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기 전의 너는 무엇이었나 - 서암(西庵) 큰스님 평전
이청 지음 / 북마크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다니던 직장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여러 가지 생각때문에 마음이 무척이나 심난했다. 그해 사월 초파일 출가 스님들의 수행 도량인 문경 봉암사를 답사하는 행사가 있어서 행사 차량에 몸을 실었다. 경북 문경군 가은면 희양산 자락, 풍광 좋은 장소에 떡하니 자리 잡은 봉암사의 경내는 잘 정돈되어 있었다. 경내를 한바퀴 돌고 전망 좋은 장소에서 사찰 주변의 경관을 내다보니 탁 트인 것이 막히고 얽혀 있던 내 마음자리를 뻥 뚫어 주는 듯했다. 봉암사의 조실 스님이 바로 서암 큰 스님이다.

 

1914년 경북 풍기읍 금계동에서 아버지 송동식의 5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난 송홍근은 19세에 불문에 들어 2003년 3월 29일 봉암사에서 열반에 들었다. 시봉 제자들이 서암 스님으로부터 열반 게송 한마디를 얻기 위해 집요하게 묻자 귀찮아서 한 말이 "그 노인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였다.

 

서암 스님이 조계종을 탈퇴하고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에 위치한 12 평짜리 오두막에서 일주일 가량 머물렀다. 이 오두막은 저자가 마련한 처소였다. 이 책은 당시 저자가 스님과 나눈 대화를 근거로 그의 삶과 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한 내용이다.

 

첫째 날 - 꿈

둘째 날 - 유학

셋째 날 - 중도파

넷째 날 - 닭 벼슬

다섯째 날 - 양산박

여섯째 날 - 종정

일곱째 날 - 태어나기 전의 나는 무엇이었나?

 

성철 스님이 1993년 10월 4일 열반에 들자 제 8 대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직에 추대된 서암 스님은 분란에 휩쌓인 종단을 바로 세우는데 전심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그는 종단과 문중을 두고서 끊임없이 벌이는 불자들의 세력다툼에 염증을 느끼고 이듬해 4월 자유로운 불자의 길을 위해 과감하게 종단을 떠나고 만다. 스님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자유인이다.

조계종 경북 종무원장, 총무원장, 종정 등의 직무가 주어졌을 때 맡은 일에 몸을 아끼지 않고 일했지만, 아니다 싶을 때면 언제라도 미련없이 그 자리를 박차고 떠난 인물이었다. 1994년 4월, 종단마저 벗어나 스스로를 "석가종 석가문중" 이라고 칭했다.

 

신라 九山禪門 중의 하나라는 전통의 사찰 봉암사는 희양산 골짜기 깊은 곳에 위치해 있다. 과거 지리산 공비들의 퇴각로였기에 공비는 물론 경찰이 교대로 들락거리는 곳이어서 수행장소로는 부적격한 곳이었다. 1954년 불교정화가 진행되자 힘깨나 쓰는 "깡패스님" 들이 모여들어 "양산박" 이라 불릴 정도로 난장판이었다. 힘만 세지 염불도 모르는 노지심같은 엉터리 중들이 모여 있기에 일반 신도들은 찾아 오질 않았다. 신도가 없으니 먹고 살 길이 막막하자 이들은 절 재산 중에서 탱화, 문화재 같은 돈 될 만한 것은 죄다 팔기 시작했다. 봉암사의 이런 문제를 파악한 서암 스님은 험난한 일을 자청하여 봉암사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불교는 우리 마음의 정체를 밝히려는 가르침이라고 서암 스님은 강조한다.

"이 우주 만물은 무엇 하나 소멸되는 것이 없고, 새로 만들어지는 것도 없습니다" (200쪽)

인간의 근본은 불생불멸 무시무종인데, 이런 이치를 모르는 중생들은 자신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를 수밖에 없다.

"참선을 하여 눈이 밝아지면 비로소 어머니의 태 안에 있을 때, 그 이전의 내가 어디 있었는지도 훤히 알게 되는 이치 또한 여기 있습니다" (200쪽) 

 

서암 스님을 가까운 거리에서 알고 지낸 저자의 회고를 통해 "서암 불교" 를 조금이나마 접해볼 수 있었다. 서암불교의 핵심은 우주에 비밀이란 없고 우리가 일상에서 보고 느끼는 것 그것이 전부라는 사실이다. 생을 마감하는 순간의 마지막 말이 평범하면서도 뜻도 없는 그런 말을 남겼지만 내 마음에 오래 동안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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