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이 깊은 곳에는 열수분출공이라는, 일종의 심해 생물들의 놀이터가 있는데 거의 사막의 오아시스나 다름없는 곳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심해에는 독일 과학자가 광합성할 만한 태양조차 없다. 지상의 생명체들이 태양으로부터 에너지를 받듯이 심해의 생물들은 바로 이곳을 근원으로 생존한다. 열수분출공에서 뿜어져 나오는 황을 먹고 사는 세균들이 있는데 이들이 똥을 싸면 그게 바로 심해 생물들이 먹을 수 있는 탄수화물이다. 태양의 광합성이 없이 탄수화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역시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사는 게 세상의 진리다.


(69-70)

미래에서 온 관광객이 아직까지 없다는 점이 시간여행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보는 관점도 있다. 미국의 한 과학자는 타임머신이 일종의 체크포인트 역할을 해서 최초의 기계가 가동을 시작하는 그 시점부터가 돌아갈 수 있는 과거의 시작점이 된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 타임머신이 작동되기 전의 과거는 타임머신상에서 없는 시대이며 오직 타임머신이 작동된 이후만 자유롭게 시공간을 오갈 수 있는 시대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아직까지 미래 관광객이 보이지 않는 것도 일리가 있다. 미래에서 봤을 때 지금 우리 시대는 돌아갈 수 없는 시대가 되는 것이니까.


(90)

서울에 사는 결혼적령기의 한 남성의 경우, 서울의 인구를 1,000만 명이라고 가정하고 이 중 50퍼센트를 여성이라고 하자. 남성의 출퇴근하는 방법이나 동선에 따라 지나가다 이성을 만날 확률은 달라지겠지만 1퍼센트 정도라고 하면 이미 대상자는 5만 명으로 줄어든다. 같은 결혼적령기 여성을 만나야 하기 때문에, 대상자의 나이 분포를 1세부터 100세까지 일정하다고 했을 때 15퍼센트 정도와 나이가 맞을 것이다. 비슷한 교육환경에 있을 확률은 1퍼센트 정도로 보고 매력을 느낄 확률은 5퍼센트, 서로 만날 때까지 살아 있을 확률 10퍼센트까지 계산을 하면 고작 0.375명이 이 남자와 연애 가능한 여성의 숫자라고 볼 수 있다. 아쉽게도 1명도 되지 못했다.


(113)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마를 때, 기분이 안 좋아지는 게 바로 이 현기증 뉴런 때문이다. 심해지면 두통이나 현기증까지 나기도 하지만 일단 현기증 뉴런이 활성화되면 불쾌하고 울적해진다. 반대로 음식을 먹어서 현기증 뉴런이 작용을 멈추게 되면, 뇌에서 보상회로가 가동되면서 평소에 먹던 음식이라고 해도 더욱 맛있게 느끼게 된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맞다.


(117)

당신의 뇌는 매우 똑똑해서 혹시나 운동으로 평소보다 더 많은 칼로리가 소모되면 어떻게든 수를 써서 당신이 더 많은 칼로리를 먹도록 만든다. 운동을 열심히 하고 난 뒤에 라면을 끓여서 먹어보아라. 몇 젓가락 먹지도 않았는데 이미 라면은 국물만 남아 있고 바로 하나를 더 끓여야 하나 고민에 빠진다. ? 평소보다 더 먹도록 뇌가 유인하기 때문이다.


(137)

그리고 그 흔적은 당신에게도 남아 있다. 바로 흰자. 달걀 노른자 흰자 말고 눈동자의 흰자 말이다. 길들여지지 않은 동물은 눈에 흰자가 없다. 하지만 사람은 흰자가 눈동자에 대부분을 차지한다. 반려동물도 마찬가지다. 흰자가 많다고 시력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동공이 크면 클수록 시력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오히려 흰자가 많으면 보는 성능이 떨어진다. 그럼 왜 이렇게 불리한 상황을 감당하면서도 흰자가 많아진 걸까? 역시 뭔가 이득이 있을 것이다.

흰자가 있다면 멀리서도 상대방이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가 있다. 서로 마주 본다는 것도 느낄 수 있고 소통하는 데 눈짓이 굉장히 많이 쓰인다. 눈동자의 방향을 통해 상호 신뢰를 줄 수 있다는 말이다. 서로가 잘 길들여졌다는 증거로 이만한 게 어디 있을까?


(175)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유전자는 단백질을 조립하는 매뉴얼이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단백질을 제대로 조립하기 위해서 특이하게 생긴 레고블록 같은 것을 이용하는데 이걸 아미노산이라고 부른다. 출신이 고작 블록 조각 비스무리한 녀석이라 아무리 백날 열심히 조립을 해도 단백질의 기능을 넘어서는 것들은 못 만드는 것이 당연하다. , 원래 단백질은 하늘을 나는 기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단백질을 아무리 잘 조립해도 하늘을 날지 못한다. 눈으로 레이저를 쏘고 타인의 마음을 조종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218)

우선 용어부터 정리해보자.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가상화폐라는 표현부터 마음속에서 지우자. 가상화폐는 마치 실존하지 않는 가상의 통화와 같은 느낌이다. 정확하게는 암호화폐라고 한다. 단어의 핵심은 암호이며 지불 수단으로서의 화폐만 뜻하는 것이 아니다. 하필이면 최초로 발행된 비트코인이 화폐 기능에만 집중한 암호화폐다 보니, ‘실물화폐 대신 가능성만이 암호화폐의 전부인 것처럼 알려지고 있다. 덩달아 블록체인 기술마저도 가짜 화폐를 만들어내는 위조 수단쯤으로 인식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암호화폐는 실물화폐의 단순한 대체품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가치를 지닌다. 기존 화폐의 역할을 그대로 하지 않아도 좋다. 대신 탈중앙화와 암호화라는, 상당히 불가능한 상황을 동시에 만족하는 방법을 찾아낸 해결사다. 바로 블록체인이라는 기술로 말이다.


(222)

거래 내용에 대한 신뢰도를 보증하는 중앙이 없고 거래에 참여하는 사람 개개인이 모든 거래 내역을 기록하고 확인한다. 따라서 물리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암호화에 도달한다. 기존의 보안 방식이 최대한 복잡하고 많은 자물쇠를 금고에 빽빽하게 거는 형태라면, 블록체인을 이용한 이 방식은 금고 자체를 전 세계를 셀 수도 없이 많은 곳에 뿌려두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금고들은 정기적으로 암호가 바뀌며 끊임없이 새로운 장소를 옮겨다닌다. 내가 해커라도 맥이 빠지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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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2 - 강감찬에서 최충헌까지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2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지음, 이익주 감수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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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2>를 이야기해줄게. 1권에서는 고려 건국부터 후삼국 통일, 그리고 광종, 천추태후 등에 관한 이야기를 있었잖아.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거란의 침략이 있었고, 강조가 막아내려고 했으나 패배하고 개경까지 함락이 되었잖아. 그리고 당시 왕인 현종은 나주까지 천도를 했다고 이야기해 주었지. 2권에서는 이 이야기부터 다시 해주었단다. 이때 고려가 나주로 몽진한 것은 강감찬의 조언에 따른 전략적 결단이었다고 하는구나. 조선 선조의 무작정 도망과는 다른 몽진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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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류근) 제가 처음에는 몽진이라는 말만 듣고 경기를 일으켰는데,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까 (조선) 선조의 몽진과는 본질적으로 달라요. 선조의 몽진이 지극히 보신적 도망이었다고 한다면 (고려) 현종의 몽진은 강감찬이 사태를 분석해 선택한 전략적 결단이었잖아요. 어떤 문제의 본질과 현상을 제대로 파악해서 그에 걸맞는 대안을 사유해 내는 능력을 보여 준 건데, 이래서 인문학적 교양이 필요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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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그 다음 이야기를 해줄게. 다행히 사신 하공진이라는 사람이 거란을 설득을 해서 거란은 개경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이때 하공진도 인질로 같이 거란 진영으로 끌려갔단다.

..

1018년 거란은 소배압을 필두로 다시 고려를 침입했단다. 세 번째였어. 이때는 강감찬 장군이 분비를 잘 해서 흥화진이라는 곳에서 승리를 했단다. 그래도 거란은 강감찬 장군을 피해서 개경까지 접근했지만, 거란의 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고려군의 대피로 다시 퇴각하고 말았어. 그런데 이 거란의 퇴각은 쉽지 않은 길이었단다. 강감찬 장군이 귀주에서 준비하고 있었거든. 거란 군대는 귀주에서 강감찬 장군한테 대패하고 세 번의 침략은 끝이 났단다. 이후 약 100년간 거란은 고려를 쳐들어오지 않았고 평화가 유지되었다고 하는구나. 강감찬 장군이 귀주에서 승리를 했을 때 나이가 72살이었다고 하는구나. 그야말로 노익장이 무엇인지 보여준 것 같구나.

시간은 흘러 1104년 고려 제15대 숙종 때 이번에는 여진이 침략을 했단다. 이때 윤관 장군이 있었는데, 윤관의 제안으로 별무반을 조성해서 여진 공격에 대비하자고 했단다. 별무반이 정비가 되고 1107(예종 때)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을 공격했다고 하는구나. 이 전쟁에서 대승을 해서 동부 9성을 차지를 했대. 역사 기록에 동부 9성이라고 되어 있지만,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고 하는구나. 다만 조선 세종 때 출간된 <지리지>에 따르면 두만강 북쪽 지역이 맞을 것이라고 했어. 이 지역이 세종 때 개척한 6진과도 같은 위치였거든.

그런데 멀어서 운용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조공을 받는 조건으로 2년 만에 동부 9성을 여진에 반환했다고 하는구나. 후세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참 아쉬운 결정이구나. 그래도 이런 결정 때문에 당시 여진이 금나라를 세우고 송과 거란을 침략하면서, 고려를 침략하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1.

고려 중기로 들어서면서 이자겸이라는 외척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좀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이자겸은 제16대 왕 예종의 장인이고, 17대 왕 인종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이었다고 하는구나. 오늘날 상식으로는 좀 이해가 안 가는 관계인데, 아무튼 인종은 이모랑 결혼을 한 것이란다. 그것도 이모 두 명이랑 결혼을 했어. 이렇게 두 왕의 장인인 이자겸은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되었어. 이자겸은 인주(오늘날 인천) 이씨였는데, 그 전부터 많은 왕비를 배출한 집안이란다.

인종은 이자겸의 권력이 너무 세다 보니 더 이상 볼 수 없고 이자겸과 그의 측근인 척준경을 공격했단다. 하지만, 이자겸의 반격에 인종은 신하 10여 명만 데리고 도망을 갔단다. 이 때 궁궐이 다 불타기도 했대. 이 사건을 역사는 이자겸의 난으로 기록하고 있단다. 도망간 인종은 이자겸에서 왕위를 주겠다고 했는데, 이자겸은 거절했단다. 지금처럼 왕의 뒤에 앉아서 권력을 독식하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한 것 같아. 인종은 이번에는 이자겸의 측근인 척준경을 회유했단다. 결국 이자겸은 지지 기반을 잃게 되고 영광으로 유배를 갔다고 얼마 안 있다 죽었다고 하는구나. 이자겸이 영광에 유배 갔을 때 말린 생선을 먹었는데, 그 생선에 너무 맛있어서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구나. 그 생선이 바로 오늘날에도 유명한 영광 지역의 특산물인 굴비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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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류근) 근데 제가 인터넷에서 이자겸을 검색해 봤더니 아주 재미있는 연관 검색어가 나와요. 영광 굴비가 나오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이자겸이 영광에서 말린 생선을 맛있게 먹고 난 다음에 비록 귀양을 온 몸이지만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뜻에서 그 이름을 지어 줬다는 겁니다. 그 생선이 바로 영광 굴비고요. 굴비가 한자로 굽힐 굴()자에 아닐 비() 자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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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척준경도 탄핵되어 귀향을 갔다고 하는구나.

, 이번에는 묘청의 난을 이야기해보자꾸나. 묘청이 원래는 난을 일으킨 것은 아니고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자고 주장했대. 서경은 오늘날 평양인데, 묘청이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자고 하는 것은 풍수지리상으로도 좋고 여진을 공격해서 고구려 영토 회복을 하자고 했어. 시인으로 유명한 정지상, 백수한 등이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지지했단다. 그에 반해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반대를 했지.

묘청은 인종에게 서경에 와서 서경의 입지 조건을 함 봐달라고 했고, 인종은 실제로 서경에 가려고 했다는구나. 그런데 가는 길에 천재지변이 일어나서 다시 개경으로 돌아왔대. 그리고 이 천재지변은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지 말라는 의미라면서 서경 천도는 안 된다고 했단다. 그렇게 되니 묘청은 난을 일으켰단다. 묘청은 서경 천도에 진심이었나 보구나.

이 소식을 들은 김부식은 서경천도운동을 지지했던 정지상, 백수한을 왕명도 없이 참수해 버렸다고 하는구나. 당시 정지상, 백수한은 개경에 있었거든. 이는 분명 과잉 진압이었는데, 정지상에 대한 사적 복수라는 이야기도 돌았다고 하는구나. 묘청의 난은 묘청의 측근 조광의 배신으로 어이없이 끝나고 말았단다. 조광이 묘청을 죽였거든. 뒤늦게 조광은 자신도 처벌 받을 것을 알고 약 일 년 간 저항했지만, 토벌대장 김부식이 이끌고 온 부대에서 패배하고 말았단다.

삼국사기의 지은이로만 알고 있던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한 토벌대장이기도 했단다. 예전에 아빠는 다른 역사책에서 알게 되었는데, 정지상까지 자기 마음대로 죽였다니 이미지가 더 안 좋아졌구나. 묘청의 난이 1135년에 일어났는데, 묘청의 난이 진압된 이후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쓰기 시작해서 1145년에 완성했다고 하는구나.


2.

18대 왕 의종 때가 되면 고려 문신들이 무신들을 멸시하는 그런 시대가 된단다. 지위가 낮은 문신들이 자신보다 높은 지위의 무신을 멸시하고 무시하는 하극상도 빈번했어. 의종은 이런 것을 좀 조정해야 하는데, 문신들하고만 술파티를 벌이는 등 주지육림에 빠졌고, 의종과 문신들의 파티에 볼거리로 무신들이 수박희라는 결투 경기를 벌여야 했단다. 무신들도 같은 신하인데 열이 받겠지. 불만이 고조된 무신들 중에 하급관리였던 이의방, 이고가 난을 일으키게 되었단다. 이의방과 이고는 하급관리다 보니 고위급 무신 인사인 정중부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정중부가 그들의 요청을 수락하면 난이 시작되었단다.

무신들이 들고 일어났는데, 의종을 지켜줄 이가 누가 있겠어. 의종은 무신들의 의견을 모두 받아주기로 했단다. 그런데, 의종을 보좌하던 환관들이 무신을 치려는 계획을 세웠어. 그런데 환관들 중 한 명이 배신을 하면서 무신들이 환관의 계획을 알게 되어 오히려 환관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단다. 무신들은 환관뿐만 아니라 문신들도 죽였는데, 3일 동안 140에서 150명을 죽였다고 하는구나.

무신에 의해 의종은 폐위되어 제주도로 유배를 갔고, 무신들은 의종의 동생을 왕위에 세웠는데 그가 제19대왕 명종이란다. 명종은 무신들에 의해 세워진 왕으로 허수아비 왕이었어. 무신들은 무신회의기구인 중방을 만들었고, 이 중방이 최고권력기구가 되었어. 무신들은 논공행상을 따지다가 자기들까지 다투게 되는데, 이의방은 이때 반대파를 숙청했는데, 함께 무신의 난을 주도했던 이고도 이때 죽였다고 하는구나.

무신들의 내분을 지켜보던 문신 김보당이라는 사람이 난을 일으켰는데 금방 진압이 되었단다. 그런데 김보당은 죽기 전에 이야기하기를 모든 문신들이 난에 참여했다고 했어. 그래서 무신들은 또다시 많은 문신들을 죽였단다. 학살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이때 이의방의 부하 이의민은 유배가 의종을 찾아가 죽였다고 하는구나.

이의방은 무신의 일인자가 되어 권력을 휘둘렀어. 하지만 이의방의 정권은 오래가지 못했단다. 정중부와 아들 정균이 이의방을 제거하면서 실권을 잡았어. 이때 정중부의 나이가 일흔이 넘었어. 무신들 사이에서도 일흔 넘어서도 권력을 탐내는 정중부를 좋게 보지 않고 등을 돌리기 시작했어. 5년간 이어진 정중부 정권은 25살 청년장수인 경대승에 의해 끝나고 만단다. 경대승은 정중부를 죽이고 권력을 잡았어. 하지만 경대승은 서른 살 젊은 나이에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다고 하는구나. 경대승의 꿈에 죽은 정중부가 나온 다음 병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있더구나. 경대승이 죽고 나서는 명종의 명에 따라 이의민이 정권을 잡았고, 이의민 권력은 13년간 이어졌단다.

이의민은 최충헌에 의해 죽고 말았어. 최충헌이 권력을 잡은 이후 최씨 무신정권이 4 62년간 이어지게 된단다. 그런데 최충헌이 이의민을 죽이는 것이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었다는구나. 이의민의 아들인 이지영이 최충헌의 동생 최충수의 비둘기를 빼앗는 일로 시작된 싸움이 커져서 최충헌이 이의민까지 죽였대. 정권을 잡은 최충헌은 명종에게 봉사십조라는 개혁안을 제안했대. 그런데 이 명종이라는 왕은 무신정권 초기 이의민이 허수아비로 세운 왕인데 여전히 왕을 하고 있구나. 무신정권을 잡은 이들은 벌써 몇 번이나 바뀌었는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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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신병주) 흔히 하는 말로 가늘고 길게 살자라는 신조에 딱 맞는 왕이에요. 명종이라는 왕은 1170년에서 1197년까지 무려 28년간 재위했어요. 우리 역사에서 왕권이 없이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왕으로는 아마 1위일 겁니다. <고려사절요>를 쓴 사관들의 평가가 핵심을 찌르죠. “왕은 천품이 아주 나약하고 여러 번 변고를 겪어서 놀랍고 두려워하여 아주 심기가 약했다. 그래서 모든 군국의 기무는 무신들에게 견제 되었다. 심지어 회노애락까지 자신의 뜻대로 하지 못했다. “슬프지 않습니까? 결과적으로 보면 명종으로서는 자기가 왕위를 유지하는 한 집권 세력은 누구로 바뀌어도 상관없다고 적절하게 타협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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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최충헌은 명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의 동생 신종을 왕위에 세웠단다. 최충헌의 동생 최충수는 신종의 며느리, 그러니까 태자비를 이혼시키고 자신의 딸을 태자비에 세우려고 했어. 이 일로 최충헌과 갈등을 빚었단다. 결국 최충헌과 최충수는 싸우게 되었고, 최충수는 최충헌에 의해 척살당하고 말았단다.

무신 정권이 문신의 멸시를 참지 못하고 권력을 잡긴 했지만, 권력을 잡고 나서 백성들을 위한 정책은 내지 않고 문신들처럼 자신들의 배만 불리고 탐욕을 부렸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당시에도 역사적으로도 많은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 같구나. 이 무신 정권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보면서 오늘 편지를 마치도록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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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80)

(이익주) 무신 정변을 세 가지 다른 층위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신 정변을 아주 가까이에서 보면 의종의 측근 가운데 무신과 기타 세력 간의 싸움으로 볼 수 있고, 조금 멀리서 보면 무신 전체와 문신 전체의 대립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 멀리서 보면 무신 대부분이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문제까지 생각이 미치죠. 그 당시 고려 사회에서 지배계급의 중하층을 구성했던 지방의 향리 계층이 무신 대부분의 원류입니다. 향리들이 서울로 올라가 무신이 되고, 무신 정변을 통해 권력을 드디어 장악한 것이죠. 이렇게 본다면 무신 정변으로 일어난 권력 교체를 중하층의 무신이 상층의 문신들을 타도하고 권력을 잡았다는 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무신 정변은 권력의 상하이동을 의미하고요. 이때 권력을 잡은 무신들, 그리고 그 공급원이 되는 지방의 향리층이 이후 전개되는 고려 후기 사회의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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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책의 첫 문장: 고려의 11세기는 정변과 전쟁으로 시작된다.

책의 끝 문장: 그래야 후세의 평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죠.


(박금수) 별무반은 기병을 강화한 특별 군대입니다. 크게 기병인 신기군과 보병인 신보군으로 나누고, 그 외에 다양한 무기를 사용하는 전문 부대들이 있습니다. 강한 활을 쓰는 경궁군이 있고, 노 하나가 아니라 두세 개를 연결한 강력한 노를 쓰는 정노군이 있죠. 또한 돌을 그냥 던지기도 하고 돌팔매에 끼워 먼 거리를 던지기도 하는 석투군도 있습니다. 그리고 대각, 즉 뿔로 만든 악기를 입으로 부는 이 대각을 불어 신호를 보내게 돼 있습니다. 사람이 옆에서 죽어 나가는 매우 혼란스러운 전장에서 끊임없이 대각을 불어 추정되는 도탕군이 있는데, 도탕군은 돌격 부대인데도 기병이 아니라 보병이었어요. 그래서 이 도탕군의 임무는 적이 공격대형을 제대로 형성하기 전에 돌입해 분탕질을 치며 적의 기세를 꺾는 소수 정예부대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 P55

(최태성) 이자겸의 본관이 어딘지 아십니까? 인주입니다. 인주 이씨죠. 인주가 어디냐면 지금의 인천이에요. 인주 이씨는 대대적으로 왕실과 혼인하면서 세력을 키워 나갔던 대표적인 외척 세력인데, 가계도를 보면 정말 복잡합니다. 순종, 선종, 예종, 인종에게 시집을 간 인주 이씨 집안의 딸이 총 열 명이나 됩니다. 그중에서도 제16대 왕 예종과 결혼 사람이 이자겸의 둘째 딸 문경태후입니다. 그리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태자가 바로 제17대 왕 인종이 되지요. - P85

(신병주) 묘청의 난을 이제까지는 개경파 대 서경파 또는 문벌 귀족 세력 내부의 분열과 같은 식으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사실은 국제 정세의 변화도 매우 중요한 지표입니다. 특히 묘청의 난이 일어나기 직전에 송이 멸망하고 남송이 수립되는 과정의 현장에 있었던 김부식이라는 인물이 국제 정세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고려가 나아갈 길을 어떻게 고민했을지 상상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지금도 그렇지만, 국내 정세뿐만 아니라 국제 정세도 함께 고려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합니다. - P144

(이익주)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용어를 정리해 볼까요? 잘 아시는 것처럼 환관은 거세한 남성이고, 궁궐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죠. 이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내리라고도 하는데, 고려 시대에는 내시와 환관이 다른 의미로 사용됩니다. 환관은 우리가 아는 그 환관인데, 내시는 거세한 남성이 아니라 국왕에게 총애받는 젊고 유능한 문신 관료들입니다. 내시들은 늘 왕과 함께 있으면서 지근거리에서 왕을 시종하는 사람들이죠. 문벌 귀족의 자제들 또는 과거에 급제한 유능한 젊은 관료들은 내시가 되는 것을 대단히 영광스럽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고려 시대에는 환관과 내시가 다른 개념인데, 의종은 왕권을 강화하면서 친위군뿐 아니라 환관마저도 권력자로 만들어 놓아 그들과 함께하는 측근 정치를 해 왔던 것입니다.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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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8)

부분적으로 서양적인 요소가 있기는 하지. 그러나 그건 좋은 거네. 중전에 대한 반역이 아니라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네. 우리는 너무나 오래도록 낡은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 왔다고 말이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전적으로 서양의 영향을 받도록 우리들 자신을 방임하자는 말은 아니네. 우리가 많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여 어느 정도 그들의 영향을 받는 것은 우리의 숙명이네. 받아들이고 거부하는 것, 접목하고 혼합하는 것, 그리고 우리 자신을 하나로 만들어 독립된 국가를 세우는 것이 우리의 과제네. 그러나 그 하나가 무엇이겠는가? , 그게 문제네! 나는 그것에 대답할 수가 없네. 그러나 이제 내 아이들을 위하여 해답을 찾아내야만 하네.”


(49)

그는 옆으로 본 여자의 얼굴에 감탄했다. 참으로 잘생겼다, 이 나라 사람들은! 그는 청나라나 일본 장사꾼들도 본 적이 있다. 일본 사람들은 체구가 작고, 중국 사람들은 피부가 누런 데다 머리칼은 더 까맣고 빳빳하다. 이 고상한 사람들이 어떤 불행을 타고 났기에 남들이 탐내는, 좁고 산이 많은 땅에 갇혀 있는 것인가! 만약 이 백성들을 평화롭게 내버려 두기만 한다면, 마음대로 꿈을 꾸게 내버려 두기만 한다면 그들은 노래를 만들고,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릴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제 바야흐로 주위의 굶주린 나라들은 입맛을 다시고 있고, 문관인 동반은 점점 부패해 가고 있으며, 호시탐탐하는 서반은 또다시 밑으로부터 위협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80)

우리가 정말로 경계해야 할 나라는 노서아와 일본입니다. 이 두 나라의 통치자들은 탐욕스럽고, 그 국민들은 통치자의 속셈을 모릅니다. 더구나 그 나라들은 평화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일본은 작은 나라이므로 야심이 큽니다. 작은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에게 만족하기 못하기 때문에 한번 야심을 품으면 무섭습니다. 일본은 큰 머리를 가진 작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야심이 없는 큰 나라와 맹방이 되어야 이 작은 나라의 침략을 막을 수 있습니다. 청나라라 할지라도 지금은 우리를 보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서양 우방을 가져야 합니다. 이홍장은 이 점을 알고 우리에 대한 종주권을 유지하려고 협조자를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더러 미국과 조약을 맺으라고 충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10)

그는 이제 백성들의 참모습을 소상히 알게 된 만큼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재촉했다. 조선 사람들은 용감하고 강인했으며, 용기뿐만 아니라 감탄할 만한 낙천성으로 시련을 견뎌내고 있었다. 부처님한테서도 임금님한테서도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은 채 조그만 행운에도 고마워하며 스스로 돕고 또 서로 도왔다. 거칠면서도 순박했고 폭풍우와 추위와 먹구름 아래서 자연과 맞서 싸웠지만 혼자가 아니라 나란히, 다 함께였다.


(179)

조선 왕조 제 26대 왕인 고종은 아직도 한창 나이의 청년이었다. 왕이 된 이래 대비 조씨와 아버지 대원군 사이에서 자랐다. 두 분 다 성격이 강했다. 대원군은 저돌적인 의지를 가진 사내였고, 조대비는 여자의 완고한 고집을 깊이 간직한 분이었다. 두 분다 그를 어린아이 취급했고, 따라서 그는 더디게 철이 들었다. 그는 이따금 두 분 사이에서 씨름할 때가 있었다. 게다가 민씨 문중의 아름다운 규수를 왕비를 맞이함으로써 세 사람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신세가 됐다.


(211)

조선의 유일한 희망은 과거를 떨쳐 버리고 현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나는 희망을 갖게 됐어요. 이제 조그만 나라도 과학과 가계의 힘으로 강성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말이오.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젊은이들을 뽑아 당신네 나라에 유학을 시킨 다음 돌아와서 사람들을 가르치게 해야 하오. 우리는 젊은이들을 위한 대학을 세워야 합니다. 허나 민 대감의 힘이 이리 막강한데 역시 설득할 수 없을 게 분명하오. 민 대감이 중전의 조카니까요. 그 짐작이 틀렸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오. 두렵고 안타까운 추측이긴 하지만, 민 대감은 자기가 본 것에 겉으로만 관심을 기울이는 척할 거요. 개혁을 건의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은밀히 방해 공작을 꾸밀 거라는 얘깁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을 바로 그거예요.”


(236-237)

대감, 저는 애국잡니다. 저는 백성들 편에 섰습니다. 그리고 대감보다 더 우리 백성을 잘 아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농민이야말로 모든 사람을 먹여 살리는 장본인입니다. 세금을 내는 것도 그 사람들뿐이에요. 우리나라에는 대감께서 서양 나라들에 있다고 말씀하신 그런 산업이 없으니까요. 이 나라에서는 모든 세금이 땅에서 나옵니다. 상감께서 새로운 개혁 정책, 다시 말해서 외교관이나 사절단, 새 기계 등속은 말할 것도 없고, 신식 군대니 우정국이니 대감께서 하셨던 그런 해외 순방이니를 추진하는 비용이 대체 어디서 나옵니까? 모두 농민한테 세금 물린단 말입니다! 게다가 그것도 모자란다는 듯이, 왕실은 누구 돈으로 그리 사치를 일삼는 겁니까? 궐 밖도 마찬가집니다. 보잘것없는 고을 사또까지도 대궐 같은 집에 사니까요. 게다가 중전마마의 외척이며 총애하는 측근들이며그 돈을 다 누가 치릅니까, 누가요? 바로 땅을 부쳐 먹고 사는 농민들입니다. 자기네 것도 아닌 따, 어느 대지주의 것이라 살 수도, 팔 수도 없는 그런 따 말이에요. 게다가 지주들은 세금도 내지 않아요. 세금을 내는 것은 그 땅에서 소작을 부쳐 먹는 천한 농민들이란 말입니다! 대감께선 한 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셨습니까?”


(290)

모든 일이 흡족하게 마무리되자 궁왕은 장례일을 선포했다. 밝고 화창한 날씨였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녀의 온갖 변덕과 고집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과 쾌활함, 용기와 명석한 두뇌, 심지어는 그 억센 의지까지도 사랑했다. 중전이 죽은 이제, 사람들에게 그녀는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조국의 옛모습을 영원히 상징하는 존재였다. 이미 전쟁에서 승리한 정복자 일본이 조선의 옛 전통과 언어, 생활 방식을 말살하는 일에 착수한 것이다.


(298-299)

아아, 당쟁 때문이지. 그게 우리의 죄야. 어떻게 해야 적을 물리치고 자유를 지킬 수 있는지, 우리는 그 방법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시간만 허비했어. 수세기에 걸친 당쟁이 우리나라를 분열시켜왔어. 분열되었기 때문에 나라가 망한 거야. 우리 자신의 부패를 뿌리 뽑기 위해 노력한 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어. 이씨, 민씨, 박씨, 김씨, 최씨 같은 명문가도 사라졌고 실학파, 동학당 등도 다 쓰러졌어. 다행히 지금은 상하 귀천 없이 온 백성이 잃어버린 독립을 되찾는 갈망으로 뭉쳐 있다. 이제는 우리들끼리 서로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일본놈들만을 미워하게 되었으니 아마 일이 좀 더 쉽게 풀리겠지.”


(357)

제 이야기는아버님께서 제 얼굴을 영영 보지 못하시게 되면제 이름을 영영 들으실 수 없게 되면이 아들 역시 하나의 갈대였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제가갈대 하나가 꺾였다 할지라도 그 자리에서 다시 수백 개의 갈대가 무성해질 것 아닙니까? 살아 있는 갈대들 말입니다.”


(480)

아무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농민은 땅을 경작했고, 바닷가 어민은 고기를 잡았고, 선상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운하와 강줄기에서 북적거리며 살았다. 그는 이 방대한 대륙과 수많은 민중이 자발적으로 혁명에 동원될 수 있을지, 혹은 그들이 진정 동원되어야만 하는지에 대해 커다란 의구심을 품었다. 생활은 풍습과 전통 속에서 그런대로 안정되어 굶주리지 않았고, 어쩌다 욕심 낳은 지주를 빼고는 그들을 억압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찻집에서 그는 웃음소리와 재치 있는 농담을 들을 수 있었다. 아이들은 통통하게 살이 쪘고 아낙네들은 분주하기만 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누구를 적으로 하여 봉기한단 말인가? 그들이 요구는 단지 자기들을 내버려 두라는 것이었다. 늙은이든 젊은이든 그에게 수차례 해 준 말이 있었는데, 국민을 다스린다는 것은 조그만 생선을 요리하는 것과 같으니, 되도록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좋다는 노자의 가르침이었다.


(563)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집의 아늑한 방에서 연춘은 이제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까지 닿을 수 있는 연락망을 짜기 시작했다. 그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조선인들로 하여금 승전에 대비하게 하여 일본이 쫓겨 가면 곧바로 기능을 수행할 정부를 갖추게 하려는 것이고, 둘째는 다른 나라, 특히 미국에 있는 동포들을 분발시킴으로써 승리를 촉진하려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수백 년 동안 조선의 해안과, 산지에 감추어진 귀중한 광물들, 어장들, 그리고 유속 빠른 강과 좋은 항만 조건을 탐내 왔다. 그는 혁명이 일어났다 해서 러시아의 본질까지 변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나라의 야욕은 굶주린 이들의 새 정권에 의해 오히려 날카로워지고 강화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들의 조상은 아사지경의 농민들이었다. 이제 그들은 살찌고 부유해질 차례가 왔다는 것이었다.


(575-576)

선생은 열반의 의미를 잘못 알고 계시는군요. 열반은 비존재가 아닙니다. 사실은 고통의 부재, 죄업의 부재, 정욕의 부재, 그리고 미혹의 부재까지를 의미하는 것이지, 비존재라 해서 열반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아요! 정반대로 열반을 선생이 말하는 바로 그 전존재이지요. 그것은 완전한 깨달은, 완전한 인식, 완전한 이해를 의미합니다. 말이 없이도 마음이 통하는 상태 말이지요. 말이 없어도 우리는 그냥 압니다.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열반에 든 정신과 영혼한테 갖출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괴로움, 고통, 정욕, 미혹 자체의 부재는 이미 알고 있음의 결과, 즉 우리가 시간이라 부르는 이 영원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이해, 깨달음의 결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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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벌레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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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랜만에 이언 매큐언의 소설을 읽었단다. 이번에 읽은 이언 매큐언의 책은 비교적 최근작인 <바퀴벌레>라는 책이란다. 장편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100페이지 남짓이라서 금방 읽을 수 있었단다. 별 생각 없이 읽다 보면, , , 이런 감탄사가 속으로 나왔단다.

아빠가 책소개를 전혀 읽지 않고, 책 읽는 스케줄을 고려하다가 얇고 빨리 읽을 수 있는 책 중에 고른 책이었거든. 첫 문장을 읽었을 때는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재해석한 책인가 싶었단다. 이언 매큐언이 예전에 <햄릿>을 재해석한 <넛셀>이라는 책을 쓴 적이 있거든. 그런데 읽다 보니 뭔가 좀 이상했단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주인공이 거대한 벌레로 바뀌었는데, 이언 매큐언의 <바퀴벌레>에서는 바퀴벌레가 사람으로 바뀌었거든.. 소설의 첫 문장에서 짐 샘스라는 이가 거대 생물체로 변신했다고 해서, 짐 샘스라는 사람이 거대한 벌레로 변신한 것인 줄 알았는데, 짐 샘스라는 바퀴벌레가 사람으로 바뀐 것이었어.

그렇게 짐 샘스는 영국의 총리가 되었단다. 그리고 계속 읽다 보면 한가지 사건이 떠오르더구나. 2016년 영국의 브렉시트가 그것이었어. 뒤늦게 책 소개를 찾아 봤더니 예상대로 브렉시트를 모티브로 하고 있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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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영문학의 대표작가 이언 매큐언이 2019년 발표한 장편소설 『바퀴벌레』는 정치가로 변신한 벌레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브렉시트 시대 영국 사회를 다룬 작품으로, 카프카를 연상시키는 흥미로운 정치풍자 소설로 주목받았다.

브렉시트란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의미하는 조어다. 2016년 국민투표로 결정되어, 유럽경제공동체(EEC)에 합류한 지 47년 만인 2020 1 31일 영국은 공식적으로 유럽연합을 떠났다. 그 배경에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유럽 경제에 대한 불확실성 증가와 대규모 난민 유입 등으로 유럽연합에 대한 국민 인식이 악화되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난 탈퇴 여론이 있었다.

이에 보수당은 2015유럽연합 잔류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공약으로 걸고 총선에서 과반수를 얻었다. 보수당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유럽연합 잔류 결과를 예상하고 불만 여론을 가라앉히기 위해 2016년 국민투표를 단행했다. 그러나 예상과 다른 탈퇴 51.9%, 잔류 48.1%라는 결과로,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가 결정되었다.

캐머런 총리는 결과에 책임지고 사퇴했고 뒤이어 테레사 메이 총리가 취임했다. 탈퇴 협정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북아일랜드는 유럽연합에 가까운 수준의 통합을 유지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협정안은 브렉시트 찬성파의 반대로 하원에서 세 차례 부결됐으며, 메이 총리 역시 국민투표 결과를 이행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사퇴한다.

이러한 자국의 우스꽝스러운 포퓰리즘 정치를 목도한 매큐언은엄청나게 절망했다 CBC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래서 『바퀴벌레』를 쓰는 동안 대단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다며, 이 작품으로 브렉시트에 대한 여론이 바뀌지는 않겠지만어둠 속에서의 짐승 같은 웃음을 통해 사람들의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작가로서 현시대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응답이 유머와 풍자라고 느꼈다고. 『바퀴벌레』는 바로 브렉시트 사태에 대한 매큐언의 첨언이다.

-       출판사 제공 책소개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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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건 그렇고 소설의 줄거리를 간단히 이야기해줄게. 책이 워낙 얇다 보니 길게 이야기할 수도 없겠구나. 총리가 된 바퀴벌레 짐 샘스. 사람의 몸이 되어 움직임도 익숙하지 않고 몸의 구조가 흉측스럽다고 생각했어. 그래도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면서 출근을 했단다. 걱정과 함께 들어선 각료회의에 그는 깜짝 놀랐단다. 정부의 여러 장관들 모두 바퀴벌레들이 변신한 사람들이었어. 외무장관인 베네딕트 한 명만 빼고 말이야. 짐 샘스는 그 전부터 자신의 종족을 위한 일을 했는데, 인간으로 변신했으니 이걸 기회로 삼기로 했어. 인간 세계를 무너뜨리는 방법을 생각해 내고 그걸 추진해 나갔지.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역방향주의라는 거야. 아빠는 역방향주의라는 말을 처음 들어봤는데, 소설의 내용을 통해서 정리해보면 자본주의에서 돈의 흐름을 반대로 하는 것이라 보면 돼. 예를 들면 소비를 하게 되면 돈을 주고, 노동을 하게 되면 돈을 받는 게 아니고 회사에 돈을 주는 것이야. 저축을 하면 마이너스 이자가 있어서 저축을 하지 않게 되었어. 그리고 25파운드 이상의 돈을 소지하고 있으면 불법이었지. 이 이상한 말도 안 되는 정책을 시도하려고 했단다. 정부 각료들은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찬성을 했단다. 그 사람은 바퀴벌레가 아닌 외무장관 베네딕트이었어. 이 사람을 어쩌지? 한 사람 매장시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성추행 사건에 연루시켜서 잘라 버렸단다. 이제 그들의 역방향주의 정책을 방해하려는 세력은 없었어.

프랑스 영해 불법 침입했던 영국 어선이 프랑스 함대에 부딪혀 침몰하여 여섯 명의 영국인 어부가 죽은 사고가 발생했는데, 짐 샘스는 이것을 정치적으로 잘 이용하여 지지율을 높이는데 성공을 했어. 그런 지지율을 바탕으로 역방향주의 정책도 잘 포장하여 국민의 동의를 얻어냈단다. 그리고 미국의 대통령에게도 지지를 받았단다. 심지어 미국에서도 역방향주의 정책을 추진하려고 했단다. 정황으로 보나 소설이 나온 시기를 봐서 미국 대통령은 트럼프를 생각하고 소설을 썼을 거야. 그렇지, 트럼프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ㅎㅎ. 짐 샘스와 바퀴벌레 일행들은 역방향주의를 의회에 통과시키고, 다시 바퀴벌레로 돌아왔단다. 여기까지가 소설의 이야기란다.

, 소설을 읽다 보니 문득 우리나라에 일본의 바퀴벌레가 변신한 사람들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요즘처럼 대놓고 친일을 하던 정부가 있던가 싶거든. 이 바퀴벌레들아, 이 정도 했으면 이제 그만 그 사람들의 몸에서 나와서 너희들 세계로 돌아가라.


PS:

책의 첫 문장: 그날 아침 영리하지만 전혀 심오하지는 않은 짐 샘스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거대 생물체로 변신해 있었다.

책의 끝 문장: 그 다음엔 여섯 장관이 그의 다리를 하나씩 잡고 웨스트민스터궁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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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4-29 1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대 정부에서 해오던 균형 외교
를 무너 뜨린 후과를 어떻게 감당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시민들에게는 인색하면서 외국정
부에 퍼주는 걸 보면, 참...

정말 이러다 큰 일 나게 생겼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지 싶습
니다.

bookholic 2023-04-29 19:32   좋아요 1 | URL
하루하루가 조마조마합니다.ㅠㅠ
아직도 4년이나 남았다는 것이 앞을 캄캄하게 하고요...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1 - 왕건에서 서희까지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1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지음, 이익주 감수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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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작년에 <역사저널 그날 조선 편>을 마무리하고 올해는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을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단다. 아빠가 역사에 취약한 편인데, 특히 고려는 더욱 그렇단다. 조선시대에 책이나 영상 매체를 다뤄서 접할 기회가 많다 보니 주워 들은 것들도 있곤 한데, 고려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단다. 고려를 다룬 책들을 읽은 적도 있긴 한데, 아주 오래 전이라서 기억에서 희미해졌어. 그래서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을 읽으면서 고려 500년 역사를 정리해보려고 했단다. 중간중간 재미있는 내용들이 있으면 너희들에게도 이야기해주고 말이야.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는 모두 4권으로 이루어져 있어. 오늘은 1권을 이야기해줄게. 자 그럼 고고~


1.

고려 이전 우리나라에는 통일신라가 있었고, 통일 신라 말기 정권이 무너지면서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생겨나면서 우리나라는 전쟁의 도가니에 빠지게 되었단다. 먼저 후백제부터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후백제는 견훤이라는 사람이 세웠는데, 진훤이라고 읽기도 한대. 지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구나. 견훤은 경상도 상주 출신으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자수성가를 했다고 볼 수 있어. 당시 지방의 권력을 잡고 있는 호족이 되었거든. 견훤은 전라지역의 장군으로 복무하다가 전라지역을 지반으로 후백제를 건국했단다. 자신의 고향이 아닌 곳에서 나를 세운 것이 특이했는데, 그 지역의 민심을 얻기 위해서인지 견훤은 반신라정책을 펼쳤단다. 무너져가는 신라의 반기를 든 것이지.

...

후고구려는 승려 출신 궁예라는 건국했는데, 그 밑에 있던 왕건이 민심을 잃은 궁예를 처단하고 고려라는 나라를 세웠단다. 918년이었어. 왕건의 아버지는 호족 출신으로 금수저라고 할 수 있어. 고려를 세운 왕건은 견훤과 달리 친신라 정책을 펼쳤단다. 당시 신라는 이름만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고, 후백제와 고려의 기세가 비슷하였단다.

견훤과 왕건은 대구 지역에서 큰 전투를 벌였는데, 왕건은 이곳에서 대패를 하고 휘하에 있던 장군 여덟 명이 죽었다고 했어. 그들이 전투를 벌여 여덟 명이 죽은 산을 그때부터 팔공산이라고 했다는구나. 전세가 견훤으로 넘어오나 했는데, 견훤은 집안이 화목하지 못했나 봐. 견훤의 아버지가 상주 지역의 호족으로 있었는데, 왕건에게 귀부하였다고 하는구나. 귀부라는 말은 스스로 와서 복종하는 것을 뜻한단다. 그런데 더 황당한 것은 이번에는 견훤이 아들 신검에게 쫓겨나 왕건에게 투항하는 일이 벌어진단다.

후백제를 세우고 왕건과 전투에서 대승을 한 견훤이 아들에게 쫓겨났다고? 견훤이 왕위를 둘째 아들에게 주려고 했는데, 이에 첫째 아들 신검이 반란을 일으켰던 거야. 그리고 신검이 아버지 견훤을 죽이려고 하자 견훤은 왕건한테 도망을 간 것이지. 후백제는 이미 집안 싸움으로 인해 자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어. 대세는 고려로 넘어왔어. 신라도 고려에 투항했지. 고려는 대대적으로 신검의 후백제를 공격하였고, 결국 신검은 항복하고 만단다. 왕건은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게 돼. 견훤의 집안 싸움이 없었다면 어쩌면 견훤의 후백제가 후삼국을 통일했을 수도 있었던 거야. 그랬다면 그 이후 역사는 또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평행우주가 있다면 후백제가 통일한 우리나라의 역사를 볼 수 있을까?


2.

우리나라 왕 중에서 가장 많은 아내를 둔 왕은 누구였을까? 그건 바로 고려 태조 왕건이야. 무려 29명의 아내를 두었대.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하던 그 즈음 지방 호족 세력이 엄청나게 컸고, 그들과 관계 개선을 하기 위해서는 정략결혼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는구나. 그래서 그렇게 많은 아내를 두었다고 하는구나. 그래도 많아도 너무 많은 것 같구나.

===============

(63)

(이익주) 제가 왕건을 위해 변명을 좀 하겠습니다. 너무 개인사적 측면으로만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요. 왕건이 스물아홉 명의 아내를 거느린 것, 사실은 거느렸다고 하기도 뭣하지만, 아무튼 스물아홉 번이나 결혼한 것은 여자가 좋아서라기보다는 후삼국을 통일하기 위해서입니다. 정치적인 계산을 한 것이죠. 왕건은 그 자신이 호족이고, 전국의 호족들은 왕건과 대등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왕건은 궁예의 부하로 경력을 시작했죠. 이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하기 위해 견훤과 싸우며 신라를 계속 의식해야 하는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각 지방에서 독립 세력으로 존재하던 호족들의 지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력한 호족과 가장 믿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동맹을 맺는 방법이 바로 결혼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래서 아까 지도에 봤던 것처럼 전국 곳곳에 있는, 각 지역의 가장 유력한 호족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그 호족의 지지를 끌어내려 합니다. 그 결과 스물아홉 번이나 결혼했던 것이고요.

===============

...

왕건은 29명의 아내를 통해 아들 25, 9명을 낳았대. 벌써 왕위 계승 싸움의 피 냄새가 나는 것 같구나. 조선에서는 왕을 이을 아들을 태자라고 하는데, 고려에서는 정윤이라고 했다는구나. 1왕후는 아들이 없어서 제2왕후의 장남 왕무를 정윤으로 삼았는데, 2왕후는 배경이 별로라서 세력도 약했다고 하는구나. 배경도 좋고 세력이 좋기로는 제3왕후가 좋은데, 3왕후는 아이도 많이 낳았다고 하는구나. 아들 다섯에 딸 둘이었지.

943 5, 왕건이 67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단다. 일단 제2대 왕은 왕무가 되었어. 혜종이었지. 그런데 혜종은 제3왕후의 아들들인 왕요, 왕소와 대립을 이뤘어. 혜종은 세력이 약했는데, 몸도 허약했단다. 거기에 왕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아우들도 있고...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진단다. 혜종의 장인인 왕규가 혜종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역모를 꾸민 거야. 왕의 장인이 역모를 꾸민다? 뭔가 석연치 않구나. 아무튼 왕규는 혜종을 죽이려고 자객을 보냈다고 했어. 그리고 이 난을 혜종의 동생인 왕요가 진압을 했다고 했대. 일명 왕규의 난이지.

하지만 이것은 왕요가 다 꾸민 것으로 추정된대. 왕요가 자신의 기반을 더 다지기 위한 작전. 역사는 승자의 기록. 이 일이 있고 얼마 안 되어 혜종 마저 34살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단다. 즉위한 지 2년만이었어. 그런데 혜종에는 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요가 왕규의 난을 진압한 공을 들어 왕위에 오르게 된단다.

그가 고려 3대 왕 정종이란다. 정종은 왕위에 오르고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려고 했어. 백성들과 호족들이 모두 반대를 했지. 그러면서 호족들은 왕요의 동생 왕소 밑으로 줄을 섰단다. 그런데 정종도 젊은 나이에 죽게 돼. 기록에 의하면 번개에 놀라 병을 얻게 되어 죽었다고 하는데, 의문의 죽음이지. 그리고 후계에 자신의 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생인 왕소에게 왕을 물려주었단다. 왕소가 제4대 왕이 되었으니 광종이란다. 고려 광종 왕소와 조선의 태종 이방원이 동생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고, 그 이전 왕이 고려와 조선 모두 정종이라고 하는구나. 그러면서 고려의 정종과 조선의 정종이 닮은 점도 지적을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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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110)

(신병주) 고려의 정종과 조선의 정종이 정말 닮았다고 했잖아요. 왕으로 재위한 기간은 두 사람 다 매우 짧아요. 근데 조선의 정종은 동생 태종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 무서운 동생이 정몽주와, 정도전, 방석 등을 죽이는 것을 다 봤거든요. 자기까지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 싶으니까 동생에게 왕위를 깔끔하게 물려주고 격구와 사냥 같은 취미 생활을 하면서 여생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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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려 4대왕 광종은 예전에 시험 문제에 많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되는구나. 노비안검법과 과제제도 시행으로 말이야. 광종은 26년간 재위하면서 고려라는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고 왕권 강화하는데 힘썼다고 하는구나. 노비안검법은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양인으로 해주는 것으로, 호족들이 관리하던 노비들을 양인으로 풀어주는 것이기 때문에 호족의 반발이 심했다고 하는구나. 노비안검법을 시행한 것이 광종 7년이라고 하는데, 왕위에 즉위한 7년 동안 호족들의 눈치를 보면서 왕권을 강화를 해서 팡 터뜨린 것이란다. 광종은 중국에서 귀화한 쌍기를 사람을 등용해서 그 사람의 조언을 정책으로 많이 삼았다고 하는구나.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바로 과거제도인데, 이 때 만들어진 과거 제도는 인재 등용의 산물로, 조선말까지 약 1000년간 이어지게 된 것이란다.

그리고 관복을 제정하여 위계 질서를 세우려고 했고, 호족 세력의 힘을 빼기 위해 최측근 호족도 숙청했다는구나. 워낙 많은 사람을 죽여서 광종의 이 빛날 광()이 아니라 미칠 광()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대. 그래서 고려 광종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의 제목도 빛나거나 미치거나였다나그런 드라마가 있었구나. 아빠는 처음 들어보는 제목인데

고려 시대 유명한 사람, 어쩌면 악명 높다고 해야 할지도 모를 천추태후란 사람이 있었단다. 예전에는 그리 유명하지 않았었는데, <천추태후>라는 드라마를 통해서 많이 유명해졌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이 사람 가족 관계가 좀 복잡하단다. 고려 초기에는 왕족 내에서 근친혼이 일상이라고 하긴 하지만, 천추태후는 복잡해도 너무 복잡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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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신병주) 천추태후는 드라마로 유명해지기 전까지는 웬만큼 역사를 아는 사람조차도 잘 몰랐던 인물입니다. 5대 왕 경종에게는 아내가 되고, 6대 왕 성종에게는 동생이 되고, 7대 왕 목종에게는 어머니가 되고, 8대 왕 현종에게는 이모가 되는 인물이에요. 천추태후를 거치지 않고는 고려 시대의 왕 네 명을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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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왕은 경종이고, 아내로는 헌애왕후 황보씨와 헌정왕후 왕보씨 이렇게 둘이었는데, 둘은 자매라고 하더구나. 이 중에 헌애왕후 황보씨가 바로 나중에 천추태후가 되는 사람인데, 왕건의 손녀이기도 했대. 경종은 즉위한 지 1년만에 죽고 동생이 왕위에 오르는데 제6대 왕 성종이란다. 헌애왕후 황보씨는 아들이 하나 있었고, 남편이 죽고 난 다음 천추궁에 머무르게 되었단다. 그런데 그곳에 있으면서 승려 출신 김치양이라는 사람과 연애를 하게 되었대. 그 사실을 알게 된 성종은 김치양을 유배 보냈다고 하는구나.

이때까지는 조용하게 있었는데, 성종이 죽고 헌애왕후 황보씨가 낳은 경종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으니 제7대 왕 목종이었어. 당시 목종의 나이가 18살이라서 자신이 직접 친정을 해도 될법한데, 어머니인 천추태후가 섭정을 하였단다. 그러면서 유배 갔던 김치양을  데리고 오기도 했어. 다시 김치양과 천추태후는 사랑을 하게 되었고, 천추태후는 마흔 살에 아들을 낳았단다. 그리고 목종은 자식들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동성연애를 했다는구나. 오호이런 상황이 되자, 천추태후는 김치양과 낳은 아들을 왕위에 세우려고 했는데, 왕족들이 반대를 하고 나섰단다.

왕족들은 대량원군이라는 사람을 다음 후계자로 세우자고 했어. 그런데 대량원군이라는 사람도 흠이 있는 사람이었어. 대량원군은 누구냐면, 경종의 둘째 부인이자 천추태후의 동생인 헌정왕후 황보씨가 숙부인 왕욱과 불륜으로 애를 낳았는데 그 애가 바로 대량원군이었어. 불쌍했던 것은 헌정왕후 황보씨는 대량원군을 낳다가 그만 죽었단다. 천추태후가 낳은 김시양의 아들과 대량원군누가 후계자가 되었을까?

이때 막강 군대를 가지고 있던 강조라는 사람이 정변을 일으켰단다. 그래서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량원군을 왕위에 올렸어. 그가 제8대왕 현종이란다. 강조라는 사람이 후계 정리를 싹 해버린 거지. 강조는 목종, 김치양, 천추태후이 낳은 김치양의 아들을 모두 죽였단다. 그리고 천추태후는 멀리 유배를 보냈어. 그렇게 권력을 좌지우지했던 천추태후의 세상도 막을 내렸단다.


4.

고려 초기 외세 침입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거란이란다. 우리나라 북쪽 이민족들인 거란족, 여진족, 말갈족, 만주족 등이 헛갈리곤 하는데 그것을 간단하게 정리해 주어 발췌해 보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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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

(이익주) 거란과 여진은 분명히 다릅니다. 거란은 몽골 계통의 유목민입니다. 우리가 아는 요라는 나라를 건국하죠. 여진은 거란보다는 우리와 좀 가깝습니다. 발해가 건국되었을 때 고구려의 유민이 지배층이 되고 말갈족이 피지배층이 됐다고 알고 있는데, 그 말갈이 발해가 망하고 거란에 점령된 다음에 여진으로 불린 거죠. 그리고 이 여진이 1115년에 금을 건국하고 더 나중인 1616년에는 후금을 세웠다가 1636년에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만주족으로 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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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3년 성종 때 거란의 침입이 있었어. 신하들 대부분은 거란의 요구를 들어주어 땅을 떼어주는 것을 지지했는데, 서희라는 사람은 홀로 반대를 했단다. 그리고 서희는 거란의 소손녕과 담판을 짓고, 오히려 강동6주를 얻어냈단다. 전쟁 한번 하지 않고 말로써 땅을 얻었으니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던가. 서희는 강동6주를 얻는 대신 송과 관계를 끊고, 거란과 사대관계를 유지한다는 조건이 있었대. 하지만 말이 쉽지 송과 관계를 그렇게 쉽게 끊게 되면 이번에는 송으로부터 공격을 받지는 않을까? 그런 것을 대비해서 서희는 송나라에는 이렇게 이야기를 했대. 거란의 침입에 대해 송나라에게 도움을 청하는 척하고, 송나라도 도와줄 여력이 없어서 고려를 도와주지 않게 되었고, 고려는 송에서 도와주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거란과 사대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했대. 이게 다 너희 송나라 때문인 것처럼 이야기해서 송나라가 책임감을 느끼게 말이야. 정말 멋진 작전이구나.

….

강조의 정변의 이후 천추태후가 물러나고 목종이 폐위되었을 때 거란은 이것을 빌미로 고려를 쳐들어 오게 되는데 이것을 거란의 2차 침입이라고 한단다. 강조라는 사람이 강동6주에서 방어를 했지만 고려군은 패배를 하고 개경까지 함락되는 위기에 빠지게 된단다. 당시 왕이었던 현종은 나주로 천도를 한단다.

여기까지가 <역사저널 그날 고려 편 1>의 이야기란다. 고려 역사도 다이나믹하고 흥미진진하구나. 편지를 쓰기 전에 너희들에게 이야기를 대략 해주었더니 너희들도 재미있게 들었잖니. 이 책에서 읽은 기억이 얼마나 오래갈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고려 역사에 대한 지식으로 머리가 꽉 찬 느낌이구나. 조만간 2권도 읽고 이야기해줄게.


PS:

책의 첫 문장: 신라 말 정치는 도탄에 빠졌고 전국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책의 끝 문장: 개경은 불바다가 됐고, 서희도 죽고 양규도 죽고, 그럼 고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익주) 고려가 건국된 지 100여 년 정도 지난 다음에 김관의라는 사람은 <편년통록>을 씁니다. 이 책에는 왕건의 조상에 관한 설화가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용왕 등 바다와 관련된 이미지가 계속 나옵니다. 이것은 왕건의 집안이 예성강을 통해 개성에서 중국의 산동반도를 왕래하며 무역했다는 것을 암시하죠. 그런데 작제건(왕건의 할아버지)이나 그 선대가 활동하던 시기를 거꾸로 추론해 보면 남쪽에서 장보고가 활동하던 시기와 거의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통일신라 시대에 남쪽 해상에서 큰 세력을 이루었던 장보고와는 별도의 독립된 세력으로 왕건의 가문이 활동했다고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 P20

(이익주) 안 주는 것보다는 주는 게 나았겠죠. 그리고 왕건의 가장 큰 선물은 호족이 지방에서 가지는 세력을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왕건이 견훤보다 훨씬 앞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왕건은 자기에게 귀부해 오는 호족들의 세력을 그대로 인정해 주겠다고 약속하죠. 이처럼 왕건은 중폐(重幣), 즉 선물을 많이 하고, 비사(卑辭), 즉 자기를 낮추는 말을 쓰는 태도를 보입니다. 될 수 있으면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거죠. 왕건도 호족이거든요. 여러 가지 동맹의 관계로 호족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다는 정책이 왕건에게서 나왔던 것이죠. 견훤 역시 그 지역의 호족들과 연합도 하고 결혼 정책도 펼치지만, 호족들을 지배하려는 속성이 왕건보다 강한 편이었습니다. 여기서 왕건과 견훤의 차이가 나타나죠. - P39

(신병주) 조선 시대에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도 기록을 보면 "정도전 등이 먼저 군사를 준비했으므로 우리는 정당방어다."라는 식으로 나오거든요. 근데 정작 난을 일으켰다는 정도전 등에게서는 군사적인 움직임을 전혀 찾을 수가 없죠. 그래서 왕규의 난이 상당히 유사하다는 겁니다. "왕규가 난을 일으켰으므로 우리는 정당하게 진압한 거다." 그런데 실체가 없죠. 하지만 역사는 왕규의 난이라는 이름으로 남았고요. - P98

(이익주) 고려라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성의 이혼과 재혼이라는 문제는 여성의 지위와 밀접하게 관계가 있지요. 재산상속 문제부터가 조건과는 다릅니다. 고려에서 부모가 사망하면 제산이 어떻게 상속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사정에 따라 다르겠습니다만, 원칙은 "자녀를 구별하지 않고 똑같이 나누어 준다."입니다. 재산을 똑같이 나누어 준다는 것은 자녀들에게 부모에 대한 의무도 똑같이 요구하는 것이고요. 예를 들어 제사는 조선 시대처럼 장남이 지내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이 돌아가면서 지냅니다. 그리고 부모가 살아 있을 때 봉양하는 의무도 장남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녀에게 똑같이 있습니다. - P157

(신병주) 거란의 제1차 침입 당시의 상황과 제2차 침입 당시의 상황을 보면 차이가 있습니다. 제1차 침입 당시의 고려는 성종이라는 왕을 중심으로 왕권이 상당히 안정돼 있었죠. 시스템이 안정되어 있는 상황이니까 서희와 같은 명장을 배출할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져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제2차 침입 때는 강조라는 인물이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왕위에 올리면서 정치 체제가 불안정해졌죠. 결과적으로 크게 보면 정치가 안정되고 지지 기반이 확실했을 때는 국방이라든가 외교에서 힘을 받을 수 있는데, 제2차 침입 때는 고려 자체가 정치적으로 무너진 것도 패배한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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