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십 여행 - 나이 듦, 그래서 더 아름다운
이여진 지음, 서진 엮음 / 스노우폭스북스P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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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나는 대한민국 법적 노인이 되었다. 나이를 먹는 일은 즐겁지도, 그렇다고 슬프기만 한 일도 아니다. 다만 한 가지 선물이 있다면 사춘기부터 내 안에 자리 잡았던 긴장과 경계에서 조금씩 풀련날 수 있다는 점이다. - '프롤로그' 중에서



지은이 이여진은 제주 출신으로 스물셋에 고향을 떠나 33년간 교단에 섰다가 이젠 내려와 나이 칠십이 되어간다. 누군가의 아내로, 누군가의 어머니로, 누군가의 며느리로 지냈던 삶은 늘 타인을 향해 있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나'를 위한 시간이 왔다. 글솜씨가 좋아 다수의 수상 경력을 지녔다.


총 네 개의 챕터로 구성된 책은 풍경(챕터1), 사람(챕터2), 사물(챕터3), 공간(챕터4) 등을 통해 27가지의 이야기들을 써내려간다. 이는 여행들의 파편을 모 글을 쓴 여행 에세이로 '어디론가 멀리 떠나는 나'가 아니라 '돌아와 마주하는 나'의 이야기인 셈이다.


풍경


오스트리아의 할슈타트, 호수와 산이 겹쳐진 그 마을은 마치 세상과 단절된 듯 또 다른 세계처럼 고요했다. 파스텔톤의 집들, 호수를 미끄러지듯 떠다니는 백조, 구름이 걸린 산맥,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제자리에 있었다.


할슈타트의 시간은 달랐다. 그곳의 시간은 '시계의 시간'이 아니라 '영혼의 시간'이었다. 누구나처럼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살아온 저자에게 카이로스의 시간이 처음으로 찾아왔다. 누구의 일정도, 계획도, 의무도 없는 시간, 그 시간 안에서 저자는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나는 안다. 여행은 세상을 보는 일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나를 다시 만나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풍경의 안과 밖을 서성인다. 그 경계 위에서 비로소 ‘살아 있음’을 배운다. 그리고 아주 가끔, 이유 없이 눈가가 젖는다. 잊지 않고 살아온 시간들이 나를 안아주는 순간들이 있어서 그렇다.(28쪽)


책에 실린 사진을 몇 번이나 바라보았다. 월드컵 축구 4강 신화를 일구었던 2002년 여름, 유럽으로 가족여행을 떠났다.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 이탈리아 로마, 베니스, 밀라노 등을 거쳐 오스트리아를 다녀오는 여행 계획이었다. 이탈리아까지 여행을 잘 마치고 오스트리아로 향할 무렵 내가 경영하던 회사에서 급한 연락이 왔다. 여행을 멈추고 귀국길에 올랐다. 당시 여행 스케줄에 할슈타트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의 이쉬움 때문에 사진이나마 내 눈에 담으려 했다. 이후 난 2008년 스페인 가족여행을 끝으로 더이상 해외 여행을 하지 못했다. 회사 경영이 매우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사람

스페인 바르셀로나 성가족(파밀리에) 성당, 성당 앞에서 저자의 첫인상은 혼란 그 자체였다. 낯선 돌기둥과 하늘을 향한 첨탑 등이 그런 느낌을 들게 만들었다.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가 심혈을 기울인 이 성당의 건축은 미완성 상태로 성당 벽면은 마치 벌집처럼 거칠었고 옥수수 줄기처럼 솟은 탑들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나 역시도 2008년 이 성당 앞에 섰을 때 미완성이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 성당의 의뢰인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영원하시니 바쁜 분이 아니시지요" - 안토니 가우디


가우디는 신앙심으로 건축을 했다. 그에게 설계란 계산이 아닌 예배였다. 류머티즘에 시달리며 평생 검소하게 살았던 이 천재 건축자는 예배하러 가는 길에 전차에 치여 생을 마감했다. 그의 허름한 옷차림 때문에 행인들은 그를 노숙자로 여겼다니 정말 아이러니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발했을 때 나는 수시 입학에 합격한 작은딸을 위로하고자 열일 모두 제껴놓고 스페인으로 가족여행을 떠났다. 당시 성가족 성당 앞에서 난 규모에 놀라고 말았다. 고등학교 1학년때까지 성당을 다녔던 내가 그동안 보았던 성당 건축물과는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또 이탈리아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인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감상했던 때를 떠올렸다.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예술은 타인의 열기 속에서, 나의 사적인 망상으로 시작된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아름다움이란 어쩌면 신이 인간의 고독을 달래기 위해 남겨둔 유일한 흔적일지도 모른다. 이탈리아 여행 때 목이 아프도록 이 그림을 올려다 보았던 추억이 떠오른다.

사물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입구에 위치한 유리로 지은 피라미드는 관광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파리는 에펠탑과 함께 건축의 정교함과 조형미가 조화를 이룬 도시란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박물관에 입장하기 전부터 긴 대기줄에 지쳤지만 한 작품 앞엔 유독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소장했던 '모나리자'란 작품이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도난과 훼손까지 있었던 터라 이젠 방탄(강화)유리 속에 보호되고 있었다.


프랑수아 1세는 정치와 외교면에서 혹평을 받았지만 예술과 문화 진흥에선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후원하던 사람이 없었던 시절에 그는 레오나르도를 프랑스로 초청해 예우하며 머물도록 배려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모나리자란 불세출의 명작이 루브르 품에 안기게 되었다.

공간

밤늦도록 라디오에서 별밤을 듣던 저자에겐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은 아름다운 기타 선율과 함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공간이었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었기에 정교한 문양도, 스페인의 공기조차 알지도 못했지만 눈을 감으면 그 곳에 있었다.

40여 년이 지나 마침내 저자는 그 이름 속 공간을 직접 걷게 되었다. 상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알람브라는 '붉은 성'이란 뜻이다. 무어인의 손에 의해 흙으로 성벽을 쌓았는데, 흙속의 철분이 붉은 빛을 발하기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듯하다.


'스페인을 잃는 것은 아깝지 않지만 알람브라를 다시 볼 수 없는 것이 원통하다' - 보압딜, 마지막 술탄

스페인 그라나다 지방에 위치한 이곳 알람브라는 카톨릭과 무슬림이 계속 힘을 겨루던 역사적인 장소였다. 나스르 궁전은 술탄이 머물던 공간이자 아라베스크 문양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사자의 궁전은 왕의 사적인 세계였다.


은퇴 후 10여 년의 여정을 기록하다

여행은 바깥을 보는 일이었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언제나 나를 확인하는 일이었다고 저자는 소감을 밝힌다. 글은 확인의 도구였다. 내면을 닦아내고 쌓인 감정을 털어내고 오래 묻은 생각을 천천히 빛 속으로 꺼내는 작업이었다. 더 늦기 전에 용기를 낸 저자의 칠십 여행은 칠십 중반인 내게 지난 과거를 소환해주 감동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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