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N 카메라 앞에서 한 중년의 남성이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22년간 리먼에서 일한 채권 트레이더였다. 그날 건물을 나선 수천 명이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특정 금융 상품, 특정 시스템, 특정 회사에 최적화된 전문성을 20년 넘게 쌓아온 사람들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전문성은 리먼이라는 맥락 안에서만 의미가 있었다. 맥락이 사라지자 20년간 쌓아온 전문성도 함께 증발했다. - '프롤로그' 중에서

책의 저자 최연성은 AI 시대 커리어 전략과 조직 혁신 분야의 전문가로 20여 년간 네슬레, 보잉, 아마존, 액센츄어 등 다수 기업에서 조직을 새롭게 세우고, 비즈니스 모델을 재설계한 현장형 전략가다. 현재는 호주를 기반으로 한 글로벌 대기업의 국제 및 이커머스 사업부 프로덕트 아키텍처 혁신을 총괄하고 있다.
총 4부로 구성된 책은 피벗이란 무엇인가?(1부), 나는 어떻게 피벗할 것인가(2부), 기업은 어떻게 피벗할 것인가?(3부), 시대 흐름에 맞게 피벗하기(4부) 등을 통해 피벗은 더 나은 버전으로 진화하는 여정의 출발이므로 이제 우리들은 어디에 축을 두고 어디로 몸을 돌릴지 고민해볼 시간임을 강조한다.
책을 일기에 앞서 먼저 피벗의 개념을 이해하도록 하자. 피벗은 자신의 중심축, 즉 핵심 역량은 땅에 단단히 박아두고, 몸의 방향을 유연하게 바꾸는 일이다. 축이 없으면 흔들리고, 움직이지 않으면 막힌다. 모든 것을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거나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쌓아온 것 위에 새로운 층을 더하는 것, 자신이 가진 것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과정이다.
초침형 인재 vs 시침형 인재
초침형 인재는 ‘주어진 문제를 잘 푸는 것’에 집중하지만 그 가치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다. 그들은 누군가가 정해놓은 게임의 규칙 안에서 뛸 뿐, 게임 자체를 바꾸지는 못한다. 반면에 시침형 인재는 다르다. 그들은 ‘어떤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를 정의한다. '이 보고서가 정말 필요한가? 우리가 해결하려는 진짜 문제는 무엇인가? 다른 접근법은 없는가? 등 이런 질문을 던진다. 때론 기존의 방식을 완전히 뒤집는 제안을 하며, 게임의 규칙 자체를 바꾼다.
한국 사회에선 시침형 인재가 드물다. 우리의 교육 시스템이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주어진 문제를 정확하고 빠르게 푸는 훈련을 받도록 되어 있어서다. 수능시험도 정해진 시간 안에 정해진 유형의 문제를 푸는 능력을 측정한다. 창의적인 답, 다른 접근법, 새로운 질문은 점수에 반영되지 않는다.
이후 직장에 취직해서도 마찬가지다. 신입사원 연수 때 '시키는 일을 잘하라'라고 배운다. 선배가 하라는 대로 묻지 말고 실행하고, 절대로 튀지 말라고 가르친다. 이런 환경에서 10년, 20년을 보내면 시침형 사고방식은 퇴화한다.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데엔 능숙하지만 어떤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 정의하는 능력은 잃어버린다.
한편 시침형 사고방식은 타고나는 게 아니다. 학습할 수 있다. 그 핵심엔 '전략적 피벗'이 있다. 축을 고정한 채 방향을 바꾸는 피벗처럼 핵심 가치나 역량은 유지하면서 이를 적용하는 분야나 방식(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축이 없으면 방황이고, 축만 있고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정체다. 전략적 피벗은 이 둘 사이의 균형이다.
초침형 인재에서 시침형 인재로 전환하는 첫째 단계는 자신만의 축을 발견하는 것이다. 본인이 진정으로 잘하는 것, 본인만의 관점, 본인이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고유한 가치, 이것이 명확해지면 그 축을 중심으로 다양한 방향을 탐색할 수 있다.
피벗 로드맵 그려보기
직장인들에게 일요일 저녁은 잔인한 시간이다.주말 내내 미뤄두었던 현실이 슬금슬금 다가온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한국 직장인의 80% 이상이 일요일 저녁 우울감을 느낀다고 응답한다. “다들 그렇게 사는 거지 뭐”, “어른이 되면 원래 이런 거야” 하고 자조적으로 넘길 일이 아니다.
피벗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만성적인 우울감은 단순한 감정의 기복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라는 기업, 즉 ‘나 주식회사’의 비즈니스 모델이 고장 났음을 알리는 요란한 경고음이다. 자동차의 엔진 경고등이 커졌는데 '원래 가끔 켜지는 거야'라며 무시하고 달리면 어떻게 되는가? 결국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멈춰 선다. 월요병도 마찬가지다. 무시하고 버티면 번아웃, 우울증, 심지어 신체적 질병으로 이어진다.
기업이 위기에 처했을 때 경영자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감정적인 호소가 아니라 냉철한 '실사'다. 재무제표를 뜯어보고, 현금 흐름이 막힌 곳을 찾고, 경쟁력을 잃은 사업부를 도려낸다. 구조조정이 필요하면 단행하고, 신사업이 필요하면 투자한다. 즉 감정이 아니라 데이터로 판단하고, 직관이 아니라 분석으로 결정한다.
그런데, 왜 우리들은 나의 인생이라는 기업이 위기에 처했음에도 CEO처럼 분석하지 않고 지친 직원처럼 한탄만 하고 있는가? "힘들다", "지겹다", "그만두고 싶다"는 푸념은 경영 보고서가 아니다. 본인에게 필요한 것은 냉정한 진단과 구체적인 전략이다.
피벗 로드맵의 첫 단계는 막연한 불안감을 구체적인 데이터로 전환하는 '정밀 진단'에서 시작된다. 우리에게는 더 정교한 진단 프레임워크가 필요하다. 저자는 '자산 건전성 평가'를 개인에게 적용해 볼 것을 권한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이 잔인한 질문을 해보라고 말이다. "만약 오늘 내가 내 인생이라는 기업을 인수하려는 사모펀드의 투자자라면 나는 나를 매수할 것인가?"
만약 본인의 자산 대부분이 '체력', '순종', '회사 내부 시스템에 대한 지식' 같은 감가상각 자산이라면 지금이 바로 위기 상태다. 매년 본인의 시장 가치는 하락 중이다. 반면 자산 대부분이 '문제 해결 통찰', '업계 네트워크', '융합 능력' 같은 증식 자산이라면 시간이 지날수록 본인의 가치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
진단 단계에서 확인해야 할 또 하나의 핵심 지표는 '성장의 기울기'다. 이에 저자는 '성장 vs 부패 테스트'를 제안한다. 지난 6개월을 되돌아보고 아래와 같은 3가지 질문에 대해 솔직하게 답해 보라고 한다.
첫째, 지난 6개월 동안 이력서에 한 줄로 적을 수 있는 새로운 성취나 프로젝트가 있었는가?
둘째, 지난 6개월 동안 업무를 수행하며 "어렵다, 모르겠다"고 느끼고 치열하게 공부해야 했던 순간이 있었는가?
셋째, 지난 6개월 동안 회사의 간판을 떼고도 나를 동료나 전문가로 인정해 줄 새로운 사람을 3명 이상 만났는가?
만약 위 질문들에 모두 "아니요"라고 답했다면 자신의 커리어는 지금 '부패'하는 중이다. 아무리 고연봉이고 회사가 안정적이라 할지라도 본인은 '좀비' 상태다. 겉으론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거다. 우리들은 종종 편안함을 안정감으로 착각한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출근, 같은 자리에서 같은 종류의 일을 처리한다면 스트레스는 적고 예측 가능성은 높을 것이다. 피벗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런 상태는 '지적 사망'의 징후다.
진단이 끝났다면 이젠 계획을 세울 차례다. 이 대목에서 많은 이들이 치명적인 실수를 한다. '실패하지 않는 완벽한 계획'을 세우려 한다는 것이다. 사실 불확실한 피벗의 세계에서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가설'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가설은 검증되어야 한다.
유튜브의 탄생 이야기는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2005년 페이팔 출신의 채드 헐리, 스티브 첸, 자베드 카림 등 세 청년이 새로운 사업인 '비디오 데이팅 사이트'를 구상하고 있었다. 당시 온라인 데이팅은 텍스와 사진 기반이었다. 이에 이들은 "영상으로 자신을 소개하면 더 매력적이지 않을까? 사진은 조작할 수 있지만, 영상은 진짜 모습을 보여주니까"란 생각을 했다.
논리적으로 완벽해 보이는 가설이었다. 그들은 사이트를 만들고 슬로건을 정했다. " Tune In Hook Up" 사람들이 매력적인 영상을 올리고, 다른 사람들이 영상을 보며 데이트 상대를 찾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완벽한 계획이었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아무도 영상을 올리지 않았다. 이들의 가설인 '사람들은 데이팅을 위해 자신의 영상을 올리고 싶어 할 것이다"가 틀렸던 것이다.
이에 이들은 데이팅이란 목적을 강요하는 대신에 사이트를 열어두고 사람들이 무엇을 올리는지 관찰하기 시작했다. 배우기 위한 계획으로 전환한 것이다. 그러자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자신의 고양이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다. 가족 휴가 영상, 아이의 첫 걸음마 영상, 친구들의 바보 같은 장기자랑 영상 등 데이팅과는 전혀 무관한 일상의 조각들을 올렸다. 그냥 자신의 일상을 공유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데이팅이란 목적을 과감히 버리고 '비디오 공유 플랫폼'으로 피벗했다. 슬로건도 "Broadcast Yourself"로 바꾸었다. 2005년 4월에 첫 번째 영상이 올라왔다. 자베드 카림이 샌디에이고 동물원 코끼리 앞에서 찍은 19초짜리 영상이었다. 2006년 10월, 구글은 유튜브를 16억 5천만 달러에 인수했다.
같은 필름 회사인데 코닥은 망하고 후지필름은 살아남았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디지털 카메라의 등장으로 필름 시장은 사망 선고를 받았다. 정작 세계 최초로 디지털 카메라를 개발했음에도 코닥은 '우리는 필름 회사다'란 정체성을 고수했다. 결국 2012년 코닥은 파산 신청을 했다. 반면에 후지필름은 변신을 시도했다. 자신들이 가장 잘하는 것을 발견, 여기에 주력했다. 필름의 주원료인 콜라겐을 다루는 기술을 살려 '콜라겐과 항산화와 나노 기술'을 다루는 기업으로 회사를 재정의했다. 화장품 브랜드 '아스타리프트'까지 탄생시켰다.
로드맵의 과정
1단계(강점의 해체)~ 가진 기술을 아주 잘게 쪼개보라
2단계(맥락의 이동)~ 해체된 기술이 가장 비싸게 팔릴 수 있는 시장

전략적 끈기로 피벗하라
이밖에도 책은 피벗의 성공과 실패 사례 알아보기, 기업 피벗의 유형 살펴보기, 피벗을 위한 마인드셋 등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참고로 나는 현재 중소업체의 경영고문으로 재능기부 활동을 하고 있어서 이 책에 밑줄을 정말 많이 그었을 정도로 배울 내용들이 많았다. 평생 한 직장에서 장기 근무하던 게 자랑이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무조건 버티는 '수동적 인내'에서 벗어나 자신의 목표 달성을 위해 '전략적 끈기'로 피벗해야 한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경제경영 여건 때문에 생존에 관해 고민하는 경영인, 직장인, 그리고 일반 개인 모두에게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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