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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없는 영웅들
퍼디아 레넌 지음, 최리외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8월
평점 :
영광과 영웅, 모두 장대한 모험을 떠났다 귀환한 이들이나 최종적인 전쟁의 승리자에게나 흔히 따라붙는 단어다. 적국의 포로들을 데리고 어설프고 괴이한 연극 무대를 꾸렸다가 여러 사람이 맞아 죽게 되는, 더 나아가 채석장에서 그 포로들을 몰래 꺼내다 고국으로 탈출시켜주겠답시고 무모한 일을 벌이는 두 청년에게 쓰일 법하지는 않은 단어다. 그러나 작가 퍼디아 레넌은 바로 이들을 영웅으로 여긴다. 연극이 무라고. - '옮긴이의 말' 중에서

작가 퍼디아 레넌은 아일랜드 태생으로 더블린 대학교에서 역사 및 고전학 학사를, 이스트 앵글리아 대학교에서 소설 창작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어릴 적부터 고대 그리스에 매료되어 투키디테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고 시라쿠사 외곽의 채석장에 던져진 약 7천 명의 아테네 포로 이야기를 접했었다. 마침내 이를 소재로 삼아 역사와 유머를 절묘하게 엮어낸 소설를 발표해 큰 호평을 받았다.
기원전 412년 시라쿠사. 이곳은 시칠리아 섬 외곽에 위치한 고대 항구도시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패배했고 아테네 전쟁포로들은 이곳의 채석장이라는 감옥에 가둬졌다. 일거리 없는 도공陶工인 람포와 겔론은 6개 가죽 부대에 물과 포도주를 가득 채우고 쿰쿰한 치즈 덩이 2개도 함께 챙겨 포로들에게 이를 먹이려고 채석장으로 향했다.
“물이랑 치즈다.” 겔론이 말한다. “에우리피데스의 대사를 알고 있고 암송할 수 있는 자에게 준다! <메데이아>나 <텔레포스>의 대사를 아는 자에겐 올리브도 주겠다.”
이를 들은 한 포로는 소포클레스나 오이디푸스 왕에 대한 것도 괜찮은지 묻는다. 이에 겔론은 규칙을 읊었다. '소포클레스, 아이스킬로스, 다른 아테네 시인들은 해당되지 않는다' 물론 낭송하는 건 자유지만 물과 치즈는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에만 해당된다는 말이다.
겔론은 에우리피데스에 미쳐 있었다. 그의 생각이 오히려 미친 게 아닌지도 모르겠다. 이곳에 연극을 올리겠다니 말이다. 과거의 영화롭던 시절에나 가능했던 일이다. 모든 건 전쟁 전의 일이다. 이제 배우俳優는 죽었고 공방工房도 모두 사라졌다. 그렇다. 지금 람포와 겔론은 이곳에서 포로들을 대상으로 오디션을 보고 있는 셈이다. 이를 위해 포로를 감시하는 비톤에게도 물질적 향응을 제공하고 있다.
음유시인이 되고 싶었던 겔론, 그의 가장 친한 친구 람포는 이를 지지한다. 겔론은 아테네의 패전으로 인해 위대한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아테네 포로들이 그 대사를 조금이라도 읊을 수 있다면 복원을 통해 소멸 위기에서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2천 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에우리피데스를 비롯한 당대의 탁월한 이야기들은 살아남아 읽히고 있음을 우린 이미 안다. 최종적으로 아테네가 전쟁에서 승리했고 찬란한 서양 문명의 근원이 되었으니 말이다. 소설 속 두 주인공 겔론과 람포는 아테네가 승리할 줄 몰랐기에 채석장을 원형극장 삼아 연극을 무대에 올리려고 노력중인 셈이다. 물론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굶주림이란 참 기묘한 것이다. 결핍이야말로 모든 사랑의 근원 아닐까?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건 바로 결핍이지 않을까? 뭔가 거기 있는 것 말고 뭔가 거기 없는 것 말이다. 나는(람포) 철학자는 아니지만 누마와 파케스(배우)의 눈이 커지고 반짝이는 것을 보며, 그들이 손톱까지 바짝 세워 치즈를 향해 달려드는 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든다.(166쪽)
겔론이 처음 연극을 본 것은 7~8살 쯤이었다. 아버지 무릎에 앉아서 소포클레스의 작품 '오이디푸스 왕'이었다. 아버지를 누가 죽였는지 알아내려는 불운한 왕을 보며 마음이 무척 아팠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 손을 잡고 난 절대로 아버지를 죽이지 않을 거라고 말했었다. 어째서 신은 오이디푸스가 친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도록 내버려둔 것인지? 그날 밤, 그는 괴로워서 내내 울었다고 했다.
아무튼 이 둘은 아네테를 사랑했다. 그리고 이런 연극을 만든 이 도시를 영원히 사랑했다. 한류를 좋아하는 외국인들이 서울로 부산으로 찾아오는 현재의 현상과도 같다. 그들은 고대 그리스가 만든 예술과 문화를 동경했던 사람이었다. 이 소설의 제목 '영광 없는 영웅들'은 바로 람포와 겔론을 가리킨다. 예술을 사랑한 어리석은 인물일지도.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영웅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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