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놉티콘
제니 페이건 지음, 이예원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난 실험이다. 늘 그랬다. 이건 기정사실이자 내개 할당된 자유이자 엄연한 팩트다. 난 감시 대상이다. 학교에서나 사회복지사와 면담하는 자리며 법원이나 경찰서 유치장에서는 물론이고, 거기서 그치지도 않는다. 언제고 저들은 사방에서 날 감시한다. 나무에 오른 날 감시한다. 난 떡갈나무 가지 중 제일 길고 튼튼한 가지를 골라 매달린 채, 내 평생의 소원과 꿈들이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몇 시간이고 버틸 수 있다. 저들은 휘영청 걸린 달과 눈싸움을 하는 날 감시한다. 

 

 

감시당하는 우리 사회를 고발하다

 

소설은 청소년 보호시설 '파놉티콘'에 배치된, 폭력과 마약에 절어버린 열다섯 살 소녀 아나이스 헨드릭스의 목소리로 시작된다. 거친 욕설과 다소 듣기 거북한 비난들이 난무하는 이 소설은 어떤 문학의 범주에 넣어야 하는지 의아할 정도이다. 하지만 이 작품으로 2012년에 데뷔한 제니 페이건(사진)은 될성부른 작가들의 등용문으로 여겨지는 워터스톤즈 서점의 '워터스톤즈 일레븐'에 이름을 올렸다. 또 2013년 최고의 젊은 영국 작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파놉티콘(판옵티콘)'이란 C자형 원형감옥이다. 이는 1700년대 후반 영국의 철학자이자 법학자인 제레미 밴담이 설계한 감옥이다. 이 감옥의 특장은 감시자는 위에서 내려다보며 모든 수감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지만, 수감자들은 감시자를 결코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이다. 이곳에 후송되어 49호실에 배치되어 이동하는 아나이스의 눈에 비친 모습은 이러하다.

 

건물 전체가 곡선형을 이룬다. 정확히는 알파벳 C자 모양이고, 그 곡선을 따라 건물 맨 위층에 굳게 닫힌 검은색 문이 여섯 개나 있다. 그 바로 아래층과 그 밑에 층에도 똑같은 문이 여섯 개씩 나 있는데, 문마다 하얗게 칠했고 하나도 빠짐없이 활짝 열려 있다. 여기선 소등 전에는 문을 절대로 닫는 법이 없다고 들었다.

 

파놉티콘

 

아무튼 이런 특성 탓에 감시를 받지 않을 때조차도 수감자는 스스로 감시받는다고 여기게 된다. 이 양식에 맞춰 건축된 수용시설에 주인공인 아나이스가 입소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소녀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 아는 게 그리 많지 않다. 이런 처지의 청소년들이 대개 그렇듯 그녀 또한 여러 위탁가정을 전전하며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나쁜 어른들을 만나고, 험한 일을 겪고, 폭력과 약물에 길들여진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나이스는 정작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는, 경찰관을 공격한 혐의로 파놉티콘으로 후송된다. 수용된 파놉티콘 내에서도 소녀는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과 연대를 형성하고 몰래 들여온 약물을 복용하는 듯 제멋대로인 듯하지만 정작 자신의 알몸을 감출 권리조차도 얻지 못한다. 항상 감시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이미 영국 최고의 사실주의 영화감독 켄 로치에 의해 영화화하기로 결정되었다.

 

 

    

 

열다섯 살 소녀 아나이스 헨드릭스는 스코틀랜드 정신병원에서 태어나 여러 위탁 가정을 거쳐 폭력과 마약에 빠지게 된다. 경찰관을 공격한 혐의로 어린 범죄자들의 보호시설인 파놉티콘으로 호송하는 경찰차 뒷좌석에 앉은 그녀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세상에 대한 불만을 거침없이 토로한다. 첫 인상이 벌써 뭔가 억울한 사람과 사악한 교도관들의 만남이라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파놉티콘에 도착한 소녀는 이렇게 말한다.

 

딱 질색이다. 신변 인수, 낯선 장소, 직원들, 서류철. 땅굴이도 있어서 그 안에 기어들어 가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아니면 나무 위에 지은 집이라든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다. 

 

브렌다 선생의 안내를 받아 3층으로 올라갔다. 여자 아이 3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49호실은 층의 한가운데 방이다. '콧수염'은 양쪽 뺨에 갈색 선을 나선형으로 세 걔씩 그렸는데, 눈은 크고 갈색이다. 귀걸이는 안 했고 머리가 길다. 이름은 '타시'다. 야구모자를 쓴 '커트 머리'는 배때기에 칼자국 투성이며, 골반에 살이 튼 걸로 봐서 애 엄마인듯하다. 이름은 '쇼티'다. 그리고 '아일라', 이렇게 3명이다. 앞으로 자주 부딪힐 인물들이다.  

"방문은 항상 열어두는 걸 원칙으로 한다, 아나이스. 대신 옷을 갈아입을 때는 당겨서 일부 닫을 수가 있어. 안은 아무도 못 들여다봐. 물론 감시탑이 있기야 하지만 거긴 아무도 없거든. 야간 간호사 선생님이 근무 중일 때를 빼고는. 그리고 간호사 선생님은 유사시에 중앙 잠금 장치를 이용해 시설 내 문을 전부 잠글 수 있어. 거주자 안전을 위해서!"

아나이스가 옷을 벗던 동작을 멈추자 브렌다가 고개를 젓는다. 이는 속옷까지 다 벗으라는 신호인 셈이다. 그녀는 팬티를 벗어 비닐봉지에 던진다. 그런데, 이 방은 전에 있던 방보다 작다. 복도에서 다시 탕탕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까 그 남자앤가 보다. 난간을 아주 후려 팰 기세다. 파놉티콘에는 남자애들도 있다. 물론 여자애들과 함께 방을 사용하지  못한다.

"남자애들 방은 대부분 2층에 있어서 문 왼편에 서서 갈아입기만 하면 아래층에서 옷 갈아입는 걸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서로 신뢰하는 분위기를 만들 수 있도록 방문을 열고 지내는 게 여기 규칙이다. 여기 파놉티콘에 비밀이란 없거든"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다들 감시받길 원하는 것처럼 군다. 누군가가 밤낮 안 가리고 자길 쳐다봐줬으면 하는 것 같다. 온라인에 사진을 올리고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자기를 맘대로 들여다보게 놔두잖아! 심지어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까지 그리고 또 실제보다 뽀샤시하세 광이 나는 척 굴지. 어떤 사람들은 아예 서너 군데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게시물을 올린다.

그뿐인가. 직장에서는 상사가 감시하지, 버스에서는 카메라가 감시하지, 하물며 기차 안에서도, 부츠 매장에서도 오죽하면 감자튀김 가게 앞에서마저 카메라한테 감시당하며 산다. 그리고 집에 가면? 구경할 사람이 누가 있는지 보러, 누가 자길 보고 있는지 확인하려 어김없이 또 온라인 접속을 한다!

감시탑을 한참 동안 쳐다보면 꼭 벌레처럼 보인다. 창에 반사된 해가 황금빛 홍채처럼 작게 빛날 때면 특히 그렇다. 어젯밤처럼 달이 깃들면 창백한 눈동자를 하고서 줄곧 사람을 좇는다. 층층이, 방방이, 모두가 저 창에 반사된다. 심지어 아나이스 자신도 저 안에 깃들어 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올려다본다.

지금 그녀는 3층 층계참에 앉아 있다. 가부좌를 틀고 고무공 던져 받기 놀이를 하는 중이다. 공은 곱슬머리 남자애한테서 뺏었다. 브라이언이라는 사이코다. 이 공놀이에서는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받아야 한 번으로 치는데 벌써 170번째다. 공을 떨어뜨리면 돼지가 죽을 거란 뜻. 돼지는 바로 그녀에게 공격을 당했다는 경찰관을 지칭한다. 

돼지가 죽으면 날 열여덟 생일까지 철통보안 중경비시설에 처박힐 거다. 그다음은 감옥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멀쩡히 버틸 리가 없지. 열여섯 살까지도 버티기 힘들걸. 그때쯤엔 벌써 죽었을 테니. 그럼 아나이스, 돼지, 테리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위탁됐던 집에서 만난 제이크 녀석, 목에 줄을 맨 제이크까지 한데 다시 뭉치는 거지. 황천 가기 전 마지막 유치장에서 포커나 치고 앉았을 불쌍한 우리 신세. 공이 어느새 완벽한 리듬을 이루며 척 하고 손에 붙는다. 벌레 눈들이 지켜보고 있다. 저놈의 감시탑, 얼굴을 박살내달라고 아주 애원을 하네.

 

아나이스는 태어나서 일곱 살 때까지 스물세 군데 옮겨 다니다가 입양이 됐고, 열한 살 때 거기서 나와서 지난 4년간 스물일곱 번 옮겨 다녔다.

 

늘 같은 악몽을 꾼다. 상습적으로 마약을 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이런 악몽에 자주 시달린다고 한다. 아나이스는 여전히 마약을 끊지 못하고 있다. 경찰관 폭행 사건도 그렇다. 그녀는 그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당시에도 분명 마약에 취한 상태였을 것이다. 꿈에서 저들은 바늘 끝보다도 작은 점 같은 아나이스를 키운다.

극미한 세균 조각에서부터 그녀를 배양해갖곤 방호복과 마스크로 무장하고 현미경에 날 올려놓고 관찰한다. 바보 같은 노래가 갑자기 떠오른다. 이게 무슨 노래였지? 테리사가 불러주던 동요지. 여자아이들은 설탕과 향신료, 세상의 온갖 달콤한 것들로 빚어 만들었다는, 지랄 같은 노래.

 


"그럼 아나이스는 뭘로 빚어졌다고 봐야 할까요?"
"설탕과 설사지 뭐겠어요"
"아니, 농담이 아니에요. 아나이스를 뭘로 만든 거죠?"
"세균요. 죽은 외계 괴생물체에서 채취한 세균에서라고요. 됐어요? 그럼 이제 당장 꺼져!"

 

소설 속에서 아나이스는 여러 어른들을 만난다. 위탁가정에서 만난 어른들과 경찰관, 그리고 법 집행인들 등등. 대체로 질이 나쁜, 세상의 더러움을 모아놓은 것 같은 어른들의 모습이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그것이 곧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반항을 선보인다. 그리고 그녀의 하루하루는 더 나쁜 방향으로만 흘러간다. 그럼에도 그 속에는 희망의 싹 같은 것이 보인다.

 

그녀는 파리에서 온 프랜시스 존스로 신분을 세탁한다. 그녀는 실종자 명단 벽보에 붙은 얼굴이 아니다. 이제 그녀는 누구의 감시도 받지 않는다. 이제 다 끝났다. 더 이상 실험은 없다. 면담도 없고, 파일도, 중경비시설로의 직행도, 사람을 패는 일도, 사람에게 된통 당하는 일도, 감방에 갇히는 일도 없다. 소설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나는, 오늘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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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욘드 로맨스 - 사랑에 대한 철학의 대답
M. C. 딜런 지음, 도승연 옮김 / Mid(엠아이디)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성애性愛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에 대한 솔직한 답변을 찾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현대인에게 유행하는 낭만적 사랑은 결핍에 기반한 사랑의 한 형태이기에 이를 어떻게 하면 정직이라는 가치를 통해 보다 진실한 사랑으로 이끌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이 글에서 주장하고자 한다. - '서문' 중에서

 

 

사랑의 의미를 찾아서

 

책의 저자 M.C. 딜런(1938-2005)은 버클리 대학에서 석사와 예일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빙햄톤 대학에서 강의 특화 석좌교수로서 1968년부터 2005년까지 재직하였다. 전공은 대륙철학과 현상학, 실존철학이며 특히 영미권의 유력한 메를로 퐁티의 주석가로서 평가받는다.

2001년에 출간된 <비욘드 로맨스>는 딜런 교수의 현상학적 통찰과 교수법의 진수가 담긴 저서로 그 내용은 1970년대부터 2005년까지 뉴욕주립 빙

 

<비욘드 로맨스>는 정직한 글이다. 낭만적 사랑으로서의 로맨스를 넘어서 그보다 진실하고 현명한 사랑의 이름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저자의 어조가 그러하다. 하지만 정직함이라는 <비욘드 로맨스>의 미덕을 믿고 관망적으로 글을 대한다면 이것이 쉽사리 소화될 수 없는 밀도와 중량을 가진 것임을 금세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 도승연, 광운대학교 교양학부 조교수

 

책은 육체적 사랑과 몸에 대한 저자의 솔직한 철학적 대답을 담고 있다. 즉 고대철학부터 포스트모더니즘과 현상학에까지 이르는 서구 사상사思想史를 관통하면서 사랑에 대한 기존의 이상적 모델이었던 낭만적 사랑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적한다. 낭만적 사랑은 상대를 이상화하며 박제화하기에 변화를 긍정하지 못하고 모든 것이 동결된 죽음으로 완성될 수밖에 없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낭만적 사랑은 상대방을 향한 사랑이 아닌 자신의 사랑을 위한 사랑, 즉 도구적 사랑이 되고 만다.

 
저자는 낭만적 사랑이 가진 이러한 폐쇄성을 뛰어넘기 위해 사랑에 대한 일반적인 철학적 담론과는 달리 상대방의 신체와 그 변동에 주목하고 육체적 관계와 성애의 문제에 대해 심층적으로 답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그는 성애의 문제가 더 이상 재생산의 문제와 결부되지 않는 현대 사회에서 성애에 대한 섣부른 신비화나 악마화를 걷어 내고 그 현실에 담백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우리 시대의 사랑에 대한 통속적인 관념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다양한 논의들을 검토하면서도 정직이라는 가치가 진실한 사랑을 이끌어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따라서, 이 책은 그렇게 좋은 사랑의 이름을 찾으려는 그만의 철학적 여정인 셈이다.

 

 

 

 


저자는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대 철학적 견해로 출발하여 아퀴나스의 자연법을 경유하고, 근대의 주체 철학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는 장구한 서구의 사상사를 관통하면서 마지막 종착지로서 자신의 전공인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에 기대어 낭만적 사랑의 치명적 문제점들을 지적한다. 또한 인류학과 문학, 정체성을 다루는 다양한 학제를 오가며 낭만적 사랑의 병폐를 비판한다.

 

이처럼 낭만적 사랑의 질병으로 가득한 현대 사회의 위기를 드러냄으로써 그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고, 그리하여 지금과는 다른 진실한 사랑에 이르는 길을 찾아야 하는 이유와 방법을 고민하게 한다. 물론 철학사와 다양한 학제를 넘나들면서 만나는 이 길이 수많은 지적인 미로와 그 수만큼의 결들을 가진다는 사실은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좋겠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이는 바로 철학적 질문이며, 이 물음에 답하려고 수많은 철학자들이 노력해왔다. 하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명쾌한 답변이라기보다는 마냥 다양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시시한 답변이란 말은 아니다. 단지 각자의 답변들이 보편적이지 않았기에 모두의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소설가 마르키 드 사드(1740~1814년)는 '사디즘'이란 어원의 창시자(?)이다. 그의 소설 <소돔의 120일>은 사후 발견돼 1904년 출간되었다. 프랑스 루이 14세 치하에서 권력자들이 젊은 남녀 노예를 이끌고 120일간 향락을 벌인다는 내용으로 1부만 완성됐고, 2∼4부는 줄거리가 요약된 미완성 작품이다. 

 

이 책은 교황청 금서로 2세기 가까이 묶였다가 1957년 족쇄가 풀렸고 국내에선 1990년, 2000년에 각각 출판됐지만 금서로 지정되며 절판됐다. 2012년 동서문화사가 재출간한 책도 유통이 금지되는 '유해간행물'이 될 위기에 처했다가 독자들의 항의로 '청소년유해매체물'로 분류돼 시중에 풀렸다. 그는 정상적인 사랑의 형태를 넘어선 근친상간, 잔인함, 동무과의 성교, 동성애 등과 같은 사랑의 방식을 소개했다. 그는 바로 '음란함'을 떠올리는 추문의 상징인 셈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년)는 자연이 허락한 사랑의 형태를 신봉하며 사드가 주장하는 형태의 사랑을 격렬히 거부했다. 즉 오직 출산을 증진하고 자손을 돌보는 이성애의 일부일처제만을 믿으며 자신의 철학에 따라 독특한 삶을 영위한 스콜라학의 황금시대를 구축한 인물이다.

 

18세기의 사드와 13세기의 아퀴나스 중 누가 더 행복했을까? 기독교의 논리라면 아퀴나스는 천국에, 사드는 지옥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퀴나스의 사상을 신봉하던 중세시대의 종교 집행관들은 수많은 이교도異敎徒들을 화형火刑에 처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천국과 지옥 중 어디에 있어야 할까?

 

만약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아마 사랑에 대해 묻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그것과 우연히 마주친다 해도 어떻게 그것이 사랑인지 알 수 있겠는가.

 

이는 플라톤의 대화록 '메논'에 등장하는 '메논의 역설'이다. 플라톤은 이 문제를 신화적 용어를 통해 풀어나간다. 즉 인간은 죽고 다시 태어나는 생과 생 사이에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우주적 지식을 알고 있지만 새로운 세상에 다시 태어나면서 이전의 모든 지식을 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막 사춘기에 접어드는 10~12살의 아이들이 갖고 있는 성에 대한 지식을 살펴보자. 아이들은 이미 무엇을 몰래 해야 하고, 언제 부끄러워해야 마며, 어떤 부분을 감추어야 하는지 충분히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정작 섹스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생물학적으로 아이들의 몸은 아직 오르가즘을 경험하기엔 부족하지만 청년기가 되면 이를 경험하게 된다.

 

성에 대한 사춘기 아이들의 선先지식은 성에 대한 지각은 있지만 그 지각은 어떤 결정적인 지각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선지식은 육체적 차원과 문화적 차원이라는 두 개의 근원으로부터 기인한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육체와 성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각을 가지고 있다. 또 아이들은 성 정체성에 영향을 끼치는 문화적 차원의 무수한 실천들을 겪는다. 예컨대 배변훈련, 성역할의 강요 등이다. 요약하자면 질문을 유도하는 선지식은 태생적인 부분(육체적)과 길러지는 부분(문화, 환경적) 양자의 상호 작용을 통해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오늘날 가장 유행와는 사랑의 스타일은 낭만적 사랑이다. 이는 젊은 날의 열정을 불타게 하며 이 열정을 뜨겁게 지피기 위해 금지된 것을 추구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모순을 감추고 있는데, 새로운 사랑의 전율이 영원하길 바란다는 점이다. 새로움과 영원함은 공존할 수 없으며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서로 사랑한 이유는 그들이 서로에게 금지된 존재였기 때문이다. 금지가 낭만적 사랑의 강도强度를 높이고 열정을 불붙게 한다는 그럴듯한 주장이다. 가질 수 없는 것을 원하는 이유는 그것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럴듯한 주장이 항상 진리를 보장해주지 못한다. 만약 금지가 욕망의 필수적인 요소라면 그것은 욕망을 제한하는 신중함이 금지 안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금지가 종교적 구조 안에서 이해될 때 이것은 신성한 것과 불경한 것을 구분하는 역사적 축적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이때 신성한 것은 신의 이름으로 승인되었던, 불경한 것이라 금지되었던 모든 것을 지칭한다. 결국 문화 안에서 금지야말로 욕망의 생성에 필수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사람의 살은 맹목적으로 스스로를 창조하고 동시에 파괴한다. 이렇듯 살은 자신에게 삶과 죽음을 부여한다. 프로이트는 자기보존적 본능과 성적 본능을 합한 삶의 본능을 에로스Eros라 했고, 공격적인 본능들로 구성되는 죽음의 본능을 타나토스Thanatos라 했다.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뒤얽힘은 신성하고 불경한 것들의 뒤얽힘과 맞물린다. 그리하여 신성함과 불경함은 신체의 살들로부터 분리되어 언어의 살 속에서 자율적으로 변화한다.

 

철학의 가치는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고 그것을 올바르게 생각하는 방식에 있다. 철학에서 설득적이라는 의미는 그 결과와 관계하는 것이므로 나쁜 철학은 안 좋은 행동과 결과, 그리고 불행한 삶을 낳는다. 현재 우리의 문화에 만연한 철학이 결과하는 정당성의 기준에서 명백하게 불행을 낳고 있다면 이제 우리에겐 사랑을 부르는 보다 나은 이름이 필요하다.

 

 

포이에시스적 통찰

 

사랑은 언어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적 구성물이다. 포이에시스가 이야기의 창작의 어원이라면 결국 사랑이란 포이에시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플라톤이 <향연>에서 소개하는 성애性愛는 그리스 미소년들이 일정한 나이에 도달했을 때의 사랑의 합법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1926~1984년)는 이와 달리 당시 성인 귀족들과 소년들과의 관계는 사회적으로 '다소 문제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고 지적한다.

 

현대의 경우 동성애가 합법적으로 인정된다 할지라도 어린아이와의 성애는 성적 관계 자체를 범죄로 취급한다. 성적 활동에 대한 이해는 시대에 따라 매우 대조적이다. 간통에 대한 현대인의 태도가 호손의 '주홍글씨' 시대보다는 관대해진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케네디나 클린턴 같은 유명 인사들의 간통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등장할 때 사랑에 대한 그들의 호소가 결코 간통의 책임을 정당화시켜주는 방어책이 되지 못했다.

 

기독교적인 사랑의 방식은 에로스에서 아가페로의 전환인데, 이 사랑은 소크라테스 초기에 있었던 '섹슈얼리티의 악마화'를 기반으로 한다. 에로틱한 사랑은 육체적으로 친밀한 사랑의 대상이 신성화된 금지에 의해 형이상학적으로 멀어짐으로써 가능하다. 즉 금기가 창조한 공간에서 에로틱한 사랑은 더 강한 생명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아퀴나스는 진실한 사랑은 오직 신성한 결혼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21세기에는 진실한 사랑은 결혼이라는 제한 안에선 불가능하다고 얘기한다. 현대의 에로스는 어떤 대상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그 금지된 대상을 사랑한다. 따라서 이러한 에로스는 언제나 불만족스러운 상태일 수밖에 없다.

 

돈 조반니는 1천 명이 넘는 수많은 여성들과 사귀면서 능숙하게 자신의 정체를 숨겼다. 이런 숨김이 유혹의 본질적인 전략이다. 왜냐하면 자기 은폐는 영원한 사랑의 약속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주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돈 조반니가 사랑을 약속했던 그 순간에는 진실했기에 그를 순수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인들을 꼬시려고 자신까지 속였으므로 진실하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포에이시스적 구성물로서의 낭만적 사랑이 사랑받으려는 자기 자신의 욕망과 충돌한다는 점에서 현대의 이 유일한 사랑의 방식은 본질적으로 진실하지 않은 사랑이다. 이제 우리들에게 남은 대안은 우리 자신의 시詩를 쓰는 일뿐이다. 자신의 삶과 육체가 함께 얽혀 있는 자신의 연인에게 삶과 육체를 서로 드러내고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말이다. 

 

 

성 도덕

 

낙태, 산아제한, 이혼, 동성애의 가치에 반대하는 입장의 배후에는 자연법이 버티고 있다. 자연법의 관점에선 자연이 인간에게 디자인한 목적, 즉 자손 양육을 거스르고 낙태와 산아제한처럼 생명의 탄생에 반하는 시도는 자연의 의도와 명백하게 대조되므로 거부되어야 할 행위들인 것이다.

 

자연법에 기대어 성 도덕을 이해한다면 자위행위, 구강 및 항문 성교, 동물과의 섹스 등 자손의 번영을 도모하지 않는 모든 성적 행위는 부정되어야만 한다. 나아가 나이가 많은 상대와의 성교나 정액을 낭비하는 성교 역시 비난의 대상이 된다. 따랏 자연법 사상이 금지하는 근친상간, 혼전 괸계, 성적 문란, 매춘, 포르노그래피 등까지 확대된다.

 

행복을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하는 고전적 미덕인 실천적 지혜신중함과 함께 진정성이나 에로스를 악마적인 특성과 연결시키지 않는 새로운 미덕을 택해야 할 것이다. 태양을 그대로 바라봄녀 눈이 멀기 때문에 일식을 관찰할 때엔 필터를 이용하는 것처럼 생식기관도 마찬가지다. 삽입의 성관계가 몸에서 몸으로 세균을 옮겨 자연을 휘청이게 하는 강력한 통로임을 명심해야 한다.

 

 

섹슈얼리티에 관한 악마화

 

우리 시대는 여전히 섹슈얼리티에 대한 기독교적 악마화를 하나의 진리로 간주한다. 섹스는 인간을 동물, 덧없음, 쇠퇴, 죽음과 연결시켜주는 육체적 현상 중의 하나이다. 섹스는 모든 신성하고 정신적ㅇ이고 순수하고 불변하는 것의 반대에 있는 것이다. 섹스의 가치만을 독립적으로 고려했을 때 이것은 전적으로 부정적이다. 섹스를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오직 종의 번식을 통해 영원성에 봉사하는 것뿐이다.

 

관용의 정치학은 성애의 가치문제를 혼동하게 하는 또 다른 금지에 의해 제한받는다. 저자는 이 금지를 '섹스의 악마화'라고 부른다. 즉 섹스에 관한 전면적인 부정은 자연법 이론을 떠올리게 하지만 섹스의 악마화와 자연법의 이론은 구별된다. 자연법 이론은 섹스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특정한 성행위는 지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섹스를 그 자체로 나쁜 것으로 생각하는 상징주의를 버려야 한다. 10대들의 임신에 대해선 도덕적 차원에서 비난하기보다는 차라리 콘돔을 나눠주며 대처하게 만들고, 에이즈가 얼마나 위험한 질병인가에 대한 연구를 통해 문제를 공감해 나가야 한다. 성적인 문제들을 죄의식을 갖고 대응하기보다는 교육이나 조사를 통해서 실용주의적으로 해결해나갈 때에 성 도덕을 고양할 수 있다. 

 

 

낭만적 사랑과 상호주관성

 

낭만적 사랑은 유기체의 한 부분인 연인의 신체, 욕망, 변화를 보지 않고 상대를 이상화하는 무지의 베일 안에서 두근거림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사랑이다. 따라서 이제 그 무지의 장막을 걷고, 연인의 신체에 대한 앎을 추구하려는 노력을 통해 지금보다 진실한 사랑의 이름, 아니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해야 한다. 영원한 두근거림이 진실한 사랑의 이상이라면, 그 사랑은 상대의 눈에 비친 아름다움의 절정,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는 이 우주적 진리는 무시한 채 모든 것이 동결된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이처럼 필연적으로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로맨스의 특징은 그 자체로는 내적 모순을, 삶의 차원에서는 위험적 요소로서 작동하게 된다. 살아있는 신체가 아니라 이상화된 박제 속의 환상으로 연인을 이해하는 사랑은 사랑의 감정을 사랑하는 것, 그 전율을 사랑하기 위해 상대를 도구화하는 수단적 사랑에 불과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연인의 신체에 대한 앎의 노력과 그것에 기반한 사랑은 시간의 누적을 통해 서로의 역사를 공유하게 하며 하나의 전체인 동반자의 신체적 정체성을 하나의 스타일로서 이해하게 한다. 이처럼 상대에 대한 무지는 곧 사랑의 불가능성이며 진실한 사랑은 연인의 신체에 대한 앎을 통해 강해지는 것이다.


동일한 이유에서 저자는 육체적 관계로서의 사랑, 성애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즉 진실한 사랑에 이르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으로서 연인의 신체에 대한 지식을 강조하고 이때 신체적 지식을 얻기 위한 중요한 소통의 통로로써 성애에 주목한다. 자신이 느끼는 감각과 느낌을 상대와 함께 나눌 수 있다는 지각의 가능성은 데카르트적 주체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으며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으로서의 주체의 이해로 이끈다.

 

이때 상호주관성로서의 주체는 연인을 자신의 쾌락을 산출하기 위한 객체로서 또는 나의 쾌락과 무관한 수단적 대상으로서 여기는 게 아니라 그 상황을 함께 하는 상호 이해적 관계로 이끌 수 있는 주체를 의미한다. 이러한 상호주관적 주체라는 인식적 전환의 계기를 성애에서 발견하는 저자에게 성애는 악이 아니며, 재생산을 위한 불가피한 의무도 아니며, 피부의 마찰을 통해서 얻어지기에 폄하되는 동물적 쾌락도, 더러운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자신의 오른손으로 왼손을 만질 때의 느낌, 혹은 내가 연인의 손을 느낄 때의 그 촉감과 온도를 상기해보자. 이때 무엇이 만지는 주체이고 무엇이 만져지는 객체인가? 신체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이 경계를 넘나드는 인식의 구체성은 비록 이성적 인식에 비한다면 애매하지만 이것은 인식의 하등함과는 전혀 다른 것이며 오히려 근본적 인식을 지칭하는 또 다른 인식의 형태를 지칭한다. 신체의 현상학에 기반한 이러한 저자의 결론은 프랑스 철학자이자 '몸의 현상학자'인 모리스 메를로 퐁티(1908~1961년)의 사상에 크게 빚지고 있다.


성애의 악마화는 비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애를 일반 도덕과 다른 중요성을 가지는 행위로서 특권화시키지도 않는다는 의미에서 저자는 인간이 유한성을 가진 유기체라는 사실을 명심하면서 자연의 법칙 밖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어리석은 태도를 피하고, 과학이 인간에 대해 알려준 지식의 내용을 참고하는 현명함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곧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자연법은 틀렸지만 인간의 신체는 자연의 법칙의 지배를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명심함으로써 보다 유효한 도덕이 가능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결론


결론적으로 저자는 과학기술의 성과가 알려준 신체에 대한 앎을 인지하면서, 즉 과학이 말하는 일종의 상식, 즉 너무 많은 파트너의 수와 질병의 위험성 등을 무시하는 성행위는 피해야 하지만 동시에 성애의 악마화라는 현대 사회의 문화에 희생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성도덕이라는 특수한 영역이 아니라 일반 도덕의 보편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주장은 성애를 재생산의 기능으로 해석하는 과거 자연법적 이해나 프로이트적 콤플렉스에 대한 논의를 넘어서 쾌락, 친밀함, 이해와 소통이라는 다양한 스펙트럼 안에 성애를 위치시킴으로써 그것의 구체적 양태를 도출하고자 한다. 


이 책의 특징은 실용성에 있다. 로맨스의 내적 모순을 서구 철학사에서 발견함으로써 신체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강조했다는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점은 삶이라는 인간 실존에 있어서 성애의 함축적 의미와 가치를 철학적으로 담론화하고 그것의 실천과 수행에 대한 접근방식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문화 전반에 있어서, 일상에서도 금기시되고 악마화되었던 성애를 전면에 드러냄으로써 성애가 재생산의 목적이 아니라 쾌락과 소통, 친근함과 삶의 이해라는 철학적 실용성이다. 이 실용성은 성애의 문제가 곧 사랑의 문제이고, 이것이 삶의 문제임을 일러준다는 점에서 삶의 기술적 실용성이기도 하다.


플라토닉 사랑의 본래적 의미가 우리가 흔히 아는 정신적 차원의 교감이 아니라 육체적 사랑을 통해 정신적 차원의 사랑까지 완성되듯, 성애 역시 유기체의 목적에 전적으로 지배되지 않는 삶의 자리에서 신체에 대한 앎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성애를 통해 주제화된 이러한 신체의 정체성은 곧 연인의 몸짓, 신체적 의도와 특징들, 그리고 그로부터 수반되는 모든 의도적 행위의 누적으로서의 스타일을 의미하며 이것은 삶의 모든 국면에서 드러나는 자기 자신이다.

 

사랑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다름 아닌 사랑에 빠진 그들이며. 그들의 몸이며, 그 살들에 축적되어 그들이 함께 만들어온 역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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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봉은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 경제학자 우석훈이 밝힌 잔혹한 "대한민국 연봉" 이야기
우석훈 지음 / 새로운현재(메가스터디북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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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각자의 연봉에 대해 혹은 우리 모두의 임금에 대해 너무 이야기를 안 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연봉이 너무 높아서 내놓고 말하기가 불편할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은 정말 형편없어 보이는 자신의 시급을 밝히는 게 싫어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종류의 사람들은 이미 정부에서 다 결정한 것이라서 말을 하나마나인 경우라 굳이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셰프의 실력과 식당의 맛에 대해 이야기기를 하면 할수록 그쪽으로 자원이 더 많이 들어가는 것처럼 우리가 연봉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부당한 일들이 줄어들 고 결국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의 연봉이 올라가게 된다. - '들어가는 말' 중에서

 

 

당신의 연봉은 적정합니까?

 

아주 극소수를 제외하면 한국인의 삶을 결정짓는 가장 큰 요소는 연봉과 같은 임금 수준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음식에 관해 이야기 하는 것의 1/100 정도를 연봉과 관련된 삶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당장 직장에서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실랑이를 하면서 고민하는 시간과 전체의 연봉 수준이나 결정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생각해보자. 동료들과 자신의 연봉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 단 1분도 안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음식에 대해 이야기를 사회적으로 많이 하면 약간이라도 음식 맛도 좋아지고 장기적으로는 위생과 청결 문제도 나아질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관심이 높기 때문이다. 간단한 이치이다. 연봉과 임금에 관한 얘기를 우리들이 더 많이 더 자주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부당한 일들이 줄어들고 많은 사람들의 연봉이 올라가게 된다.

 

얼마 전에 신문 기사와 인터넷에 운전기사를 폭행한 기업주의 얘기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그렇다. 몽고간장 오너의 갑질 폭행 사건이었다. 땅콩 때문에 많은 승객들이 탑승한 여객기를 제맘대로 회항시켜 온 국민의 공분을 샀던 사건이 수면 아래로 잠기나싶더니 새로운 사건이 고개를 들고 나타났다. '땅콩회항' 사건은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었기에 관련자가 응당한 처벌을 받았다. 그리 많지 않은 임금을 받고서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심정으로 온갖 모욕과 수치감을 몸으로 받아들인 기사님의 처우에 대해 우린 떠들어야 한다.

 

이제부터는 우리들의 삶이 더 이상 초라하지 않도록 맛집이나 맛있는 음식에 관한 대화 시간만큼이나 부당하게 대접받고 있는 우리들의 연봉 얘기에 시간을 좀 할애보자. 옛말에도 '우는 아이 젖 물린다'고 했다. 치사하게 울진 않더라도 정확한 현실에 관한 대화와 수다들이 필요한 때이다.

 

책의 저자 우석훈은 이미 우리들에게 <88만원 세대>라는 책으로 제법 알려진 자칭 C급 경제학자로 함께 잘사는 방법을 모색한다. 젊은 시절, '왜 사는가'라는 물음 앞에 돌보고 베풀고 함께 잘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게 스스로 잘살 수 있는 방법이라 믿으며 남들이 권하는 일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일을 개척해왔다.

 

프랑스 파리10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으며 현대환경연구원, 에너지관리공단을 거쳐 유엔 기후변화협약의 정책분과 의장과 기술이전분과 이사로 수년간 국제협상에 참가했다. 이후 자신의 이름을 걸고 발언할 수

 

 

 

 

 

 

 

 

 

 

 

 

한국에서는 연봉을 바라보는 기업들의 시선은 무얼까? 100인 이상 사업장에 대해 한국경영자총협회에서는 매년 임금 조정 실태조사를 한다. 기업 입장에서 자신들이 연봉을 조정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답변한 것을 모은 것이다. 그해 연봉 조정에 관한 기업의 시각이라고 보면 크게 무리가 없다. 아래는 2015년 조사에서의 연봉 결정 변수이다.

 
1. 기업 지불 능력(30.2%)
2. 최저임금 인상률(20.1%)
3. 타 기업 임금 수준 및 조정 결과(15.2%)
4. 물가상승률(10.6%)
5. 경영계 임금 조정 권고(8.1%)
6. 노조의 요구(6.4%)
7. 통상임금 범위 조정(5.9%)
8. 60세 정년 의무화(3.4%)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노조의 요구'가 그렇게 높은 비율을 차지 하지는 않았고, 최저임금 인상률이 생각보다 높게 나왔다. 100인 이상 기업이면 전부 대기업이라고 하기는 어렵고, 중견기업 규모도 상당수 포함된 것인데, 그해에 최저임금이 얼마나 인상되었는가가 20퍼센트 넘게 주요 변수로 고려된다는 것은 진짜로 흥미로운 시사점이다.

 

조사 결과 전체를 해석해보자. 회사는 "돈 없으니까 배 째라"(기업 지불 능력)고 말한다. 그러면 노동자는 "그래도 최저임금 인상 수준 정도는 올려주는 게 상식에 맞지 않느냐"(최저임금 인상률)며 "다른 곳도 이 정도는 주는데"(타 기업 임금 수준 및 조정 결과)라고 맞받아친다.

 

만약에 그해 최저임금이 별로 오르지 않았고 다른 기업들도 임금을 별로 높이지 않았다면 회사 측에 유리한 임금 결정 구도가 펼쳐질 수밖에 없다. 연봉 결정 변수의 6위를 차지한 '노조의 요구'는 씨알이 먹히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히 회사 입장에선 "꼼짝 말라"라고 말할 수 있다. 

 

교과서에는 연봉을 결정하는 두 변수가 노동생산성과 물가상승률이라고 적혀 있지만, 현실은 다르다. 노동생산성이 높아져 회사의 이윤이 늘어났다고 임금도 올려줄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는 잠시 접어두자. 물가가 상승해 살림살이가 더 팍팍해졌으니 회사가 이타심을 발휘해 임금을 올려 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도 마찬가지다.

 

 

2013년 기준으로 저임금 노동자 비율이 미국(25%), 한국(24.7%)로 OECD 국가 중 1, 2위를 다툰다. 참고로 2003년도 한국의 수치는 24.9%였다. 전형적인 저임금 노동 구조임을 알 수 있다.

 

 

연봉과 규모의 상관관계

 

연봉의 기준이 300만 원 밑으로 내려오면 이제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한다. 예술, 스포츠, 여가 분야도 다시 등장한다. 국악, 스포츠, 이런 분야들이 대표적인 박봉이라고 하는데, 실제로도 그렇다. 사람들이 문화생활에 돈을 쓰지 않으니까 당연히 이런 쪽이 박봉을 형성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문화행정은 제대로 되는가? 맨날 대통령 친구 아니면 누군가 챙겨주는 자리로 행정이 운영되니까, 당분간 개선될 가능성이 별로 보이지는 않는다.

 
전자부품을 만드는 직종도 규모가 작아지면 이 구간으로 들어온다. 30인 이하의 의료정밀 분야도 딱 여기다. 100인 이하의 숙박업도 여기에 속한다.

 
30인 이하의 소매업은 200만 원 중반대를 형성한다. 30인 이하의 육상 운송, 흔히 말하는 전세버스 회사들이나 소규모 택시회사가 여기에 해당 한다. 인쇄 및 기록업종, 흔히 말하는 인쇄소도 딱 이 가운데이다. 먹고살기가 쉽지 않다. 100인 이하의 보건업은 여기 딱 한가운데에 있다.

 
좀 더 밑으로 내려가 보자. 100인 이하의 가죽 및 신발 업체들이 여기 나온다. 이탈리아, 프랑스를 모델로 하는 대표적인 '마에스트로' 업종인데, 한국에서는 먹고살기가 쉽지 않다. 100인 이하의 사회 복지서비스도 이 구간에 들어가 있다. 복지를 수행하는 사람들 스스로가 복지의 대상인 상황, 딱 그렇다.

 
10인 이하의 건설업이라면 이제 200만 원 초반대로 내려온다. 교육 서비스업도 10인 이하라면 역시 이 구간에 있다. 동네 어귀에 있는 작은 보습학원들, 그런 사람들이 이 정도 받는다고 보면 된다. 식료품 제조업도 10인 이하라면 이 구간으로 들어간다. 맨날 '영세사업'이라는 별칭을 받으면서 "먹는 거 가지고 장난치면 사형이야", 이런 얘기 듣는 업종이다. 그렇지만 마을기업이나 농촌기업이라고 할 때, 지역과 농촌에서 해볼 수 있는 지역경제의 주력 업종이 또 바로 이 분야이기도 하다. 시장과 사회, 그 중간에 걸쳐 있는 영역이다.

 

 

 

주주 자본주의와 모럴 헤저드

 

1990년대까지 재벌 회사의 오너들은 자신의 월급을 1억 미만, 정말 터무니없이 낮은 수준으로 정했다. 회장이 그렇게 조금 받는다는데, 계열사 사장들이라고 더 많이 받을 수가 있나? 그렇게 하다 보니 임원이라고 해봐야 요즘 기준으로 하면 형편없는 월급들을 받았다. 물론 이렇게 저렇게 서로 조금씩 더 챙겨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요즘처럼 연봉이 수십억 원이 나 하는 수준은 아니다. 그 시절에 임원은 '임시 직원'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였다. 부장에서 임원으로 올라가봐야 갑자기 월급이 몇 배로 올라가 는 것도 아닌데, 이제 매년 해고의 위기를 맞는다. 그래서 과장이나 차장 말기부터 부장으로 어떻게 하면 천천히 올라갈 것인지 고민하는, 정말 옛날 얘기 같은 시절이 있었다.

 
요즘은 다르다. '열심히 일하면 먼저 잘리고, 그냥 있으면 바로 잘린다', 이게 요즘 대기업에서 유행하는 얘기이다. 열심히 일해서 임원으로 승진해도 정말 소수를 제외하면 정년 이전에 먼저 잘리게 된다. 그렇다고 그냥 있으면? 정년은커녕 부장까지 가보지도 못하고 바로 잘린다.

 
주주 자본주의에 의하여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던 대기업 임원들의 연봉에 대한 대중의 불만이 일순간에 폭발한 것은 2008년의 일이다. 리만 브라더스의 파산으로 주요 금융기관에 공적자금이 투입되어 겨우겨우 부도만을 면하고 있던 시기, 임원들이 보너스를 받는 일이 벌어졌다.

 

2008년 대기업 임원들 연봉에 대한 불만이 결국 터져 나왔다. 미국, EU 등 각 국가에서 임원들의 연봉을 공개하고, 지나치게 많은 보너스를 받지 못하도록 제약하자는 제안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흐름이 가장 가시적이며 공개적으로 진행된 것이 2013년의 스위스 국민투표까지 상정된 소위 '살찐 고양이법'이었다. 즉 최하 임금과 최고 임금을 12배가 초과되지 않도록 하자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해 가을 67.9퍼센트의 반대로 법안이 통과되지 못했다.

 

 

연봉공개주의, 우리도 좀 알자

 

한국에선 오랫동안 연공서열제를 월급의 기준으로 사용하였다. 연공서열제에서는 월급을 공개할 것이냐 말 것이냐는 의미가 없다. 입사연도와 직책만 알면 대체적인 월급을 알 수 있다. 지금도 공무원들의 월급은 공무원 월급표를 보면 쭉 나온다. 여기에 약간의 수당과 성과급 정도에 따라서 개인별로 좀 차이가 나지만 기본적인 임금 규모는 다 공개되었다.

 

 
대통령과 장관 등 고위공무원은 연봉을 받게 되어있는데, 이것도 연봉표로 다 공개된다. 우리가 살았던 세상은 이런 세상이었다. IMF 경제 위기 이후 부분적으로 연봉제라는 것이 도입되면서 은근슬쩍 들어온 제도가 있다. 연봉 비밀주의! 다음의 연봉계약서를 한번 보자.

 

 
조항5비밀유지에 관한 조항이다. 연봉제 도입과 함께 비밀유지 조항 도 같이 들어가게 되었다. 유리지갑이라는 표현은 월급에 대한 이중적 표현이다. 국세청도 월급을 정확히 알지만 다른 사람들도 다 안다. 2000년대 들어 연봉 비밀주의가 전면화되면서 이제 옆자리 동료의 연봉도 모르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전 세계에서 이런 식으로 근로계약서를 쓰는 게 보편화된 나라는 미국과 한국, 두 곳이다. 원래 미국도 이 같은 방식을 채택했지만 최근 연봉비밀주의 대신 연봉공개주의 쪽으로 넘어가는 중이다. 부작용이 많기 때문이다. 유럽은 EU 차원에서 근로 표준계약서를 권고한다. 국가별로도 표준계약서를 권고한다. 이 표준계약서에는 비밀유지에 관한 단서조항이 없다.

 

 
한국은 어떨까? 두 가지 흐름이 진행 중이다. 각자 알아서 하도록 한 수 많은 근로계약서 방식에는 문제점이 많았다. 예를 들면 연예기획사와 스타들과의 노예계약이라 불리는 것이 개별적으로 이루어진 기형적 계약이다. 사장이 당연히 갑이고 근로자는 을인데, 갑질도 보통 갑질이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영화 스태프들의 계약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표준계약서 방식으로 가는 중이다. 근로계약도 그중의 하나이다.

 

 

 

응답하라 2016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은 한국에 중산층 형성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를 그리고 있다. 언젠가 시간이 흘러 <응답하라 2016>이 만들어진다면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그려질까? 1988년보다 집의 외형이나 가구는 훨씬 더 좋아졌지만 마음 속 여유가 훨씬 더 팍팍해진 상태로 묘사될 것이라고 저자는 전망한다.

 

드라마 속 주인공인 '성덕선'의 남편이 누가 될지보다 오히려 어떤 직업을 가지게 될지 더 궁금하다. 과연 그녀가 좋은 대학에 가서 결국 좋은 직장을 가지게 된다는 뻔한 레퍼토리로 갈 것인지, 아니면 리얼리티를 높여 대입에는 실패하지만 밝고 인간적인 그녀의 캐릭터를 살려 기가 막힌 반전과 함께 고연봉 전문직이 될 것인지가 관심이다.

 

물론 돈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치는 않는다. 높은 연봉이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최소한 한국에서 연봉이 낮아지면 불행하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평균 연봉이 매우 낮은 저개발국가와 아주 높은 고소득국가, 양쪽 모두에서 연봉과 개인적 행복 간의 상관관계가 약해진다. 이 중간쯤에 위치한 한국의 경우는 연봉과 행복 간의 관계가 가장 높을 것이다. 더 발전한다면 우리도 대부분 돈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자면 한국은 더 발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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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날들
이형동 글.그림 / 별글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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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에게 나의 시선으로 바라본 평범하지만, 흔하지 않은 내 일상들을 이야기할 것이다. 적어도 이제는, 나에게 참 좋은 날이 된 하루들이다. 그동안 내가 탐험한 이야기가 당신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면 더 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내가 바라본 세상을 통해 당신도, 당신만의 세상을 발견할 수 있는 시선을 갖길 바란다. 소소하지만, 누군가에게 기분 좋은 발견이 되고, 저마다의 하루를 다시 추억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꿈꿔 본다. - '프롤로그' 중에서

 

 

우리 모두는 외로운 탐험가

 

책의 저자 이형동은 '일상의 감성'을 엄선해 소개하는 '감성 큐레이터'의 역할을 자처한다. 즉 자신의 어린 시절과 지난 사랑의 날들, 여행, 음식, 직장 생활, 음악, 영화, 공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재로 '참 좋은 날들'의 이야기를 ?친다. 지극히 평범한 날들 속에서 아주 특별한 감성을 길어 올려, 때로는 영화처럼 때로는 음악처럼 잔잔하면서도 감각적인 따뜻한 일상으로 우리들을 초대한다.

 

그는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광고홍보학을 전공하고 늦게 사회에 입문해 감성 쇼핑몰 텐바이텐에서 3년 간 근무하고, 현재 피키캐스트 마케팅팀에서 일하고 있다. 2012년, 한 월간지에 칼럼을 연재하면서 이때 쓴 원고를 토대로 감성적인 소품을 소개한 <탐난다>를 출간했다. 두 번째로출간한 이 책은 단순한 '감성팔이'나 '추억팔이'가 아닌, 독특한 사고방식과 자신만의 감성으

 

 

 

 

 

 

 

 

 

 

 

 

 

"야근이요? 아, 네. 괜찮습니다"

 

일찍 들어가 집에서 쉬고 싶었지만 저자는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이 거짓말은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그 '거짓말'과 성격이 다르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처세술'이다. 이런 행동을 잘 하지 못하는 직장인은 사회성이 부족하다고 낙인이 찍히게 마련이다.

 

아니다. 하나도 괜찮지 않다. 따지고 보면 불합리하고, 힘들고 불편하다. 전혀 괜찮지 않다. 지금 당장 너무 힘들고, 오늘만큼은 일찍 퇴근해 쉬고 싶다. 그러나 습관적으로 괜찮다는 말이 튀어나온다. 만약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게 사회생활이라고 말한다면, 사회생활을 매우 잘하고 있는 사람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생활의 능력치가 높은 사람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 말들이 습관처럼 튀어나온다는 건 최소한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만큼 자신감이 부족해서일지도 모른다. 정말 괜찮은 걸까. 오늘 정말 괜찮은 걸까. 앞으로도 괜찮을 수 있을까?

 

 

호의

 

때로는 영화보다 영화 속 대사가 더 유명해지곤 한다. 흥행에 상관없이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시간이 지나 재조명 받는 경우도 있다. 지금 말하려고 하는 영화도 그렇다. 배우 황정민과 류승범이 주연을 맡아 연기 대결을 펼쳤던 영화 <부당거래>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호의가 계속되면 그것이 권리인 줄 알아"

 

이 짧은 대사는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공감을 얻으며 여러 상황에서 회자되곤 한다. 일상 속 많은 관계에 적용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 간, 친구 사이, 선배와 후배, 선임과 후임, 스승과 제자, 비즈니스 파트너 관계, 점원과 고객 등 대부분의 관계에서 쓸 수 있는 말이다. 기가 막힌 대사다.

 

 

 

 

루체른의 주말

 

신혼여행으로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그리고 스위스의 인터라켄, 루체른에 갔다.  이는 물론 저자의 얘기다. 인터라켄 '융프라우'의 감동을 뒤로 하고, 루체른 기차역에 도착했다. 역 앞으로 나오면 눈앞에 로이스강이 흐르고 있고, 오래된 목조교인 카펠교와 강가의 호텔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는 아내와 함께 들뜬 마음에 서둘러 짐을 풀고 도시 구경에 나섰다. 루체른은 평일이나 주말을 가리지 않고 늘 사람들이 붐비는 관광도시다. 쇼핑을 뒤로 한 채 걷고 또 걸으며 도시를 눈으로 구경했다. 다섯 시간 쯤 걸었다. 해 질 녘, 부부는 식사를 위해 번화가로 들어섰다. 토요일인데 상가들이 모두 문을 닫고 있었다. 이상했다.

 

하지만 그들에겐 이게 정상이었다. 주말은 진정'자기를 위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관광객이 몰려 올지라도  누구나 자신만의 시간을 보장받고 즐겁게 이를 누리고 있었다. 식당으로 둘어섰다. 현악 4중주가 흘러나왔다. 먹음직한 음식을 주문하고 나니 한 정치인의 캐치프레이즈가 떠올랐다.

 

 

 

왼손을 위한 선물

 

때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유명했던 피아니스트 비트겐슈타인은 전쟁 중, 오른팔을 잃는 중상을 입는다. 피아니스트에게 팔을 빼앗기는 일만큼 절망적인 것이 있을까. 그 소식을 들은 라벨은 그를 위한 곡을 만들어 헌정한다. 한 손으로 칠 수 있지만 결코 쉽지 않은 곡,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남아 있는 왼손으로 이 곡을 연주하고, 다시 한 번 유명세를 얻는다. 라벨을 통해 제2의 인생을 선물 받게 된 것이다.

 

신이 아닌,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 저자는 강연을 들으며 이 곡이 그런 선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러한 선물을 받는 것보다, 줄 수 있는 것이 훨씬 큰 축복일 것이다. 그는 자신도 누군가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왼손일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좋은 사람

 

외근에서 돌아오는 길에 팀장이 저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주위에서 욕을 먹어야 성공해. 좋은 사람 소리 들으면 경쟁력이 없는 거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이 말이 참으로 씁쓸하게 느껴졌다. 마치 공존이 불가능하므로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는 말로 들렸다.

 

그는 여전히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었다. 여기저기서 욕을 많이 먹으면서가지 오래 살고 싶은 생각도 없다. 어떤 누군가는 그를 좋은 기억으로 담아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 더 노력할 것이다. 성공하는 것보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게 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오천 원

 

"이 꽃 한 묶음에 얼마예요? 한 다발 말고, 한 묶음이요"

 

4월, 인사동 거리를 걷던 한 아가씨는 망설이듯한 발걸음을 트럭으로 옮겼다. 현금이 얼마 없었고, 트럭에는 카드 단말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저씨는 손으로 한 묶음을 잡더니, "오천 원이오"라고 답했다. 그 한 묶음은 정말 작아 보였다. 지갑에 있던 현금은 달랑 오천 원이 전부였고, 순간 살지 말지 꽤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런 그녀를 본 주인아저씨가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아가씨는 오천 원으로 봄을 사는 거예요" 오천 원으로 봄을 사는 것. 그 한마디에 그녀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오천 원을 냈다. 그리고 아저씨에게 봄을 건네받았다. 다시 길을 걷는 그녀의 손에는 작지만 싱그러운 봄 한 묶음이 들려 있었다.

 

 

지금 오천 원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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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지 메이커 - 세상을 전복하고 새로운 규칙을 만드는 변화의 창조자들
이나리 지음 / 와이즈베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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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평생 직장이라는 에스컬레이터는 없다. 부몬님 세대의 성공 방정식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리드 호드먼의 말마따나 나 자신이라는 스타트업을 경영해야 한다. 시장의 변화를 읽고, 민첩하게 움직이며, 합리적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이제야말로 한 번쯤 남만의 승부를 걸어볼 만한 때가 된 것이다. 단, 체인지 메이커여야 한다. - '저자 서문' 중에서

 

 

창업가 정신을 찾아가는 여행

 

'기회를 포착해, 난관과 역경을 뚫고, 혁신적 사고와 행동으로, 새 가치를 창출하는 것'

 

책의 저자 이나리가 정의한 '창업가 정신'이다. 그녀는 

 

 

 

 

 

 

 

 

 

그들은 '무엇을 아느냐' 보다는 '누구를 아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하며 때로는 엄청난 비난과 갈등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변화를 위한 새로운 질서를 정립하려고 노력한 사람들이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실패로부터 배우며 가끔 '미친 결정'을 내리기도 하지만 합리적으로 위험을 감수하면서 시장의 변화를 읽고, 민첩하게 움직이며 세상을 바꾸어 나간다. 

 

 

 

 

 

드롭박스의 드루 휴스턴

 

드롭박스의 젊은 창업자 드루 휴스턴은 실리콘밸리의 진정한 '록 스타'로 인정받는다. 이 회사는 2014년 초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을 비롯해 골드먼삭스, 세쿼이어캐피털 등 유수 투자자들로부터 총 2억5000만 달러를 유치했다. 기업 가치는 무려 100억 달러. 최대 주주인 그의 자산도 1조3000억원대로 불었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이 회사가 기업공개를 할 경우 트위터의 가치를 가뿐히 제압하는 '잭팟'을 터뜨리라 예상한다. 

 

무엇보다 드롭박스는 구글, 애플, 페이스북, 세일즈포스닷컴처럼 '플랫폼'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 수많은 파트너를 제안으로 끌어들여 독자적 생태계를 구축 중인 것이다. 꿈이 큰 휴스턴은 이미 수 차례의 강력한 M&A 유혹을 이겨냈다. 제안자 중에는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도 있었다.

도대체 드롭박스가 뭐길래? 이는 쉽게 말해 각종 파일을 PC는 물론 스마트폰, 태블릿 등 인터넷으로 연결된 온갖 기기에서 자유롭게 넣고 빼고 공유할 수 있는 서비스다. 어떤 기기에서든 사진이나 문서를 '드롭박스' 폴더에 집어넣으면 연결된 모든 기기로 순식간에 업로드 된다. 여러 사람이 한 계정에 접속해 실시간 공동작업을 할 수도 있다.

 

USB 메모리를 들고 다닐 필요가 없으며, 이메일이나 포털 사이트에 로그인해 파일을 올리고 내리는 수고도 할 필요 없다. 2기가바이트의 저장 공간을 무료 제공하고, 윈도부터 안드로이드까지 거의 모든 운영체제를 지원한다. 현재 2억 명 이상이 사용하는, 세계 최대의 파일 공유 서비스다.

 



그가 밟아온 길은 21세기 성공 창업자의 교과서만 같다. 하버드대 출신 엔지니어 아버지와 도서관 사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보스턴 근교에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5살 때 어린이용 IBM 컴퓨터를 선물받은 것을 계기로 프로그래밍에 빠져들었고, 열두 살 때 게임을 하던 중 발견한 버그를 제작사에 알려 임시 직원에 발탁되기도 했다.

 

공부를 잘해 SAT 1600점 만점으로 MIT 컴퓨터공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서도 오직 관심은 프로그래밍과 창업이었다. 주말이면 관련 서적을 수북이 쌓아놓고 읽는 것은 물론 저학년 때부터 이런저런 창업에 도전했지만 길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몇몇 스타트업에서 일하며 자기만의 비전을 찾아 헤맸다.

 

어느 날 보스턴에서 뉴욕으로 가기 위해 기차역을 찾은 그는 작업 내용이 담긴 USB메모리를 가져오지 않은 걸 깨달았다. 낭패감에 휩싸인 중 갑자기 '각종 파일을 간편하게 공유할 수 있는 서비스가 있다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드롭박스 홈페이지를 보면 그가 '보스턴 기차역에서 (드롭박스 소프트웨어의) 코드 첫 줄을 썼다'고 설명한다.


 

드디어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를 찾은 그는 2007년 실리콘밸리로 이주한다. 이어 세계 최초이자 최고 수준의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인 'Y콤비네이터'(YC)에 도전한다. 당시 그가 YC의 액셀러레이팅(보육) 대상이 되기 위해 제출한 지원서 내용은 그 패기와 통찰력, 간결하지만 강력한 메시지로 인해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됐다.

 

지원서를 살펴보면 그가 당시 이미 스마트폰을 비롯한 각종 인터넷 기기가 우리 일상은 물론 업무 영역 전반을 지배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예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미 여러 파일 공유 서비스가 출시됐으나 일반인도 쉽게 접근하고 부담 없이 쓸 수 있는 제품이 없음을 강조했다.

 

그의 문제의식과 해법은 YC의 인정을 받아 철저한 멘토링은 물론 적지 않은 투자까지 받게 된다. 대신 YC의 요구와 그 자신의 필요에 따라 공동 창업자를 물색한다. 이란 난민 가정에서 태어난 MIT 후배 아라시 페르도시였다. 이 후배는 고작 6개월 남겨놓은 대학 졸업을 포기하고 실리콘 밸리로 달려온다. 그는 현재도 드롭박스 최고기술책임자CTO다.

드롭박스가 처음부터 엄청난 주목을 받은 건 아니었다. 초기 고객 물색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일껏 투자받은 돈을 온라인 광고비로 허비하던 중 휴스턴은 색다른 방식을 고안한다. 유머러스한 코멘트와 함께 시제품을 홍보하는 동영상을 찍어 얼리어답터들이 자주 가는 사이트에 올린 것이다. 이를 통해 들어온 사용자 피드백을 반영해 제품을 개선한 뒤 또 후속 비디오를 올렸다. 아이디어를 빠르게 실행해 시제품을 만들고 시장 반응을 통해 완성도를 높여가는 것. 이른바 '린 스타트업Lean Startup' 방식의 모범 사례라 할 만하다.

이후 드롭박스는 뛰어난 기능과 편리한 사용자환경 디자인, 무료와 유료로 이원화된 요금 설계, 빠른 동기화 속도와 안정성, 사용자가 또 다른 사용자를 추천하면 양측에 무료 데이터를 추가 제공하는 마케팅, 외부 개발자나 기업들이 관련 서비스를 쉽게 개발할 수 있도록 하는 개방 정책 등으로 시장을 장악했다.

2013년 휴스턴은 MIT 졸업식에서 축사를 했다. 핵심 메시지는 세 가지였다. 첫째, 테니스 공을 쫓아 목줄이 끊길 지경으로 달려가는 강아지처럼 꿈에 집중하라. 둘째, 삶을 완벽하게 만들려 하지 말고 재미있게 만들어라. 셋째, "1분만 생각해 보라. 당신이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5명의 사람(circle of 5)은 누구인가?" 이 중 세 번째 메세지는 무척 인상적이다. 

그는 재능 또는 노력만큼이나 어울리는 사람이 누구이냐가 중요하며, 그것이 사람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실제 곁에 함께 있진 않더라도 꿈꾸며 닮고 싶어하는 사람 또한 '당신의 인맥'이라고 강조했다. 나의 서클은 누구이며, 누구를 롤 모델로 삼아야 할 것인가. 이번 주말을 바쳐서라도 고민해 볼 만한 주제인 듯하다.

 

 

창업자의 스승, 폴 그레이엄

 

스타트업은 신생기업을 뜻한다. 엑셀러레이터는 초기 자금, 멘토링, 네트워크 등을 제공하는 스타트업 육성 시스템이다. 이 단계를 잘 마치면 벤처캐피털, 즉 창업투자사의 본격적인 투자 대상이 된다. 이후 성공적인 기업 경영으로 증권시장에 상장되거나 높은 가치로 인수합병이 될 때 이를 엑시트라고 부른다.

 

와이컴비네이터YC는 세계 최초의 엑셀러레이터다. 실리콘밸리의 창업 역사는 YC를 중심으로 전후前後가 나뉜다. 2005년에 설입된 YC는 30개국, 700개가 넘는 스타트업을 탄생시켰다. 이중에서 생존한 성공 기업들의 평균 기업가치는 이미 약 580억 원(2012년 초 기준)을 넘어섰다. 앞서 살펴본 드롭박스의 기업가치는 2015년 6월 기준 약 11조 5천억 원에 달한다. 세계적인 IT잡지 <와이어드>는 YC를 '스타트업 신병 훈련소'라고 명명했다.

 

 

 

창업자 폴 그레이엄은 학창 시절 학교 공부를 경멸하고 또래들과 어울리길 거부했던 전형적인 '너드nerd'였다. 그는 코넬대학교 철학과에 입학, 작가의 꿈을 가졌지만 이후 방향을 바꿔 하버드 대학원에서 컴퓨터 과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또한 명문 로드아일랜드스쿨오브디자인에서 정식으로 미술 교육까지 받았다.

 

1995년, 그는 친구와 비아웹이라는 세계 최초의 웹 기반 애플리케이션 회사를 설립했다. 3년 뒤 야후는 이 회사를 4,960만 달러에 인수했다. 지금의 '야후 스토어'다. 이후 그는 새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를 창안, 스팸 필터링 원천 기술의 개발 등 전설적인 해커의 반열에 올랐다.

 

"창업에 대한 일장 연설을 하고 난 뒤 학생들과 얘기를 나누다 '나도 엔젤이 없었다면 스타트업을 못했겠지'라는 생각이 들어 YC를 시작했다" - 폴 그레이엄

 

핵심 메시지는 간단하다. '성공적 스타트업을 만들려면 좋은 사람들과 시작하고, 고객이 정말 원하는 것을 만들며, 돈을 최대한 아껴 쓰라'는 것이다. 아이디어란 실상 그리 중요치 않으며, 강박적이리 만큼 무섭게 일하는 파트너를 구하고, 첫 번째 서비스를 무조건 빨리 내놓아야 한다는 조언도 곁들인다. 공동창업자 간 지분 분배엔 '모두가 약간씩 박한 대우를 받는 느낌이 들 정도가 적당하다' 식의 현실적 가이드라인도 제시한다. 무엇보다 스타트업은 '40년 할 일을 4년에 몰아 하는 만큼의' 엄청난 노력과 체력을 요구한다. 그러나 세상의 부富를 창출하는 데 이보다 더 빠르고 좋은 길은 없음을 강조한다.

 



이런 생각에 따라 그해 여름 그레이엄은 비아웹의 옛 동료, 훗날 아내가 된 제시카 리빙스턴과 함께 YC를 설립한다. 비아웹 매각 등을 통해 번 돈을 재투자한 것이다. 이어 액셀러레이팅의 표준이 된 프로그램을 시작한다. 될성부른 예비창업자를 뽑아 한 팀(1~4명)당 1만4000~2만 달러의 초기 자금을 자원하고, 3개월간 집중적인 멘토링과 기술·경영 조언을 제공한다. 대가로 약 6%의 지분을 받는다. 13주 차에는 유력 투자자들을 초대해 데모 데이를 갖는다. 이런 스타트업 스쿨을 매년 두 차례 진행한다.

이 못지않게 중요한 게 매주 화요일 저녁 열리는 '만찬Dinner'이다. 지난 3월 미국 출장 중 캘리포니아주 마운틴 뷰에 있는 YC를 찾았다. 현장에서 만난 YC 멤버는 "실리콘밸리의 유력 투자자와 멘토들이 참여하는 만찬이야말로 YC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했다. 아무리 돈이 많고 유명해도 YC 특유의 '검증'을 통과하지 못하면 이 자리에 초대받을 수 없다. 만찬에서의 대화를 밖으로 전하지 않는 것도 불문율이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은 저녁 늦도록 새 아이디어와 투자에 대해 토론하고 조언을 주고받는다. 그야말로 실리콘밸리 네트워크의 결정판이다.

미국의 벤처투자자이자 블로거인 프레드 윌슨은 "그레이엄은 아이들(창업자들)에게 돈만 주는 게 아니라 방법론과 가치체계까지 알려 준다. YC는 그저 투자회사가 아니라 컬트이며, 그레이엄은 그 교주"라고 평한다. 한국에서도 요즘 액셀러레이팅, 멘토링 붐이 일고 있다. 무늬만 그럴싸할 뿐 프로페셔널과는 거리가 먼 프로그램들이 많다. 결국 답은 그레이엄처럼 성공한 창업 선배가 자신이 일군 부富로 후배 스타트업 육성에 나서는 것이다. 본엔젤스, K큐브, 프라이머, K스타트업, 패스트트랙아시아 같은 국내 대표 액셀러레이터들의 활약을 고대한다.

 

 

 

실리콘밸리 생태계 디자이너, 마이클 모리츠

 

 

 

 

 

 

'2014년 세계 산업계 최고의 사건'을 꼽는다면 아마도 알리바바그룹의 뉴욕 증시 상장일 것이다. 그해 9월 상장 이후 50여 일 만에 알리바바의 주가는 50퍼센트 가량 올랐다. 연말 시가총액은 우리 돈으로 310조 원을 돌파했다. 덕분에 알리바바 창업자 마윈은 중국 최고 부자가 됐다. 최대 투자자인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역시 일생일대의 성취를 이루었다. 이 가운데 뒤에서 가만히 웃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미국 실리콘 밸리 벤처투자사 세쿼이아 캐피털마이클 모리츠 회장이다.

 

 

 
모리츠는 알리바바가 상장되기 전에 경제 전문지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몇 년 전 조용히 이 회사에 투자했다. 알리바바의 기업공개는 인터넷 산업의 전 지구적 진화에 있어서 하나의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우리(세쿼이아)는 십이삼 년 전부터 중국에 거대한 기술 기업 가치가 형성되리라는 것을 예견했다. 향후 30여 년간 제대로 된 비즈니스를 하려면 중국으로 가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세계 ICT(정보통 신기술) 업계 리더 중 그의 이야기를 흘려듣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리츠는 1990년대 이후 실리콘밸리 창업 생태계를 사실상 디자인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가 투자한 기업 리스트를 살펴보자. 구글, 야후, 페이팔, 시스코, 유튜브, 링크드인, 자포스, 왓츠앱, 드롭박스, 스트라이프 등. 그는 이 회사들의 초기 투자자이자 이사회 멤버였고, 강력한 후견인이자 헌신적인 멘토였다. 그가 직접 투자하지 않았지만 세쿼이아의 주요 포트폴리오에는 애플, 오라클, 에어비앤비 등의 회사들에도 경영에 깊숙이 관여했다. 그는 2015년에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버블이 붕괴될 조짐을 보인다고 말했다. 참고로 쿠팡이 국내 기업으로는 최초로 세쿼이아로부터 2014년 1억 달러를 유치한 적이 있다.

 

 

풀뿌리 소비자운동, 브루스 크라우더

 

영국 잉글랜드 북서부의 랭커셔 주는 산업사나 노동운동사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산업혁명의 진원지이자 기계파괴운동(러다이트 운동)으로 대표되는 근대 노동운동의 발원지이며, 세계 최초 협동조합인 '로치데일 조합' 탄생지이자 임기 내내 노동집단과 격렬히 대립한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런 랭커셔에는 2000년대 이후 다른 듯 같은 또 하나의 의미가 덧붙여졌다. '공정무역의 메카'다.

공정무역이란 남미,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같은 개발도상국 생산자들과의 공정한 거래를 통해 해당 지역 농민과 노동자들의 삶에 긍정적이고 지속적인 변화를 도모함을 말한다. 대개 환경친화적 농산물이나 제품을 직거래하는 소비자운동의 형태를 띤다. 핵심 정신은 '자선이 아니라 정의'라는 홍보 문구로 요약된다. 일상생활에서 공정무역 인증마크가 부여된 제품을 소비함으로써 제3세계 사람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보장하고, 이를 통해 지속가능한 미래를 열어가자는 것이다.

이 공정무역 운동이 지구촌 곳곳으로 퍼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곳이 바로 랭커셔 주의 소읍 가스탕이다. 2001년 이 곳은 세계 최초의 '공정무역 마을'이 됐다. 이를 계기로 세계 30여 개국 총 2,224개(2015년 8월 기준)의 공정무역 마을이 생겨났다. 영국은 공정무역의 선진국으로 거듭났다.

 

 

 

마을의 창시자는 브루스 크라우더다. 가스탕이 공정무역운동의 상징이자 롤 모델이 될 수 있었던 건 그야말로 이름 없는 평범한 시골마을이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특별한 점 하나 없다는 바로 그 평범함이 오히려 분명한 메시지를 전한다. 의지와 헌신만 있다면 세계 어느 곳의 어떤 공동체도 공정무역 마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크라우더 공저 <공정무역은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중에서).

 

실제 공정무역 마을 운동은 '풀뿌리 소비자운동' 혹은 '풀뿌리 시민혁명'의 세계적 모범사례라 할 만하다. 창의적 활동가들의 끈질긴 헌신이 지역민들의 열정을 끌어내는 데 성공할 경우 어떤 위력을 발휘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지역민의 삶의 질과 만족도를 높일 뿐만 아니라 국제적 연대를 통해 인류의 공동선共同善 실현에 기여한다.

크라우더는 리버풀대에서 수의학을 전공한 수의사다. 그는 대학 졸업 직전인 1984년, 영국의 세계적 구호단체인 옥스팜 활동가가 된다. 92년 결혼과 함께 가스탕에 정착해 동물병원을 여는 한편, 옥스팜 가스탕 지부를 설립한다. 이어 가스탕에 공정무역을 정착시키기 위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그는 가스탕이 공정무역의 진원지가 되기에 충분한 잠재력을 갖췄다고 봤다. 랭커셔 주처럼 산업화와 노동운동의 최전선에서 역사적 분투를 해온 영국 공업지역 사람들에게 '공정한 노동에 대한 공정한 대가'라는 공정무역의 모토는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언론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시의회나 종교단체들 또한 시큰둥했다. 크라우더는 극심한 좌절과 무력감을 느껴야 했다. 돌파구는 꿈결에 찾아왔다. 어느 날 밤 크라우더는 잠을 자다 불현듯 공정무역 마을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혹 잊을세라 펜과 종이를 찾아 이를 기록했다. 핵심은 개발도상국 생산자들과 가스탕 농민들 간의 공감대 형성이었다.

2000년 3월 '공정무역을 위한 2주간' 행사 때 크라우더와 옥스팜 동료들은 지역사회 각 분야 대표들을 식사에 초대했다. 테이블에 놓인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은 공정무역 상품과 가스탕 지역 농산물을 활용한 것이었다. 그는 개발도상국 생산자들에게 공정 가격을 지불하자는 공정무역 운동이 정당한 가격을 받고자 애쓰는 가스탕 농민들의 노력과 같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이 같은 이벤트를 기획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참석자들은 공정무역 운동에 깊은 공감을 표시했다. 그는 '가정 또는 직장에서 공정무역 제품을 사용하겠다는 서명에 동참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어 곧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가스탕 시는 2011년 마을 중심부에 공정무역마을국제센터(FIG)를 열었다. 세계 각지로부터 몰려오는 사회활동가와 관광객들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크라우더를 비롯한 몇몇 활동가들의 지칠 줄 모르는 의지와 행동력이 지역민 전체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것이다. 크라우더는 세계적 명성을 얻은 뒤에도 여전히 가스탕에 살며 지역 봉사자이자 파트타임 수의사로 활동 중이다.

 

흔히 정부는 물론 각종 단체에서는 변화의 동력을 조직 정비나 예산 확보에서 찾는다. 하지만 가스탕의 성공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결국 진정한 힘은 사람, 그리고 연대에서 나온다. 사회 변화를 주도하려는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역량이 열정과 창의성, 네트워킹 능력인 이유다.

 

 

세상은 누가 바꾸는가?

 

저자는 서문에서 이 질문에 대해 "사업가"라고 답한다. 책에 등장하는 43명의 체인지 메이커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놀라운 혁신으로 이전에는 없던 뭔가를 창조해낸 사람들이다. 창업가도 있고, 엔지니어나 과학자, 그리고 사회혁신가도 있다. 이들 모두에겐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 기업가정신의 주요 요소 혹은 성공 창업의 필수 덕목이라해도 무방할 것 같다.

 

책을 통해 자신의 체인지 메이킹 역량을 가늠해 보자. 특히 창업과 취업 사이에서 고민 중인 사람, 오랜 직장생활 끝에 독립을 꿈꾸는 사람, 비록 작지만 자신의 일을 시작해 보려는 사람,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싶은 사람 등이라면 유익한 팁을 충분히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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