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암 강세황, 서호 김홍도 연구
유천형 지음 / 지식과감성#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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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암이 안산에 거주할 때 어린 단원 김홍도는 그를 스승 삼아 화가의 자질을 길렀으니 두 거장의 만남은 필연적이지 않은가? 이들은 18세기 영·정조 르네상스를 꽃피운 일등 공신으로 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표암은 당시 ‘예림의 총수摠帥’로 조선 화단을 장악했으니 그를 만나러 이곳을 드나들었던 문인 화가들의 분주한 발자국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 문종이 심은 예술의 씨앗이 배테되어 최경을 거쳐 표암과 단원에 이르러 만개한 것이다. - ‘발간사’ 중에서



책의 저자 유천형은 문화원장 시절 과거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은 경험을 토대로 18세기 안산과 관련한 회화사의 일부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고자 18세기 두 거장의 발아지發芽地를 확실히 밝히고자 한다.


두 거장의 발자취를 세우는 것은 이들의 문화사적 업적이 너무나 크고 또 안산의 품격과 관련되기 때문에 안산이 단순히 자연환경만이 아니라 역사 문화가 살아 숨쉬는 격조 높은 도시임을 천명하려는 의도가 담긴 셈이다.


청문당淸聞堂과 경성당竟成堂


안산 청문당은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에 위치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4호로 지정된 곳으로 조선 시대부터 부곡동은 진주 유씨 세거지世居地였다. 즉 16대손인 유시행柳時行(1566~1606년)의 아들이 선조의 부마가 되자 선조가 내린 사패지인 이곳에 자리 잡았다. 당시 일만 권의 서적이 소장된 조선 시대 만권당 중 하나였다.


조선 시대 4대 만권당

서울 월사月沙 이정구의 고택

진천鎭川 이인엽, 이하곤 부자의 고택

안산 부곡(개멸마을) 유명천의 청문당

안산 정재골 유명현의 경성당


(사진, 청문당 전경)


4백여 년 전에 축조된 이 집은 당초 5천여 평 대지 위에 현정玄亭, 하당荷堂, 희한당熙閑堂, 만권당萬卷堂 등의 부속 건물과 괴석원怪石園 등 빼어난 정원을 자랑하고 있었다. 당시 이 집을 설경으로 한 표암 강세황의 산수도인 <자싱편도池上篇圖>가 유씨 가문과 진주 강씨 본댁에 각각 1점씩 전해지고 있다.


경성당은 처음엔 유명천, 유명현 형제가 공부하던 서실書室로 안산 부곡동(정재골)에 있었다. 현재 부곡동(개멸마을)에 있는 경성당은 그 후 유원성이 차명한 것이다. 이인좌의 난으로 인해 유명현이 남해의 외딴 섬에서 유배 중 죽고 이후 유씨 가문은 정재골(현, 정재초교 근처)로 낙향했던 것이다.


퇴당 유명천은 낙향 후 안산 부곡(개멸마을)에서 개인 서재를 청문당이라고 명명하고, 정재 유명현도 안산부곡(정재골)에서 경성당이라 이름했다. 표암 강세황의 증언에 따르면 청문당과 경성당은 각기 조선의 4대 만권당의 하나로 수많은 도서를 수장하고 있었다.


표암 강세황의 예술


강세황(1713~1791년)은 조선 후기 때 대표적인 문인화가이자 평론가이다. 문인 사대부로서 그림뿐만 아니라 시와 글씨에도 능하여 소위 시詩·서書·화畵의 삼절로 명성이 높았다. 타고난 예술적 재능 못지않게 탐구 정신 또한 투철해 만년까지 꾸준히 노력하는 자세를 견지했다.


그가 활동하던 조선 후기 화단(1700~1850년 경)은 디양한 화법의 전개와 새로운 회화관의 탄생이 이루어지던 시기로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와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풍속화와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 등이 유행했으며, 점차 서양화법도 수용되고 있었다.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만들어 내었으며, 나아가 당시의 한국적인 회화 발전에도 크게 공헌햇다. 뿐만 아니라 김홍도, 신위 등의 스승이 되어그들에게 그림을 가르쳐 주고 영향을 끼쳐 그들이 대가로 성장케 한 업적 또한 크다.


(사진, 표암유고에 실린 시詩)


마지막 두 구절의 ‘밤나무 솔 시냇가엔 소나무가 우거져 있고 옹기 촌 입구엔 시냇물 졸졸 흐르네’란 표현은 당시 강세황이 거주하던 산향재山響齋 앞을 흐르던 실개천과 그 개천을 따라 내려가면 우측에 조성되어 있던 소나무 숲을 지칭한 것이다.


김홍도의 생애와 화경


단원 김홍도(1745~1806년)는 안견, 장승업과 함께 ‘조선 3대 화가’로 지칭된다. 그럼에도 일반인들은 단지 ‘풍속화風俗畵의 대가’ 정도로 알려져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는 전통 회화 모든 영역에 두루 뛰어난 큰 화가였다.


유럽 르네상스 시대의 유명 화가에 비교되는 천재 화가로 평가될 수 있을 정도이며, 겸재 정선(1676~1759년)과 더불어 김홍도는 조선의 화선畵仙으로 병칭된다. 그의 위대성과 걸맞게 장르별, 작품별, 회화사적 의의 맟 영향, 인물 됨됨이와 삶 등 다방면에 걸쳐 국내외의 여러 박사학위 논문을 비롯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사회 각계각층 남녀노소가 등장하는 익살스럽고 삶이 깃든 풍속화, 마냥 푸근하게 느껴지는 우리 산천을 화폭에 옮긴 진경산수화, 그리고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까치, 강아지 등의 동물과 꽃을 소재로 다룬 영모화나 화조화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정서를 누구보다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김홍도의 가계도를 살펴보면 그의 선대가 역관, 서리 등으로 중인 집안 출신이며, 그림과는 전혀 무관했음을 알 수 있다. 표암 강세황의 <표암고>중 ‘단원기’에 따르면 어린 시절 김홍도가 표암의 집을 자주 드나들었으며, 그림에 재능을 보여 칭찬과 함께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788년 정조의 어명에 따라 금강산을 그렸으며, 동행한 강세황은 76세의 고령 탓에 끝까지 함께하지 못해 그동안 그린 작품을 보여 달라고 한 기록이 강세황의 <표암유고>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에 나와 있는 걸로 보아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은 이때 제작된 초본으로 짐작된다.


서호西湖는 김홍도가 30대까지 많이 쓰던 사능士能 이전의 호이다. 서호는 한자문화권에선 꽤나 빈번히 사용된 명칭이다. 안산의 서호는 점섬 앞바다 일대를 지칭한다. 대개 호을 지을 때 자신 또는 자신의 주변 환경과 밀접한 경우가 많다. 어린 시절 김홍도가 인산에 거주했음이 확인되므로 서호는 점섬 앞바다인 서호에서 따온 것이 분명해 보인다.



(사진, 서호 지도)


김홍도의 스승인 강세황이 <표암유고>에서 중년 이후 노년까지 절친한 친구였던 이수봉을 위해 지었던 ‘제화천이의숙문祭花川李儀叔文’에도 “서호西湖에서 술을 가지고 다니던 일이 곧 꿈속 일과 같다”라는 글이 있다. 표암은 중장년기에 안산에서 거주했으므로 서호는 바로 안산의 점섬 앞바다임을 알 수 있다.


안산의 문화사적 가치


안산은 강세황이 30세에서 60대에 들어 벼슬길에 나아가기까지 머물었던 지역으로, 그의 문화사적 업적을 남기는데 중요한 토양이었다. 강세황 외에도 조선 후기 문화사에 많은 업적을 남긴 문인들의 삶도 청문당과 경성당이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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