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욘드 로맨스 - 사랑에 대한 철학의 대답
M. C. 딜런 지음, 도승연 옮김 / Mid(엠아이디)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성애性愛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에 대한 솔직한 답변을 찾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현대인에게 유행하는 낭만적 사랑은 결핍에 기반한 사랑의 한 형태이기에 이를 어떻게 하면 정직이라는 가치를 통해 보다 진실한 사랑으로 이끌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이 글에서 주장하고자 한다. - '서문' 중에서

 

 

사랑의 의미를 찾아서

 

책의 저자 M.C. 딜런(1938-2005)은 버클리 대학에서 석사와 예일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빙햄톤 대학에서 강의 특화 석좌교수로서 1968년부터 2005년까지 재직하였다. 전공은 대륙철학과 현상학, 실존철학이며 특히 영미권의 유력한 메를로 퐁티의 주석가로서 평가받는다.

2001년에 출간된 <비욘드 로맨스>는 딜런 교수의 현상학적 통찰과 교수법의 진수가 담긴 저서로 그 내용은 1970년대부터 2005년까지 뉴욕주립 빙

 

<비욘드 로맨스>는 정직한 글이다. 낭만적 사랑으로서의 로맨스를 넘어서 그보다 진실하고 현명한 사랑의 이름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저자의 어조가 그러하다. 하지만 정직함이라는 <비욘드 로맨스>의 미덕을 믿고 관망적으로 글을 대한다면 이것이 쉽사리 소화될 수 없는 밀도와 중량을 가진 것임을 금세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 도승연, 광운대학교 교양학부 조교수

 

책은 육체적 사랑과 몸에 대한 저자의 솔직한 철학적 대답을 담고 있다. 즉 고대철학부터 포스트모더니즘과 현상학에까지 이르는 서구 사상사思想史를 관통하면서 사랑에 대한 기존의 이상적 모델이었던 낭만적 사랑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적한다. 낭만적 사랑은 상대를 이상화하며 박제화하기에 변화를 긍정하지 못하고 모든 것이 동결된 죽음으로 완성될 수밖에 없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낭만적 사랑은 상대방을 향한 사랑이 아닌 자신의 사랑을 위한 사랑, 즉 도구적 사랑이 되고 만다.

 
저자는 낭만적 사랑이 가진 이러한 폐쇄성을 뛰어넘기 위해 사랑에 대한 일반적인 철학적 담론과는 달리 상대방의 신체와 그 변동에 주목하고 육체적 관계와 성애의 문제에 대해 심층적으로 답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그는 성애의 문제가 더 이상 재생산의 문제와 결부되지 않는 현대 사회에서 성애에 대한 섣부른 신비화나 악마화를 걷어 내고 그 현실에 담백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우리 시대의 사랑에 대한 통속적인 관념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다양한 논의들을 검토하면서도 정직이라는 가치가 진실한 사랑을 이끌어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따라서, 이 책은 그렇게 좋은 사랑의 이름을 찾으려는 그만의 철학적 여정인 셈이다.

 

 

 

 


저자는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대 철학적 견해로 출발하여 아퀴나스의 자연법을 경유하고, 근대의 주체 철학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는 장구한 서구의 사상사를 관통하면서 마지막 종착지로서 자신의 전공인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에 기대어 낭만적 사랑의 치명적 문제점들을 지적한다. 또한 인류학과 문학, 정체성을 다루는 다양한 학제를 오가며 낭만적 사랑의 병폐를 비판한다.

 

이처럼 낭만적 사랑의 질병으로 가득한 현대 사회의 위기를 드러냄으로써 그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고, 그리하여 지금과는 다른 진실한 사랑에 이르는 길을 찾아야 하는 이유와 방법을 고민하게 한다. 물론 철학사와 다양한 학제를 넘나들면서 만나는 이 길이 수많은 지적인 미로와 그 수만큼의 결들을 가진다는 사실은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좋겠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이는 바로 철학적 질문이며, 이 물음에 답하려고 수많은 철학자들이 노력해왔다. 하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명쾌한 답변이라기보다는 마냥 다양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시시한 답변이란 말은 아니다. 단지 각자의 답변들이 보편적이지 않았기에 모두의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소설가 마르키 드 사드(1740~1814년)는 '사디즘'이란 어원의 창시자(?)이다. 그의 소설 <소돔의 120일>은 사후 발견돼 1904년 출간되었다. 프랑스 루이 14세 치하에서 권력자들이 젊은 남녀 노예를 이끌고 120일간 향락을 벌인다는 내용으로 1부만 완성됐고, 2∼4부는 줄거리가 요약된 미완성 작품이다. 

 

이 책은 교황청 금서로 2세기 가까이 묶였다가 1957년 족쇄가 풀렸고 국내에선 1990년, 2000년에 각각 출판됐지만 금서로 지정되며 절판됐다. 2012년 동서문화사가 재출간한 책도 유통이 금지되는 '유해간행물'이 될 위기에 처했다가 독자들의 항의로 '청소년유해매체물'로 분류돼 시중에 풀렸다. 그는 정상적인 사랑의 형태를 넘어선 근친상간, 잔인함, 동무과의 성교, 동성애 등과 같은 사랑의 방식을 소개했다. 그는 바로 '음란함'을 떠올리는 추문의 상징인 셈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년)는 자연이 허락한 사랑의 형태를 신봉하며 사드가 주장하는 형태의 사랑을 격렬히 거부했다. 즉 오직 출산을 증진하고 자손을 돌보는 이성애의 일부일처제만을 믿으며 자신의 철학에 따라 독특한 삶을 영위한 스콜라학의 황금시대를 구축한 인물이다.

 

18세기의 사드와 13세기의 아퀴나스 중 누가 더 행복했을까? 기독교의 논리라면 아퀴나스는 천국에, 사드는 지옥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퀴나스의 사상을 신봉하던 중세시대의 종교 집행관들은 수많은 이교도異敎徒들을 화형火刑에 처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천국과 지옥 중 어디에 있어야 할까?

 

만약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아마 사랑에 대해 묻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그것과 우연히 마주친다 해도 어떻게 그것이 사랑인지 알 수 있겠는가.

 

이는 플라톤의 대화록 '메논'에 등장하는 '메논의 역설'이다. 플라톤은 이 문제를 신화적 용어를 통해 풀어나간다. 즉 인간은 죽고 다시 태어나는 생과 생 사이에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우주적 지식을 알고 있지만 새로운 세상에 다시 태어나면서 이전의 모든 지식을 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막 사춘기에 접어드는 10~12살의 아이들이 갖고 있는 성에 대한 지식을 살펴보자. 아이들은 이미 무엇을 몰래 해야 하고, 언제 부끄러워해야 마며, 어떤 부분을 감추어야 하는지 충분히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정작 섹스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생물학적으로 아이들의 몸은 아직 오르가즘을 경험하기엔 부족하지만 청년기가 되면 이를 경험하게 된다.

 

성에 대한 사춘기 아이들의 선先지식은 성에 대한 지각은 있지만 그 지각은 어떤 결정적인 지각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선지식은 육체적 차원과 문화적 차원이라는 두 개의 근원으로부터 기인한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육체와 성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각을 가지고 있다. 또 아이들은 성 정체성에 영향을 끼치는 문화적 차원의 무수한 실천들을 겪는다. 예컨대 배변훈련, 성역할의 강요 등이다. 요약하자면 질문을 유도하는 선지식은 태생적인 부분(육체적)과 길러지는 부분(문화, 환경적) 양자의 상호 작용을 통해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오늘날 가장 유행와는 사랑의 스타일은 낭만적 사랑이다. 이는 젊은 날의 열정을 불타게 하며 이 열정을 뜨겁게 지피기 위해 금지된 것을 추구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모순을 감추고 있는데, 새로운 사랑의 전율이 영원하길 바란다는 점이다. 새로움과 영원함은 공존할 수 없으며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서로 사랑한 이유는 그들이 서로에게 금지된 존재였기 때문이다. 금지가 낭만적 사랑의 강도强度를 높이고 열정을 불붙게 한다는 그럴듯한 주장이다. 가질 수 없는 것을 원하는 이유는 그것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럴듯한 주장이 항상 진리를 보장해주지 못한다. 만약 금지가 욕망의 필수적인 요소라면 그것은 욕망을 제한하는 신중함이 금지 안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금지가 종교적 구조 안에서 이해될 때 이것은 신성한 것과 불경한 것을 구분하는 역사적 축적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이때 신성한 것은 신의 이름으로 승인되었던, 불경한 것이라 금지되었던 모든 것을 지칭한다. 결국 문화 안에서 금지야말로 욕망의 생성에 필수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사람의 살은 맹목적으로 스스로를 창조하고 동시에 파괴한다. 이렇듯 살은 자신에게 삶과 죽음을 부여한다. 프로이트는 자기보존적 본능과 성적 본능을 합한 삶의 본능을 에로스Eros라 했고, 공격적인 본능들로 구성되는 죽음의 본능을 타나토스Thanatos라 했다.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뒤얽힘은 신성하고 불경한 것들의 뒤얽힘과 맞물린다. 그리하여 신성함과 불경함은 신체의 살들로부터 분리되어 언어의 살 속에서 자율적으로 변화한다.

 

철학의 가치는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고 그것을 올바르게 생각하는 방식에 있다. 철학에서 설득적이라는 의미는 그 결과와 관계하는 것이므로 나쁜 철학은 안 좋은 행동과 결과, 그리고 불행한 삶을 낳는다. 현재 우리의 문화에 만연한 철학이 결과하는 정당성의 기준에서 명백하게 불행을 낳고 있다면 이제 우리에겐 사랑을 부르는 보다 나은 이름이 필요하다.

 

 

포이에시스적 통찰

 

사랑은 언어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적 구성물이다. 포이에시스가 이야기의 창작의 어원이라면 결국 사랑이란 포이에시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플라톤이 <향연>에서 소개하는 성애性愛는 그리스 미소년들이 일정한 나이에 도달했을 때의 사랑의 합법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1926~1984년)는 이와 달리 당시 성인 귀족들과 소년들과의 관계는 사회적으로 '다소 문제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고 지적한다.

 

현대의 경우 동성애가 합법적으로 인정된다 할지라도 어린아이와의 성애는 성적 관계 자체를 범죄로 취급한다. 성적 활동에 대한 이해는 시대에 따라 매우 대조적이다. 간통에 대한 현대인의 태도가 호손의 '주홍글씨' 시대보다는 관대해진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케네디나 클린턴 같은 유명 인사들의 간통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등장할 때 사랑에 대한 그들의 호소가 결코 간통의 책임을 정당화시켜주는 방어책이 되지 못했다.

 

기독교적인 사랑의 방식은 에로스에서 아가페로의 전환인데, 이 사랑은 소크라테스 초기에 있었던 '섹슈얼리티의 악마화'를 기반으로 한다. 에로틱한 사랑은 육체적으로 친밀한 사랑의 대상이 신성화된 금지에 의해 형이상학적으로 멀어짐으로써 가능하다. 즉 금기가 창조한 공간에서 에로틱한 사랑은 더 강한 생명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아퀴나스는 진실한 사랑은 오직 신성한 결혼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21세기에는 진실한 사랑은 결혼이라는 제한 안에선 불가능하다고 얘기한다. 현대의 에로스는 어떤 대상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그 금지된 대상을 사랑한다. 따라서 이러한 에로스는 언제나 불만족스러운 상태일 수밖에 없다.

 

돈 조반니는 1천 명이 넘는 수많은 여성들과 사귀면서 능숙하게 자신의 정체를 숨겼다. 이런 숨김이 유혹의 본질적인 전략이다. 왜냐하면 자기 은폐는 영원한 사랑의 약속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주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돈 조반니가 사랑을 약속했던 그 순간에는 진실했기에 그를 순수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인들을 꼬시려고 자신까지 속였으므로 진실하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포에이시스적 구성물로서의 낭만적 사랑이 사랑받으려는 자기 자신의 욕망과 충돌한다는 점에서 현대의 이 유일한 사랑의 방식은 본질적으로 진실하지 않은 사랑이다. 이제 우리들에게 남은 대안은 우리 자신의 시詩를 쓰는 일뿐이다. 자신의 삶과 육체가 함께 얽혀 있는 자신의 연인에게 삶과 육체를 서로 드러내고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말이다. 

 

 

성 도덕

 

낙태, 산아제한, 이혼, 동성애의 가치에 반대하는 입장의 배후에는 자연법이 버티고 있다. 자연법의 관점에선 자연이 인간에게 디자인한 목적, 즉 자손 양육을 거스르고 낙태와 산아제한처럼 생명의 탄생에 반하는 시도는 자연의 의도와 명백하게 대조되므로 거부되어야 할 행위들인 것이다.

 

자연법에 기대어 성 도덕을 이해한다면 자위행위, 구강 및 항문 성교, 동물과의 섹스 등 자손의 번영을 도모하지 않는 모든 성적 행위는 부정되어야만 한다. 나아가 나이가 많은 상대와의 성교나 정액을 낭비하는 성교 역시 비난의 대상이 된다. 따랏 자연법 사상이 금지하는 근친상간, 혼전 괸계, 성적 문란, 매춘, 포르노그래피 등까지 확대된다.

 

행복을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하는 고전적 미덕인 실천적 지혜신중함과 함께 진정성이나 에로스를 악마적인 특성과 연결시키지 않는 새로운 미덕을 택해야 할 것이다. 태양을 그대로 바라봄녀 눈이 멀기 때문에 일식을 관찰할 때엔 필터를 이용하는 것처럼 생식기관도 마찬가지다. 삽입의 성관계가 몸에서 몸으로 세균을 옮겨 자연을 휘청이게 하는 강력한 통로임을 명심해야 한다.

 

 

섹슈얼리티에 관한 악마화

 

우리 시대는 여전히 섹슈얼리티에 대한 기독교적 악마화를 하나의 진리로 간주한다. 섹스는 인간을 동물, 덧없음, 쇠퇴, 죽음과 연결시켜주는 육체적 현상 중의 하나이다. 섹스는 모든 신성하고 정신적ㅇ이고 순수하고 불변하는 것의 반대에 있는 것이다. 섹스의 가치만을 독립적으로 고려했을 때 이것은 전적으로 부정적이다. 섹스를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오직 종의 번식을 통해 영원성에 봉사하는 것뿐이다.

 

관용의 정치학은 성애의 가치문제를 혼동하게 하는 또 다른 금지에 의해 제한받는다. 저자는 이 금지를 '섹스의 악마화'라고 부른다. 즉 섹스에 관한 전면적인 부정은 자연법 이론을 떠올리게 하지만 섹스의 악마화와 자연법의 이론은 구별된다. 자연법 이론은 섹스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특정한 성행위는 지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섹스를 그 자체로 나쁜 것으로 생각하는 상징주의를 버려야 한다. 10대들의 임신에 대해선 도덕적 차원에서 비난하기보다는 차라리 콘돔을 나눠주며 대처하게 만들고, 에이즈가 얼마나 위험한 질병인가에 대한 연구를 통해 문제를 공감해 나가야 한다. 성적인 문제들을 죄의식을 갖고 대응하기보다는 교육이나 조사를 통해서 실용주의적으로 해결해나갈 때에 성 도덕을 고양할 수 있다. 

 

 

낭만적 사랑과 상호주관성

 

낭만적 사랑은 유기체의 한 부분인 연인의 신체, 욕망, 변화를 보지 않고 상대를 이상화하는 무지의 베일 안에서 두근거림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사랑이다. 따라서 이제 그 무지의 장막을 걷고, 연인의 신체에 대한 앎을 추구하려는 노력을 통해 지금보다 진실한 사랑의 이름, 아니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해야 한다. 영원한 두근거림이 진실한 사랑의 이상이라면, 그 사랑은 상대의 눈에 비친 아름다움의 절정,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는 이 우주적 진리는 무시한 채 모든 것이 동결된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이처럼 필연적으로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로맨스의 특징은 그 자체로는 내적 모순을, 삶의 차원에서는 위험적 요소로서 작동하게 된다. 살아있는 신체가 아니라 이상화된 박제 속의 환상으로 연인을 이해하는 사랑은 사랑의 감정을 사랑하는 것, 그 전율을 사랑하기 위해 상대를 도구화하는 수단적 사랑에 불과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연인의 신체에 대한 앎의 노력과 그것에 기반한 사랑은 시간의 누적을 통해 서로의 역사를 공유하게 하며 하나의 전체인 동반자의 신체적 정체성을 하나의 스타일로서 이해하게 한다. 이처럼 상대에 대한 무지는 곧 사랑의 불가능성이며 진실한 사랑은 연인의 신체에 대한 앎을 통해 강해지는 것이다.


동일한 이유에서 저자는 육체적 관계로서의 사랑, 성애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즉 진실한 사랑에 이르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으로서 연인의 신체에 대한 지식을 강조하고 이때 신체적 지식을 얻기 위한 중요한 소통의 통로로써 성애에 주목한다. 자신이 느끼는 감각과 느낌을 상대와 함께 나눌 수 있다는 지각의 가능성은 데카르트적 주체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으며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으로서의 주체의 이해로 이끈다.

 

이때 상호주관성로서의 주체는 연인을 자신의 쾌락을 산출하기 위한 객체로서 또는 나의 쾌락과 무관한 수단적 대상으로서 여기는 게 아니라 그 상황을 함께 하는 상호 이해적 관계로 이끌 수 있는 주체를 의미한다. 이러한 상호주관적 주체라는 인식적 전환의 계기를 성애에서 발견하는 저자에게 성애는 악이 아니며, 재생산을 위한 불가피한 의무도 아니며, 피부의 마찰을 통해서 얻어지기에 폄하되는 동물적 쾌락도, 더러운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자신의 오른손으로 왼손을 만질 때의 느낌, 혹은 내가 연인의 손을 느낄 때의 그 촉감과 온도를 상기해보자. 이때 무엇이 만지는 주체이고 무엇이 만져지는 객체인가? 신체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이 경계를 넘나드는 인식의 구체성은 비록 이성적 인식에 비한다면 애매하지만 이것은 인식의 하등함과는 전혀 다른 것이며 오히려 근본적 인식을 지칭하는 또 다른 인식의 형태를 지칭한다. 신체의 현상학에 기반한 이러한 저자의 결론은 프랑스 철학자이자 '몸의 현상학자'인 모리스 메를로 퐁티(1908~1961년)의 사상에 크게 빚지고 있다.


성애의 악마화는 비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애를 일반 도덕과 다른 중요성을 가지는 행위로서 특권화시키지도 않는다는 의미에서 저자는 인간이 유한성을 가진 유기체라는 사실을 명심하면서 자연의 법칙 밖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어리석은 태도를 피하고, 과학이 인간에 대해 알려준 지식의 내용을 참고하는 현명함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곧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자연법은 틀렸지만 인간의 신체는 자연의 법칙의 지배를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명심함으로써 보다 유효한 도덕이 가능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결론


결론적으로 저자는 과학기술의 성과가 알려준 신체에 대한 앎을 인지하면서, 즉 과학이 말하는 일종의 상식, 즉 너무 많은 파트너의 수와 질병의 위험성 등을 무시하는 성행위는 피해야 하지만 동시에 성애의 악마화라는 현대 사회의 문화에 희생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성도덕이라는 특수한 영역이 아니라 일반 도덕의 보편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주장은 성애를 재생산의 기능으로 해석하는 과거 자연법적 이해나 프로이트적 콤플렉스에 대한 논의를 넘어서 쾌락, 친밀함, 이해와 소통이라는 다양한 스펙트럼 안에 성애를 위치시킴으로써 그것의 구체적 양태를 도출하고자 한다. 


이 책의 특징은 실용성에 있다. 로맨스의 내적 모순을 서구 철학사에서 발견함으로써 신체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강조했다는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점은 삶이라는 인간 실존에 있어서 성애의 함축적 의미와 가치를 철학적으로 담론화하고 그것의 실천과 수행에 대한 접근방식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문화 전반에 있어서, 일상에서도 금기시되고 악마화되었던 성애를 전면에 드러냄으로써 성애가 재생산의 목적이 아니라 쾌락과 소통, 친근함과 삶의 이해라는 철학적 실용성이다. 이 실용성은 성애의 문제가 곧 사랑의 문제이고, 이것이 삶의 문제임을 일러준다는 점에서 삶의 기술적 실용성이기도 하다.


플라토닉 사랑의 본래적 의미가 우리가 흔히 아는 정신적 차원의 교감이 아니라 육체적 사랑을 통해 정신적 차원의 사랑까지 완성되듯, 성애 역시 유기체의 목적에 전적으로 지배되지 않는 삶의 자리에서 신체에 대한 앎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성애를 통해 주제화된 이러한 신체의 정체성은 곧 연인의 몸짓, 신체적 의도와 특징들, 그리고 그로부터 수반되는 모든 의도적 행위의 누적으로서의 스타일을 의미하며 이것은 삶의 모든 국면에서 드러나는 자기 자신이다.

 

사랑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다름 아닌 사랑에 빠진 그들이며. 그들의 몸이며, 그 살들에 축적되어 그들이 함께 만들어온 역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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