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이 쓴 불후의 명저 는 소위 ‘전설의 시대’부터 기원 전 2세기(한나라 무제武帝)까지 2천 년이 넘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총 130권에 달하는 책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아래와 같이 나뉜다.


본기本紀~ 오제五帝부터 시작해 한漢나라 무제까지 제왕의 계보와 사적을 수록


표表~ 본기에 나오는 여러 제왕과 제후들의 흥망을 기록한 연표


서書~ 역법曆法·천문天文·법제法制·예법禮法·경제經濟·치수공사 등을 기록


세가世家~ 나라별로 제후의 계보와 사적을 기록, 특별히 공자도 포함하고 있다.


열전列傳~ 정치가·군인·학자 등부터 거리의 인물까지 개인사를 기술




왜 지금도 한참 오래 전에 쓰여진 중국의 역사책을 여전히 한국의 현대인, 특히 직장인들이 많이 읽는지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내가 이 책을 즐겨 읽는 데는 역사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다양한 인간 심리와 인간 정신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물정이 각박해지면서 갈수록 의협심이 사라지는 시대를 우린 살고 있는 듯하다. 좋게 생각하면 남의 일에 상관하지 않겠다는 보신保身에 치우진 바 있겠지만 나를 불쾌하게 만드는 것은 정의라는 개념은 아랑곳않고 그저 권력에 빌붙어 자기 이속만을 챙기려는 지극히 이기적인 좀팽이들만 늘어나는 것 같다. 특히, 정치판은 이런 현상이 심하디 심하다.


<사기>의 ‘유협 열전’遊俠列傳에는 의협 정신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나온다. 유협이란 말은 사마천이 처음 사용한 말이다. 중국에선 전쟁으로 온통 어지러웠던 전국 시대(기원전 5세기)부터 한漢나라 초기(기원전 1세기)까지 이들 유협의 무리가 당시 사회에 막강한 힘을 떨쳤다.


유협의 무리는 법보다 칼이나 주먹이 앞서는 무뢰배일지라도 ‘의협 정신’만은 그 누구보다 확고했다. 이 정신은 ‘내 몸의 위험을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을 곤경에서 구한다’는 것이다. 2001년 1월, 일촉즉발의 위험한 상황임에도 몸을 내던져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고 접근하는 열차를 못 피해 죽음에 이른 유학생 이수현(고려대 무역학과 휴학, 당시 26세)의 행동에 대해 일본인들은 ‘의인’義人이라고 칭송했었다. 당시 지하철 역사 안엔 많은 일본인들이 있었음에도 아무도 이에 반응하지 않았기에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던지기도 했다.


그렇다. 법으로 제정한 윤리는 체제의 질서를 중시함에 비해 야野의 윤리는 인간성의 결합을 중시한다. 의협 정신은 권력이나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인간관계에 의한 것이다. ‘이권 카르텔’을 누리고자 파벌로 뭉치는 정치 패거리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주가朱家는 노나라 사람으로 한나라 고조(유방)와 동시댕에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협객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위험에 빠진 사람을 숨겨주어 목숨을 건진 사람이 수백 명이었다고 알려진다. 그는 신분이 낮은 사람부터 도왔기에 집안엔 남은 재산이 별로 없었다. 유협 열전엔 ‘주가가 패전의 장군 계포를 구했다’고 적혀 있다.


이 내용은 <계포난포 열전>에 상세히 적혀 있다. 의리남으로 유명했던 계포는 항우에 의해 초나라의 장군에 임명되었다. 그는 전투에서 유방을 여러 차례 곤경에 빠뜨렸다. 이에 항우를 물리친 유방은 계포 머리에 현상금을 내걸었다.


계포는 당시 복양의 한 집에 숨어 지내다가 집 주인장의 권유로 노예로 변장하여 다른 노예들과 함께 노나라의 협객 주가朱家에 팔렸다. 주가는 계포임을 알면서도 그를 노예로 사서 농사일을 시켰다. 게다가 자신의 아들에게 “결코 소홀히 대하지 마라”고 당부했다.


이후 주가는 낙양으로 가서 하우영을 방문해서 “계포가 항우를 위해 열심히 일한 것은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것일 뿐, 이제 천하가 안정되었는데도 아직 사사로운 원한 때문에 한 사람의 목숨을 쫓는 것은 소인배나 할 짓”이라며 한의 고조에게 이를 꼭 전하라고 부탁한다. 마침내 이 말이 전해지고 계포에게 사면령이 내려졌으며, 후에 고조를 만나 용서를 구한 계포는 고조의 시종이 되었다.


(사진, 사마천의 계포 인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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