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인류 역사상 개인이 가장 많은 지식을 알고 있는 시대, 다만
문제는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공허하다. 가슴에
구멍이 난 것처럼 모든 것이 빠져나간다. 그럴수록 스스로를 의심한다.
아는 것이 부족해서인가? 머릿속에 정보와 지식을 더 쏟아 넣어 가득 채우면 나아지려나? 채워보고 채워보지만 그것으로는 채워지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는 그 답 역시 이미 알고 있다. 우리가 머리만 키웠기 때문임을
말이다.
(11)
그렇다면 깨달음은 어떠한가? 지금은 깨달음이 뭔가
싶은 마음이 더 클 테지만 일단 처음 듣는 단어는 아니니 대략적인 느낌을 말해보자. 당신에게 깨달음은
어디에 가까운가? 그것은 지식의 영역인가, 아니면 지혜의
영역인가? 모든 것이 그러하듯 깨달음도 이 두 가지 측면이 혼재해 있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느낀다. 어쩐지 깨달음은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실천적인 지혜일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지식을 통해 깨달음이 무엇인지 언어로 정리하는 과정을 거친다면
그 경계가 명확해지고 그에 따라 깨달음의 윤곽을 더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깨달음의 실제 의미를 깊이 이해할 수는 없다. 실천을 통해 그것의 실제 의미가 체화될 때에야 우리는
깨달음에 대한 지혜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9)
사실 이 둘은 다른 사람이 아니다. 이들은 모두
당신 영혼의 두 가지 모습이다. 모든 개인은 한 가지 빛깔의 삶을 살지 않는다. 어느 때 우리는 지극히 세속적인 사람이었고, 다른 때에는 진리를
향한 투사였다. 어느 때에는 세상이 명료했고, 다른 때에는
혼란스러웠다. 과거의 당신 영혼은 치기 어린 젊은이의 영혼이었고, 미래의
당신 영혼은 원숙한 노년의 영혼일 것이다.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오늘의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지금 당신의 영혼은 어떤 빛깔을 하고 있는가?
(49-50)
유물론과 과학이 정신적인 요소를 완벽히 배제함으로써 얻은 것은 무모순성이다. 모든 신념이 제한적인 영역에서만 언제나 무모순적일 수 있듯. 경험의
의미를 제한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유물론과 과학은 물질의 울타리 안에서 완벽히 무모순적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대중으로 하여금 유물론과 화학이 하나의 이념이 아니라 세계 전체를 설명하는 객관적인 진리라고 상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실상은 세계를 축소했다고 할 수 있다. 무모순성의 영광은 정신과 관련된 모든 가치를
세상 밖으로 쫓아냄으로써 얻게 된 반쪽짜리 승리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얻게 된 승리는 오늘날의
학계와 대중의 유몰론 편향 패러다임으로 작동하고 있다.
(94)
일상의 번잡함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을 반복하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한다. 자신이 그 생각 자체가 되어 그저 생각의 반복 위를 흘러가고 있을 뿐인데도 말이다. 혹은 어쩐지 스스로 생각이 너무 많은 것 같다고 느낀다 해도 그것이 잘못임을 알지 못한다. 원래 사람들은 생각이 많은데 나는 좀 더 많은가 보다 정도로 여기고 그 생각의 반복 속에서 평생을 살아간다. 또 다른 이는 생각의 과다와 반복을 즐기기까지 한다. 그는 그것
자체에 빠져든다. 이처럼 오늘날의 사람들은 생각의 반복이 너무도 익숙하기에 그것이 고통이라는 것 자체를
모른다. 생각의 반복이 멈추는 경험을 한 사람만이 그것이 고통이었음을 알 수 있다.
(119)
마음에서 어떤 원인에 의해 하나의 상념이 일어서면 그 즉시 마음은 그것을 끌어당기거나 밀어내려는
이원적 작용을 한다. 이때의 끌어당김과 밀어냄은 개인에게 매력과 혐오의 강렬한 감점으로 체험된다. 그리고 이 강렬한 감정은 상념을 강화하고 사유를 반복하게 함으로써 결국 그 상념이 마음 안의 하나의 존재자로
일어서게 한다. 나의 마음에 드러나는 모든 존재는 끌어당김과 밀어냄의 작용에 의해 생겨나고 눌러앉아
있는 것이다.
(124)
명상이라는 단어도 그러하다. 사전적으로는 어두울
명(冥)에 생각 상(想)으로 어두운 가운데 생각함을 의미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어떤 이들은 명상이 종교적 색채가 강하다고 생각해 명상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인 맥락에서 사용한다. 다른
이들은 똑같이 명상이 종교적 색채가 강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기에 명상이라는 단어를 긍정적인 맥락에서 사용한다. 어떤
이는 명상을 실용적인 측면에서 이해해서 명상이라는 단어를 긍정적으로 사용한다. 반면 다른 이는 같은
이유에서 부정적으로 사용한다. 어떤 이는 명상이라는 단어를 진리와 엮어 사용하기도 하고, 다른 이는 현실 도피적인 무엇이라는 전제에서 사용하며, 또 다른
이는 오늘날의 힐링 문화가 만들어낸 상업화된 서비스의 일환이라는 측면에서 사용한다.
(138)
어떤가? 당신은 아, 이것을 말하는 것이구나, 하고 그것을 움켜쥐었는가? 우리는 나에게 없는 어떤 멀고 험난한 세계에서 진리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는 나에게 없지만 노력을 통해 얻게 되는 어떤 경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나에게 있었다. 나에게 속하고 나의 바탕이 되는 것. 이것이
자아의 본질이고, 세계를 일으키는 배경이며, 모든 존재의
근원이다. 바탕과 배경이 그러하듯 있다고 말할 수 없고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고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 사유와
논리로는 그 앞까지 갈 수 있지만 도달할 수 없고, 그 끝에서의 단 한 번의 체험으로 정확히 알게 되는
것. 이것이 내면의 근원이자 의식의 실체이며 본질적인 자아의 모습이다.
이것이 우리가 찾던 것이다.
(164)
우리는 침묵을 통해 알게 된다. 이 텅 비어 있음은
크기가 없고 경계가 없다.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정신적인 것이 아니다.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자의 배경이다. 그렇기에 모든 생명 안에 깃든 의식은 몸의 크기와는
무관하게 의식의 크기를 말할 수 없다. 작은 미물의 내면세계는 좁고,
큰 생물의 내면세계는 넓은가? 그렇지 않다. 그
반대는 어떤가? 개미는 상대적으로 작으니 외부세계가 크다 느끼고, 혹등고래는
상대적으로 크니 외부세계가 작다고 느끼는가? 그렇지는 않다. 의식은
몸의 크기나 신체 능력, 뇌의 크기, 지능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199)
이것이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의 일상과 나의
감정과 나의 선택과 나의 모든 것이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제 그 이유를 안다. 끌어당김과 밀어냄 때문이다. 이것이 나의 감정과 상념과 느낌과 욕망에
연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그 사랑은 커져간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행동을 좋아하고 그 좋아함은 커져간다. 나는
내가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고 그 미움을 키워간다. 나는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싫어하고 그 싫어함을 키워간다. 영원한 것은 없기에 나의 경향과 쏠림도 조금씩 변해갈 테지만, 나는
나의 행동 양식과 내면의 상태를 섬세히 들여다봄으로써 유의미한 시간의 범위 안에서 과거와 미래의 나를 가늠해볼 수 있다.
(250)
세속 안에서 세속적인 마음을 줄여간다면, 현실을
살아가며 동시에 현실에 대한 마음 씀을 줄여간다면 나의 본질은 점차 선명해질 것이다. 내면을 여행하는
자. 이것이 나의 본질이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여행지에서 가져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추억이 전부인 것처럼, 내가
이 삶에서 가져갈 수 있는 것은 부와 성공이 아니다.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의식에 남을 흔적뿐이다. 그 흔적은 우리가 알고 있는 뇌를 기반으로 하는 물질적 기억과는 다를 것이기에 그것이 얼마나 구체적일지, 어떤 방식으로 기록되고 회상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은 상처의
흔적 같은 단편적 인상일 수도 있고 혹은 신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우주의 모든 것을 기록한다는 아카식 레코드(Akashic
Records) 같은 것일 수도 있다.
(281)
지혜로운 부모를 상상해보자. 모든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듯 지혜로운 부모도 자녀의 안녕을 바란다. 하지만 지혜로운 부모는 그들의 자녀가 안락과 편안함보다는
적절한 위기와 실패에 대면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것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자녀가 스스로 어린아이의
모습을 깨뜨리고 어른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자아의 본질도 그러하다. 나의 깊은 의식, 수많은 삶을 살아내고 또다시 수많은 삶을 이어나갈
자, 세상을 스스로 일으키고 그것을 관조하는 자도 그러하다. 그
본질은 어른 되고자 할 것이다. 신의 어른이, 모든 의식적
존재의 어른이 되고자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 모든 신체가 아이의 옷처럼 보이게 할 만큼의 깊은 성정을
원할 것이다. 그때서야 자아의 본질은 어른답게 세상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생과 사를 관통하는 깊은 의식의 관점에서 배움과 사랑은 삶의 이유로서 부족함이 없다.
(339)
천천히 눈을 뜬다. 충분히 쉬었다. 침묵은 오래 지속되었다. 세상은 아직 적막하고 창문에 맺힌 물방울은
아침 햇살에 반짝인다. 시계를 본다. 이제 사랑하는 이들을
깨우고 그들을 챙긴 후 출근할 시간이다. 어제는 나도 모르게 욕심을 부리고 화를 내었으며 어리석게 행동하지
않았던가. 오늘은 조금은 줄이리라. 심판이나 죄책감 때문이
아니다. 보상이나 인정 때문이 아니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내가 바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이 세계를 일으킨 것도 나고 굳이 이 신체로 이 세계를 미워하지 않으리라. 이제
시간이 되었다. 몸을 일으켜 세상으로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