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라 그리기 - 석정현 부부 짧은 글 화집
석정현 지음 / 성안당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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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마누라'를 그리는 방법에 대한 작법서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나는 성격상 흔히 말하는 '사랑꾼' 같은 스윗한 남자도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만 나는 그림을 유일한 직업이자 취미로 지닌 입장으로 많은 대상 중에서도 사람 그리기를 가장 좋아하는데, 때마침 10년 넘게, 24시간 내내 내가 선택한 어떤 사람이 한 집에 있었을 뿐이다.



책의 저자 석정현은 1996년 게임 일러스트레이터로 데뷔한 이래 만화가, 드로잉 강사, 애니메이터, 에세이 작가 등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오직 그림 하나로 세상과 소통해 온 30년 경력의 '전문 그림꾼'임을 자처한다. 스테디셀러 <석가의 해부학 노트>를 통해 인체의 비밀을 가장 명쾌하게 풀어낸 저자이다.


이제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다른 도서들과는 달리 목차가 없는 특징을 지녔다. 책 내용들에 굳이 경계선을 두지 않으려는 의도로 보이는데, 독자 입장에선 책장을 두루 편하게 넘기면서 유독 자신의 눈길을 끄는 대목에서 좀 더 집중해서 읽으면 될 듯 싶다. 제일 먼저 내 눈을 사로잡았던 페이지를 소개해 보려한다.



마누라는 항상 많은 생각에 잠겨 있다.

마누라로, 엄마로, 딸로, 며느리로, 학생으로, 작가로, 여성으로....

나처럼 한 가지의 생각에만 꽂혀 사는 사람에겐 상상도 잘 안 되는 일이다.

그런 나를 바라보면 얼마나 부럽고도 답답할까 생각을 좀 해본다.


마누라는 태생적으로,

본심을 숨기지 못하는 것 같다.

가끔은 좀 숨겨도 나쁠 갓 같지 않긴 한데....

내 귀가 쓸데없이 좋은 건가?



인생의 7할은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한다.

그 비어있는 시간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나와 같은 시공간에 함께 존재하는 대상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일이다.
굳이 메시지를 담지 않아도 된다.
그림을 그리면, 기다리는 시간이 없어진다.



나는 나이 마흔을 앞두고 있을 때 늦장가를 갔다. 나의 배우자도 그저 공부하는 게 좋아서 대학 강단에서 전임강사로 일하고 있던 소위 노처녀였다. 이것도 인연이었나 보다. 나도 결혼에 대해선 별 생각이 없었던 노총각으로 일하는 걸 좋아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길 즐기는 그런 사람이었다. 

고 3 시절,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 온 이래 외롭다고 느껴본 적이 거의 없었다. 내 주위엔 늘 사람들이 많은 편이었다. 사실 내 결혼은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해서 한 게 아니라 막내 동생이 딸부자집 여성과 대학시절부터 교제한 터라 결혼을 심하게 종용받고 있다는 고민을 술자리에서 듣고서 그 자리에서 동생을 위해 곧 결혼하겠다고 약속하고 말았던 것이다. 동생도 형이 장가를 가야 자신도 결혼할 수 있다고 믿는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이후 마치 007작전을 방불케하는 결혼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매주 주말 대구로 내려가 미리 준비된 맞선 자리를 소화하는 강행군이었다. 각설하고 사촌 형수가 운영하던 동네 약국의 단골이었던 참한 노처녀를 나와의 맞선자리로 이끌어냈다. 그 많던 맞선 자리를 갖고서 내 입에서 '괜찮다'는 말이 한번도 나오지 않았지만 이번만은 참 편하게 느껴졌던 감정을 어머님과 형수에게 전했더니 상경하는 일요일에 애프터 미팅을 준비해주었다. 사실 양가 부모님들이 더욱 성화였다. 결혼식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결혼 후 두 남녀는 서로를 알아가고 있었다.

평소 지방 출장 업무와 야근이 많았던 나는 그날도 부산 지역 출장 업무를 하루 앞당겨 마치고 자정을 넘긴 시간에 귀가했다. 13평 짜리 주공아파트에서 신혼 살림을 차린 아내도 사는 동네에 친구나 지인이 전혀 없던 탓에 독서와 그림 그리기로 소일해오다 예쁜 첫 딸을 출산한 후 육아에 전념코자 대학 강단마 포기하고 있었다. 잠자는 딸 옆에서 곤히 잠든 아내를 깨우지 않으려고 발뒤꿈치를 들고 조심조심 방안으로 들어갔다. 아내의 머리맡에 스케치북이 놓여 있었다. 어린 딸의 모습들을 여러 장 스케치한 그림을 목격했다. 그림에 재능이 있어 보이는 솜씨였다.

드로잉은 단순한 그림 연습이 아니다.
내가 그리는 대상의 기록일 뿐만 아니라
내가 태어난 이후 유일한 순간의 흔적,
내 몸으로 보고 생각하고 느낀 생명 현상의 증거이기도 하다.


결혼하기 전, 아내는 나에게 해외여행을 많이 다녀보고 싶다고 했다. 나와의 맞선 자리 때문에 프랑스 파리에서의 유학 일정까지 뒤로 미룬 걸 알기에 아내를 위한 유럽 첫 여행지는 바로 파리였다. 유명 화가들의 그림 감상을 위해 미술관 투어를 겸했다. 난 영어 구사밖에 못하지만 아내는 불어도 잘 했다. 이때 난 미리 준비해간 여행 노트에 제법 많은 드로잉을 그렸다. 그곳에 아내도 살을 붙였다. 하지만 카메라백을 도난당해서 모든 기록물 또한 분실하고 말았다. 이후 여러 차례의 유럽 여행 때도 도난 사고는 뒤따랐다.

마누라를 기록하다

비록 내가 전문 그림꾼은 아닐지라도 못난 나를 만나 동고동락同苦同樂했던 아내와의 추억을 남기는 작업을 조만간 해 볼 작정이다. 특히, 늘그막에 벌어졌던 나의 사업 실패로 인해 합의이혼할 수밖에 없었던 서글픈 초라함을 기록으로 남겨 두딸에게 전달하고 싶은 충동이 인다. 기록해두지 않은 추억은 서서히 소멸되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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