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를 세는 사람 - 이경희, 푸른 테이프 세계의 두번째 이야기
문재웅 지음 / 부크크(bookk)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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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한 사람의 이름을 제목으로 걸었다. 경희. 누군가의 딸이었고, 누군가의 언니였고, 누군가의 아내였고, 누군가의 며느리였고, 누군가의 어머니였던 사람. 그리고 생애 마지막 몇 달 동안에야, 다시 온전히 자기 자신이었던 사람. - '머리말' 중에서



문재웅 작가는 <푸른 테이프>란 소설을 발표한 후 스핀 오프 개념의 두번째 이야기인 '숫자를 세는 사람'을 출간했다. 총 23장으로 구성된 책은 주인공 경희(이경희)의 삶의 궤적을 따라간다. 시어머니 이옥자의 며느리로, 남편 김재웅의 아내로, 아들 성현의 엄마로서의 삶을 그린 이야기이다.


여섯 살의 경희는 엄마가 쌀을 자루에 옮겨 담을 때 그 수를 세는 게 좋았다. 아니 좋아했다. 됫박 하나가 가득 차면 이를 쌀자루로 옮겨 담는데, 그때 기억으론 열 개 정도 쌀자루가 쌓이면 엄마의 얼굴이 조금 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곳은 방앗간이다. 늘 뜨거운 김과 고소한 떡 냄새로 가득 찬 공간이다. 또 떡메 기계의 쿵쿵 찧는 소리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다 깜박 잠에 빠져드는 곳이기도 하다.


경희는 1972년 대구 한 산부인과 병원에서 태어났다. 엄마 혼자서 낳았다. 아버지는 없었다. 일하기 때문이다. 삼촌 밑에서 일하다가 어느 해엔 배를 만드는 곳에서 일하다가 집에 돌아오곤 했다. 방문 옆엔 못이 하나 박혀 있었는데, 이 자리는 아버지 겉옷이 걸리는 장소이다. 대체로 이 못은 비어 있었다.


노현동은 낮은 슬레이트 지붕들이 산자학 따라 다닥다닥 붙은 동네였다. 좁은 골목이라 행인 두 사람이 마주치면 한 명은 몸을 비켜줘야 했다. 비 내리는 날엔 마당 한가운데 흙탕물이 고였다. 경희네는 주인집 뒷편에 딸린 셋방이었다. 방 하나에 부엌에 있는 구조인데 문을 열면 옆집 담이 보였다. 겨울이면 그 담 밑으로 고드름이 달리고, 경희는 이를 하나씩 세는 것도 좋아했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며칠 동안 방바닥에 누워 지냈다. 엄마는 평소보다 일찍 밥을 지어 상을 차리고, 계란찜이 한 접시 더 놓였다. 아버지가 떠나면 이는 더 이상 상 위에 오르지 않았다. 노현동을 떠난 뒤로도 경희는 낯선 곳에 도착할 때마다 무의적적으로 주변의 무언가를 세는 버릇을 이어갔다.



할머니는 자식을 열 셋 낳았고, 아버지는 막내였다. 경희가 본 적도 없었던 큰아버지(맏아들)은 서울대를 나온 사람으로 이념에 물들어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집안의 호적과 신원 조회 서류엔 지워지지 않는 줄이 그어져 있고, 이 때문에 취업이 어렵다는 말도 들렸다. 이는 바로 과거의 연좌제 낙인인데, 현재는 관련 법이 폐지됐다.


여덟 살 경희는 학교가 파하면 곧장 다섯 살 남동생 진일을 데리러 놀이방으로 향했다. 귀가해선 동생의 손을 씻기고 방바닥에 신문지를 펴놓고 동생의 숙제를 봐주었다. 엄마가 방앗간 일을 끝낼 때까지 저녁상을 차려 배고파하는 동생에게 자기 몫 밥을 덜어서 동생 밥그릇에 더 얹어 주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어도 가슴으로 느끼는 행동이었다.


진일이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그해 가을, 눈이 벌겋게 부어서 집에 돌아온 날이 있었다. 아무런 이유도 털어놓지 않던 동생이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애들이, 나보고 빨갱이 집 자식이라 캤다", 이 말의 의미를 경희는 이미 알고 있었다. 동네 우물가에서 이웃 어른들이 떠들다가 발자국 소리에 뚝 끊던 그 말소리를. 경희는 동생의 얼굴을 씻겨줬다. 왜 어린 아이들이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내가 1970년대 초반 수도경비사령부에 군복무할 때도 신원 조회에 걸린 병사들이 군장을 모두 챙겨 헌병 짚차를 타고 다른 부대로 전출 당하는 광경을 목격했던 추억이 떠오른다.


고등학생 경희는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귀가하는 길이면 종종 하늘의 별을 세며 걸었다. 노현동의 밤하늘은 유난히 별이 많았다. 스물, 서른, 마흔, 이렇게 세다 보면 어느세 집 앞에 와 있었다. 별을 세는 동안 만큼은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았다. 훗날 스위스로 향하던 비행기 안에서도 이러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경희는 서울의 한 보험회사에 취직했다. 입사 2년만에 대리로 승진했고, 입사 5년 차가 되던 해엔 2살 어린 후배 사원의 사수가 되어 지도했다. 서울에서 자취로 지내던 경희는 월급 중 상당액을 노현동 집으로 보냈다. 오후 2시의 커피숍, 선남선녀의 만남이 있었다. 선남은 은행원 재웅으로 경희가 다니는 보험회사 옆 빌딩에서 일하는데, 둘의 로맨스는 계속 이어진다.


한 달 후 재웅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지하철 노선과 도보 거리, 심지어 화장실 위치까지 적혀 있었다. 그리곤 다음 주에 영화 한 편 보러 가자고 제안했다. 경희는 누군가 이렇게 섬세하게 준비해온 경우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함께 영화를 보았다. 또 재웅은 경희 생일을 기억하고 손수건 한 장을 내밀었다. 사귄 지 반 년 되었을 때 경희는 그를 노현동에 데려갈지 고민한 적이 있었다. 결국 상견례를 앞두고 노현동에 데려갔다. 엄마의 반응은 '그 사람 손이 참 순하더라'였다.



둘 사이에 아들 성현이 태어났다. 경희는 성현의 탄생 시각을 잊지 않으려고 손목시계로 몇 번이고 확인해 시어머니에게 불러주었다. 오후 세 시 십칠 분. 그리고 이 숫자를 평생 잊지 않았다. 이후 매년 그 시각이 되면 하던 일을 멈추고 조용히 그날을 떠올렸다. 훗날, 알프스가 보이는 하얀 방에서도 이 숫자를 떠올리게 된다.


2011년 봄, 남편 재웅은 과장으로 승진했다. 서울 본사로 재배치 발령이 났다. 이사 준비를 하던 경희는 시어머니 옥자를 찾아가 이 소식을 전했다. 당시 시어머니의 나이는 일흔하나였다. 대구와 서울 간의 거리만큼 이상으로 남편 재웅은 홀로 남겨진 시어머니 옥자를 늘 마음에 걸려 했다. 



나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기에 경희 부부의 심리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나와 아내의 성장 터전도 대구였다. 난 서문시장 인근에서, 아내는 수창국민학교 근처 인교동에서 자랐다. 고등학교 3학년 가을, 은행에 합격해 대구집을 떠난 나는 계속 싱글로 서울에서 살아가다 나이 마흔에 중매로 늦장가를 간 후에도 서울에서의 삶이 계속 이어졌다. 


대구집의 향수를 늘 안고 살았던 나에게 대구 지역 회사로부터 임원 스카우트 제의가 있어서 한참 고민 끝에 대구로 이사했다. 키운 자식 모두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살다보니 그리움만 안고 사셨던 부모님은 나의 이사를 매우 좋아했다. 또 아내도 친정이 가까워서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이 생활이 오래 지속될 거란 예상이 보기 좋게 깨졌다. 회사의 오너인 노회장과 의견충돌이 잦아짐에 따라 마음 고생이 심한 내게 아내가 다른 곳을 찾아 이직하자는 제안을 했다.


바로 결행했다. 머슴살이가 싫어 사직한 후 평소 친하게 지내던 고교 선배가 지역 임원들 모임에서 들은 정보를 토대로 현재 임원이 필요한 회사 몇 곳을 추천하길래 이중 한 곳을 선택해 조심스럽게 접촉했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회장과의 면담 일정이 잡힌 이후 나의 이력과 주위 사람들의 평판에 만족한 회장이 함께 일하자고 최종 손을 내밀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회사 인력관리를 총괄하던 임원이 나의 대학 선배였기에 뒷조사를 소상하게 한 모양이었다. 여기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지만, 근무를 서울에서 해야 한다는 통보와 함께 신고식을 서울에서 진행한 후 처음 얼마간은 주말부부로 지냈다.


이후 양가 부모님들이 섭섭하긴 하지만 어차피 계속 서울에서 임원 생활을 하려면 혼자선 힘드니까 대구 지산동 집을 정리하고 서울에 살 집을 알아보라고 했다. 기존에 살던 아파트는 이미 전세를 주고 있었고 계약 기간이 많이 남아 있었기에 당시 회사 일터와 비교적 가까운 삼성동 주택가에 거주하던 처형과 동서가 인근 부동산 소개소를 통해 해청아파트를 추천해서 근무지를 도보로 이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어서 이곳으로 이사했다. 당시 대구 본가 집마당에 뛰어놀던 손녀들이 눈에 밟힌다면 특히 어머니가 매우 섭섭해 했다.


아내, 며느리, 엄마, 그리고 노현동 딸이라는 4개의 자리를 동시에 채우며 살아온 경희는 여전히 바쁘게 살아가던 중 남편 재웅의 제안으로 처음으로 제주도 가족여행을 떠났다. 여름휴가로 사흘 일정이었다. 바닷가에 앉아 노을 보며 찍은 사진 속에서 경희는 활짝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이런 얼굴이 얼마 만인지 헤아려 보았다.


2017년, 남편 재웅이 부장으로 승진하는 날 경희는 갈비찜을 요리해서 세 식구가 그날 저녁을 함께 했다. 이 자리엔 시어머니 옥자도 초대했다. 당시 시어머니도 대구집을 완전 정리하고 서울 상도동 임대아파트 단지로 이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들 성현의 성장이 대견스러워 웃음을 놓지 않았던 시어머니를 통해 가족의 사랑을 재차 느낄 수 있었다. 옛말에 '정도 자주 볼수록 더 생긴다'는 말이 떠오른다. 이런 시어머니 옥자에게 치매가 찾아왔다.



경희에게도 건강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아랫배의 묵직한 증상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설거지를 하던 중 잠시 싱크대를 붙잡고 서 있었던 적도 있었다. 병원에 가는 걸 계속 미루던 경희는 일정표에 오히려 시어머니의 진료일, 아들의 학원 상담, 남편 재웅의 회식일 등과 같은 스케줄로 채웠다. 평범한 하루 일상들의 연속 속에 병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2020년 겨울, 샤워를 하던 경희는 아랫배 한쪽에 생긴 단단한 응어리를 손끝에서 느꼈다. 이를 며칠 동안 더 지켜봤다. 한번은 재웅에게 이를 말하려다 멈추고 말았다. 해가 바뀌기 직전 동네 병원을 찾았다. 초음파 화면을 살펴보던 의사는 난소 쪽에 12cm 정도 크기의 뭔가가 있다며 큰 병원에 가보길 권했다. 이후 경희는 대학병원에 갔다. 조직검사 결과, 난소암 판정이 내려졌다. 더구나 5년 생존률이 약 15%정도라고 했다.



이 겨울로부터 몇 해 뒤, 알프스가 보이는 방에서 경희는 이 손끝의 감촉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이었다. 그때는 이미 손끝으로 확인할 몸조차 다르게 변해 있으리라는 것을, 오늘 밤의 경희는 알지 못했다.(92쪽)


반복되는 항암 속에서 경희의 머리카락은 자라고 빠지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이후 어느 순간부터 예전의 머리숱을 되찾지 못했다. 원래의 3분의 1 정도에서 자라기를 멈췄고, 정수리 쪽은 두피가 비칠 만큼 듬성듬성했다. 처음엔 이를 감추려 모자와 스카프를 시도했지만 나중엔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같은 병실에 있었던 난소암 4기 판정의 박 여사는 따뜻한 말동무였는데, 다른 환우를 통해 최근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박 여사의 남편은 스위스에서의 안락사를 권했고 박 여사도 이를 원했지만 절차가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려서 그 사이에 이런 변이 생겼던 것이다. 그날 저녁 경희는 재웅에게 박 여사 소긱을 전했다. 재웅은 조력 사망에 대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경희와 재웅의 삶을 마감하며


스위스 취리히 외곽의 조용한 주택에 위치한 조력 사망을 돕는 병원에서 경희는 의사가 내민 알약을 받아 들었다. 항구토제였다. 60대 초반쯤의 박사는 서류를 펼치며 국적, 진단명, 최종 확인 여부 등을 다시 확인했다. 재웅은 옆에서 경희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해'를 말하고, 경희는 연한 갈색 액체가 담긴 투명한 컵을 마셨다. 졸음이 온다. 하나, 둘, 셋... 어느 순간부터 숫자가 흐려졌다. 평생 처음으로 끝까지 세지 않아도 괜찮았다. 이 병실의 이름은 '평화의 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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