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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이 순신’ 때처럼 ‘대왕 세종’의 종종 마음에 박히는 의미 있는 구절들이 반갑고 고맙다.
주말 ‘대왕 세종’을 친구와 같이 보면서 우리는 동시에 한 의미 깊은 구절에 박혀서 드라마가 끝나고 나서도 그 이야기를 1시간은 한 듯 하다.

사람들의 오해 한 가운데에 있게 된 충녕 대군을 향해 효녕 대군은 말한다. 사람들은 너에게 왕의 자리를 뺏으려 하는 자라고 오해할 터이다, 너는 그것이 두렵지 않느냐고. 충녕 대군은 이미 자신의 엄마에게도 오해를 받아 이제 너를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이야기까지 들은 터였다.

이에 대해 충녕 대군은 말한다. 두렵다고.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오해 하게 될까봐 두려워하여 세상에 대해 진실에 대해 눈을 감게 될까봐, 정직하게 마주하지 않게 될까봐 두렵다고. 대사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진실을 외면하게 될까봐 두렵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 속에 자신이 억울하게 되는 것이 두렵지 않고 자신이 진실을 세상으로부터, 정직을 외면하게 될까봐 두렵다고 한 충녕 대군의 대사는 잠시 시간이 정지된 듯 느릿하게 진하게 가슴에 울렸다.

친구는 자신이 뜻했던 것을 이룬 사람과 이루지 못한 사람간에는 두려움에 있어 차이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두려워하는 대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무언가를 해 보기도 전에 두려워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과 의견, 독선과 오해를 두려워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것을 견디지 못할까봐 두려워한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할까봐 두려워한다. 그 빛 속에 둘러싸여 있는 듯한, 보장되어 있는 듯한 그 그룹 안에 그 원 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될까봐 두려워한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지 않게 될 그 두려움을 두려워하게 된다면 아마도 우리는 미처 알지 못했던 나, 그런 내가 있는 ‘바로 그 삶’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3편>에 보면 부자 아빠가 이런 말을 저자에게 해 준다. 세상 사람들이 너에게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세상 사람들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대체로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그 하나는 자신이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너도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 또 하나는 네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 지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기에 못할 것이라고 한다는 것.

진정 무언가를 뜻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정말 우리에게 다가온 바로 그 무엇이라면 세상 사람들이 왜 나에게 안 된다고 말하는 지 생각해 보자. 부자 아빠가 말해 준 그 이유가 아주 설득력 있게 들린다.

지금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다면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그것이 어떤 두려움인지?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자 하는 두려움은 아닌지?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지 않게 될까봐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아마 최대한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고자 사랑스러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 게 아닐까.

충녕 대군처럼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을 제대로 골랐으면 좋겠다. 그리고 바로 나 자신을 감동시키는 그 어떤 일을 찾은 놀라운 행운을 누리고 있다면 오늘 하루 용기 백배 충전되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기쁨을 누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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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도 가장 가고싶은곳!

[빈센트 반 고흐 전]을 다녀와서

(이 글은 전문적 소견의 글이 아닙니다. 저는 미술사나 기법이나 인상주의 등에는 잘 모릅니다. 빈센트를 향한 예기치 않은 열렬한 애정과 저의 순수하게 개인적인 소감을 담은 글입니다. 하지만 그의 원작이 얼마나 멋진 지..실제로 보지 않고서는 믿기지 않을 지경입니다. 원래부터 미술에 특별히 조애가 깊었거나 빈센트에 대한 지대한 애착을 가졌던 사람이 아니었으나 그의 원작을 만나고 나서 깊이 빠져 버린 한 사람임을 미리 밝혀 둡니다)


나는 사실 내가 이렇게 빈센트의 작품을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다. (고흐는 살아 생전 자신이 반 고흐가 아니라 빈센트로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그를 빈센트라 부르고 싶다)

너무나 강렬하고 유명해서 잘 알고 있는 작품 ‘해바리기’와 ‘자화상’ 그리고 그가 귀를 잘랐다는 고갱과 얽힌 사연 외에 내가 빈센트에 대해 아는 바가 많지 않기도 하거니와 그에 대한 사연들은 너무 강렬해서 오히려 흥미를 잃게 하는 쪽이었다.

그런데 빈센트의 원작과 마주하고 나서 나는 그에게 반하고 말았다. 어떻게 이토록 아름다운 노란색과 파란색을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압도적인 노란색과 파란색에 나는 그가 왜 색채 화가라고 불리는지 알 수 있었다.
또한 그의 붓터치는 너무나 생생하고 강렬해서 나는 마치 빈센트가, 그토록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던 빈센트가, 자신에게는 구원이라고 말한 그림을 그리는 뒷모습이, 그 붓칠이 보이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특히 그의 ‘밀짚 모자를 쓴 자화상(1887년작)’은 너무나도 맘에 들었다. 정말 의외였다. 나는 그냥 괴기할 것이라 짐작했던 그것의 원작은 압도적이었다. 그 노란색과 파란색, 그리고 붉은 색. 그 붓칠. 그 결. 도대체 빈센트는 어떤 감정과 느낌, 생각을 가지고 이 자화상을 그렸을까. 나는 그의 정신을 발견하고 싶어서 그의 자화상을 십여분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림을 이렇게 한 동안 바라보니 잠깐 흘러가며 보는 것과 아주 아주 다른 느낌이 들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계속 바라보고 싶고 또 바라보고 또 보다가 더 사랑에 빠지게 되는 그런 불가사의한 느낌이.

빈센트는 인물화에 깊은 애정을 가졌다고 한다. 그는 자화상을 40여점을 남겼는데 인물화에 있어 두번 째로 유레없는 작품수라고 한다. 빈센트는 사실 그대로 표현하기 보다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 그 인물의 내면을 드러내는 그런 인물화를 그리고 싶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더더욱 빈센트의 자화상을 한참이나 마주 눈 맞추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화상을 그릴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빈센트는 성당을 그리기 보다 차라리 사람의 눈을 그리겠다고 동생 테오에게 말했다고 한다. 빈센트는 그 기묘하면서도 낯설고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그 자신의 자화상으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내가 그리고 싶은 건 성당보다 사람들의 눈이야. 이들 눈 속에는 성당에 없는 무언가가, 엄숙하고도 위엄이 있는 무언가가 존재하기 때문이지. 불쌍한 거지의 영혼이든 매춘부의 영혼이든, 내가 보기엔 인간의 영혼이 더 흥미로운 대상이야.”
-1885년 12월 18일,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책 <빈센트 반 고흐>에서 발췌-

나는 그림에 대해 잘 모른다. 미술사 수업을 대학 때 호기심으로 교양 과목으로 들어본 것이 다이다. 제대로 된 미술 관련 서적을 찬찬히 읽어 본 적도 없다. 다행히 미술관에 친구들 보다 1시간 넘게 일찍 도착하여 1층의 갤러리샵을 둘러보면서 그의 작품을 만나기 전의 의식을 할 수 있었다.
특히 흥미로운 책 한 권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빈센트가 자신의 동생 테오에게 보낸 150여통의 편지들과 ‘반 고흐 미술관’ 소장 작품 250여 점을 편집하여 출판한 책 <빈센트 반 고흐>(출판사 생각의 나무)이다. 사실 인상주의나 그러한 미술사적인 관심보다 빈센트라는 사람이 궁금했고 그의 정신 세계를 알고 싶었던 참에 그 책은 아주 반가운 것이었다. 그 두꺼운 책을 펼쳐 들고 아주 잠깐, 아주 약간 읽게 된 빈센트의 글은 그의 영혼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어서 나는 두서없는 애절함과 두근거림을 느꼈다.

고흐 전시회에서는 각 시기 별로 작품을 모아놓고 그 시기에 대한 글도 벽면에 적어 놓아 감상하는 데 아주 도움이 되었다. 고흐전을 보러 가신다면 꼭 이 벽면의 글을 읽어 보시길 그리고 작품 설명을 먼저 듣고 나서 다시 찬찬히 작품을 보시길 권한다. 30분의 작품 설명을 듣고 작품을 다시 한 번 쭉 둘러보니 역시 데면데면하게 작품을 대하는 것보다 휠씬 좋다.

‘밤의 카페테라스’와 ‘까마귀가 있는 보리밭’이 없어 못내 아쉬웠는데 이번에 빈센트의 원작을 만나고 나서 미처 조우하지 못한 그의 작품을 찾아 유럽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외 제목을 잘 알지 못하는 작품들도 직접 보고 싶고. ‘밤의 카페 테라스’의 카페며 그가 묵은 ‘노란집’이며 작품 속의 장소들도 봐 두고 싶고.
마치 생물처럼 꿈틀거리는 생생한 ‘아이리스’, 불타는 듯한 짙은 파란색의 사이프러스, 방금 그려진듯한 물감이 떨어질듯한 정원의 나무들, 떨어져 볼수록 오히려 창문을 통해 보는 듯 비밀스러운 색채의 노란 집.
아무래도 빈센트에 대해 공부하게 될 것 같다. 무엇보다 노란색과 파란색의 절정을 이루는 그의 작품에는 도저히 눈을 못 뗄 것 같다.

“나는 아무 소용이 없는 사람으로 느껴진다’며 권총 자살 시도로 이틀 만에 결국 죽음을 맞이한 그에게 삶은 아마도 너무 진지했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며 그림이 그에게 재능이기 이전에 “구원이다”고 말한 심정이 가슴 저리게 아프다. 결국 그림조차 그를 구원하지 못했다. 그의 그림과 마주하고 있는 현재의 나는 그 압도적인 아름다움, 그의 진심에 완전히 반해버렸는데 말이다.

“이런 저런 경향을 만족시키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진정한 인간적인 감정이 표현되기를 바란단다. 그러니까 이 일이야말로 나의 목표야. 이런 생각에 집중하면 내가 무엇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모든 것이 쉽고 단순해지지. 이런 집중으로 말미암아 삶에 혼돈이 초래되는 일 없이 나의 모든 행위가 이 목표를 지향한다면 말이다.”
-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책 <빈센트 반 고흐>에서 발췌-


* 빈센트 반 고흐전에 가실 분들을 위해서
- ING 생명이나 GS 칼텍스의 협찬으로 회원 할인가가 있으므로 할인의 기쁨을 누리시길~
- 작품 해설이 30분 정도 진행되는 데 가능하면 이 시간에 맞추어 가세요. 아니 절대적으로 맞추어 가세요^^ 대부분 2시간 간격으로 진행됩니다.
- 1층의 갤러리샵도 꼭 구경하시구요. 원작을 보고 나면 아무래도, 이 노란색과 파란색이 아닌데...하는 생각이 들며 색채가 맥이 빠지지만 그래도 마음이 드실 것 같습니다^^
- 서울시립미술관 1층에 사물함이 있어 아주 요긴했습니다. 미술관 내부는 사람으로 복잡거려 제법 더우니 코트는 벗어 사물함이 넣어 두시고 관람 하심도 좋으실 듯 합니다.
- 제일 중요한 것! 아주 아주 복잡합니다. 저는 평일에 갔는데도 복잡했습니다. 주말에는 더욱 심하겠지요. 이토록 멋진 작품들을 많이 사람들이 와서 보니 뿌듯하기도 한데 관람할 때는 복잡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평일이라면 오전이나 저녁에, 주말이라면 다소 각오를 하심이 좋을 듯 합니다. 평일에도 9시까지 관람이므로 7시 작품 설명을 들으면서 9시까지 관람하시는 것도 추천합니다! 7시 이후에는 할인 혜택도 받으실 수 있구요^^
- 조금 일찍 가시거나 관람 후에 서울시립미술관 주변을 어슬렁 거리며 걸어 보시는 것도 즐거우실 것 같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지니 더욱 즐거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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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한 짧은 단상 – 세 가지 사랑]


처음에
나는 그 사람이 없으면 못살 것 같은, 나를 완전하게 채우는 누군가를 만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완전한 사랑의 느낌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살면서 생각했다.
자기 자신 그 자체로 완전함을 느낄 수 없다면 우리는 늘 누군가를 통해서 자신을 완전하게 채우고자 한다면 그것은 결국 다른 사람에게 자신에게 부족한 무언가를 채우기를 바라는 것이 되지 않는가. 그것이 완전한 사랑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마치 결합 혹은 계약처럼 느껴졌다. 그것이 아무리 그럴싸하게 멋지게 꾸며지더라도 결국은 서로의 부족한 무언가를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결합하는 행위로 느껴졌다.
메우는 행위, 부족한 것을 채우는 행위, 그것은 사랑이 아니지 않은가. 나는 다시 의문을 가졌다.


그 다음에
찾아온 사랑에 대한 생각은 이러했다. 사랑은 상대방의 성장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나는 이 정의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상대방의 성장을 도와주기 위해 마음을 다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이 사람을 도와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이 사람의 고통을 덜기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하지만 거기에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나는 그를 돕기 위해 애쓰는 동안 정작 나 자신을 돕지 못했다. 나 자신을 도울 시간을 내지 못했고 그것을 생각할 심리적 여유도 없어져 갔다.
가장 치명적이었던 것은 내가 나 자신을 생각하기에 힘들 때에 너를 위해서라는 명분은 너무나 달콤하고 위대해서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생각하는 고통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켰다. 하지만 그것은 해방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냥 지연이었을 뿐이다. 나 자신의 불행감을 쌓아 나가는.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간섭으로 치달아가는.
왜냐하면 사랑은 나의 가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가치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즉 그의 삶을 논할 권리를 나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직 누군가의 삶에 대해 논할 권리를 가졌다면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의 삶이었다. 나는 고통과 반복과 절망의 순간에 바로 상대방이 아니라 나를 돌아봐야 했다. 그것이 더 큰 사랑이고 그것이 근원적으로 왜곡되지 않는 순수한 사랑의 시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그의 성장과 과정, 삶의 과정을 왜곡시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나는
믿는다. 내가 그를 사랑한다고 할 때, 나는 ‘그의 삶의 과정, 성장의 속도를 존중한다’는 것이다. 나는 평가하지도 비난하지도 초조해하지도 않는다. 나는 다만 나 자신의 삶의 성장의 속도, 삶의 과정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것처럼, 나를 사랑하는 사람 또한 그렇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상대방의 삶의 속도, 그 성장과 과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물론 나는 그가 도움을 요청할 때 손길을 뻗기도 하고 그를 꼬옥 안아주기도 하고 나의 생각 또한 주고 받는다. 이 행위들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그것이 옳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 수 없다. 전 삶의 과정, 이 전 생애를 꿰뚫어 내가 통찰해 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알 수 없다.
나는 겸손해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사랑한다. 도움을 청할 때 도움을 주고 그리고 나도 도움을 청하는 기쁨을 누린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옳고 저것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특히 내가 그러한 유혹을 가장 많이 느낄 수 있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내가 나 자신의 삶 전체를 다 꿰뚫지 못하며 더더군다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삶 전체에 대해 내가 무엇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나는 포옹하고 아끼고 애정을 표현할 수 있는 나의 자유가 기쁘다. 그 표현의 자유가 즐겁고 기쁘고 고맙다.
나는 이제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사랑이라 부른다.


너무나 분명한 것은
내가 나 자신과 가지는 사랑의 관계가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와 다른 사람과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나와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의 이야기다. 즉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과정, 그 변화 과정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 어느 순간에도 그 어떤 상황에서도 바라보아야 할 것은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바로 나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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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에 가장 우선순위에 오르는 것 중 하나가 음악이겠지요.
과거 굉장히 힘들었던 시절, 추운 바람을 쐬면서 무작정 걷던 날, 어느 지나가던 레코드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5분간을 가만히 서 있었던 기억이 나요.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부끄러운 줄을 몰랐죠. 하지만 그 5분간 저는 마치 영원에 잠시 머물다 온 것처럼 힘을 얻었던 기억이 나요.

좋은 음악을 듣고 건강하고 푸르게 자라나는 식물 이야기, 좋은 음악을 듣고 심신의 안정을 찾아 범죄에 대한 욕구를 낮추는 게 성공했다는 이야기들도 있죠. 모든 것이 자신만의 고유의 파장을 내뿜고 있다고 한다면 음악 또한 그 고유의 파장을 가지고 있을 테니 아주 공상과학 소설 같은 이야기는 아니겠죠.

명상 중에 음악을 들으면서 음악에 따라 공명하는 동작을 저절로 취함으로써 치유하는 과정이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명상 중에 하나인데요, 저의 경험으로는 심신으로 모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눈을 감고 자신의 몸에 집중하는 거예요. 그리고 음악은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트는 것이 좋아요. 완전히 몰입할 수 있거든요. 가끔 저는 제 상태가 따라 신나는 음악을 틀어 놓기도 하고 어떨 땐 김영동님의 음악을 틀죠. 물소리를 틀 때도 있어요. 그 음악에 따라 저절로 나오는 동작이 다 달라요. 그것은 음악의 파장과 몸의 상태가 어떻게 작용하는 데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아요.

오프라 윈프리는 힘들 때마다 ‘Amazing grace’를 듣는다고 하던데요, 저는 ‘You raise me up’을 들어요. 시크릿 가든에서 듣고 무척 감동 받아서 이 노래의 아주 다양한 버전을 다 듣고 있답니다.
2008년의 목표에는 “You raise me up’을 잘 부르기가 있어요. 이 노래를 멋지게 완성하고 싶어요. 그래서 올해가 엄마 칠순이신데요, 열심히 봉사하시며 아름다운 삶을 살고 게시는 사랑하는 엄마를 위해 불러 드리고 싶거든요.
지금도 “You raise me up”을 듣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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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이 이 세상에서 가장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은 ‘인생이 친절한가?’라는 질문이라고 했습니다.

인생이 친절한가…이 질문을 접하고 울음을 터트릴 뻔 했어요. 삶이 정말로 나에게 친절하다고 믿는다면, 혹은 신앙이 있으시다면 신이 정말로 나를 사랑한다고 믿는다면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이 모든 일들이 나를 일깨우고 나를 돕고자 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겠지요. 인생이 친절한가는 자신을 믿는냐는 질문과도 바로 통하는 것 같아요.

삶과 인생이 나를 언제나 돕고자 하며 행복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 어떤 선택의 상황에서 그렇게 두려워할 필요는 없겠지요. 물론 나중에 그게 아니었는데..라는 생각이 드는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많을 지도 몰라요. 하지만 인생이 친절하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가 나아가는 방향에 추호도 의심이 없겠지요.

나는 과연 무엇을 그토록 두려워하고 힘들어 했던 것일까..생각해 보면 나의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잘 될지 알 수 없어서, 잘못된 것이 될까봐 걱정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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