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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을 막는 사람 - 이옥자, 푸른 테이프 세계의 마지막(세번째)이야기
문재웅 지음 / 부크크(bookk) / 2026년 8월
평점 :
이 소설은 한 사람의 이름을 제목으로 걸었다. 옥자, 누군가의 딸이었고, 누군가의 언니였고, 누군가의 아내였고, 누군가의 어머니였던 이름. 그러나 이 책이 끝까지 붙들고 싶었던 것은 그 모든 관계의 호칭 이전에 존재했던, 옥자라는 사람 그 자체였다. - 머리말' 중에서

책의 저자 문재웅은 얼마 전에 읽었던 소설 <푸른 테이프>를 쓴 소설가이다. 그는 재웅이라는 이름을 이 소설 속 아들에게 붙였다. 주인공 옥자의 아들인 셈이다. 푸른 테이프는 몸에 해로운 가스 냄새가 새어 들어오는 벽과 천장의 틈을 막으려고 붙이는 우리들이 익히 잘 알고 있는 그 파란색 테이프를 말한다.
총 18개 장으로 구성된 이 소설 <틈을 막는 사람>은 주인공 이옥자(재웅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로 그녀의 생애를 그리고 있다. 그런데, 아들 재웅은 옥자보다 먼저 생을 마감한다. 말기암을 앓던 아내 경희가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안락사를 선택, 스위스의 한 병원으로 날라가 그곳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자 사랑하던 아내를 만나려고 아들 성현만 남겨놓고 뒤따라 죽는다. 옥자의 생애를 끝까지 지켜본 사람은 아들 재웅이 아닌 손자 성현이었다.
옥자는 가위를 손에 쥐고 평생 남의 머리를 스타일시하게 잘라주던 미용실 원장으로 살았다. 셋째딸로 태어난 그녀는 일곱 살 아래의 막내인 남동생 성수의 머리를 깎으면서 가위질을 처음 배웠다. 집이 가난해서 남동생이 이발소에 갈 돈조차 없었다. 아무튼 옥자는 자신의 손끝으로 먹고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던 거다.
큰 언니는 대구로 시집가고(나중에 일하러 간 걸 알게 됨), 작은 언니는 한국전쟁 발발 때 피난길에서 죽었으니 이젠 집안의 맏이 역할을 해야만 했다. 더구나 국민학교도 3학년 초에 중퇴하고 집안일을 거들며 밤에 야학夜學에서 공부했기에 더욱 자립自立心이 자연스레 생겼을 것이다. 사실 이 시절엔 대부분의 서민들이 소위 '보릿고개'을 겪을 정도로 삶이 팍팍했다. 그러니 여자아이가 학교를 다니는게 쉽지 않았다.

김천 읍내에 서울 봉제회사에서 사람을 뽑으러 온다는 소식이 마을에 돌았다. 기숙사에서 숙식까지 해결해 준다고 했다. 사실 얼마 전 언니가 보내온 편지엔 미용 기술을 배우면 먹고살 수 있다면서 대구로 오라고 했지만 옥자는 대구까지 갈 차비와 언니 집에 얹혀살 형편이 큰 부담이었다. 그래서 몇 달이라도 서울에서 일해 돈을 마련한 후 대구로 가도 늦지 않을 거라고 판단, 이른 아침 서울로 가는 회사 버스에 몸을 실었다. 배정된 곳은 구로의 한 봉제공장이었다.
기숙사는 방 하나에 8명이 함께 사용했다. 이 중 절반은 18살인 옥자보다 어렸다. 새벽 6시에 기상해서 미싱 앞에 앉으면 밤 9시에 끝났다. 사십 대 중반의 작업반장 최 씨는 입이 거칠고 지적질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미싱 작업 중 손을 다칠 수도 있기에 그랬다. 그가 유독 살갑게 대하는 여공들은 스무 살 안팎으로 어깨를 짚거나 허리를 슬쩍 감싸는 등 손버릇이 나빴다.
추석을 앞둔 어느 토요일, 공장 전체 회식이 있었다. 반장 옆엔 17살의 순이가 자리를 했다. 술기운이 돌자 그는 노골적으로 순이의 어께를 감싸며 추태를 부렸다. 이를 보던 옥자가 반장의 행동을 제지하자 그는 옥자의 뺨을 때릴 기세였다. 이에 옥자도 물러서지 않았다. 내일 아침에 노동국에 가서 이를 모두 얘기하겠다고 맞섰다. 다음 날 옥자는 기숙사 사감실에 불려가 해고 통보를 받았다. 2년 가까이 모은 돈이 많지 않았지만 그 길로 서울역에서 대구행 완행버스를 탔다. 오후 늦게 도착했다.

대구에 사는 언니는 월셋방에 거주하며 미용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언니와 결혼하려 했던 남자는 방직공장에서 만난 사이였는데, 집안에서 거듭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헤어지고 말았으며, 이후 미용실에서 일자리를 얻어 근무하고 있었다. 이 시절 젊은 여성 대부분은 특출한 재능이 없을 경우 중매를 통해 믿음이 가는 남성과 결혼을 하는 게 평생직장이라고 여겼다. 언니도 이 부류에 포함되지만 혼기婚期를 놓친 삼십대 노처녀였기에 고향 김천에서도 혼삿말이 전혀 없었다.
미용학원에서 실력을 닦아 자격증을 딴 옥자는 대구의 한 미용실에 취직해 이젠 어엿한 고참이 되었고, 동료 미용사들도 스물다섯이 되자 하나둘 결혼 중매로 미용실을 떠났다. 심지어 옥자보다 늦게 들어온 후배조차 먼저 결혼하기도 했다. 옥자의 말 못할 고민은 담석증으로 인해 세 차례나 수술을 받은 건강 이력 때문에 아이를 낳지 못할 거란 불안감이 생겼다.
건강한 미용실 처녀들은 미용실 뒷방에서 밥을 먹을 때도 결혼 이야기를 늘어 놓았지만, 옥자는 다음달 방세가 먼저인지라 한 남성을 마음에 품는다는 것은 사치라고 느꼈다. 스물여덟 살의 옥자는 지명 손님만으로 하루 일과가 다 채워졌다. 이에 미용실 원장은 가게를 차려 독립하라고 권했다. 하지만 돈이 문제였다. 그 무렵 언니는 혼처가 정해져 신혼 살림을 차려 나갔다.
옥자에게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매파 최 여사의 제안이 있었다. '씨받이 계약'이었다. 대구에선 꽤나 이름난 종가집의 장손 김부현 부부의 슬하에 딸만 줄사탕인지라 종가의 대를 이을 아들만 낳아 준다면 옥자 명의 집 한 채와 미용실 개업과 함께 매월 일정액의 생활비까지 지급하겠다는 제안이었다. 미래의 안정적인 경제가 보장되어 있지 않았던 옥자에겐 솔깃한 유혹임에 분명했다. 이미 본처도 이를 흔쾌히 수락하고 있다고 했다. 장고長考 끝에 옥자는 이를 받아들이고 김부현이 마련해 준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미용실을 떠나는 옥자를 원장과 동료들은 아쉬워했다. 옥자는 임신 끝에 아들을 낳았다. 이 아이가 바로 재웅이다.

계약 이행은 깔끔하지 않았다. 전세계약서 한장 달랑 내밀고 어려워진 경제 상태를 들먹이며 부족한 부분은 곧 채워주겠다고 했다. 재웅의 첫돌이 지날 무렵, 김부현의 발걸음은 예전보다 현저하게 뜸했다. "아버지 언제 와?", 말을 배운 재웅의 잦은 말이었다. 옥자의 두 번째 임신 소식을 들은 김부현은 진지한 얼굴로 옥자를 찾아와 재웅이도 둘째도 모두 자신의 호적에 넣기로 집안 어른의 동의를 얻었다고 했다. 하지만 둘째 아들 재철까지 출산했음에도 옥자 명의의 집도 미용실도 마련되지 않았다. 똑같은 소리, '기다려달라'고만 했다.
재웅이 다섯 살, 재철이 세 살이 되자 이웃 아주머니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옥자는 예전의 미용실로 일하러 나갔다. 재웅이 일곱 살이 되자 시어머니 격인 김부현의 어머니가 다시 옥자를 찾아와 학교 갈 나이가 되었다면서 큰집(본처)으로 데려가겠다고 했다. 계약 이행 때문에 실랑이가 벌어지고 김부현은 절충안을 제시했다. 둘째 재철만 데려 가고 재웅은 옥자한테 있기로 했다.
이후 작은 미용실 '숙녀의 집'이 비로소 문을 열었다. 재웅은 학교가 파하면 미용실로 곧장 와서 만화책을 보며 가게 문이 닫힐 때까지 기다렸다. 살림은 여전히 빠듯했다. 전세금을 갚아나가는 이자, 미용실 운영비, 재웅의 학용품비 등을 챙기다 보면 한달 벌이가 남는 날이 드물었다.
1980년 봄, 나이 마흔이 된 옥자는 칠성시장 골목 안에 예전의 미용실보다 두 배나 넓은 가게로 확장 이전했다. 순전히 자신이 벌어서 모은 돈과 은행대출금을 합쳐 마련한 옥자의 가게였다. 지난 인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열두 살에 국민학교를 중퇴당하고 부엌에 서 있던 그 겨울부터 스무 해가 넘도록 걸어온 인생길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개업식날 언니도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축하해줬다. '참으로 대단하다'고 말이다.

1980년대 중반, 동네 골목 입구에 생소한 간판이 내걸렸다. '뉴서울 헤어살롱'. 서울에서 미용 기술을 배운 젊은 원장이 미용실을 개업했다. 유리창 너머로 젊은 미용사들이 최신 유행 잡지를 펼쳐놓고 손님 맞이에 분주한 모습들이 보였다. '요즘은 다 그렇게 자른다'는 한 젊은 손님이 제시하는 커트 사진을 바라보던 옥자는 자신의 손끝으로 익힌 감각은 이제 신기술을 배워야 함을 느끼게 했다.
젊은 미용사들이 다니는 강습회에 참가했다가 실습을 지도하던 강사가 옥자의 커트질 손 모양이 모두 구식이라고 지적받았다. 또 배운 기술을 가게에서 시도해 보았지만 손님들 반응이 별로였다. '옥자 씨는 옛날식이 낫다'는 평가를 해주었다. 손이 예전 같지 않아서 병원에 갔더니 관절염 판정을 내리며 무리하면 더 심해진다는 경고였다. 통증이 심한 날은 손목에 헝겊을 감고 일해 보았지만, 오랜 단골의 '예전만은 못한다'는 지적에 가게를 닫기로 결심하게 만들었다.

1980년대 말, 몇 년째 매상이 계속 줄고 손의 통증이 나아질 기미가 없는 실정이라서 그동안 미루고 있던 결정, '숙녀의 집' 간판을 마침내 내렸다. 새로이 삶의 터전을 잡은 곳은 경북대학교 북문 앞이었다. 낡은 2층 집을 전세로 얻어 하숙업을 시작했다. 6개의 방에 대학생들로 채웠다. 대부분 지방에서 온 학생들이라 아침 6시에 기상해 아침상을 차렸다. 반찬도 넉넉하게 준비했다. 하숙생들 사이에 옥자의 하숙집이 제일 낫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아들 재웅도 하숙집에서 함께 살았다. 하숙생들이 재웅의 학업을 지도해 주기도 했다. 합격자 발표날에 전한 아들 재웅의 경북대학교 합격 소식은 그날 저녁상을 잔칫상으로 만들었다.
이 대목에서 나의 대학 하숙 시절이 떠올랐다. 학교에서 가까운 하숙촌에 입주했는데,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거의 매일 저녁 내기 당구에 막걸리집으로 어울려 다니니까 말이다. 대성학원에서 만나 알게 된 한 입학 동기생이 좀 조용한 하숙집을 구하러 간다는 얘길 듣고 따라 나섰다. 부산 출신인 이 친구는 재수시절 하숙집을 전전했기에 이런 일엔 해박했다.
대학교 앞에서 버스를 타고 수유시장 맞은편에서 내려 시장을 거쳐 골목길을 오르며 몇 집들을 구경했지만 맘에 쏙 들지 않았는데 이 친구도 동감이었다. 한 집 대문에 '하숙 구함, 빈방 있음'이라고 표지가 붙어 있었다. 주인 아줌마는 통영 사람으로 남편과 사별하고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했다고 했다. 본채는 가족들이 사용하고 별채를 하숙으로 내놓았던 거다.
입주 환영식을 가졌다. 아들은 상고를 졸업하고 한 시중은행의 행원으로 재직하고 있었고, 딸은 고등학생이었다. 가끔 공부하는 나에게 과일 접시를 넣어주시며 딸 공부를 부탁하곤 했다. 큰 기대를 가질까봐 난 여름에 군에 입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영어와 수학 과목을 좀 가르쳤는데, 공부에 소질이 없어 보였다. 공부보다는 다른 데 더 관심이 컸다.
하숙업도 오래가질 못했다. 인근에 신축 원룸촌이 들어서면서 대학생들은 하나둘 그곳으로 이전해나갔다. 몇 해를 더 버티던 옥자는 결국 1990년대 초 하숙집을 정리했다. 대구 변두리의 허름한 여인숙을 간판 그대로 임대했다. 12개의 방이 있는 구조로 이중 한 칸은 옥자 모자의 터전이었다. 장기 투숙객이 많았다. 공사장 인부, 홀로 사는 노인, 그리고 형편이 어려운 사람 등이 주된 손님이었다.
여인숙 인수 후 얼마 되지 않아 동네 건달들이 몰려 와서 자릿세를 요구했다. 여자 홀몸으로 이런 사업을 한다는게 상대방에겐 만만한 먹잇감으로 보인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옥자의 단호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여러 차례 찾아와 협박을 계속했다. 경찰에 이를 신고했더니 오히려 적당히 합의하라는 충고까지 했다. 계속 이러면 여인숙 운영이 어려울 듯해 결국 작은 돈으로 합의했다. 아들이 걱정할까 염려되어 몰래 하던 일이었지만 결국 건달에게 돈을 주는 장면을 재웅에게 들키고 말았다.
또 옥자에게 사기를 친 병국은 혼자 살아가는 여인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셈이었다. 처음엔 정답고 위로하는 모습으로 다가와선 돈을 뜯어낸 후론 발걸음을 끊고 말았다. 이런 소소한 자금 지출조차 옥자는 노트에 빼곡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방안 동안 여인숙 일을 돕고자 와 있던 아들 재웅이 청소를 하다 우연히 이를 보고선 엄마 옥자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에 그날 밤은 잠들지 못했다.
1992년 봄, 재웅은 대학을 졸업했다. 그해 여름 안양에 소재한 대기업에 합격해서 안양으로 떠나는 날, 옥자는 시외버스터미널까지 배웅을 나갔다. 모자 간 나눈 인사는 서로를 걱정하는 말이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로 여겼던 이 기쁨이 오래가지 못했다. 석 달 뒤, 재웅이 짐을 싸들고 대구로 돌아왔다. 핼쑥한 얼굴로 말이다.직장 생활이 얼마나 힘에 겨웠는지 열흘 동안 절寺에 가 있었다. 처음으로 마음이 편했다고 했다.
이후 아들 재웅은 은행직종 취업 준비를 했다. 1994년 봄, 재웅은 여신전문금융회사 공채에 합격해 여의도로 첫 출근을 했다. 몇 해 뒤 구미 지점으로 발령받아 대구 칠곡에서 출퇴근했다. 그 무렵 대구에서 만난 경희를 옥자에게 인사시켰다. 경희는 옥자의 여인숙까지 손수 반찬을 만들어 찾아오고, 관절염을 겪는 옥자를 위한 파스와 연고 등까지 챙기고, 이불 홑청도 빨래할 정도로 다정다감한 여성이었다.
이듬해 두 사람은 결혼했다. 첫아이 성현을 낳고 평온한 날이 지속되다가 재웅이 과장으로 승진하던 해에 서울 본사로 발령나서 이사를 해야만 했다. 옥자로선 대구와 구미 간의 거리보다 더 멀어진 셈이다. 서울로 이사간 뒤 옥자는 매주 일요일 저녁 7시엔 여인숙 마루 전화기 앞에 앉아 있었다. 아들 재웅의 전화를 기다렸다. 비록 통화는 십분 남짓이었지만 옥자에겐 이게 일주일을 견디게 해주는 마약과 같았다. 매주 토요일, 작은 아들인 내가 대구 부모님께 올린 안부 전화도 이러했을 것 같다. 2005년, 옥자는 여인숙을 완전 정리한 후 예순다섯 나이에 대구 시내 작은 원룸을 얻어 이사했다.

"재웅아, 요새 누가 자꾸 우리 집을 엿보는 것 같다", 이는 망상妄想 증세다. 치매 환자들에게 보이는 현상인데, 치매 정도가 깊어지면 환각이나 망상 증세가 종종 나타난다고 한다. 그렇다. 옥자는 현재 치매를 앓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2014년 겨울 어느 밤, 옥자는 화장실에 가려고 몸을 일으키다 허리에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전화를 들어 대구에 사는 남동생 성수에게 몇 번이나 통화를 시도했지만 연락되지 않았다. 이에 서울의 재웅에게 전화를 했다. 바로 통확 되었다. '허리가 안 움직인다'는 말을 듣고 바로 119로 긴급 전화를 해주어 구급차가 와서 병원 응급실에서 검사를 할 수 있었다. 다행히 큰 병은 아니었다. 디스크와 근육 문제로 인한 급성 통증이란 진단이었다. 입원해 있는 옥자 병실로 다음날 재웅이 찾아왔다.
옥자의 야윈 얼굴을 목격한 재웅은 오래 참아온 말을 꺼냈다. "엄마, 이젠 서울 쪽으로 올라오는 거 어떻겠노", 이에 옥자는 선뜻 답하진 못했다. 그러나, 어제밤에 홀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던 자신을 떠올리자 두려움이 생생했기에 "생각해볼게"라고 답했다. 재웅은 병실에 며칠 머물며 간병에 노력했다. 이런 아들의 모습을 보니 옛 시절도 떠올랐다. 결국 옥자는 올라가기로 결심했다.
2018년 봄, 옥자는 58년 간의 대구에서의 삶을 떠나 상경했다. 아들 재웅이 마련해 준 곳은 상도동의 작은 임대아파트 9층이었다. 아들 부부가 사는 아파트까지 걸어서 20분 거리였다. 이사 온 첫 주말, 아들 재웅의 가족이 옥자 아파트로 놀러왔다. 낯을 가리는 6살 손자 성현이 작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옥자는 몸을 낮춰 성현과 눈을 맞추며 챙겨온 사탕 한 봉지를 내밀었다. 오래된 가위를 꺼내어 성현의 많이 자란 앞머리를 다듬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 성현은 활짝 웃었다.
이사 후 두 달 즈음, 옥자는 홀로 동네를 걷다가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반찬가게를 찾아 나섰다가 비슷하게 생긴 다세대 주택들이 이어진 길에서 한 시간 가까이 같은 골목을 몇 바퀴나 돌다가 지나가던 젊은 여자를 붙잡고 옥자의 임대아파트 방향을 문의했다. 이곳엔 임대아파트가 몇 개 있어서 단지 이름, 동 호수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만 했다. 기억이 나지 않아 재웅의 메모지를 손가방 속에서 찾아냈다. 이후 옥자는 반찬가게에서 만난 주인장의 진한 대구 사투리가 마치 자신의 뿌리처럼 여겨졌다.
상도동에서의 삶이 여러 해 이어지는 동안, 옥자의 기억에 조금씩 틈이 생기지 시작했다. 2019년 가을, 재웅은 엄마 옥자를 모시고 정신과를 찾았다. 똑같은 질문과 답을 반복해야 할 정도로 그런 반응을 보인다는 게 깜빡하는 기억을 넘어 이상하다고 느껴서다. 간단한 몇 가지 검사를 했다. 진단 결과는 '초기 알츠하이머형 치매'였다. 약으로 진행을 늦출 수는 있지만, 완치는 어렵다고 했다.
가스 냄새에 대한 불안도 이 무렵부터 점점 짙어졌다. 한번은 가스불에 냄비를 올려놓고 깜빡하는 바람에 냄비를 태워 경비원과 관리소장이 옥자 아파트를 방문하기도 했다. 이에 경희는 옥자 아파트의 가스레인지를 인덕션으로 교체하자고 제안했고, 재웅은 업체를 불러 공사를 시작했다. 이에 옥자는 낯선 사람들이 드니드는 걸 불안한 시선으로 이를 지켜봤다. 시공이 끝난 후에도 인덕션의 빨간 불빛을 볼 때마다 여전히 가스 냄새를 걱정했다.
또 엄마 옥자는 미용실을 그만둔 지 5년~7년 전으로 기억했다. 사실은 미용실을 접고 하숙집, 여인숙을 거쳐 서울까지 온 세월이 20년이 넘었음에도 말이다. 2020년 이후 세상이 코로나19 전염병으로 말미암아 단절이 추세가 되자 재웅 부부도 옥자 아파트 방문이 뜸해졌다. 이 시기엔 전화로 자주 안부를 물었다.
2024년 봄, 도시가스 정기 안전점검원이 상도동 아파틀를 찾아왔다. 그는 가스레인지 연결 호스와 배관 이음매를 점검했다. 점검을 끝내고 오래된 연결 호스의 교체를 건의하면서 혹시 냄새가 나면 신고하라고 당부하고 떠났다. 옥자는 그날 밤부터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몇 번이나 창문을 열었다. 코끝이 매꼼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옥자는 테이프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복도 쪽 벽에 붙인 테이프가 옆집 사는 젊은 부부의 현관까지 넘어오자 불편함을 느낀 이들은 옥자에게 이를 좀 떼달라고 부탁했다. 옥자는 문을 열고 얼굴만 내민 채 '가스 샌다. 여도 위험하다'고 답하자, 난감해서 더 이상 말도 못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 복도에서 마주치면 인사도 없이 빠르게 지나갔다. 한편, 재웅은 회사 업무에 지치고 아내 경희의 건강에 이상이 있음을 인지하고 마음이 무거워 한 동안 옥자 아파트를 방문하지 못하다가 어느 토요일에 방문해서 벽에 붙은 파란 테이프를 목격하고 놀랐다. 모자 간의 언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테이프를 떼지도 못하고 중단했다.
2022년 가을, 옥자는 홀로 지하철을 탔다가 길을 잃었다. 그날 문득 대구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미용실 문을 열어야 한다고, 아니면 언니 정자를 만나야 한다는 등 정확하지 않은 다급함이 옥자를 밖으로 이끌었다. 열차를 놓치고 다시 타기를 반복했지만 어디로 가려 했는지 옥자 본인도 기억하지 못했다. 결국 경찰의 도움으로 파출소에 대기하고 있는 옥자를 재웅이 연락받고 데리어 왔었다. 이런 사태에도 불구하고 재웅은 옥자를 요양병원에 보내지 않았다. 재웅은 매주 주말이면 상도동을 찾아 엄마 옥자를 챙겼다.
치매에 걸린 환자가 길을 잃는 일은 흔하다.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실종 노인을 찾는다는 긴급 문자가 계속 스마트폰 액정 창에 뜬다. 이들 중 대부분은 치매와 관련된 분일 것으로 짐작된다. 나의 큰아버지도 사촌형의 병원 빌딩 최상층에 마련된 방을 떠나 밖으로 나간 뒤 종종 길을 잃고 헤맨 적이 많았다. 파출소에서 아니면 고향 사람의 연락을 받고 가슴을 쓸어내리곤 했다. 실종 신고까지 접수했던 큰아버지는 남의 빌딩 옥상에서 시신 상태로 발견되었다.
몇 년의 세월이 흘러 재웅은 아내의 병세가 깊어져 예전처럼 엄마 옥자를 케어할 형편이 되지 않아 인천의 한 요양병원에 입소시켰다. 낯선 장소에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삶에 대한 회의감과 오래된 형광등처럼 불이 켜졌다 나가길를 반복하는 기억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재웅은 홀로 요양병원을 찾아가 옥자에게 아내 경희를 데리고 멀리 갔다 오겠다고 인사했다. 이후 재웅도 경희도 옥자를 찾아오지 않았다.
부모님 두 분의 장례를 치른 성현은 할머니 옥자를 다시 상도동 집으로 모셔 왔다. 요양보호사 한 분이 낮 시간에 케어해주고, 학교가 파하면 곧장 성현이 상도동 집으로 달려왔다. 이렇게 성현은 아버지 재웅이 하던 일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옥자는 손자 성현을 종종 재웅이라 불렀다. 주말에 재웅이가 오기 전에 뭔가 준비해야 겠다는 생각에 옥자는 새벽에 일어나 문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날 오전, 성현은 장바구니를 들고 상도동에 도착, 벨을 눌러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관리사무소의 도움으로 받아 문을 따고 들어가보니 할머니는 집 안에 없었다. 성현은 건물 곳곳을 찾았다. 비상계단에서 발견했다. 구급대원들이 도착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할머니 장례를 치르고 벽 곳곳에 붙은 파란 테이프를 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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