부식)


연개소문은 봉건 세습적인 호족 공화제를 타파하고 정권을 한 곳에 집중함으로써 분권적인 국면을 통일적인 상태로 바꾸었다. 또 반대파는 군주든 호족이든 불문하고 죄다 소탕했다. 그는 영류왕을 비롯해서 수백 명의 관료들을 주살했다. 또한 침략한 당태종을 격파했을 뿐 아니라, 이를 추격하여 중국 전역을 진동시켰다. 그는 혁명가의 기백을 가지는 데 그치지 않고, 혁명의 능력과 지략까지 갖추었다고 봐야 한다.


#신채호 #조선상고사 #한국사 #고대사 #역사 #자기계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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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보감에는 참 좋은 말이 많다.

사람들이 꼭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알려 준다.

명심明心이란 ‘마음을 밝게 한다’는 의미이며,

보감寶鑑은 ‘보물과 같은 거울로 교본이 된다’는 뜻이다.


(사진)


견선여갈(하고) 문악여롱(하라)

선사수탐(하고) 악사막락(하라)


“착한 것을 보면 목마른 것처럼 하고,

나쁜 것을 들으면 귀먹은 것처럼 하라.

착한 일은 모름지기 탐내어 하고,

나쁜 일은 즐기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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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 머니 GET MONEY
이경애 지음 / 밀리언서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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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펼쳐서 읽기를 결심했는가? 그렇다면 이미 당신은 부자가 되기 위한 문턱을 넘어서는 중이다. 이 책은 진정한 성공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고, 삶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중요한 팁을 제공할 것이다. 부자가 되고 싶고, 더 나아가 의미 있는 삶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 ‘프롤로그’ 중에서




책의 저자인 이경애는 12년 경력의 기자 생활을 통해 수백명의 CEO들을 인터뷰하면서 그들과의 교류속에서 재산 축적과 기업 성장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진짜 부자들 스토리인 돈버는 시스템과 노하우를 터득할 수 있어서 이후 자기 사업인 어학원 운영을 시작, 부자 대열에 합류한 인물이다.


저자가 만난 사람들은 30년 이상 부를 유지하고 자산을 불려온 사람들이다. 이제 막 부자가 되었을 때부터 오늘날까지 부자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그들을 곁에서 지켜보고 분석한 결과 부를 획득하는 과정을 5가지 단계로 나눴다.

1단계돈의 본성을 파고드는 것이다. 돈의 본성을 알지 못하면 잠까지 줄이고 일상의 행복을 포기하면서까지 열심히 일해도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이다. 부자들은 돈은 인격체와 같아서 머물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돈이 머물고 싶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남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해 일해야 한다.

♣자산이 강인하게 자라도록 생명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일(노력)만 하다가는 몸이 먼저 망가진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레버리지를 활용할 줄 아는 자본주의 속성을 알아야 한다.

♣경제적 자유를 성취해야 한다.

2단계는 돈의 흐름에 올라타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는 것만으로는 부자가 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이 흐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일하며 돈이 벌리지 않는다고 한탄한다. 부자가 되려면 돈이 흐르는 지점을 파악하는 안목이 필요하다.


큰 부를 이룬 사람들은 어느날 갑자기 벼락부자가 된 것이 아니다. 수시로 겪게 되는 허들(장애물)을 치우면서 고통스런 길을 통과해 나간다. 올바른 방향인지에 대한 불안감, 별 성과없는 지루한 시간 등을 버텨내면서 한걸음씩 올라간다. 마침내 이 모든 것을 견뎌낸 사람들이 달콤한 열매를 딴다. 이것이 바로 ‘고진감래苦盡甘來’의 진정한 의미임을 깨달아야 한다.


(사진, 차근차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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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2-17 0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4,5단계는 리뷰글이 사라졌네요.ㅠㅠ
https://blog.naver.com/5for10/223295028874
 

대한민국 사회에서 대중문화가 여성들의 변화를 어떻게 담아내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은 꼭 필요한 작업이다. 1980년대에 시작되어 90년대를 거쳐 2000년대로 이어지면서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급증함에 따라, 미디어도 이를 담아내는 여성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현모양처, 신데렐라 캐릭터가 이삼십년 전만 해도 인기를 끌었다. 반면 요즈음 드라마 속의 여성들은 완전히 다르다. 자식을 버리고 자신의 야망을 선택한 엄마,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여성 로비스트, 개인적 복수를 통해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여성 등이 바로 그런 모습들이다.


슈룹: ‘우산’을 나타내는 순우리말


지금 소개하려는 드라마도 이같은 범주에 속한다. 독특했던 드라마 제목이 관심을 끌면서 국어사전을 들추어 본 일이 이후 종영때까지 시청하는 일로 이어졌다. 평소 김혜수 배우를 좋아한 것도 시청으로 연결되는 데 한 몫 거들었다.


(사진, 슈룹 포스터)


시대의 배경은 조선시대이지만 실상은 퓨전 사극이다. 역사물이기에 고증 문제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특히, 중국풍風은 비난받을만 했다. 아무튼 이 드라마는 가상의 중전 임화령(김혜수)이 겪게되는 궁중 음모와 권력싸움을 다루는 줄거리로 진행된다. 주인공 화령은 다섯 명의 적통대군을 출산했는데, 왕세자인 장남을 제외하곤 모두 자유분망한 문제아들들이다.


시어머니인 대비大妃(김해숙)는 화령을 매우 싫어해서 기회만 되면 중전자리에서 떨어뜨리려 하기에 이를 견제하기에도 벅차다. 그럼에도 그녀는 중전의 소임을 다 하려고 후궁들과 후궁 소생들의 기강 잡기는 물론이고 내명부內名婦 관리까지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래서 ‘조선에서 가장 걸음이 빠른’ 중전이란 캐릭터로 표현되고 있다.


스토리의 전개는 능력을 인정받던 장남인 왕세자가 갑자기 의문사死를 당하면서 중전의 지위가 흔들맇 수도 있는 상황이 전개된다. 즉 차기 왕세자의 자리를 놓고 경합을 통해 최종 경쟁에서 승리한 왕자(대군)로 결정하려는데,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는 대비 측근으로 분류되는 후궁 황 귀인의 소생이기 때문이다.


이후 극의 전개는 조선시대 왕실의 교육 경쟁과 여러 대군들의 엄마인 후궁들의 치맛바람이 치열한 교육열熱을 주제로 다룬 드라마 ‘스카이 캐슬’의 조선편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그런데, 슈룹은 남성사회였던 조선시대를 여성주의 시각에서 다루었다는 점이 돋보였다. 칠거지악七去之惡, 삼종지도三從之道 같은 굴레를 벗어나려는 시도를 보인 점도 주목할 만했다.


“삼불거三不去라는 게 있지요. 혼인을 한 여인도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법입니다. 시부모를 위해 삼년을 치렀거나 혼인 후에 부귀를 얻었가나 돌아갈 친정이 없는 경우엔 칠거지악에 해당되더라도 함부로 아내를 쫓아낼 수 없습니다. 남편에게 창을 준 대신 아내에겐 방패를 준 격이랄까요?” - ‘화령의 대사’ 중에서




#드라마 #여성주의 #슈룹 #퓨전사극 #가상조선시대 #김혜수 #김해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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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이 쓴 불후의 명저 는 소위 ‘전설의 시대’부터 기원 전 2세기(한나라 무제武帝)까지 2천 년이 넘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총 130권에 달하는 책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아래와 같이 나뉜다.


본기本紀~ 오제五帝부터 시작해 한漢나라 무제까지 제왕의 계보와 사적을 수록


표表~ 본기에 나오는 여러 제왕과 제후들의 흥망을 기록한 연표


서書~ 역법曆法·천문天文·법제法制·예법禮法·경제經濟·치수공사 등을 기록


세가世家~ 나라별로 제후의 계보와 사적을 기록, 특별히 공자도 포함하고 있다.


열전列傳~ 정치가·군인·학자 등부터 거리의 인물까지 개인사를 기술




왜 지금도 한참 오래 전에 쓰여진 중국의 역사책을 여전히 한국의 현대인, 특히 직장인들이 많이 읽는지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내가 이 책을 즐겨 읽는 데는 역사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다양한 인간 심리와 인간 정신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물정이 각박해지면서 갈수록 의협심이 사라지는 시대를 우린 살고 있는 듯하다. 좋게 생각하면 남의 일에 상관하지 않겠다는 보신保身에 치우진 바 있겠지만 나를 불쾌하게 만드는 것은 정의라는 개념은 아랑곳않고 그저 권력에 빌붙어 자기 이속만을 챙기려는 지극히 이기적인 좀팽이들만 늘어나는 것 같다. 특히, 정치판은 이런 현상이 심하디 심하다.


<사기>의 ‘유협 열전’遊俠列傳에는 의협 정신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나온다. 유협이란 말은 사마천이 처음 사용한 말이다. 중국에선 전쟁으로 온통 어지러웠던 전국 시대(기원전 5세기)부터 한漢나라 초기(기원전 1세기)까지 이들 유협의 무리가 당시 사회에 막강한 힘을 떨쳤다.


유협의 무리는 법보다 칼이나 주먹이 앞서는 무뢰배일지라도 ‘의협 정신’만은 그 누구보다 확고했다. 이 정신은 ‘내 몸의 위험을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을 곤경에서 구한다’는 것이다. 2001년 1월, 일촉즉발의 위험한 상황임에도 몸을 내던져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고 접근하는 열차를 못 피해 죽음에 이른 유학생 이수현(고려대 무역학과 휴학, 당시 26세)의 행동에 대해 일본인들은 ‘의인’義人이라고 칭송했었다. 당시 지하철 역사 안엔 많은 일본인들이 있었음에도 아무도 이에 반응하지 않았기에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던지기도 했다.


그렇다. 법으로 제정한 윤리는 체제의 질서를 중시함에 비해 야野의 윤리는 인간성의 결합을 중시한다. 의협 정신은 권력이나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인간관계에 의한 것이다. ‘이권 카르텔’을 누리고자 파벌로 뭉치는 정치 패거리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주가朱家는 노나라 사람으로 한나라 고조(유방)와 동시댕에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협객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위험에 빠진 사람을 숨겨주어 목숨을 건진 사람이 수백 명이었다고 알려진다. 그는 신분이 낮은 사람부터 도왔기에 집안엔 남은 재산이 별로 없었다. 유협 열전엔 ‘주가가 패전의 장군 계포를 구했다’고 적혀 있다.


이 내용은 <계포난포 열전>에 상세히 적혀 있다. 의리남으로 유명했던 계포는 항우에 의해 초나라의 장군에 임명되었다. 그는 전투에서 유방을 여러 차례 곤경에 빠뜨렸다. 이에 항우를 물리친 유방은 계포 머리에 현상금을 내걸었다.


계포는 당시 복양의 한 집에 숨어 지내다가 집 주인장의 권유로 노예로 변장하여 다른 노예들과 함께 노나라의 협객 주가朱家에 팔렸다. 주가는 계포임을 알면서도 그를 노예로 사서 농사일을 시켰다. 게다가 자신의 아들에게 “결코 소홀히 대하지 마라”고 당부했다.


이후 주가는 낙양으로 가서 하우영을 방문해서 “계포가 항우를 위해 열심히 일한 것은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것일 뿐, 이제 천하가 안정되었는데도 아직 사사로운 원한 때문에 한 사람의 목숨을 쫓는 것은 소인배나 할 짓”이라며 한의 고조에게 이를 꼭 전하라고 부탁한다. 마침내 이 말이 전해지고 계포에게 사면령이 내려졌으며, 후에 고조를 만나 용서를 구한 계포는 고조의 시종이 되었다.


(사진, 사마천의 계포 인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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