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작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 치오니, 하느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41)

전태일은 두 손에 이마를 대고 차가운 방바닥에 엎드렸다.

주여, 약한 저에게 용기와 확신을 주소서. 제가 저의 죽음을 넘어설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저의 죽음이 절대 헛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주소서.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돈 많고 권력 가진 자들의 서로 작당해서 속이고 또 속이고, 거기에 정부까지 한통속이 되어 있습니다. 그 벽은 높고 높으며, 두껍고 두껍습니다. 그 벽을 어찌해야 깰 수 있겠나이까. 그 벽을 깨고 모든 사람끼리 빈부도, 강약도, 귀천도 없는 세상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이 한 몸을 육탄으로 날리는 길뿐이라고 여겨지옵니다. 이 미천한 몸 하나 육탄으로 날아가 산산이 부서져서 천대받고 억눌려 사는 모든 노동자들이 눈 똑바로 뜨고 자기들을 보게 하고자 하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다함께 뭉쳐 일어나 그 벽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인간다운 세상을 이룩해 내는 데 한 톨 불씨이고자 하나이다. 이 결심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번뇌하였으나 이 길이 가장 옳은 길이라 여겨지옵니다.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은 2천 년 동안 끝없이 부활하시기 위함이었나이다. 이 나약한 자 감히 주님의 가르침을 한 중 거름이 거고자 하오니 주여, 부축하여 주소서…..”

 

(57)

, 나도 이번 사건으로 모든 걸 알게 된 건데, 우리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사람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나라에서 법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근로조건이라는 게 있어. 하루에 일은 여덟 시간만 한다. 야근을 시키면 야근 수당을 따로 지급해야 한다, 일요일과 공휴일은 쉬어야 한다. 공장 안의 작업환경은 건강을 해치게 해서는 안 된다, 하는 식으로 정해놓은 거야. 그밖에도 노동자들을 위한 법이 많은데, 그 법들을 다 합해놓은 게 근로기준법이라는 거야. 그런데 사장들은 그 법을 하나도 안 지키잖아. 그래서 그 사람은 모든 걸 법이 정한 대로 하게 하려고 우리 노동자들이 힘을 모아 들고일어나게 하는 일을 시작했어. 그걸 노동운동이라고 해.”

 

(60)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일까…… 배운 것이 많은가…… 아니지, 스물두 살에 벌써 재단사 노릇을 했다면 아무리 짧아도 5년은 봉제공장밥을 먹었을 것 아닌가. 그럼 아무리 많이 배웠어야 중학교밖에 더 나왔겠는가. 그렇다면 많이 배웠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스텐공장은 일하는 모든 조건이 봉제공장에 비해 나빴으면 나빴지 좋을 것이 없었다. 그런데 자신은 막소주나 마시며 불평을 했을 뿐이지 그 사람 같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다른 공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 어린 사람이 남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다니…… 그게 똑똑한 것인가…… 어리석은 것인가…… 이 야박하고 약아빠진 세상에서 그런 사람이 있다니……

 

(95)

월출산은 바위산의 아름다움이 더없이 빼어난 산이었다. 월출산의 신비스러움과 아름다움은 두 가지 사실이 합해져 이루어지고 있었다. 시방 그 어디를 둘러보아도 산줄기라고는 없이 질펀한 들녘일 뿐인데 어찌 그렇게 거대한 바위산이 솟을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바위산이 되 무작정 커서 위압적인 것이 아니라 수많은 작은 봉우리들이 모여 산을 이루고, 그 산들은 겹겹이 큰 산을 이루어내며 아기자기하고 오밀조밀하게 조화되어 있었다. 넓은 들판 가운데 솟아 더욱 우람해 보이고, 그러면서 수많은 봉우리들이 어우러져 섬세한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월출산은 바위산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그 겹겹의 봉우리에 안개가 감겨 있을 때는 범접하기 어렵게 신령스럽기 그지없었고, 눈이 하얗게 내려 있으면 신선의 세상이 저기가 아닌가 싶게 신비스러움은 절정을 이루었다.

 

(155-156)

바로 그거요. 모든 신문들도 은근히 그런 냄새를 풍기고 있고, 세상 인심도 그리 돌아가고 있듯이 이번 선거는 분명 우리 경상도와 전라도의 싸움일 수밖에 없소. 여러분은 이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유권자들에게 주지시켜야 해요. 우리끼리니까 터놓고 하는 얘긴데, 유권자 설득작전에서 그냥 막연하게 우리가 같은 경상도니까 경상도를 찍자 해서는 효과가 좋지 않아요. 특히 지식수준이 낮고 단순한 사람들일수록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이건 된장이고 간장이고 고추장이다 하는 식으로 꼭꼭 찍어서 쉽게 말해야 효과가 나요. 다시 말하면, 우리 경상도가 이렇게 잘살게 된 건 누구 덕이냐? 다 각하 덕이다. 왜냐하면 각하께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1, 2차 단행하시면서 덕을 제일 많이 입히신 데가 우리 경상도 아니냐. 부산, 대구를 양대 중심으로 해서 발전시키는 것은 더 말할 것 없고, 울산을 개발했고, 마산에 수출자유지역을 만들었고, 경부고속도로를 개통하지 않았느냐. 다 이런 혜택으로 딴 데보다 더 잘살게 된 것이니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폐일언하고 우리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똘똘 뭉쳐 또다시 각하를 찍어 대통령으로 받들어야 한다. 만약에 우리가 힘을 합치지 않아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면 어떻게 되느냐. 지금까지 누렸던 그 모든 혜택이 다 전라도땅으로 가버린다. 여러분, 이런 사실들을 명백하게 주지시켜야 한다 그겁니다.”

 

(270)

으응, 그거야 뭐……” 김명숙은 그까짓 거야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심드렁하게 말끝을 흐리고는, “이런 말 들으면 우리 원장님 또 싫은 기색할지 모르지만 말야, 디자이너로 말하자면 노력으로나 능력으로나 앙드레 김을 당할 사람이 없어. 네가 말을 꺼냈으니까 솔직하게 하는 말인데 우리한테는 신동파나 박신자보다는 앙드레 김이 훨씬 더 중요하고 본받아야 될 인물이야. 너도 소문 들어서 좀 알고 있겠지만 앙드레 김은 벌써 15년 전에 순전히 독학으로 디자인 공부를 시작했는데, 거짓말 하나도 보태지 않고 기본 스케치를 1천 번, 1만 번, 수백만 번을 해서 2년이 지나지 않아 어둠 속에서도 마음먹은 대로 디자인 스케치를 해낼 수 있었다는 거야. 그 실력이 얼마나 짱짱하면 벌써 6~7년 전에 프랑스 정부에서 초청해 세계 디자인의 최고 도시인 파리에서 패션쇼를 열게 했겠니. 너 국민학교 때 명필 한석봉 얘기 들었지? 등잔불 없는 밤중에 천자문을 획 하나 틀리지 않고 다 썼다는 거. 난 그게 지어낸 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앙드레 김이 살아 있는 한석봉이야. …… 그 사람처럼 되는 게 꿈이야.”

 

(302-303)

그 길을 따라 사나이의 젊은 꿈도 접고, 야속한 운명에 절망하며 절룩절룩 걸어가고 있는 한 남자의 외롭고 슬픈 모습이 영화의 라스트 씬처럼 떠올라 있었다. 그것은 지금의 영상이 아니라 그 시를 외웠던 중학생 때의 영상이었다. 그 영상은 변함이 없는데 왜 시는 떠오르지 않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야 간간하게 말하면 세월 따라 잊혀진 것이었다. 그런데 최주한은 야릇한 상실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을 마치 누구한테 빼앗겨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느낌의 배면에는, 그럼 나는 서울에서 얻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회의가 도사리고 있었다. 결국 그것을 빼앗아간 것은 서울이었다. 중학생 시절에 비해 서울에서 보낸 세월은 긴 세월이었다. 그 세월은 중학생인 어린 시절 한때 외웠던 시를 잊혀지게 할만도 했다. 그런데도 엉뚱하게 상실감이 드는 것은 자신이 처한 궁색한 처지 때문일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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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코스트
테스 게리첸 지음, 박지민 옮김 / 미래지향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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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 소개해줄 책은 얼마 전에 신간 코너에서 본 책이란다. 지은이가 낯익은 사람이라서 더 관심이 갔단다. 테스 게리첸이란 사람인데, 오래 전에 <의과의사>라는 스릴러 소설을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단다. 테스 게리첸은 의사 출신 작가로 <의과의사>라는 소설에서도 의사라는 직업의 장점을 유감없이 드러냈던 것으로 기억한단다. 그런 테스 게리첸의 신작이라면서 홍보를 했는데 아빠가 제대로 걸려 들었단다. 아빠가 추리 소설도 좋아하는 편이니 재미있겠다 싶어서 읽었단다.

제목은 <스파이 코스트> 스파이에 관한 이야기인가 보구나. 그런데 코스트는 무얼 의미하지? 코스트(coast)는 해안이라는 뜻인데, ‘스파이 코스트라고 하면 다른 숨어 있는 뜻이 있으려나? 책에서 이야기를 해주었는지 모르겠는데, 재미있게 다 읽었지만 아빠는 책에서는 스파이 코스트라는 문구를 본 적이 없는 것 같구나. 문득 이 소설의 주무대인 메인 주 퓨리티와 관련이 있나 싶어, 검색을 해보니, 메인 주가 미국 북동부 끝에 바다랑 붙어 있더구나. 소설 속 장소가 해안 마을이라서, <스파이 코스트>라고 한 것인가?

 

1.

메인주 퓨리티라는 해안 마을에 전직 스파이 출신 매기 버드가 출신을 숨긴 채 농장 생활을 하며 지내고 있었단다. 은퇴한 지 16년이나 되었으니 스파이가 전직이라고 하기에도 시간이 한참 지난 시간이구나. 그렇게 스파이 생활은 뭔 과거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비앙카라는 젊은 요원이 찾아와서 시라노 작전의 파일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매기와 함께 시라노 작전에 참여했었던 다이애나가 사라졌다면서, 매기에도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남기고 갔단다. 그런데 그날 저녁 비앙카는 매기의 집 진입로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어. 이것은 누가 봐도 매기에게 경고를 날린 것이라고 볼 수 있었지.

이 사건은 조 티보듀라는 경찰이 담당하였단다. 비앙카가 시신으로 발견되었을 때 매기는 북클럽 친구들과, 정확히 이야기하면 은퇴한 다른 요원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단다. 매기가 살고 있는 마을에는 매기뿐만 아니라 잉그리드, 로이드, , 데클란 등 은퇴한 요원들도 살고 있었어. 서로의 비밀을 알고 있으면서 친하게 지내던 옛 동료들에게 이 마을을 추천하여 하나 둘 이곳에 정착하게 된 거야. 그들은 북클럽 이름은 마티니 클럽이었는데, 그들은 비앙카 살인 사건을 조사하게 되었단다. 그들은 사건 장소에서 가서 시신을 살펴보고 서로 의논하고 그랬는데 그 모습을 보던 경찰관 조가 가장 황당했을 것 거야. 시골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시신에 놀라지도 않고 시신에 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니 말이야. 그들은 그저 취미로 추리소설을 많이 읽어서 관심이 있을 뿐이라고 했단다. 그렇다면 비앙카가 이야기한 시라노 사건이란 어떤 사건일까.

 

2.

스파이 소설에 사랑이 빠질 수 없지. 24년 전. 매기의 나이는 서른다섯 살. 방콕에서 휴가 중이었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의료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대니 겔러거라는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단다. 그런데 홀로 된 대니의 어머니가 대니에게 영국으로 돌아와 달라고 애원을 해서, 대니는 영국으로 돌아갔단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더 뜨거워졌어. 장거리 연애를 했단다. 물론 매기는 자신이 CIA 요원이라는 것을 숨기고 무역업을 한다고 했어. 그들의 장거리 연애는 6년이 넘어도 식지 않았단다. 18년 전 매기는 임무 수행을 위해 터키 이스탄불에 있었단다. 그곳에서 매기에서 정보를 주던 체첸의 정보원 도쿠가 암살 당하고 그의 가족들도 모두 의문사하고 말았단다. 매기는 이 일로 큰 충격을 받았단다. 이 일을 겪고 런던에 가서 대니 겔러거를 만났는데, 대니로부터 청혼을 받았단다 매기도 이제 CIA 요원을 은퇴하고 대니와 결혼하기로 마음 먹었단다.

임무를 정리하려고 이스탄불에 왔는데, 다이애나 로드라는 요원이 찾아왔어. 대니의 고객 중에 하드윅이라는 자가 있는데, 그 자가 러시아 쪽 스파이로 추정된다는 거야. 그리고 시라노라는 러시아의 핵심 요원도 활동한다고 했어. 하드윅을 조사하면 사라노의 정체도 밝힐 수 있다고 했어. 그들은 얼마 전에 죽은 체첸 정보원 도쿠의 죽음과도 연관이 있었어. 그래서 하드윅의 정보를 빼 달라고 부탁하러 온 거야. 매기는 갈등을 했단다. 가뜩이나 대니에게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있었는데, 그로부터 그의 고객의 정보를 빼내야 하니 말이야. 하지만 자신의 불쌍한 정보원 도쿠와 그의 가족에 대한 원한도 생각해야 했단다.

문득 재미있게 본 <얼라이드>라는 영화가 생각이 나는구나. 동료 스파이인줄 알았던 아내가 이중간첩 의심을 받고 그것을 증명해야 하는 임무를 맡은 주인공그 괴로운 심정….. 혹시 매기의 남자친구 대니도 혹시 러시아 스파이 시라노가 아닐까? 방콕에서 만남도 우연한 만남이 아닌 고의적인 접근은 아닐까? 이런 추측을 하면서 다음 장을 열심히 넘겼단다.

 

3.

매기는 다이애나의 요청을 수락했단다. 지금처럼 충분이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매기는 대니와 결혼을 하고, 결혼식장에 온 하드윅과 인사도 했어. 하드윅은 이혼하고 젊은 여자와 사귀고 있었는데, 15살짜리 딸 벨라도 함께 지내고 있었어. 엄마와 떨어져 지내는 벨라는 파티에서 알게 된 매기를 잘 따르게 되었단다. 결혼하고 나서 얼마 후 대니와 매기는 하드윅의 초대한 파티에 참석하게 되었어. 파티가 끝나고 대니와 매기는 하드윅의 집에서 잤는데, 매기는 밤에 조사를 하다가 마구간에서 시체를 발견하게 되었고, 곧 이어 그 시체를 치우는 이들과 마주칠 뻔한 위기도 있었어.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시신은 CIA에서 심어 놓은 또 다른 요원이었어. 만일 매기의 정체도 밝혀졌다면

하드윅이 업무 차 몰타에 출장을 가는데, 대니도 함께 가야 한다고 했어. 사실 하드윅이 간질 증상이 있는데 언제 간질이 나타날지 몰라서, 주치의인 대니도 함께 가야만 했어. 대니의 제안으로 여행도 할 겸 매기도 함께 가게 되었단다. 그런데 몰타에서 매기는 자신의 신분을 대니에게 들키고 말았단다. 어차피 이 임무만 끝나면 다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인데대니는 매기의 정체를 알고 나서 매기의 사랑을 의심했어. 매기는 대니를 사랑하는 것은 진심이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대니는 여전히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았어. 그러면서 시간을 갖자고 하면서, 다른 일반 비행기로 따로 타고 오라고 했어. 그런데…. 하드윅과 대니가 타고 있던 전용 비행기가 폭발로 추락하고 말았단다. CIA의 짓이었어. 이 사고로 CIA의 타겟인 시라노와 하드윅뿐만 아니라 대니와 하드윅의 딸 벨라 등 죄 없는 이들도 죽고 말았단다. 이 사건으로 매기를 은퇴를 하고 메인 주 시골 마을에 정착을 했던 거야. 매기는 참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었구나.

 

4.

다시 현재로 돌아와 보자. 비앙카가 죽고 나서 얼마 후 이번에는 매기를 직접 노린 암살 시도가 있었어. 다행히 매기도 대응 사격을 했고, 범인도 도망 갔단다. 경찰관 조는 다시 매기를 조사했어. 총 쏘는 것이 아주 능숙한 할머니 매기를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당연한 거지. 뿐만 아니라 할머니의 친구들도 탄피만 보고도 무슨 총인지 아는 것도 이상하고조는 이 때부터 이들의 전직을 의심했을 거야.

범인이 안 잡혀서 일단 매기는 숨어 지내기로 했단다. 시라노 작전에 참여했던 또 다른 요원인 개빈을 만나러 방콕에 갔어. 개빈은 루게릭 병으로 투병 중이었어. 개빈도 이야기하기를 하드윅이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어. 그 근거로 최근 그의 계좌에서 돈이 인출되었다고 했어. 매기는 하드윅의 마지막 애인이었던 실비아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밀라노에 갔단다. 다이애나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그곳에서 매기는 다이애나를 만났단다. 매기와 다이애나가 그곳으로 올 곳을 예상을 했던지 그들에게 다시 총격이 가해졌고, 총격 중에 다이애나는 죽고 말았단다. 그런데 그 일당을 이끈 이는 다름 아닌 벨라였단다. 그 비행기에 벨라가 탄 줄 알았는데, 벨라는 친어머니의 만류로 비행기를 타지 않았던 거야. 벨라는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했던 거야….

그리고 매기와 마주 친 벨라.. 벨라는 어렸을 때 엄마와 헤어져 있을 때 매기에게 의지를 많이 했었단다. 벨라는 끝내 매기까지는 죽일 수 없었어. 인지상정. 벨라와 헤어진 매기는 다시 메인 주로 돌아왔단다. 그렇게 소설은 끝이 났단다.

지은이 테스 게리첸의 글들은 여전히 재미있구나. 그리고 황당해하는 경찰관 조의 모습에 유머 코드도 더해졌구나. 전에 읽었던 <외과의사>는 지은이의 전직의 장점을 살렸다면 이번에 읽은 <스파이 코스트>는 순수한 필력으로 끝장내준 것 같구나. 이 정도 이야기라면 다음 작품을 기대해 볼만하구나. 그런데 어렴풋이아빠가 오래 전에 테스 게리첸의 <소멸>이란 책을 산 기억이 있구나. 도서 정가인하도서로 분류되어 싼 사격에 판매되고 있어서 샀었는데, 언젠가 읽겠지 하면서 지금껏 읽지 않았구나.. 그런데 그 책이 어디에 있을까? 나중에 책장 정리하다가 보게 되면 읽어봐야겠구나. ,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그녀는 한때 멋진 황금빛의 소녀였다.

책의 끝 문장: “그리고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어디에서 우리를 찾아야 하는지도 이제 잘 알고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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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2-25 2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책 보고싶던데...별 5개를 보니 꼭 봐야하겠네요. ^^ 하지만 리뷰는 흐린 눈으로 읽습니다. ㅎㅎ

bookholic 2025-02-26 16:32   좋아요 1 | URL
ㅎㅎ 잘하셨습니다~~
제가 기억력 보조수단으로 줄거리를 주저리 적어놓아서..^^
바람돌이 님도 취향에 맞길 바랍니다^^
 














(42)

행복하기 위해선 콜센터에서 일하지 않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것이 내가 첫 근무를 마치고 내린 결론이었다. 출발은 무난했다. 다음 날 아침, 이 상태로 과연 전화를 받을 수 있을까 불안한 마음을 안고 정식 출근길에 올랐다. 내 심정을 대변해 주듯 새벽부터 두툼한 봄 안개가 도시를 뒤덮었다. 온 세상이 뿌옇고 축축한 것이 마치 서울이 쌀뜨물 아래 잠긴 것 같았다. 양돈장을 그만둔 이후로 이렇게 아침 일찍 지하철을 타로 나선 게 얼마 만인가. 그나 저나 지하철의 흡입력은 세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었다. 진공청소기가 먼지를 빨아들이듯이 전철역 인근의 직장인들을 무서운 기세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55)

상대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이럴 때가 가장 두려운 순간이다. 극도로 화가 난 고객이 갑자기 조용해졌을 때, 이런 상황은 상담사에게 이런 이미지로 다가온다. 두 사람이 격렬하게 말다툼을 벌인다. 침이 튀고 삿대질이 오간다. 분노에 눈이 뒤집힌 이가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상식적인 방식으로는 더 이상 자신이 느낀 좌절감을 담아낼 수가 없다. 뒷일은 상관없다. 어떻게든 이 분노를 해소해야만 한다. , 망치, 포트, 연필, 젓가락 무엇이든 상대를 한 방에 보내버릴 무기를 찾는다. 이 순간의 정적은 수화기 너머의 고객이 상담사에게 휘두를 언어적 흉기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다는 뜻이다.

 

(82)

텅 빈 집에 홀로 있는 동안에도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소프트폰을 대기 상태에 전화를 기다리고 있을 때처럼. 그러다가 전화벨이 울리거나 메시지 수신음이 울리면 매번 깜짝깜짝 놀란다. 내 핸드폰으로 연락을 할 사람은 가족이나 친구밖에 없는 걸 아는데도 그렇다. 시간이 지나면 적응이 될 줄 알았는데 아니다. 매일 첫날 근무를 끝마쳤을 때처럼 똑같이 불안하고 똑같이 짜증 난다. 불안과 짜증이 모든 사람을 대하는 일반적인 상태가 된다. 일을 그만둔 후에도 완전히 예전처럼 되돌아가지는 못한다. 이 일은 사람을 뿌리까지 바꿔놓는다. 전쟁터가 젊은이들을 바꿔놓듯이.

 

(139)

첫날 근무가 끝나고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는 막장에 다다랐다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막장은 본래 탄광에서 석탄층이 드러난 갱도의 끝을 가리키는 단어다. 암벽의 석탄을 떼어내야 하는 막장에서의 작업이 탄광에서도 가장 고된 일인 데다 그 위치도 가장 깊숙한 지점이다. 여기에 사회적인 추락의 맥락까지 더해져서 갈 데까지 가버렸다라는 의미로 굳어진 것이다. 까대기의 면면이 탄광의 막장을 떠올리게 한다. 한여름의 컨테이너는 그 자체로 굴이다. 철판은 한낮의 열기를 그대로 머금고 있어 자정이 넘어 문을 열었을 때도 후텁지근한 열기가 가득 차 있다. 내부엔 바람도 빛도 들지 않고 레인 끝에 달린 희미한 전등 빛에 기대 작업한다.

 

(177)

나 처음 일한 날이었는데 새벽 내내 땀 뻘뻘 흘리면서 일하다가 다 끝나고 밖에 나왔는데어떤 건지 알죠? 진짜 그지꼴로 간신히 서 있을 힘만 남아서근데 나가니까 햇빛이 막 쏙아지는데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은 게, 와아아 세상이 어떻게 그렇게 달라 보이냐. 오기 전엔 나도 걱정 많이 했어요. 20대 때 노가다 좀 뛰었지만 그거야 30년 전 일이고 젊은 애들도 골골댄다는데 내가 할 수 있을까, 처음엔 좀 버벅댔지만 끝날 때쯤 되니까 할 수 있겠더라고. 나는 거뜬히 하는데 등치 막 이따만 한 노랭이들이 힘들다면서 집에 가는 거 보니까 기분도 좋고 흐흐.

그러면서 밖에 나왔는데노오오오란 해가 떠 있는 걸 딱 보고 있는데그럴 뭐랄고 할까, 뭐라고 하면 좋을까나 살 수 있겠다충분히 살 수 있겠다. 그런 기분이 들어요. 그게 참 희한해. 밤새 술 퍼마시다가 해 뜨는 걸 볼 때는 세상에 그렇게 비참한 게 없는데, 내가 너무 별 볼 일 없고 쓰레기 같고 이렇게 또 하루 사느니 그냥 콱 뒤져버리는 게 낫겠다 싶은데, 알 끝나고 해 뜨는 걸 보면 나도 뭔지 모르겠는데, 보고 있으면 그냥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더라고.

 

(190)

근무 첫날은 어디서나 정신이 없는 법이지만 식당 근무 경력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주방에서의 첫날은 어느 정도는 생과 사를 오가는 경험이다. 칼질과 불길이 난무하는 가운데 한쪽에선 기름이 끓고 바닥은 미끈거리고 어디 하나 긴장을 풀 구석이 없었다. 똑같이 요리하는 공간이라고 해도 가정 주방과 업소 주방은 엄연히 달랐다. 업소 주방에서는 오감이 극대화됐다. 이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닌 게 각종 재료며 양념을 항상 대용량으로 사용하고 칼은 집에서 쓰는 것보다 훨씬 큼지막하고 화구의 불길은 가정용보다 두세 배는 강력했다. 사방이 맵고 뜨겁고 날카로운 것투성인 데 깔끔하게 정리한 서커스 차력 쇼의 한 귀퉁이 같았다.

 

(195)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화상을 입힐 수 있는 눈빛이 있다면 신입 직원이 요리하는 꼴을 쳐다보는 주방장의 시선이 그럴 듯싶다. 느닷없이 살기가 느껴져 뒤를 돌아보니 조윤진 씨가, 눈에 조금만 더 힘을 줬다간 관통상까지 남길 법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사극에서 성난 왕이 주변의 신하들을 물리칠 때 사용하는 손짓을 해 보이며 주방으로 들어섰다. 전문가가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절망감과 즐거움을 동시에 안겨주는 경험이다. 불과 칼을 이토록 자유자재로 다룬다는 점에서 요리사들은 현대 사회에서 간달프에 가장 가까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201)

당장 먹어도 아무 문제 없는 음식을 버릴 때는 뭔가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는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한 해에도 수백만 명이 굶어 죽는 시대에 이렇게 멀쩡한 음식을 필요 이상으로 만들어서 버리는 건 범죄다. 하지만 뷔페라는 공간이 그렇다. 마감되기 전까지 빈 접시가 있어서는 안 된다. 이래저래 낭비할 수밖에 없다. 만약 현명한 소비가 불가능에 가까울 만큼 어려운 일이라면 최소한 상식적으로 낭비할 수는 없을까? 주방에서 일하기 부적합한 사람은 위생 관념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멀쩡한 음식이 버려지는 꼴을 두고 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베이비부머들을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정신이상으로 몰고 갈 만큼 고문하고 싶다면 뷔페 짬밥을 처리하는 알바를시켜보라.

 

(226-227)

나는 민재를 보면서 질량 불변의 법칙이야말로 만고 불변의 진리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얘는 뇌세포 만드는 데 쓸 단백질을 끌어다가 죄다 가슴근육으로 바꾼 게 분명했다. 그는 말도 거칠고 체격도 우람해서인지 선준 씨가 한 번도 시비를 걸지 않은 유일한 주방 직원이었다. 나는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떠올리며 선준이와 민재가 서로 치고받고 싸우다 둘다 사이좋게 동반으로 그만두는 날을 고대했지만 놀랍게도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했다. 사이코는 사이코까리 통한다는 슬픈 진실이 다시 한번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별수 없이 그간의 선례를 따라 부검 시 검출되지 않는 독약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는데, 안타깝게도 민재는 이미 내가 만든 요리를 입에 대지 못할 음식으로 평가했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랑스러운 물질을 손에 넣는다 하더라도 사용할 기회는 없었을 거다. (그나저나 그런 마법 같은 약이 정말 존재하긴 하는 거예요? 화학자 여러분, 독약이 필요한 선량한 사람들 괴롭히지 말고 대답해 주세요!)

 

(244)

너는 내가 이렇게 말하면 기분 나쁠지 모르겠지만 알바는 정말 몰라. 안 겪어본 사람은 알 수가 없어. 내가 <동물의 세계> 이런 거 보는 거 좋아하거든. 거기 보면 아프리카 초원에서 표범이 토끼나 새끼 가젤 같은 거 잡으려고 전속력으로 막 달려가. 그러면 조그만 동물이 눈에 핏발 세우고 도망을 친다고. 목숨을 걸고 도망가. 내가 그걸 보고 있으면 무슨 생각이 드는 줄 알아? 쟤네들은 내 마음 알 거라고. 온 세상에 딱 쟤네들만 내 기분 이해할 거라고. 장사하는 사람 심정이 딱 그거야. 사자가 등 뒤에서 입 벌리고 쫓아오는데 어떻게든 안 잡히려고 도망치는 거. 인건비에 배달비에 재료비에 대출에 적자에 어? ? 하다가 따라잡히면 그대로 끝장나는 거거든. 그러니까 똥구멍에서 피가 나게 뛰어다니는 거지. 그나마 야생은 편한 거야. 사자는 한 5분 따라오다 안 된다 싶으면 포기라도 하지. 우리는 안 끝나. 혀가 입 밖으로 빠져나와서 너덜거릴 정도로 도망을 치는데 그게 안 끝나. 계속 쫓아오고 계속 도망가. 그렇게 19년을 살아봐. 식당 하는 게 그런 거야.”

 

(259)

보면은 직장에서 젊은 사람들 힘센 남자들, 이런 사람들 뽑으려고 하잖아요? 그게 뭘 모르는 거예요. 그런 젊은 애들, 덩치 좋은 남자들은 언제든지 내키지 않으면 그만둬요. 우리 남편만 해도 누구랑 싸웠다고 누가 기분 나쁘게 했다고 그만둔 게 몇 번째예요. 그치만 결혼해서 애까지 있는 여자들은 가게가 망하기 전까진 절대 안 그만둬요. 그런 사람들은 정말 필사적이에요. 절대 중간에 일을 그만두지 않는 사람들은 애 있는 엄마들이에요. 직원들이 자꾸 들락날락해서 골치가 아픈 사람은 애 키우는 엄마들만 뽑아야 돼요.”

 

(326)

반면에 퇴근길은 순간순간을 음미해야 하는 정찬이다. 건물을 빠져나오는 순간 피부에 닿는 서늘한 공기, 거리에서 지나쳐 가는 사람들의 얼굴, 뿌옇게 저물어가는 햇빛, 교복 입은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하나하나를 최고급 코스 요리처럼 색, 소리, 냄새 모두 온전하게 맛보고 싶어진다. 서울 사람들이 하루 중 유일하게 인류애를 잠시 회복하는 시기가 이때다. 회사를 빠져나와서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서울의 모든 것이 조금씩 덜 구리고 덜 괴상하게 느껴진다. 가래와 담배꽁초는 조금 줄어든 것 같고 음식 쓰레기를 쪼아대는 비둘기는 조금 덜 흉측해 보인다. 때마침 거리는 언제부턴가 가로수로 각광받기 시작한 벚나무 때문에 홍단 났다라고 표현해야 할 것 같은 풍경의 연속이었다.

 

(399)

문제는 돈이란 존재는, 얻기 위해 평생을 쏟아부은 다음에야 자신이 그들 삶의 정답이었는지 아닌지를 알려준다는 거다. 다시 말해 삶의 가능성이 말기 위암 아니면 고독사 중 하나만 남았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돈이었는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다. 물론 열심히 돈을 모으지 않은 사람 역시 말기 암, 고독사와 마주한다. 결국 어느 쪽이든 그 순간을 피할 수 없다면 청춘의 굴라그마다 가득했던 외침에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응답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특권이라고 한승태는 생각했다. 단순히 글을 쓰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 글을 쓸 줄 안다는 것, 스스로를 온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다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이 생각을 어떻게 조리 있게 아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결국 대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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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만사 답사기 - 유홍준 잡문집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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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요즘 컨디션이 안 좋아서, 독서 편지가 많이 밀려 있구나. 오늘도 컨디션이 썩 좋지는 않아. 그런데다 윤석열 탄핵 선고도 아직이고, 그들은 여전히 거짓말만 일삼는구나. 그것이라도 빨리 해결이 되어야 할 텐데 말이야. 오늘도 컨디션이 안 좋아서 최대한 요점만 간단히 쓰도록 해야겠다.

오늘 소개할 책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 님의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라는 책이란다. 유홍준 님의 책들은 주제가 뚜렷하단다. 대부분 우리나라 문화 유산에 관한 책이지. 그렇다 보니 일상 생활을 하면서 쓴 에세이들은 책으로 낼 생각을 안 했대. 그러다가 이번에 출판사의 제의도 있고 해서 그런 글들을 모아서 낸 책이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란다. 책 제목을 참 지은 것 같구나. <나의 ~ 답사기>는 유홍준 님의 상징적인 제목이잖니. 지은이를 보지 않아도 누가 봐도 유홍준 님의 책이라는 것을 알 거야.

첫 번째 글은 마지막 담배를 피우면서 적은 글인데, 금연이 어렵다고들 하지만 이번에는 꼭 성공하시길 바란다. 새해 들어 많은 계획들을 세우는데 흡연가들이 꼭 하는 계획이 담배를 끊는 것이지만 그것이 그리 쉽지 않은 것 같구나. 매년 년초마다 금연 계획을 하는 이들도 있으니... 그런데 역설적으로 마크 트웨인은 담배 끊는 일이 아주 쉽다고 했는데, 그 이야기를 들어보니 미소가 지어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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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금연은 정말 힘들다. 마크 트웨인은 역설적으로 말했다. “담배를 끊는 일은 아주 쉬운 일이다. 나는 백 번도 넘게 끊었으니까.” 20년 전 경험에 의하건대 금연은 매정하게 결별하는 의지밖에 없다. 금연 뒤에 찾아올 기쁨을 기대하며 끊어야 한다. 이제는 아침마다 칵칵거리지 않게 되고 양치질할 때 나오는 조갯살만 한 가래도 없어질 것이다. 방에선 곰팡내가 사라질 것이고, 얼굴엔 살이 뽀송하게 오르며 피부도 맑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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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금은 우측 통행이 상식이 되었지만, 아빠가 어렸을 때만 해도 걷는 것은 좌측 통행을 해야 한다고 했어. 자동차는 우측 통행, 사람은 좌측 통행... 그렇게 자동차와 사람의 통행 방향이 달랐던 이유는, 우리나라의 굴곡지고 아픈 역사와 관련이 있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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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78)

그래서 1905년에 발표한 대한제국 규정은 우측통행을 명시했다. 그런데 기찻길이 좌측통행으로 들어오면서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일제가 강점하면서 조선총독부는 아예 1921년 도로 규칙을 일본과 똑같이 좌측통행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지금은 모두 철거된 서울 시내 전차들도 좌측으로 달렸다. 그때는 기차, 자동차, 사람 모두 영국, 일본과 마찬가지로 좌측통행의 나라였던 것이다.

그러나 8.15 해방이 되고 미군이 들어오면서 미국식 우측통행 자동차가 거리를 누비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나라의 찻길은 우측통행이 되었다. 미군정은 1946년 차량 우측통행을 규칙으로 명시하였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기존의 습관대로 좌측통행을 하고 있었다. 더욱이 1962년 제정된 도로교통법이보도와 차도의 구분이 없는 도로에서는 좌측보행이 원칙이라고 규정하면서 좌측보행이 굳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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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록된 조선왕조실록... 그렇게 오랜 왕조의 전체를 기록으로 남긴 왕조는 전무후무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 그리고 그 원본이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나라처럼 외세 침략이 많았던 나라에서 원본이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란다. 선조들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그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긴 쉽지 않았을 거야.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이유를 보니, 국뽕이 절로 생기는 것 같구나. 이런 것은 정말 자랑스러워할 만하구나.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소프트파워가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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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1. <조선왕조실록>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천재지변 등 다방면의 자료를 수록한 종합 사료로서 가치가 높다.

2. 중국, 일본, 베트남 등 실록이 있는 나라 중 편찬된 실록은 후손 왕이 보지 못한다는 원칙을 지킨 나라는 조선왕조뿐이다.

3. 위 원칙의 고수로 <조선왕조실록>은 기록에 대한 왜곡이나 고의적인 탈락이 없어 세계 어느 나라 실록보다 내용 면에서 충실하다. 책 권수로 치면 중국 명나라 실록이 2,900권으로 더 많으나 실제 지면 글자 수는 1,600만자 정도로, 4,965만자인 <조선왕조실록> 3분의 1에 불과하다.

4. 중국, 일본, 베트남 등의 다른 나라 실록들은 대부분 원본이 소실되었고 근현대에 만들어진 사본들만 남아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왕조 시기의 원본이 그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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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은 원본과 번역본을 인터넷에서 자유롭게 볼 수 있다고 하는구나. 해당 사이트를 들어가 보니 직역을 해 놓아 재미있게 읽히지는 않을 것 같구나. 재미있게 편집된 책이나 만화 등으로 한번 쭉 읽어보면 좋겠구나.

...

이 책에는 유홍준 님의 지인에 관한 이야기들도 실려 있단다. 주로 돌아가신 다음 그들을 추모하면서 적은 글들이었어. 유홍준 님의 주례를 서 주신 리영희 선생님, 평생 민주화 운동을 하신 백기완 선생님, 억울한 옥살이를 하면서도 삶을 사랑하신 신영복 선생님, 그 외에 백남준, 홍세화, 이애주, 김민기 등 여러 분들을 추모하는 글들을 실었단다. 그 사람을 보려면 그 사람의 친구를 보라는 말이 있는데, 유홍준 님과 어울리신 분들을 보니 유홍준 님은 참 성공하신 분인 것 같구나. 여러 분들의 이야기 중에, 신영복 님이 남기신 말이 좋아서 발췌해 보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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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

<더불어 숲>은 신영복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보름 전에 쓴 작품이다. 이 마지막 작품은 대작인 데다 획에 흔들림이 없이 전혀 절필 같지 않고 오히려 이제까지 당신이 살아온 삶과 사상과 예술이 이 한 작품에 담긴 것 같은 웅혼함이 있다. 더불어 숲이라 쓴 네 글자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다.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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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이 정도로 짧게 마친다. 유홍준 님은 그래도 뭐니뭐니 해도 문화유산에 대한 글을 쓰실 때 글이 살아있고 신명 나는 것 같더구나. 이 책보다는 유홍준 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읽어봤으면 좋겠구나. 그런데 기행문이라는 시의성을 띠기도 해서 초창기 책들은 너희들이 이해 안 가는 부분도 있을 것 같지만, 우리나라 문화 유산을 이해하는데는 이만한 책이 없으리라 생각한다. 유홍준 님은 앞으로 국토박물관 순례를 두세 권 더 쓰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를 마무리하신다고 하는구나. 일생의 큰 목표를 다 이루실 때까지 건강하실 바라고, 그 이후에는 방송이나 유튜브를 통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계속 들려주셨으면 좋겠구나.

이상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새해로 들어서면서 나도 담배를 끊었다.

책의 끝 문장: 이제 <국토박물관 순례>를 두세 권 더 쓰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대장정을 마치려고 하니 이번에는 진짜 막을 내리게 될 것이다.



각 나라의 백자에는 자연스럽게 그 민족의 미적 정서가 반영되어 있다. 일찍이 일본의 민예학자 야나기 무네요시는 한중일 동양 3국의 도자기를 조형의 3요소인 선, 색, 형태와 비교하면서 중국은 형태미가 강하고, 일본은 색채가 밝고, 한국은 선이 아름답다고 했다. 때문에 중국 도자기는 완벽한 형태미를 강조하고, 일본 도자기는 화려한 색채미를 보여주는 데 반하여 한국 도자기는 부드러운 선맛을 자랑한다고 했다. 그래서 도자기 애호가들은 중국 도자기는 멀리 높은 선반에 올려놓고 보고 싶어하고, 일본 도자기는 옆에 가까이 놓고 사용하고 싶어지는데, 한국 도자기는 어루만지게 싶게 한다는 것이다. 그 따뜻한 친숙감과 사랑스러운 정겨움이 조선백자의 특질이다. - P82

미족미술협의회(민미협)는 이 그림을 1989년도 달력에 실었다. 그런데 이를 이용하여 부채를 만든 인천 지역의 한 재야청년단체를 수사하던 서울시경 대공과에서 느닷없이 신학철 화백의 집을 압수수색하고 신 화백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연행하였다. 경찰은 어이없게도 이 그림이 북한을 찬양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해석인즉, 그림 아래쪽에서는 남한 사람들이 힘겹게 노동을 하고 있고, 위쪽에서는 북한 사람들이 푸짐한 밥그릇을 앞에 놓고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그림을 한반도 지형으로 보면 초가집은 평양의 생가를 암시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식으로 그림을 해석할 수 있다는 경찰의 대공적 상상력이 어처구니없음을 넘어 경이롭기만 했다. 미술비평엔 인상비평, 양식비평, 재단비평 등이 있는데 가히 ‘공안비평’이라 할 장르가 나타난 것이다.
- P176

그런데 <실천문학> 남도 답사에서 황석영 형은 3시간 만에 마이크를 내려놓고 내가 8시간 마이크를 잡으면서 나도 ‘구라’의 반열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 아마도 윤재걸 시인이 한 말 같은데 백기완 선생이 라디오 시대 이야기꾼, 황석영이 흑백텔레비전 시대 이야기꾼으로 통했는데 유홍준이 컬러텔레비전 시대 이야기꾼으로 등장했다고 해서 모두 박수 치며 웃었다. 이후 방동규 선생은 끝까지 재야의 라디오로 남고 내가 백기와, 황석영과 함께 ‘조선의 3대 구라’로 꼽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와 별도로 도올 김용옥의 등장 이후 나는 이어령, 김용옥과 함께 세칭 ‘3대 교육 방송’으로 불리기도 했다. - P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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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인류 역사상 개인이 가장 많은 지식을 알고 있는 시대, 다만 문제는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공허하다. 가슴에 구멍이 난 것처럼 모든 것이 빠져나간다. 그럴수록 스스로를 의심한다. 아는 것이 부족해서인가? 머릿속에 정보와 지식을 더 쏟아 넣어 가득 채우면 나아지려나? 채워보고 채워보지만 그것으로는 채워지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는 그 답 역시 이미 알고 있다. 우리가 머리만 키웠기 때문임을 말이다.

 

(11)

그렇다면 깨달음은 어떠한가? 지금은 깨달음이 뭔가 싶은 마음이 더 클 테지만 일단 처음 듣는 단어는 아니니 대략적인 느낌을 말해보자. 당신에게 깨달음은 어디에 가까운가? 그것은 지식의 영역인가, 아니면 지혜의 영역인가? 모든 것이 그러하듯 깨달음도 이 두 가지 측면이 혼재해 있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느낀다. 어쩐지 깨달음은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실천적인 지혜일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지식을 통해 깨달음이 무엇인지 언어로 정리하는 과정을 거친다면 그 경계가 명확해지고 그에 따라 깨달음의 윤곽을 더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깨달음의 실제 의미를 깊이 이해할 수는 없다. 실천을 통해 그것의 실제 의미가 체화될 때에야 우리는 깨달음에 대한 지혜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9)

사실 이 둘은 다른 사람이 아니다. 이들은 모두 당신 영혼의 두 가지 모습이다. 모든 개인은 한 가지 빛깔의 삶을 살지 않는다. 어느 때 우리는 지극히 세속적인 사람이었고, 다른 때에는 진리를 향한 투사였다. 어느 때에는 세상이 명료했고, 다른 때에는 혼란스러웠다. 과거의 당신 영혼은 치기 어린 젊은이의 영혼이었고, 미래의 당신 영혼은 원숙한 노년의 영혼일 것이다.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오늘의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지금 당신의 영혼은 어떤 빛깔을 하고 있는가?

 

(49-50)

유물론과 과학이 정신적인 요소를 완벽히 배제함으로써 얻은 것은 무모순성이다. 모든 신념이 제한적인 영역에서만 언제나 무모순적일 수 있듯. 경험의 의미를 제한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유물론과 과학은 물질의 울타리 안에서 완벽히 무모순적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대중으로 하여금 유물론과 화학이 하나의 이념이 아니라 세계 전체를 설명하는 객관적인 진리라고 상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실상은 세계를 축소했다고 할 수 있다. 무모순성의 영광은 정신과 관련된 모든 가치를 세상 밖으로 쫓아냄으로써 얻게 된 반쪽짜리 승리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얻게 된 승리는 오늘날의 학계와 대중의 유몰론 편향 패러다임으로 작동하고 있다.

 

(94)

일상의 번잡함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을 반복하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한다. 자신이 그 생각 자체가 되어 그저 생각의 반복 위를 흘러가고 있을 뿐인데도 말이다. 혹은 어쩐지 스스로 생각이 너무 많은 것 같다고 느낀다 해도 그것이 잘못임을 알지 못한다. 원래 사람들은 생각이 많은데 나는 좀 더 많은가 보다 정도로 여기고 그 생각의 반복 속에서 평생을 살아간다. 또 다른 이는 생각의 과다와 반복을 즐기기까지 한다. 그는 그것 자체에 빠져든다. 이처럼 오늘날의 사람들은 생각의 반복이 너무도 익숙하기에 그것이 고통이라는 것 자체를 모른다. 생각의 반복이 멈추는 경험을 한 사람만이 그것이 고통이었음을 알 수 있다.

 

(119)

마음에서 어떤 원인에 의해 하나의 상념이 일어서면 그 즉시 마음은 그것을 끌어당기거나 밀어내려는 이원적 작용을 한다. 이때의 끌어당김과 밀어냄은 개인에게 매력과 혐오의 강렬한 감점으로 체험된다. 그리고 이 강렬한 감정은 상념을 강화하고 사유를 반복하게 함으로써 결국 그 상념이 마음 안의 하나의 존재자로 일어서게 한다. 나의 마음에 드러나는 모든 존재는 끌어당김과 밀어냄의 작용에 의해 생겨나고 눌러앉아 있는 것이다.

 

(124)

명상이라는 단어도 그러하다. 사전적으로는 어두울 명()에 생각 상()으로 어두운 가운데 생각함을 의미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어떤 이들은 명상이 종교적 색채가 강하다고 생각해 명상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인 맥락에서 사용한다. 다른 이들은 똑같이 명상이 종교적 색채가 강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기에 명상이라는 단어를 긍정적인 맥락에서 사용한다. 어떤 이는 명상을 실용적인 측면에서 이해해서 명상이라는 단어를 긍정적으로 사용한다. 반면 다른 이는 같은 이유에서 부정적으로 사용한다. 어떤 이는 명상이라는 단어를 진리와 엮어 사용하기도 하고, 다른 이는 현실 도피적인 무엇이라는 전제에서 사용하며, 또 다른 이는 오늘날의 힐링 문화가 만들어낸 상업화된 서비스의 일환이라는 측면에서 사용한다.

 

(138)

어떤가? 당신은 아, 이것을 말하는 것이구나, 하고 그것을 움켜쥐었는가? 우리는 나에게 없는 어떤 멀고 험난한 세계에서 진리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는 나에게 없지만 노력을 통해 얻게 되는 어떤 경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나에게 있었다. 나에게 속하고 나의 바탕이 되는 것. 이것이 자아의 본질이고, 세계를 일으키는 배경이며, 모든 존재의 근원이다. 바탕과 배경이 그러하듯 있다고 말할 수 없고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고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 사유와 논리로는 그 앞까지 갈 수 있지만 도달할 수 없고, 그 끝에서의 단 한 번의 체험으로 정확히 알게 되는 것. 이것이 내면의 근원이자 의식의 실체이며 본질적인 자아의 모습이다. 이것이 우리가 찾던 것이다.

 

(164)

우리는 침묵을 통해 알게 된다. 이 텅 비어 있음은 크기가 없고 경계가 없다.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정신적인 것이 아니다.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자의 배경이다. 그렇기에 모든 생명 안에 깃든 의식은 몸의 크기와는 무관하게 의식의 크기를 말할 수 없다. 작은 미물의 내면세계는 좁고, 큰 생물의 내면세계는 넓은가? 그렇지 않다. 그 반대는 어떤가? 개미는 상대적으로 작으니 외부세계가 크다 느끼고, 혹등고래는 상대적으로 크니 외부세계가 작다고 느끼는가? 그렇지는 않다. 의식은 몸의 크기나 신체 능력, 뇌의 크기, 지능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199)

이것이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의 일상과 나의 감정과 나의 선택과 나의 모든 것이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제 그 이유를 안다. 끌어당김과 밀어냄 때문이다. 이것이 나의 감정과 상념과 느낌과 욕망에 연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그 사랑은 커져간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행동을 좋아하고 그 좋아함은 커져간다. 나는 내가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고 그 미움을 키워간다. 나는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싫어하고 그 싫어함을 키워간다. 영원한 것은 없기에 나의 경향과 쏠림도 조금씩 변해갈 테지만, 나는 나의 행동 양식과 내면의 상태를 섬세히 들여다봄으로써 유의미한 시간의 범위 안에서 과거와 미래의 나를 가늠해볼 수 있다.

 

(250)

세속 안에서 세속적인 마음을 줄여간다면, 현실을 살아가며 동시에 현실에 대한 마음 씀을 줄여간다면 나의 본질은 점차 선명해질 것이다. 내면을 여행하는 자. 이것이 나의 본질이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여행지에서 가져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추억이 전부인 것처럼, 내가 이 삶에서 가져갈 수 있는 것은 부와 성공이 아니다.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의식에 남을 흔적뿐이다. 그 흔적은 우리가 알고 있는 뇌를 기반으로 하는 물질적 기억과는 다를 것이기에 그것이 얼마나 구체적일지, 어떤 방식으로 기록되고 회상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은 상처의 흔적 같은 단편적 인상일 수도 있고 혹은 신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우주의 모든 것을 기록한다는 아카식 레코드(Akashic Records) 같은 것일 수도 있다.

 

(281)

지혜로운 부모를 상상해보자. 모든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듯 지혜로운 부모도 자녀의 안녕을 바란다. 하지만 지혜로운 부모는 그들의 자녀가 안락과 편안함보다는 적절한 위기와 실패에 대면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것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자녀가 스스로 어린아이의 모습을 깨뜨리고 어른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자아의 본질도 그러하다. 나의 깊은 의식, 수많은 삶을 살아내고 또다시 수많은 삶을 이어나갈 자, 세상을 스스로 일으키고 그것을 관조하는 자도 그러하다. 그 본질은 어른 되고자 할 것이다. 신의 어른이, 모든 의식적 존재의 어른이 되고자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 모든 신체가 아이의 옷처럼 보이게 할 만큼의 깊은 성정을 원할 것이다. 그때서야 자아의 본질은 어른답게 세상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생과 사를 관통하는 깊은 의식의 관점에서 배움과 사랑은 삶의 이유로서 부족함이 없다.

 

(339)

천천히 눈을 뜬다. 충분히 쉬었다. 침묵은 오래 지속되었다. 세상은 아직 적막하고 창문에 맺힌 물방울은 아침 햇살에 반짝인다. 시계를 본다. 이제 사랑하는 이들을 깨우고 그들을 챙긴 후 출근할 시간이다. 어제는 나도 모르게 욕심을 부리고 화를 내었으며 어리석게 행동하지 않았던가. 오늘은 조금은 줄이리라. 심판이나 죄책감 때문이 아니다. 보상이나 인정 때문이 아니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내가 바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이 세계를 일으킨 것도 나고 굳이 이 신체로 이 세계를 미워하지 않으리라. 이제 시간이 되었다. 몸을 일으켜 세상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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