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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위대한 사랑을 못 해본 사람들이 하는 소리다.

위대한 사랑을 하게 되면, 첫 순간부터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아이로

변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의구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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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란 개인적인 모험을 통해 스스로 깨우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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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도란 인간에게 뜨거운 기운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죠.

법도의 역할은 사람들에게 안정성을 제공하는 거예요.

비록 허울뿐일지라도 영속성을 제공하기도 하죠.

그러니까 법도는 냉기에 뿌리를 박고 있어요.

무엇인가를 보존하려면 찬 기운이 필요한 법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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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고독한 벌레야.

고독한 벌레 중에서도 가장 심하게 굶주린 벌레지.

나도 곧 그놈에게 먹힐 거야.

나는 놈에게 뭘 바치지?

내 벌레는 무엇을 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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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그대에게 무엇을 줄 때는 줄 만하니까 주는 것이다.

그러니 삶에서 모든 것을 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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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삶의 한 영역이다.

이 영역에서는 경험이 많아도 아무 쓸모가 없아.

경험이 도리어 방해가 될 수 있다.

새로운 것에서 느끼는 감동, 그 아찔한 기분이 사랑의 필수 요소이기 때문이다.

상대를 만날 때마다 세상의 첫날 아침을 맞는 기분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을 하는 게 아닐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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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면 세월 가고 세월 가면 사랑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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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기술
유시민 지음, 정훈이 그림 / 생각의길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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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기억력에 의한 내용상 오류 있을 수 있음.

 

[글쓰기 특강 시즌 2]

요즘 회사 일이 너무 바쁘다. 그래서 리뷰도 늦어진다. 기억력의 유효기간이 워낙 짧아서 빨리 기록으로 남게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유시민의 책을 읽으면서도 메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책을 읽었다. 그래도 인상적인 부분은 따로 발췌해놨다. 발췌한 글들은 공감이 많이 가는 곳이다. 나의 생각을 만들어주었다.

인터넷 알라딘 서점에서는 신간이 나오면 문자를 보내주는 서비스가 있어서 유시민을 설정해 놓았다. 얼마 전 유시민의 신간 소식을 알려주는 반가운 문자가 왔다. 두어 달 전에 마무리한 팟캐스트 방송에서 유시민이 책을 쓰고 있다고 했는데, 그 책이 드디어 출간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같은 통찰력이 뛰어나고 정확한 예측을 하는 사람이 정치인을 하는 것도 좋지만, 정치를 그만두고 지금처럼 전업작가를 하는 것도 그를 좋아하는 사람의 처지에서는 나쁘지 않다. 정기적으로 그의 책을 볼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하다. 최근에는 여행기에 관한 책도 준비한다고 하는데 무척 기대된다. 이번에 읽은 <표현의 기술>… 이 책은 작년에 출간한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의 연장선상에 있는 책이다.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을 펴 낸 후, 강연이나 인터넷 등을 통해서 독자와 소통을 하면서,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정리하고 내용을 보태서 냈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 낸 책은 정훈이라는 만화가와 공저이다. 책을 펼쳐보면, 정훈이라는 만화가가 그린 만화가 곳곳에 포함되어 있고, 마지막에는 상당히 많은 분량에 만화가 정훈이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만화로 실어 놓았다. 정훈이는 유명한 만화가인데,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캐릭터가 재미있게 생겼고, 이야기 또한 재미있게 한다.

  

[왜 쓰는가?]

작년에 출간한 책에서는 글쓰기를 왜 하는가에 대한 초점을 두었다면, 이번에는 그럼 글을 왜 쓰는가? 에 대한 질문을 먼저 던졌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전문 글쟁이들만 글쓰는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들이 글을 쓴다고 볼 수 있다. 책을 읽고 나면 리뷰를 쓰니, 글을 쓴다고 할 수 있다. 회사에서도 하루에 상당량의 메일을 쓴다. 소설가 김훈은 오직 자기를 표현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고 한다. 그런데, 남들이 공감해 주면 고맙다고 한다. 그런데, 유시민은 이 생각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다. 나도 동의하지 않았다. 유시민은 자기를 표현하기 위해 쓰는 것은 맞는데, 자신의 글이 여론을 형성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쓴다는 것이다. 유시민은 단 한번도 읽는 이를 의식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정치적 글쓰기의 대표격인 조지 오웰의 글을 예로 들기도 했다. 그러면서 조지 오웰의 글은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극찬을 하기도 했다. 나도 조지 오웰의 책을 세 권 정도 읽었는데, 셋 모두 정치색이 뚜렷한 글인데, 비유와 재미와 긴장감을 모두 주었다. 그래서 나도 조지 오웰을 좋아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글쓰기의 이유가 있다면, 돈 벌기 위함이라고 솔직히 이야기한다. 특히 전업 작가들에게는 특히 그것이 큰 이유 중에 하나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도 알라딘 서재에 리뷰를 쓰다보니 글을 읽을 불특정인을 의식하는 것 같다. 그리고 간혹, 책에서 알게 된 불편한 진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어 그들도 알게 되었으면 하는 바램도 있었던 것 같다. 그렇고 보면 나도 어느 정도 정치적 글쓰기를 한 것이다. 그 글들이 조지 오웰이나 유시민처럼 예술성을 탑재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기술이 필요하다]

책을 읽고 나면 늘 리뷰를 쓰는데, 그런데, 그것이 쉬운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늘 들었다. 어떨 때는 머릿속에 생각한 내용들을 쭉 써내는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은 엉킨 실타래에서 실을 풀어내듯, 복잡하게 엉킨 생각들을 하나씩 살살 뽑아내는 그런 어려움이 있다. 유시민이 글쓰기는 결국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첫번째 이유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글쓰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는 표현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 된다. 그래서 그가 표현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표현의 기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표현하는 데 있어 '기술'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그래,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간단한 것은 아니고,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기술이 전부는 아니지만, 기술이 있으면 자신의 생각을 좀더 남들에게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기술들 중에 몇 가지가 있다. 먼저 틀에 박히고, 진부하고 상투적인 표현을 하지 말라고 한다. 맞다. 그런 글들을 읽으면 금방 식상해진다. 나도 글을 쓰다 보면, 글이 그렇게 진부하고 상투적인 표현을 많이 쓰게 된다. 유시민은 의식적으로 진부함과 상투적인 생각을 멀리하라고 한다. 그리고 두번째는 읽는 이가 공감할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남이 쓴 글에 공감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러면서 독서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책을 읽을 때 그 책에 감정 이입을 해서 읽으라고 한다. 이 방법은 나도 공감한다 나도 책을 읽을 때, 언제나 감정 이입을 한다. 소설을 읽을 때는 소설 속 주인공이 되어서 읽어보고, 비소설인 경우는 글을 쓸 때의 지은이가 되어 글을 읽으려고 한다. 그렇게 자신이 읽는 글에 감정 이입하여 공감하는 능력을 키우다 보면, 자신이 글을 쓸 때도 쉽게 공감가는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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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타인이 하는 말을 듣는 것과 같습니다. 책을 쓴 사람에게 감정을 이입해서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 그 사람이 펼치는 논리, 그 사람이 표현한 감정을 듣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겁니다. 평가와 비판은 그 다음에 하면 됩니다. 저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려고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글 속으로 들어가 더 많이 배우고 느끼고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읽어야 평가와 비판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감정을 이입해서 책 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다음, 자기 자신의 시선과 감정으로 그 간접 경험을 반추해 보는 작업이 비판적 독해라는 말이지요.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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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자신이 읽기 어려운 책은 굳이 힘들게 끝까지 들고 있지 말라고 한다. 이 세상에는 자신이 공감할 수 있는 책들이 아주 많이 있으니까 말이다. 유시민의 이 주장에 찬성한다. 예전에 어떤 분은 어려운 책을 만나면 그래도 한번 완독해 해보라고 한 사람도 있어서, 꾸역꾸역 마지막 페이지까지 본 적이 있는데, 얼마 못 가 무슨 내용인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읽었으니, 책을 읽은 게 아니라 활자만 읽은 거니까... 하지만, 여러 사람들이 읽을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는 책인데 감정이입이 어려운 경우는 나중에 재도전을 해보라고 한다. 산 오르는 것에 비유하면서, 그 산을 오를 수 있는 내공이 생기고 나면 다시 한번 도전해 보는 것처럼그래도 안되면 나중에 또 도전유시민은 그렇게 해서 읽은 책인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라는 책이며, 이 책을 강력 추천하였다. 나도 예전에 <코스모스>를 읽었는데, 이 책을 많은 이들에 추천하였다. 정말 명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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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가 이해하기 어렵고 공감할 수 없는 책은 올라갈 길이 없는 산과 같습니다. 아무리 대단하고 아름다워도 소용이 없습니다. 길이 있다고 해도 너무 크고 높은 산은 오르기 어렵습니다. 히말라야 봉우리를 아무나 오를 수는 없어요. 감정을 이입하는 독서를 하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책을 골라야 합니다. 저는 완전히 재미없고 난해한 책은 읽지 않습니다. 어렵지만 읽을 가치가 있다는 평을 듣는 책이라도 도저히 감정 이입을 할 수 없으면 덮어 둡니다. 제가 아직 그 산에 오를 만한 내공이 더 생기고 나면 그 책에 다시 도전해 봅니다. 그래도 안 되면 나중을 기약하면서 또 덮어 둡니다.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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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써보자.]

이 책에서는 악플에 대응하는 방법까지 이야기해주고 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이긴 한데, 그래도 재미있게 읽었다. 그 밖에 여러 상황에 대한 글쓰기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이야기해주고 있는데, 그 중에 아무래도 회사원이다 보니, 회사에서의 보고서 글쓰기에 관한 글이 있어 발췌해 보았다. 회사의 글쓰기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글이나 보고서를 읽는 독자가 누군가가 가장 중요하다. 회사에서야말로 더욱 글 읽는 사람에 따라 글쓰기의 방향이 많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노력은 하는데, 그런 글들이 상대방을 얼마나 만족시키는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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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페이퍼든 상세보고서든, 슬 때는 독자의 눈으로 살펴봐야 합니다. 보고서는 보통 윗사람이 읽습니다. 쓰는 사람마다 나이가 많고, 경험도 많고, 시력은 나쁘고, 업무 범위는 넓고, 의사 결정권은 크고, 일반적으로 변화에 둔감하고, 결정해야 할 문제는 많습니다. 그런 사람의 시선으로 문제를 살피면서 보고서를 써야 합니다. 읽는 사람이 잘 아는 문제는 간단하게, 중요한데 잘 모를 수 있는 것은 자세하게 써야 합니다. 지적 호기심이 적은 사람이라면 원페이퍼에 가깝게, 지적 호기심이 왕성한 사람이라면 상세보고서에 가깝게 쓰는 편이 현명합니다.(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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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이 보급된 이래, 우리는 수많은 글들을 쓴다. 그리고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것보다 글로 이야기하는 것이 더 많을 수도 있다. 나도 카톡 등 메신저 프로그램으로 이야기라는 경우가 더 많다. 그렇듯 글쓰기는 우리 삶의 일부가 되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좀 글쓰기를 잘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표현을 잘하는이 책은 그런 사람들을 위한 길잡이가 되는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 이 리뷰는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를 수정하여 작성함.

독서는 타인이 하는 말을 듣는 것과 같습니다. 책을 쓴 사람에게 감정을 이입해서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 그 사람이 펼치는 논리, 그 사람이 표현한 감정을 듣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겁니다. 평가와 비판은 그 다음에 하면 됩니다. 저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려고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글 속으로 들어가 더 많이 배우고 느끼고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읽어야 평가와 비판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감정을 이입해서 책 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다음, 자기 자신의 시선과 감정으로 그 간접 경험을 반추해 보는 작업이 비판적 독해라는 말이지요. (153쪽)

독자가 이해하기 어렵고 공감할 수 없는 책은 올라갈 길이 없는 산과 같습니다. 아무리 대단하고 아름다워도 소용이 없습니다. 길이 있다고 해도 너무 크고 높은 산은 오르기 어렵습니다. 히말라야 봉우리를 아무나 오를 수는 없어요. 감정을 이입하는 독서를 하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책을 골라야 합니다. 저는 완전히 재미없고 난해한 책은 읽지 않습니다. 어렵지만 읽을 가치가 있다는 평을 듣는 책이라도 도저히 감정 이입을 할 수 없으면 덮어 둡니다. 제가 아직 그 산에 오를 만한 내공이 더 생기고 나면 그 책에 다시 도전해 봅니다. 그래도 안 되면 나중을 기약하면서 또 덮어 둡니다. (162쪽)

원페이퍼든 상세보고서든, 슬 때는 독자의 눈으로 살펴봐야 합니다. 보고서는 보통 윗사람이 읽습니다. 쓰는 사람마다 나이가 많고, 경험도 많고, 시력은 나쁘고, 업무 범위는 넓고, 의사 결정권은 크고, 일반적으로 변화에 둔감하고, 결정해야 할 문제는 많습니다. 그런 사람의 시선으로 문제를 살피면서 보고서를 써야 합니다. 읽는 사람이 잘 아는 문제는 간단하게, 중요한데 잘 모를 수 있는 것은 자세하게 써야 합니다. 지적 호기심이 적은 사람이라면 원페이퍼에 가깝게, 지적 호기심이 왕성한 사람이라면 상세보고서에 가깝게 쓰는 편이 현명합니다.(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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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 - 법을 지배한 자들의 역사
한홍구 지음 / 돌베개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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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기억력에 의한 내용상 오류 있을 수 있음.

 

 


[우리나라 사법부]

몇 주 전 우리집 아이들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서점에 갔다가 구입한 책이다. 아이들을 서점에 데려간 이유는 그렇게 큰 서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도 있었지만, 나도 가 본 지가 오래되어 한번 가보고 싶었다. 여유롭게 관심 있는 책들도 보고, 대폭 바뀌었다는 그곳을 구경하고도 싶었다. 그런데, 내가 욕심이 많았나 보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잘못하면 아이들을 놓칠까 봐 계속 아이들만 쫓아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결국 기대했던 여유로운 책읽기는 상상으로만 하고, 각자 책 한 권씩 골라 나왔다. 난 신간으로 나온 이후 계속 눈여겨 보았던, 내가 엄청 좋아하는 역사학자 한홍구가 쓴 <사법부>란 골랐다. 간만에 알라딘이 아닌 다른 서점에서 책을 샀다.

한홍구. 그 분은 정말 한결 같은 분이다. <대한민국>을 시작으로 그 분의 책은 거의 다 읽었는데, 한번도 실망을 준 적이 없었고, 늘 큰 가르침을 주었다. 왜곡된 우리나라 현대사를 바로 잡아주려는 노력에 늘 고마움을 느낀다. 절대 신뢰!!! 가끔씩 팟캐스트에 손님으로 출현할 때는 꼭 챙겨 듣곤 하는데,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이번에 그가 쓴 <사법부>란 책은 우리나라 사법부의 민낯을 낱낱이 까발려주는 내용이었다. 어쩌다 사법부가 이 꼴이 되었다 답답하면서도, 또 희망도 걸어보았다.

사법부

포탈사이트 다음에서 사법부라는 말은 아래와 같이 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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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의 주요임무는 분쟁의 해결이다. 법원은 모든 법률문제를 결정해야 하며배심재판을 받을 사안이 아닌 경우에는 사실문제까지도 결정하게 된다. 그러나 사법부가 분쟁에 대한 판결만을 담당하는 것은 아니다. 민사사건의 대부분은 재판에까지 이르지 않으며 법정 밖에서 해결된다. 그러한 사건에 있어 법원의 기능은 행정적인 것이다. 판결을 요하는 사안인 경우에는 소송당사자를 확정하고 증거를 채택하며, 소송절차의 개시 및 재판단의 배정과 관련된 문제를 다루는 규정들에 의한다. 사법절차 자체도 별도의 규칙에 따르게 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다른 민주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국가권력을 입법•행정•사법으로 나누고 그 각각을 별도의 독립적 국가기관에서 담당하도록 하는 권력분립, 또는 3권분립의 원칙을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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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사전에 충실한 정의다. 그런 사전적 의미로서 사법부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꼭 필요한 조직이다. 사람들 간에 분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고, 그 분쟁을 법의 잣대로 판결을 내려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거다. 그런데, 정치적인 분쟁은 어떨까? 법이란 것이 모든 것을 명확하게 판결할 수 있을 수는 없다. 법이라는 것이 결국 글자로 써 있기 때문에, 그 해석을 사람마다 달리 할 수 있는 거다. 최대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법을 바탕으로 판결해야 하지만, 오늘날 우리나라 사법부는 그렇지 못하고 있다. 특히 정치적인 이슈에 대해서는 어떤 사람이 판사이냐에 따라 결과가 달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존심을 버린 지는 옛날그냥 권력이 시키는 대로 돈 많이 벌면서 편하게 사는 길을 택한 것이다. 바로 직전에 읽었던 <이회영 평전>에서 이회영과 그의 형제들이 걸어간 길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어쩌다 사법부가 이 모양이 되었는지를 밝혀주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2009년부터 2010년까지 한겨레에 연재했던 것을 편집해서 엮은 책이라고 한다. 그 시절도 신뢰를 잃은 사법부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사법부는 백성들과 더욱 멀어지고, 권력과 더욱 가까워졌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다?]

이 책을 읽고 놀라운 것은 서슬 퍼런 독재시대의 사법부는 오히려 지금보다 더 독립적이고, 정의로웠다는 점이란다. 이승만 시절은 반대파 정치인을 마구 죽이던 시절이고, 군사 독재 시절때도 독립적이고, 정의로운 판사들이 있었다. 물론 동백림 사건이나 인혁당 사건 등 권력에 고개를 숙인 판결도 많았지만, 그것은 독재 시대 후반부에 많이 있었고, 이승만 시대와 박정희 군사 독재 시절 초반부에는 그래도 사법부가 사법부다웠다고 한다. 그래서 권력이 사법부를 미워할 정도였단다. 박정희 정권과 검찰의 공안사건에 판사들이 집단으로 사표를 제출하는, 막강 자존심을 가지고 있던 시절도 있었다니, 오늘날의 사법부를 생각하면 신기하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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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1971 6월과 7, 대법원의 국가배상법 위헌판결과 서울형사지법에서 행한 시국 사건에 대한 연이은 무죄판결은 사법부의 독립성을 만천하에 고취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독립성은 사실 평지돌출로 나온 것은 아니었다. 무장군인 법원난입 사건이나 동백림 사건 당시의 괴벽보 사건은, 그때만 해도 법원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권력이 법원을 몹시 불편해했음을 보여준 사례다. 사법파동의 주역이었던 홍성우 변호사나 최영도 변호사는 1960년대 후반부터 사법 파동 이전까지 법관들은 권력의 눈치를 거의 보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법원으로서는 중정이나 검찰의 눈치를 봐서 그 위세가 무서워할 걸 못한다든가 하는 분위기나 없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사법파동 이전까지는 상당히 자유롭고 배짱대로 재판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누렸다. 그 당시 서울형사지법 단독판사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아서 서울시장보다도 힘이 세다는 말까지 나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위로는 대법원부터 아래로는 지방법원까지 박정희 정권의 심기를 거스르는 판결이 연이어 나오자 정가와 법조계에는 정부가 어떤 형태로든 사법부를 손볼 것이라느니 정부가 바라는 대로 판결하지 않은 판사들은 다칠 것이라느니 하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그리고 이 소문은 곧 현직 법관 두 명에 대한 검찰의 영장청구라는 형태로 가시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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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속 사법부]

정권에 반항하는 사법부에 대해 정권도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자신이 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말이다. 처음 사법파동이 일어났을 때는 직접 사태를 처리를 했었지만, 판사들을 곱지 않은 시선을 보였다. 그리고 유신 정권에 들어오면서, 그들의 권력은 하늘을 뚫을 듯했다. 정권의 비위를 거슬리는 판결을 한 판사들은 좌천되기 일쑤고, 자격 정지를 밥 먹듯 했다고 한다. 그러니, 정권에 손바닥 비비는 판사들만 살아남아서 판사 자리에 있게 된다. 그러다 보니 인혁당 사건 같은 말도 안 되는 일도 일어나게 된 거다. 당시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반공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1970년대 들어서면서 남파하는 간첩의 수가 급격하게 줄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공수사 요원들은 자신들의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있지도 않은 간첩을 채웠다고 한다. 조작을 해서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인혁당 사건이었다. 유신 반대를 하는 사람들을 간첩으로 몰아서, 사형 선고를 내리고, 선고를 내린 지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한 사건이 기점으로 대한민국 사법부는 죽었다고 할 수 있다.

유신 시절, 긴급조치 9호가 발표되었다. 여러 가지 강압조치가 있었는데, 공안 사건을 일반법원에서 판결하도록 했단다. 그 전에는 군법원에서 해서, 일반 법원의 판사들은 부담을 덜 수 있는데, 이제부터는 자신들이 칼을 쥐게 된 거다. 그래서 일부 판사들의 법관 기피가 늘어났고, 더 양심 있는 판사들을 법복을 벗고 변호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최고권력의 시녀가 된 사법부는 무죄 판결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1976 221명을 판결했는데, 2번만 무죄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무죄 판결을 낸 판사는 좌천되었다가, 판사 자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게 대한민국의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문제점을 심각하게 인식한 종교계에서도 움직였다. 천주교 중심으로 원주에서는 원주 선언이라는 시국선언을 했는데, 당시 원주에 있던 천주교 지학순 주교와 김지하, 장일순 등이 참여했다고 한다. 그리고 개신교에서도 시국 선언을 했는데, 장소는 교회가 아닌 명동 성당이었다. 권력의 탄압이 여의치 못해서, 장소를 구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김수환 추기경이 오케이를 해서 명동 성당에서 하게 되었다고 한다. 장소가 서울이다 보니, 재야 인사 뿐만 아니라 전현직 정치인들도 많이 참여했는데, 그 대가로 구속을 당해야만 했다. 그분이 죽기 전까지 사법부는 점점 권력의 하인이 되는 길을 가게 되었다.

 

[새로운 독재의 사법부 길들이기]

영원할 것만 같았던 그분이 세상을 떴다. 그것도 자신의 최측근의 총으로… 우리나라는 다시 한번 민주주의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러질 못했다. 혹시 아무도 준비를 하지 못했나? 너무 갑작스러운 독재의 종말을마치 갑작스러운 해방과 찾아온 미군정과 친일파의 재득세처럼… 독재가 가고 또다른 독재가 정권을 잡았다. 독재를 보낸 김재규. 새로운 독재는 사법부를 장악하고, 김재규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판결을 해버렸다. 김재규의 변호사는 이 사건은 우발적으로 발생한 단순 살인이라고 주장했지만, 판결은 새로운 독재의 입맛에 맞게 판결이 나왔다. 일부 양심 있는 판사들의 소수 의견이 있었지만… 그저 소수 의견이었다.

새로운 독재. 그 또한 무서운 사람이었다. 총칼로 아무런 죄없는 백성들을 죽이면서, 청와대로 들어갔으니 말이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있는 이에게 내란을 일으키려 했다고 누명을 씌워 사형을 선고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때 재판이 있기 전 문제를 제기한 판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당연한 듯 면직 처리했다고 한다. 이게 불과 몇 십 년 전 우리나라의 모습이다사법부의 모든 사람들이 권력의 시녀였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시녀들만 살아남았던 것이다. 권력에 저항하는 일부 판사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좌천 또는 면직이었다. 그것은 대법원장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말 안들으면 쫓아버리고, 좌천하고, 어쩔 수 없이 사표 쓰게 하고그리고는 변호사도 못내게 하였다고 한다. 당시 시위하는 학생들에게 즉결심판이라는 권한을 판사에게 주었는데, 일부 판사들은 양심대로 무죄를 판결하기도 했다는데, 그렇게 되면 바로 안기부에서 해당 판사의 뒷조사를 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법복도 많이 벗었다고 한다. 새로운 독재에서 이런 일을 도맡아 하는 것은 안기부였다.

판사들은 그래도 양심있고 소신을 가지고 있던 판사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검찰은 그야말로 떡검이라는 명찰을 일찌감치 달았다. 요즘도 홍만표라는 이가 무지막지한 범죄를 했음에도 검찰이라는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 우린 그런 시스템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지은이 한홍구 선생님이 대한민국 검찰에 대해서도 따로 책을 쓰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 업무가 갑자기 바빠져서 책읽는 시간도 많이 줄고, 리뷰 쓸 수 있는 시간은 더욱 줄었다. 혹시 졸필이 되어 버린 이 리뷰를 읽고 한홍구의 <사법부>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는 이가 있으면 안될 일이다. 이 시대 세금을 내면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볼 책이다.

 

 

 

※ 이 리뷰는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를 수정하여 작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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쭈니 2016-06-27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르고 있던 새로운 사실들의 알게됐습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bookholic 2016-06-28 00:06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쭈니님도 기회되시면 한번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30)

누가 쓴 책이든, 무엇에 관한 책이든 비판적으로 읽는 게 기본입니다. 정치인만 그런 게 아니라 기업인, 교수, 평론가도 거짓말을 하거나 틀린 주장을 하니까요. 책은 모두 사람이 쓴 겁니다. 가방끈이 얼마나 길든, 하는 일이 뭐든, 사람은 다 비슷한 결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잘 속이고, 쉽게 속아 넘어가고, 편견과 고정관념에 빠지고, 감정과 충동에 휘둘리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고 하는 동물, 오리는 모두 그런 불완전한 존재로서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그래서 누가 쓴 어떤 책이든 다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겁니다.

 

(50)

글 쓰는 사람을 위협하는 것이 욕망만은 아닙니다. 훌륭한 이상을 추구하는 종교와 사상도 조심해야 합니다. 이념과 종교의 교조가 도덕적 미학적 직관을 질식시키기도 하거든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역사 사례가 있습니다. 중세 교회가 자행한 마녀 사냥과 십자군전쟁, 유럽인들의 북아메리카 원주민 대학살, 히틀러의 홀로코스트, 스탈린의 독재와 대숙청, 크메르루즈의 킬링필드, 북한의 우상숭배와 3대 세습, 소위 이슬람국가(IS)의 민간인 참수와 같은 어리석음과 죄악의 배후에는 그것을 정당화한 지식인의 말과 글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말과 글로 만든 이념과 종교의 도그마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목 졸라 죽였기 때문에 그런 비극이 벌어진 겁니다.

 

 

(59)

정치적 글쓰기에도 예술성이 중요합니다. 예술성은 문장의 아름다움과 아울러 독창적인 논리의 미학을 요구합니다. 그런 글을 쓰려면 생각과 감정에 자유와 날개를 달아 놓아야 해요. 고정관념과 도그마에 갇히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글을 쓸 수 없거든요. 보수든 진보든 상관없이, 다수 학설로 통하는 이론과 인식 방법을 답습하면 상투적이고 진부한 글을 쓰게 됩니다. 현실은 빨주노초파남보인데 흑백필름으로만 사진을 찍어서 현실이 그와 같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지요.

 

(60)

고정관념과 이념의 교조에 생각과 감정이 묶이면 글이 진부해집니다. 빤한 글, 지루한 글, 첫 문장만 보아도 마지막 문장을 짐작할 수 있는 글을 쓰게 됩니다. 독창적인, 기발한, 창의적인, 흥미로운, 반전이 있는 글을 쓰지 못합니다. 진보냐 보수냐? 내 이념을 어떻게 글쓰기에 반영할까? 창의적인 글을 쓰고 싶다면 이런 헛된 질문을 털어 버리고 오로지 아름다운 것과 옳은 것만 생각하면서 글을 쓰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렇게 씁니다.

 

(96)

늘 잘되는 건 아닙니다만, 저는 먼저 이견을 가진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할 수 있는 만큼 공감을 표현한 다음 제 생각을 말합니다. ‘나는 이런 사실이 중요하고, 이런 해석과 판단이 옳다고 생각한다그렇게 말하는 것이지요. 누구든 상대방이 자기를 인정하고 존중한다고 느끼면 그 사람의 말을 더 진지하게 경청합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으신가요?

 

 

(153)

독서는 타인이 하는 말을 듣는 것과 같습니다. 책을 쓴 사람에게 감정을 이입해서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 그 사람이 펼치는 논리, 그 사람이 표현한 감정을 듣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겁니다. 평가와 비판은 그 다음에 하면 됩니다. 저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려고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글 속으로 들어가 더 많이 배우고 느끼고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읽어야 평가와 비판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감정을 이입해서 책 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다음, 자기 자신의 시선과 감정으로 그 간접 경험을 반추해 보는 작업이 비판적 독해라는 말이지요.

 

 

(162)

독자가 이해하기 어렵고 공감할 수 없는 책은 올라갈 길이 없는 산과 같습니다. 아무리 대단하고 아름다워도 소용이 없습니다. 길이 있다고 해도 너무 크고 높은 산은 오르기 어렵습니다. 히말라야 봉우리를 아무나 오를 수는 없어요. 감정을 이입하는 독서를 하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책을 골라야 합니다. 저는 완전히 재미없고 난해한 책은 읽지 않습니다. 어렵지만 읽을 가치가 있다는 평을 듣는 책이라도 도저히 감정 이입을 할 수 없으면 덮어 둡니다. 제가 아직 그 산에 오를 만한 내공이 더 생기고 나면 그 책에 다시 도전해 봅니다. 그래도 안 되면 나중을 기약하면서 또 덮어 둡니다.

 

 

(167)

벌써 7년이 되었습니다. 제가 아주 좋아하고 존경했던 분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슬픔을 감당하기 어려웠고, 죽이고 싶을 정도로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다가온 책이 소설가 김형경의 에세이 <좋은 이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느끼는 슬픔을 어떻게 대면해야 하는지 저는 몰랐습니다. 그래서 내가 느끼는 슬픔과 분노의 실체가 무엇인지 몰라서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좋은 이별이란 제목이 눈을 찌르듯 다가왔어요. 그 책을 읽으면서 저는 그 길었던 여름을 견뎠습니다.

 

 

(237)

원페이퍼든 상세보고서든, 슬 때는 독자의 눈으로 살펴봐야 합니다. 보고서는 보통 윗사람이 읽습니다. 쓰는 사람마다 나이가 많고, 경험도 많고, 시력은 나쁘고, 업무 범위는 넓고, 의사 결정권은 크고, 일반적으로 변화에 둔감하고, 결정해야 할 문제는 많습니다. 그런 사람의 시선으로 문제를 살피면서 보고서를 써야 합니다. 읽는 사람이 잘 아는 문제는 간단하게, 중요한데 잘 모를 수 있는 것은 자세하게 써야 합니다. 지적 호기심이 적은 사람이라면 원페이퍼에 가깝게, 지적 호기심이 왕성한 사람이라면 상세보고서에 가깝게 쓰는 편이 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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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1971년 6월과 7월, 대법원의 국가배상법 위헌판결과 서울형사지법에서 행한 시국 사건에 대한 연이은 무죄판결은 사법부의 독립성을 만천하에 고취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독립성은 사실 평지돌출로 나온 것은 아니었다. 무장군인 법원난입 사건이나 동백림 사건 당시의 괴벽보 사건은, 그때만 해도 법원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권력이 법원을 몹시 불편해했음을 보여준 사례다. 사법파동의 주역이었던 홍성우 변호사나 최영도 변호사는 1960년대 후반부터 사법 파동 이전까지 법관들은 권력의 눈치를 거의 보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법원으로서는 중정이나 검찰의 눈치를 봐서 그 위세가 무서워할 걸 못한다든가 하는 분위기나 없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사법파동 이전까지는 상당히 자유롭고 배짱대로 재판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누렸다. 그 당시 서울형사지법 단독판사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아서 서울시장보다도 힘이 세다는 말까지 나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위로는 대법원부터 아래로는 지방법원까지 박정희 정권의 심기를 거스르는 판결이 연이어 나오자 정가와 법조계에는 정부가 어떤 형태로든 사법부를 손볼 것이라느니 정부가 바라는 대로 판결하지 않은 판사들은 다칠 것이라느니 하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그리고 이 소문은 곧 현직 법관 두 명에 대한 검찰의 영장청구라는 형태로 가시화되었다. 


(113)

대법원은 저항권은 인정할 수 없고 긴급조치는 위헌이 아니라면서 피고와 변호인의 고문 주장을 배척했고, 절차상의 위법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공판조서가 QUSWHEHLJTEK는 주장도 묵살되었다. 확정판결 18시간 만의 사형집행은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그러나 형사소송법 어디에도 18시간 만에 사형집행을 하면 안 된다는 구절은 없으니 이 또한 철저하게 ‘합법’이었다. 유신체제는 그로부터 4년 6개월 더 지속되었는데 박정희는 긴급조치 위반 사건을 더는 군법회의로 보내지 않고 일반법원에서 재판하도록 했다.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살인으로 대한민국 법원은 사법부를 지독히 불신했던 박정희로부터 신뢰를 획득했다. 그러나 독재자의 신뢰가 깊어질수록 국민들의 마음은 사법부로부터 멀어졌다.


(259)

1986년 4월 23일. 김용철 대법원장 체제가 출범한 이후 사법부에는 조용한 변화가 일었다. 고문으로 조작된 사건이나 시국사건에서는 여전히 정권이 깊이 개입했지만 사법부는 인산구속에 신중해지고 시국사건이나 공안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건국대 사건으로 1986년 11월 1,290명이 구속되면서 그 이상의 변화를 기대하기는 힘들어졌다. 김용철 대법원장은 적극적으로 사법부의 독립을 추구했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한 법관들에게 보복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이런 그의 모습이 안기부의 눈에는 “여론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등 무능력한 업무 자세로 일관”하는 ‘주사급’ 대법원장으로까지 비쳤다. 결국 김용철은 1988년 제2차 사법파동으로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대법원장직에서 물러났다.



(353)

이 기막힌 결정에 대해 조영래 변호사는 이렇게 탄식했다. 조금 길지만 꼭 되새겨야 할 말이다. “우리는 오늘 우리 사법부의 몰락을 봅니다. 아무리 뼈아프더라도 이 말을 들어주십시오. 사법부는 그 사명을 스스로 포기한 것입니다. 한 그릇의 죽을 얻는 대가로 장자 상속권을 팔아 넘긴 것처럼, 사법부는 한갓 구구한 안일을 구하기 위하여 국민으로부터 위탁받은 막중한 사법권의 존엄을 스스로 저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태에 대하여 사법부에 몸담고 있는 법관 개개인들만을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 그러나 적어도 사법부로서는 이 사태의 책임을 다른 누구에게도 전가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해두고자 합니다. 용기가 없는 사법부, 스스로의 사명을 스스로 저버린 사법부는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기대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비통한 심정으로 말하거니와 이 재정신청 기각 결정으로 인하여, 이제 더 이상 사법부의 독립성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게 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사법부의 존립 근거 자체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이 사태의 위험성에 대하여, 사법부에 몸담고 잇는 모든 법관들이 깊이 통찰하고 사법권의 존엄을 스스로 지키기 위한 건곤일척의 몸부림을 시작하지 않으면 아니될,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역사적 순간이 도래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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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1 03: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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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1 20: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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