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
에크하르트 톨레 지음, 김미옥 옮김 / 양문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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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영적인 지헤와 관련된 책들을 읽으면 늘 느끼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인도의 영적 지도자들의 책을 접하면 마치 현실과 영적 세계는 동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일상, 이 매일의 삶, 내 바로 옆에서 숨쉬며 잠자고 있는 부부, 가족, 아이과의 이 하찮아 보이는 삶에서 평화와 기쁨을 발견하고 그것과 함께 살 수 있는 힘이다. 지금 이 공간이 나의 명상 공간이며, 지금 이 상황이 나를 자각할 수 있는 상황이며,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이 사람이 바로 나를 드러내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교회 문을 나와, 가부좌에서 풀려 나와서는, 이 매 순간 살아가는 존재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 내가 평화와 기쁨을 깨닫지 못한다면...결국 나는 분리되고 만다. 우리는 특정한 공간 속에서 주어지는 제한적 행복이 아니라, 평화와 기쁨이 바로 이 순간, 바로 이 삶, 바로 이 공간, 바로 이 사람과의 관계와 함께 하기를 바란다.

여러 영적인 책들을 접하면서 늘 어려움을 느끼며 곤혹스러워 하던 나의 절친한 지인은 이 책을 접하고 나서 자신이 읽은 영적인 책 가운데에서 가장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으며 그렇기에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생각과 감정은 나 자신이 아니다’라는 에크하르트 톨레의 말에 깊이 반응하는 그를 바라보면서 나 또한 이중으로 감동을 받았다. 내가 그에게 권한 영적 깨달음과 관련된 수십 권의 책 가운데에서 그가 그 말을 읽은 것이 처음이 아니다. 이 책만이 그에게 영향을 미쳐서 그가 그토록 반응은 아닐 것이다. 성장이라는 것은 이렇게 아주 미세하게 땅 안에서 기다림의 과정을 겪으면서 싹을 띄워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크하르트 톨레의 책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구도의 길로 소개한 것은 이유가 있다. 일반적으로 영적인 주제를 다루는 책은 특정 분야의 책들이 그러하듯이 전체 분야에서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는 참으로 이례적인 일이다. 그런데 이 책은 아마존에서 5년 동안 베스트셀러 1위의 자리를 지켜왔다. 그것은 에크하르트 톨레의 말들은 전혀 새롭지 않은 바로 나 자신의 모습, 고통이 반복되는 지금 이 순간,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싶은 매일의 바램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평소에 쉽사리 접하게 되는 자기관리 분야의 책들과는 명확히 다른 구도라는 분명한 의도가 책 전체에 순수하게 일관되어 있다. 특히 어떤 특정한 종교적 색채에 구애 받지 않은 자만심 없는 담백함과 간결함이 많은 이들에게 장애물 없는 호소력을 느끼게 한다. 무엇보다도 나의 지인이 좋은 예가 되지 않을까.

에크하르트 톨레의 책을 읽고 나서 어느 순간부터 이전에는 식상했지만 지금은 매우 진실된 하나의 질문이 늘 내 마음에서 솟아오른다. 마음이 너무 혼란스럽거나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지 정말 알 수 없을 때, 이 질문은 내게 다시 숨쉬는 방법을 알려준다. “오늘은 나의 마지막 날, 지금 이 순간은 나의 마지막 순간, 지금 이 사람은 나의 마지막 사람…그렇다면 나는?”

에크하르트 톨레의 책은 총 5권 한국에 번역되어 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The Power of NOW, ),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The Power of NOW, 2001), <고요함의 지혜>(Stillness Speaks, 2003> 그리고 나는 아직 읽지 않은 (A New Earth-Awakening to Your Life's Purpose, 2005),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2008.9>
내 마음 속에서 오랫동안 꿈틀거리던 아주 현실적이고 다양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담고 있어 기쁨을 주었던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아주 얇지만 한 구절 한 구절 매 순간 마치 삶 전체가 명상 가운데 있는 듯 했던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와 <고요함의 지혜>

내 책상 앞, 지금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꽂아둔 이유는, 매번 그 책을 펼쳐 보지 않더라도 책 안에서 에크하르트 톨레가 하고 싶었던 말의 진정한 한 마디, ‘지금 이 순간’과 ‘고요함의 지혜’, 제목 그 자체 만으로도 일상의 강력한 안내자가 되어 주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의 삶에 대한 존재감과 자각이 더 자주 그리고 더 넓고 깊게 지속되도록 도와 준 에크하르트 톨레와 그의 책.
잭 콘필드가 ‘깨달음 전에도 빨래, 깨달음 후에도 빨래’라는 했던 말의 깊이가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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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선택 2008-08-14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의 핵심을 발췌하여 엮은 책이다. 그렇다고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만 읽으면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를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에는 상황에 따른 조언들도 자세하게 담겨 있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 휠씬 쉽다. 나는 세 책을 동시에 읽고 있다. 영적인 책들은, 내가 일정한 단계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다 읽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종류의 책들이 아니니까.
 



‘불멸의 이 순신’ 때처럼 ‘대왕 세종’의 종종 마음에 박히는 의미 있는 구절들이 반갑고 고맙다.
주말 ‘대왕 세종’을 친구와 같이 보면서 우리는 동시에 한 의미 깊은 구절에 박혀서 드라마가 끝나고 나서도 그 이야기를 1시간은 한 듯 하다.

사람들의 오해 한 가운데에 있게 된 충녕 대군을 향해 효녕 대군은 말한다. 사람들은 너에게 왕의 자리를 뺏으려 하는 자라고 오해할 터이다, 너는 그것이 두렵지 않느냐고. 충녕 대군은 이미 자신의 엄마에게도 오해를 받아 이제 너를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이야기까지 들은 터였다.

이에 대해 충녕 대군은 말한다. 두렵다고.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오해 하게 될까봐 두려워하여 세상에 대해 진실에 대해 눈을 감게 될까봐, 정직하게 마주하지 않게 될까봐 두렵다고. 대사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진실을 외면하게 될까봐 두렵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 속에 자신이 억울하게 되는 것이 두렵지 않고 자신이 진실을 세상으로부터, 정직을 외면하게 될까봐 두렵다고 한 충녕 대군의 대사는 잠시 시간이 정지된 듯 느릿하게 진하게 가슴에 울렸다.

친구는 자신이 뜻했던 것을 이룬 사람과 이루지 못한 사람간에는 두려움에 있어 차이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두려워하는 대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무언가를 해 보기도 전에 두려워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과 의견, 독선과 오해를 두려워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것을 견디지 못할까봐 두려워한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할까봐 두려워한다. 그 빛 속에 둘러싸여 있는 듯한, 보장되어 있는 듯한 그 그룹 안에 그 원 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될까봐 두려워한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지 않게 될 그 두려움을 두려워하게 된다면 아마도 우리는 미처 알지 못했던 나, 그런 내가 있는 ‘바로 그 삶’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3편>에 보면 부자 아빠가 이런 말을 저자에게 해 준다. 세상 사람들이 너에게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세상 사람들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대체로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그 하나는 자신이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너도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 또 하나는 네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 지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기에 못할 것이라고 한다는 것.

진정 무언가를 뜻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정말 우리에게 다가온 바로 그 무엇이라면 세상 사람들이 왜 나에게 안 된다고 말하는 지 생각해 보자. 부자 아빠가 말해 준 그 이유가 아주 설득력 있게 들린다.

지금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다면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그것이 어떤 두려움인지?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자 하는 두려움은 아닌지?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지 않게 될까봐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아마 최대한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고자 사랑스러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 게 아닐까.

충녕 대군처럼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을 제대로 골랐으면 좋겠다. 그리고 바로 나 자신을 감동시키는 그 어떤 일을 찾은 놀라운 행운을 누리고 있다면 오늘 하루 용기 백배 충전되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기쁨을 누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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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도 가장 가고싶은곳!

[빈센트 반 고흐 전]을 다녀와서

(이 글은 전문적 소견의 글이 아닙니다. 저는 미술사나 기법이나 인상주의 등에는 잘 모릅니다. 빈센트를 향한 예기치 않은 열렬한 애정과 저의 순수하게 개인적인 소감을 담은 글입니다. 하지만 그의 원작이 얼마나 멋진 지..실제로 보지 않고서는 믿기지 않을 지경입니다. 원래부터 미술에 특별히 조애가 깊었거나 빈센트에 대한 지대한 애착을 가졌던 사람이 아니었으나 그의 원작을 만나고 나서 깊이 빠져 버린 한 사람임을 미리 밝혀 둡니다)


나는 사실 내가 이렇게 빈센트의 작품을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다. (고흐는 살아 생전 자신이 반 고흐가 아니라 빈센트로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그를 빈센트라 부르고 싶다)

너무나 강렬하고 유명해서 잘 알고 있는 작품 ‘해바리기’와 ‘자화상’ 그리고 그가 귀를 잘랐다는 고갱과 얽힌 사연 외에 내가 빈센트에 대해 아는 바가 많지 않기도 하거니와 그에 대한 사연들은 너무 강렬해서 오히려 흥미를 잃게 하는 쪽이었다.

그런데 빈센트의 원작과 마주하고 나서 나는 그에게 반하고 말았다. 어떻게 이토록 아름다운 노란색과 파란색을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압도적인 노란색과 파란색에 나는 그가 왜 색채 화가라고 불리는지 알 수 있었다.
또한 그의 붓터치는 너무나 생생하고 강렬해서 나는 마치 빈센트가, 그토록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던 빈센트가, 자신에게는 구원이라고 말한 그림을 그리는 뒷모습이, 그 붓칠이 보이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특히 그의 ‘밀짚 모자를 쓴 자화상(1887년작)’은 너무나도 맘에 들었다. 정말 의외였다. 나는 그냥 괴기할 것이라 짐작했던 그것의 원작은 압도적이었다. 그 노란색과 파란색, 그리고 붉은 색. 그 붓칠. 그 결. 도대체 빈센트는 어떤 감정과 느낌, 생각을 가지고 이 자화상을 그렸을까. 나는 그의 정신을 발견하고 싶어서 그의 자화상을 십여분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림을 이렇게 한 동안 바라보니 잠깐 흘러가며 보는 것과 아주 아주 다른 느낌이 들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계속 바라보고 싶고 또 바라보고 또 보다가 더 사랑에 빠지게 되는 그런 불가사의한 느낌이.

빈센트는 인물화에 깊은 애정을 가졌다고 한다. 그는 자화상을 40여점을 남겼는데 인물화에 있어 두번 째로 유레없는 작품수라고 한다. 빈센트는 사실 그대로 표현하기 보다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 그 인물의 내면을 드러내는 그런 인물화를 그리고 싶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더더욱 빈센트의 자화상을 한참이나 마주 눈 맞추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화상을 그릴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빈센트는 성당을 그리기 보다 차라리 사람의 눈을 그리겠다고 동생 테오에게 말했다고 한다. 빈센트는 그 기묘하면서도 낯설고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그 자신의 자화상으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내가 그리고 싶은 건 성당보다 사람들의 눈이야. 이들 눈 속에는 성당에 없는 무언가가, 엄숙하고도 위엄이 있는 무언가가 존재하기 때문이지. 불쌍한 거지의 영혼이든 매춘부의 영혼이든, 내가 보기엔 인간의 영혼이 더 흥미로운 대상이야.”
-1885년 12월 18일,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책 <빈센트 반 고흐>에서 발췌-

나는 그림에 대해 잘 모른다. 미술사 수업을 대학 때 호기심으로 교양 과목으로 들어본 것이 다이다. 제대로 된 미술 관련 서적을 찬찬히 읽어 본 적도 없다. 다행히 미술관에 친구들 보다 1시간 넘게 일찍 도착하여 1층의 갤러리샵을 둘러보면서 그의 작품을 만나기 전의 의식을 할 수 있었다.
특히 흥미로운 책 한 권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빈센트가 자신의 동생 테오에게 보낸 150여통의 편지들과 ‘반 고흐 미술관’ 소장 작품 250여 점을 편집하여 출판한 책 <빈센트 반 고흐>(출판사 생각의 나무)이다. 사실 인상주의나 그러한 미술사적인 관심보다 빈센트라는 사람이 궁금했고 그의 정신 세계를 알고 싶었던 참에 그 책은 아주 반가운 것이었다. 그 두꺼운 책을 펼쳐 들고 아주 잠깐, 아주 약간 읽게 된 빈센트의 글은 그의 영혼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어서 나는 두서없는 애절함과 두근거림을 느꼈다.

고흐 전시회에서는 각 시기 별로 작품을 모아놓고 그 시기에 대한 글도 벽면에 적어 놓아 감상하는 데 아주 도움이 되었다. 고흐전을 보러 가신다면 꼭 이 벽면의 글을 읽어 보시길 그리고 작품 설명을 먼저 듣고 나서 다시 찬찬히 작품을 보시길 권한다. 30분의 작품 설명을 듣고 작품을 다시 한 번 쭉 둘러보니 역시 데면데면하게 작품을 대하는 것보다 휠씬 좋다.

‘밤의 카페테라스’와 ‘까마귀가 있는 보리밭’이 없어 못내 아쉬웠는데 이번에 빈센트의 원작을 만나고 나서 미처 조우하지 못한 그의 작품을 찾아 유럽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외 제목을 잘 알지 못하는 작품들도 직접 보고 싶고. ‘밤의 카페 테라스’의 카페며 그가 묵은 ‘노란집’이며 작품 속의 장소들도 봐 두고 싶고.
마치 생물처럼 꿈틀거리는 생생한 ‘아이리스’, 불타는 듯한 짙은 파란색의 사이프러스, 방금 그려진듯한 물감이 떨어질듯한 정원의 나무들, 떨어져 볼수록 오히려 창문을 통해 보는 듯 비밀스러운 색채의 노란 집.
아무래도 빈센트에 대해 공부하게 될 것 같다. 무엇보다 노란색과 파란색의 절정을 이루는 그의 작품에는 도저히 눈을 못 뗄 것 같다.

“나는 아무 소용이 없는 사람으로 느껴진다’며 권총 자살 시도로 이틀 만에 결국 죽음을 맞이한 그에게 삶은 아마도 너무 진지했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며 그림이 그에게 재능이기 이전에 “구원이다”고 말한 심정이 가슴 저리게 아프다. 결국 그림조차 그를 구원하지 못했다. 그의 그림과 마주하고 있는 현재의 나는 그 압도적인 아름다움, 그의 진심에 완전히 반해버렸는데 말이다.

“이런 저런 경향을 만족시키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진정한 인간적인 감정이 표현되기를 바란단다. 그러니까 이 일이야말로 나의 목표야. 이런 생각에 집중하면 내가 무엇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모든 것이 쉽고 단순해지지. 이런 집중으로 말미암아 삶에 혼돈이 초래되는 일 없이 나의 모든 행위가 이 목표를 지향한다면 말이다.”
-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책 <빈센트 반 고흐>에서 발췌-


* 빈센트 반 고흐전에 가실 분들을 위해서
- ING 생명이나 GS 칼텍스의 협찬으로 회원 할인가가 있으므로 할인의 기쁨을 누리시길~
- 작품 해설이 30분 정도 진행되는 데 가능하면 이 시간에 맞추어 가세요. 아니 절대적으로 맞추어 가세요^^ 대부분 2시간 간격으로 진행됩니다.
- 1층의 갤러리샵도 꼭 구경하시구요. 원작을 보고 나면 아무래도, 이 노란색과 파란색이 아닌데...하는 생각이 들며 색채가 맥이 빠지지만 그래도 마음이 드실 것 같습니다^^
- 서울시립미술관 1층에 사물함이 있어 아주 요긴했습니다. 미술관 내부는 사람으로 복잡거려 제법 더우니 코트는 벗어 사물함이 넣어 두시고 관람 하심도 좋으실 듯 합니다.
- 제일 중요한 것! 아주 아주 복잡합니다. 저는 평일에 갔는데도 복잡했습니다. 주말에는 더욱 심하겠지요. 이토록 멋진 작품들을 많이 사람들이 와서 보니 뿌듯하기도 한데 관람할 때는 복잡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평일이라면 오전이나 저녁에, 주말이라면 다소 각오를 하심이 좋을 듯 합니다. 평일에도 9시까지 관람이므로 7시 작품 설명을 들으면서 9시까지 관람하시는 것도 추천합니다! 7시 이후에는 할인 혜택도 받으실 수 있구요^^
- 조금 일찍 가시거나 관람 후에 서울시립미술관 주변을 어슬렁 거리며 걸어 보시는 것도 즐거우실 것 같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지니 더욱 즐거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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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한 짧은 단상 – 세 가지 사랑]


처음에
나는 그 사람이 없으면 못살 것 같은, 나를 완전하게 채우는 누군가를 만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완전한 사랑의 느낌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살면서 생각했다.
자기 자신 그 자체로 완전함을 느낄 수 없다면 우리는 늘 누군가를 통해서 자신을 완전하게 채우고자 한다면 그것은 결국 다른 사람에게 자신에게 부족한 무언가를 채우기를 바라는 것이 되지 않는가. 그것이 완전한 사랑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마치 결합 혹은 계약처럼 느껴졌다. 그것이 아무리 그럴싸하게 멋지게 꾸며지더라도 결국은 서로의 부족한 무언가를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결합하는 행위로 느껴졌다.
메우는 행위, 부족한 것을 채우는 행위, 그것은 사랑이 아니지 않은가. 나는 다시 의문을 가졌다.


그 다음에
찾아온 사랑에 대한 생각은 이러했다. 사랑은 상대방의 성장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나는 이 정의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상대방의 성장을 도와주기 위해 마음을 다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이 사람을 도와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이 사람의 고통을 덜기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하지만 거기에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나는 그를 돕기 위해 애쓰는 동안 정작 나 자신을 돕지 못했다. 나 자신을 도울 시간을 내지 못했고 그것을 생각할 심리적 여유도 없어져 갔다.
가장 치명적이었던 것은 내가 나 자신을 생각하기에 힘들 때에 너를 위해서라는 명분은 너무나 달콤하고 위대해서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생각하는 고통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켰다. 하지만 그것은 해방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냥 지연이었을 뿐이다. 나 자신의 불행감을 쌓아 나가는.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간섭으로 치달아가는.
왜냐하면 사랑은 나의 가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가치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즉 그의 삶을 논할 권리를 나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직 누군가의 삶에 대해 논할 권리를 가졌다면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의 삶이었다. 나는 고통과 반복과 절망의 순간에 바로 상대방이 아니라 나를 돌아봐야 했다. 그것이 더 큰 사랑이고 그것이 근원적으로 왜곡되지 않는 순수한 사랑의 시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그의 성장과 과정, 삶의 과정을 왜곡시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나는
믿는다. 내가 그를 사랑한다고 할 때, 나는 ‘그의 삶의 과정, 성장의 속도를 존중한다’는 것이다. 나는 평가하지도 비난하지도 초조해하지도 않는다. 나는 다만 나 자신의 삶의 성장의 속도, 삶의 과정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것처럼, 나를 사랑하는 사람 또한 그렇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상대방의 삶의 속도, 그 성장과 과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물론 나는 그가 도움을 요청할 때 손길을 뻗기도 하고 그를 꼬옥 안아주기도 하고 나의 생각 또한 주고 받는다. 이 행위들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그것이 옳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 수 없다. 전 삶의 과정, 이 전 생애를 꿰뚫어 내가 통찰해 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알 수 없다.
나는 겸손해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사랑한다. 도움을 청할 때 도움을 주고 그리고 나도 도움을 청하는 기쁨을 누린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옳고 저것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특히 내가 그러한 유혹을 가장 많이 느낄 수 있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내가 나 자신의 삶 전체를 다 꿰뚫지 못하며 더더군다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삶 전체에 대해 내가 무엇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나는 포옹하고 아끼고 애정을 표현할 수 있는 나의 자유가 기쁘다. 그 표현의 자유가 즐겁고 기쁘고 고맙다.
나는 이제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사랑이라 부른다.


너무나 분명한 것은
내가 나 자신과 가지는 사랑의 관계가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와 다른 사람과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나와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의 이야기다. 즉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과정, 그 변화 과정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 어느 순간에도 그 어떤 상황에서도 바라보아야 할 것은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바로 나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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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눈치를 보는가
가토 다이조 지음, 이인애.박은정 옮김 / 고즈윈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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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눈치를 보는가 (부제: 나를 발견하는 심리학)
가토 다이조 지음 / 고즈윈 / 2006.12.05


너무나 진실이기도 하지만 사실 가슴 깊이 이해되기 어려운 것이, ‘자신으로부터 평화가 시작된다는 것’. 그것은 이기주의, 개인주의 같은 개념들과 뒤섞여 그 실체를 잃곤 했지만 나는 정신적, 영적, 심리적 아니 모든 면에서 ‘자기 자신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잘 돌보는 것’이 모든 평화와 행복이라고 시작한다.
내가 행복하지 않고 편안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으로부터 왜곡된 형태로 보상을 얻으려는 심리를 드러낸다. 즉, 자기 자신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정신적 심리적 독립성을 확보하지 못했을 때 우리는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 특히 부부간 그리고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 어떤 형태로든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부제 <나를 발견하는 심리학>이 마음에 와 닿았던 이 책은, 자신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억누름으로써,자신이 원하는 것을 상대에게 투영하여 만족시키고자 하는 의존성에서 독립하지 못함으로써 우리가 겪게 되는 고통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 의존성이란 우리가 자신을 인정하고 자연스럽고 솔직한 감정을 느낄 수 없도록 억누름으로써 타인을 통해 자신의 왜곡된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상태를 말한다.

저자가 한 마디로 정의내린 의존성.
“남에게 기댄다는 것은 ‘이런 저런 것을 요구하는’ 행위와 같다.”

이것은 상당히 자각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아주 교묘하고 혹은 반대적 형태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이 왜곡된 욕구를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부모와 자식, 부부 간에는, ‘이렇게 해야 옳다’는 정의를 내세우거나, ‘나는 너에게 이렇게 헌신적인데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혹은 ‘이렇게 걱정해 줬더니..’ 와 같은 형태로 드러나면서 ‘나의’ 규칙과 기준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된 상대방은 ‘나쁜 사람’이 된다.

이 책에는 어떻게 우리가 어린 시절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어 가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지배적인 부모’ 로부터 정신적, 감정적 독립을 하고 싶다면 한 번 자신의 상황이 이렇지 않은지 살펴보자. 또는 내가 이러한 ‘지배적인 부모’로 아이의 자기 발견의 자유를 박탈하고 있는 건 아닌지, 부모가 부모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않음으로써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저자는 말한다. 아이가 자연스러운 감정을 느끼기 전에, 지배적인 부모는 이 감정은 옳은 것이고 저런 감정은 나쁜 것이며, 이 일은 좋아해야 맞고 저 일은 좋아하지 않아야 맞다는 형태로, 모든 것을 정해 버린다. 이로 인해 아이는 자연스럽고 진실스러운 감정을 잃어버리고 ‘당연히 그래야 할’ 감정을 만들기 시작한다.
아이가 이 진실하지 못한 상태를 자각하는 건강한 시기를 거치지 못하고 성인으로 계속 살아나가게 되면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자각하지 못하게 되고, 다른 사람이나 환경에 의해 주어진 욕망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자연스럽고 정직한 감정들을 ‘시시하고 하찮고 안 되는’ 감정들로 여기고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억눌린 하지만 여전히 충족되기를 바라는 감정과 욕구를 다른 사람, 특히 배우자 혹은 자녀를 통해 채우고자 하는 의존성을 지니게 된다.

결혼하고 부모가 되었지만 스스로 자각하지 않는 한 이러한 의존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의존성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 뿐만 아니라 여러 인간 관계를 다양한 왜곡된 형태로 변형시킨다.
자기 자신에게조차 자연스럽고 솔직한 감정을 인정 받을 수 없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자신을 방어하고 싶어하고 상대방에게 사랑받기 위해 그의 욕구에 나를 맞추고자 노력한다. (이 책의 제목이 <나는 왜 눈치를 보는가?> 인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을 고통스럽게 여기고 상대방에게 내가 배푼 은헤를 생색내며 나에게 왜 내가 해 준 것처럼 해 주지 않느냐고 비난하게 된다.

저자는 상대방을 통해 스스로의 욕구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의존 욕구의 치유를 ‘존재감’에서 찾는다. 자신을 부정하기에, 자신의 존재가 인정받지 않기에, 즉 ‘자기 존재감’을 잃어 버리게 되면 늘 자신을 확인하고 싶어하고 초조해 하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줄 관계 혹은 일에 ‘의존’한다고 한다. 저자는 과하게 일을 놓지 못하거나 성취감이나 보람찬 하루에 강박증을 가지고 있다면 일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지 묻는다.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자신이 진실로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 혹은 자신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느끼는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감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다면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밝히고 또한 그것을 인정하는 것 또한 힘겨운 일이 될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의존해야만 한다면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에 솔직해지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무탄트>라는 책의 아주 지혜로운 인디언들이 해 주는 이야기에, 아이는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완전히 홀로, 완전한 침묵 속에서 며칠을 머무르고 온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이제 성년이 될 준비가 되었음을 말하면 모든 부족 사람들이 파티를 열어 진심으로 축하해 준다고 한다.
우리도 이렇게 스스로 부모로부터 정신적 독립을 할 준비가 되었음을, 한 존재로서 결혼할 준비가 되었음을, 그리고 부모가 될 준비가 되었음을 스스로 깊이 인정하는 행위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늘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이해하는 가족, 친구들과 진심으로 같이 축하하는 행위는 그 무엇보다도 멋지고 값질 것 같다.

완전히 공감 갔던 저자의 한 구절.
“자연스런 감정을 억누른 채 인위적인 감정으로 살면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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