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의 시대 - 찬란하고 어두웠던 물리학의 시대 1900~1945
토비아스 휘터 지음, 배명자 옮김 / 흐름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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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양자역학에 관심이 많은 아빠에게 눈이 똥그래지게 하는 책이 한 권이 나타났단다. 제목부터가 <불확실성의 시대>. 양자역학을 대표할 수 있는 단어인 불확실성이 책 제목에 들어가 있으니 양자역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 책이 양자역학을 다룬 책이란 것을 알 것 같구나. 이 책의 부제가 <찬란하고 어두웠던 물리학의 시대 1900~1945>라고 되어 있구나.

물리학이란 것이 이제 더 이상 발전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1900년대 초기 지금까지 옳다고 생각했던 물리학을 뒤집어 엎을 일들이 계속 출현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을 거야. 1900년대 시작과 함께 기존의 물리학을 깨는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이 연이어 출현하면서 물리학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지. 하지만 세계는 어지러웠어.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이 벌어졌고, 물리학자들도 양쪽 진영으로 나뉘게 되었지. 그래서 이 책의 부제에 찬란어둠이 같이 들어가 있는 것 같구나.

이 책의 지은이는 뮌헨과 버클리에서 철학과 수학을 공부한 토비아스 휘터라는 사람인데 프리랜서 기자와 작가로 일하고 있다는구나.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책은 <불확실성의 시대> 한 권인 것 같구나. 이 책은 1900년부터 1945년까지의 현대물리학을 연대기 식으로 다루다 보니 아빠가 몇 년 전에 읽은 짐 배것의 <퀀텀 스토리>가 떠오르더구나. 아빠의 기억력으로 그 책의 내용의 기억이 많이 나질 않지만, 그래도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들이 몇몇 있었단다. 그럼 <불확실성의 시대>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게.

 

1.

먼저 문을 여는 사람은 1900년 막스 플랑크의 이야기란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당시에는 물리학은 이제 거의 모든 것이 다 확정되었기 때문에 더 발전할 것이 없다는 것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대. 하지만 막스 플랑크는 물리학을 전공하였단다. 이전 물리학들이 계속 실패한 흑체복사에 관한 연구를 했어. 흑체복사란 반사가 전혀 안 되는 흑체에서도 온도에 따라 빛이 나오는 현상인데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았나 봐.

플랑크는 독일 베를린 대학교 교수로 일하게 되었고 1900 10 19일 드디어 그동안 많은 과학자들이 실패했던 흑체복사이론을 발표했단다. 이 이론을 발표하면서 상수를 하나 소개했는데, 그것이 과학계의 상수에서 가장 작은 상수인 플랑크 상수라는 것이었어. 플랑크 상수는  0.00000000000000000000000000655 란다. 소수점 밑으로도 0 26개나 있었어. 이 이론에 따르면 흑체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불연속을 가진 에너지가 나오는데 그것은 지금까지의 상식을 깨는 거였어. 에너지는 연속적이라고 생각들을 했거든. 이렇게 에너지가 불연속적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 현대물리학의 시작이자 양자역학의 시작이 된 것이란다.

1903년 파리에는 폴란드 출신의 여성 과학자 마리 퀴리가 연구를 하고 있었단다. 마리 퀴리의 언니가 파리에서 의학 전공으로 유학하고 있어서 덩달아 파리로 왔던 거래. 혼자 공부하던 마리는 피에르 퀴리를 만나 함께 연구를 하고 나중에는 결혼까지 하게 되었단다. 둘은 새로운 원소 방사성 원소를 두 개 발견하였단다. 하나는 마리의 조국인 폴란드의 이름을 딴 폴로늄이고 나머지 하나는 그 유명한 라듐이었단다. 당시 방사성 원소가 그렇게 유해한 물질인줄 몰랐기 때문에 스스로 빛을 내는 라듐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고 그로 인해 나중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하더구나. 안타까운 역사지.

1905년는 아인슈타인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지. 스위스 베른에서 특허청 직원으로 일하던 아인슈타인은 5개의 굵직한 논문을 한 해에 모두 발표했단다. 그 중에는 그 유명한 특수상대성 이론도 발표했어. 특수상대성 이론에 대해서는 아빠가 몇 번 이야기를 했으니 오늘은 생략할게.

….

1911. 덴마크의 닐스 보어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 해란다. 영국 켐브리지 대학교에서 JJ톰슨에게 물리학을 배우려고 했지만, 영어가 서툰 닐스 보어를 냉대했고, 닐스 보어는 켐브리지를 떠나 맨체스터 대학으로 옮겼다고 하는구나. 맨체스터 대학에서 러더퍼드 교수 밑에서 공부를 했대. 이 책에 나오는 과학자들은 대부분 너희들이 앞으로 공부하면서 교과서에서 자주 보게 되는 사람들일 거야.

1914년 닐스 보어가 뮌헨에서 원자와 전자 궤도에 대한 이론을 발표했어. 이 이론에는 전자가 도약한다는 내용을 포함되어 있는데 왜 언제 어떻게 전자가 도약하는지는 아직 모르는 상태였어. 하지만 많은 물리학자들이 이 이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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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보어는 원자물리학을 창시했다. 그의 모형은 오랫동안 열려 있던 질문에 답하는 동시에 새로운 질문도 만들어냈다. 전자는 도약할지 말지를, 그리고 어떤 궤도로 도약할지를 어떻게 결정할까? 양자 세계에서 다시 어떤 일들이 즉흥적으로 벌어지는 것 같고, 인과 원칙이 다시 힘을 잃는 것 같다. “인과성 문제는 나도 많이 괴롭습니다.” 몇 년 뒤에 아인슈타인은, 원인 없는 양자 도약의 수수께끼가 여전히 풀리지 않았을 때, 막스 보른(Max Born)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이것은 아인슈타인 혼자만의 고민이 아니었다. 물리학자들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속으로 알면서도, 감탄을 아끼지 않으며 보어의 원자 모형을 열심히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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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부터 1918년까지 세계1차대전이 일어나서 과학자들도 전쟁에 자유롭지 못해서 참여하게 되었다는구나. 세계1차대전을 이야기하자만 무서운 전염병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구나. 전쟁터에서 알 수 없는 전염병으로 많은 군인들이 죽었고, 전쟁이 끝나고도 이 전염병은 전 세계로 퍼져 500여만 명이 죽었다고 하는구나. 막스 베버와 에곤 쉴레 등 유명인들도 이 병으로 죽었다고 하는구나.

1919 5 29일은 전세계적으로 개기일식이 있었단다. 일반 사람들은 태양이 사라지는 신기한 현상을 구경한다고 정신이 없을 때, 영국의 에딩턴이라는 사람은 몇 년 전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일반 상대성 이론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에딩턴은 아인슈타인의 말대로 빛이 중력에 의해 휘어진다는 것을 증명하게 되었단다.

 

2.

1924년 프랑스의 왕자 드 브로이는 빛과 전자 모두 파동이며 입자일 수 있다는 내용을 발표하였단다. 그 이전까지는 파동과 입자는 별개로 빛도 누군가는 파동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입자라고 했었거든. 그런데 드 브로이가 파동이면서 입자일 수 있다고 발표한 것인데 이것은 정말 혁신적인 생각이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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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1923년 말에 드브로이는 길고 외로운 숙고 끝에단순하고 대담한 아이디어에 이르렀다. 그는 광전 효과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주장을 거꾸로 뒤집어보았다. 빛이 입자의 흐름처럼 행동할 수 있다면, 입자 역시 어떤 면에서 파동처럼 행동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대단히 새롭게 과감하게 근거가 빈약한 결론이었다. 지금까지 입자는 파동과 전혀 관련이 없는 응집된 알갱이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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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 … 모든 물질에 이런 이중성이 있습니다! 빛만이 이런 분열을 경험하는 게 아니라, 우주 창조의 기본 재료인 모든 원자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손에 들도 있는 이 논문이, 전자든 양성자든 모든 입자에는 파동이 있고, 이 파동이 공간을 이동한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많은 사람이 내 주장을 반박할 것임을 나는 압니다. 그리고 이 주장이 오로지 나의 고독한 숙고에서 나온 것임을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주장이 기이한 주장임을 나는 인정합니다. 만에 하나 그것이 틀렸을 때 내게 닥칠 형벌을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나는 여러분에게 가장 깊은 확신으로 말합니다. 모든 사물은 두 가지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고,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확정적인 없습니다. 나뭇가지에 앉은 참새를 노리는 아이의 손에 들린 돌이 물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릴 수도 있습니다.”

드브로이가 강연을 마쳤고, 교수들은 당황하여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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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 브로이의 발표 이후에 많은 이들이 당황했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많은 과학자들이 연구를 시작했고, 하이젠베르크는 헬골란트 섬으로 요양을 갔다가 행렬역학으로 양자역학을 설명하는 것을 성공했단다. 이 이후의 이야기들은 아빠가 그 이전에도 여러 번 이야기해서 짧게 요약해서 이야기할게. 하이젠베르크가 그 어려운 행렬역학으로 양자역학을 설명해서 동료 과학자들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어려운 행렬역학을 공부해야만 했대. 그런데 1925년 슈뢰딩거가 비교적 쉬운 파동방정식으로 양자역학을 설명하였단다. 과학자들은 어려운 행렬역학보다 쉬운 파동방정식의 설명을 더 좋아했단다. 슈뢰딩거는 이 공식으로 여기저기 강연을 했었나 보구나.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을 이용한 양자역학은 전자의 입자에 대한 설명이 어려워 이를 하이젠베르크와 닐스 보어 등이 반론을 냈지만, 얼마 후 슈뢰딩거는 하이젠베크르의 행렬역학을 일부 조정하면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과 동일함을 밝혀냈단다. 슈뢰딩거가 잘 나가다 보니, 하이젠베르크가 시샘을 했을 것 같기도 하구나. 어찌했든 양자역학을 처음 설명한 사람은 자신인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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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247)

하이젠베르크가 헝클어진 부스스한 금발과 소년 같은 앳된 얼굴, 그리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뒤늦게 강당에 들어섰다. 그는 이제 겨우 스물네 살이지만, 벌써 양자역학의 선두 그룹에 있다. 그는 이론을 창시했다. 그는 이 이론을 간단히 그 양자역학이라 불렀고, 슈뢰딩거보다 몇 달 먼저 개발했다. 그러므로 어쩌면 지금 강연을 해야 할 사람은 슈뢰딩거가 아니라 하이젠베르크여야 마땅했을지도 모른다.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의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 노르웨이 여행을 중단하고 유럽 대륙을 가로질러 이곳으로 서둘러 왔다. 그는 꽃가루 알레르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트레깅을 위해, “스팀롤러(증기로 가는 삼륜자동차)를 타기 위해”, 그의 말을 빌리면, 다른 양자물리학자들에게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북유럽에 갔었다. 그는 몇 주 전에 미에사 호숫가에서 야영하며 백야 속에서 양자역학을 곰곰이 생각했고, 양자역학을 이용해 헬륨원자의 기이한 긴 스펙트럼을 계산했고, 구드브란스달렌 골짜기에서 송네피오르까지 걸었고, 자신감을 가득 안고 뮌헨에 왔다. 스칸디나비아의 긴 햇살에 하이젠베르크의 얼굴이 갈색으로 그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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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폴 디랙이라는 사람이 특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합쳐서 설명하는데 성공했단다. 그리고 디랙 방정식으로 전자 스핀을 설명하였고, 반물질이라는 존재를 발견했어. 반물질도 여러 번 이야기해서 패스할게. 1926년에 슈뢰딩거는 독일에서 강연도 하고 보어의 초대로 코펜하겐에도 오는 등 바쁘게 지냈나 보구나. 슈뢰딩거가 보어와 토론을 하면서 남긴 말이 하나 있는데, 과학을 잘 비유해서 이야기한 것 같아 소개해 본다. “과학은 놀이입니다. 현실이라는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노는 위험한 놀이입니다.”

1927년 코펜하겐에서 하이델베르크는 불확정성 원리를 발표했단다. 이 이론을 아빠가 제대로 이해하는 못했지만, 대충 이해한 바로는 현재의 전자의 위치와 속도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내용이란다. 그로 인해 미래의 위치와 속도도 알 수 없다는 것이야. 이것은 지금까지 물리학의 상식을 또 한번 깨는 이론이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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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의 논문으로,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가 물리학의 토대라고 여겼던 인과성을 흔들었다. “’현재를 정확히 알면, 미래를 계산할 수 있다는 인과법칙의 명확한 진술에서 틀린 것은 결론이 아니라 전제조건이다.” 우리는 현재를 알 수 없다. 우리는 전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으므로, 전자의 미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으므로, 전자의 미래 위치와 속도의 가능성 확률만을 계산할 수 있다. “양자역학을 통해 인과법칙의 무효성이 명확히 입증된다.” 논문의 마지막 문장이 말한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통한 시공간 혁명에서 감히 그렇게 멀리까지 가지 못했었다. 한때 뉴턴이 상상했던 시계태엽 우주는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변화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는 이마누엘 칸트의 문장도 더는 통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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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론은 닐스 보어 조차 반대했었어그러다가 닐스 보어의 상보성 이론을 발표하면서 화해를 했다는구나. 하이젠베르크르의 불확정성 원리와 보어의 상보성 이론으로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이 완성되었단다. 이 코펜하겐 해석은 얼마 후에 브뤼셀에서 열린 그 유명한 5차 솔베이 회의의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었단다. 전자 나아가 모든 입자들의 위치가 불확실하고 확률로 존재하는 것을 누가 받아들이겠는가. 닐스 보어와 아인슈타인의 공방전이 이어진 5차 솔베이 회의에 대해서는 아빠가 전에도 여러 번 이야기했으니 이것도 오늘은 생략할게.

….

 

3.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독일의 나치의 힘이 세지고 나치가 유대인들을 탄압하게 되자 과학자들도 영향을 받게 되었단다. 아인슈타인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초대로 1 5개월간 머물렀는데 독일의 유대인 박해가 시작되어 독일로 돌아가지 못하고 벨기에와 영국에 머물다가 다시 미국으로 이전하게 되었단다. 아인슈타인뿐만 아니고 많은 유대인 과학자들이 미국으로 망명을 했단다. 막스 플랑크는 이런 과학자들의 대탈출을 보고 안타까워 하면 히틀러를 만나서 설득하려고 했었다는구나. 하지만 히틀러의 답변은 유대인은 유대인이라는 답변이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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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0-381)

막스 플랑크는 이런 대탈출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독일 과학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히틀러를 만나려 애썼다. 1933 5 16 11시에 기회가 왔다. 플랑크는 유대인에도 인류에 소중한 사람쓸모없는 사람등 여러 종류가 있으니 구별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벨화학상 수상자 프리츠 하버는 부모가 유대인이지만 암모니아 추출 과정을 개발하여 제1차 세계대전에서 유독가스를 무기로 사용할 수 있게 하여 독일에 기여했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런 구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대인은 유대인이오. 모든 유대인은 엉겅퀴처럼 서로 들러 붙어 있소,.” “그러나 가치 있는 유대인을 외국으로 내보내는 것은 완전히 자해 행위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독일에서 이룩한 그들의 과학 업적이 외국으로 빠져나가 외국을 유익하게 할거라고, 플랑크가 반박하고 설득했다. 히틀러는 악명 높은 특유의 흥분 상태에 빠져 무릎을 거세게 때리며 점점 더 빨라지는 말로 일흔다섯의 노교수에게 고함을 치고 강제수용소에 감금하겠다고 위협했다. 플랑크는 그저 조용히 듣고만 있다가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가 플랑크의 등에 대고 외쳤다. “한심한 멍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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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오토 한과 리제 마이트너는 (사실은 리제 마이트너가 거의 혼자서) 어떤 원자의 핵을 분열시킬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어. 그러면서 질량이 줄어들고 줄어든 질량만큼 에너지가 나온다는 것인데 이것은 바로 핵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어. 그로 인해 독일에서도 핵폭탄 개발을 추진하였고, 미국에서도 오펜하이머를 중심으로 핵폭탄 프로젝트, 여러 번 이야기해서 너희도 알고 있는 맨하튼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란다. 그리고 맨하튼 프로젝트의 끝은 일본에 투하된 핵폭탄 두 발이었고그렇게 <불확실성의 시대>의 책은 끝을 맺었단다. 하지만 지은이는 책은 끝났지만 과학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이야기를 했단다. 아빠가 예전에 읽은 <퀀텀 스토리>에서도 1945년 이후에도 영자역학의 연구와 입자에 대한 연구를 계속 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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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9)

진짜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그러나 책은 언제가 끝난다. 이 책의 물리학자들은 1945년 이후에도 계속 활동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누구도 양자역학이나 상대성이론에 견줄 만한 진보를 더는 이루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은 세계 공식을 찾고자 했다. 하이젠베르크 역시 뭔가를 찾고 있었다. 그들은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100년 전에 세운 그들의 이론은 오늘날까지 굳건히 서 있고, 우리의 컴퓨터칩과 의료장비 안에 들어 있고, 당시 이런 이론의 해석을 두고 그들이 겨뤘던 논쟁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심에 있다.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에 제기한 이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회의적인 물리학자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다. 이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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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양자역학을 이해할 때까지 아빠의 양자역학 책읽기는 계속될 거야.

 

PS,

책의 첫 문장: 당신이 사는 세상이 지금까지 믿었던 것과 전혀 다르게 작동한다는 사실을, 어느 날 알게 되었다고 상상해보라.

책의 끝 문장: 이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고전 전기역학의 창시자 맥스웰(James Maxwell)은 1871년에 이미 이런 자기만족을 경고했다. "(측정이 주를 이루는) 현재의 실험은, 중요한 모든 물리적 상수가 몇 년 안에 대략 추산되어 과학자들에게 남은 것은 그저 이 측정을 소수점 아래 수치까지 세밀화 하는 것이라는 의견이 만연할 만큼 충격적이다." 그는 또 이렇게 강조했다. "꼼꼼한 측정의 노력에서 얻어야 하는 진정한 보상은 더 큰 정확성이 아니라, 새로운 연구 분야의 발견과 새로운 과학 아이디어의 발달이다." 과학의 역사는 맥스웰이 강조한 대로 될 것이다. - P19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보른의 확률, 슈뢰딩거의 파동,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모든 것을 상보성이 양립시킨다. 슈뢰딩거의 파동은 슈뢰딩거가 생각하는 그런 고전적 파동이 결코 아닌데, 측정하지 않을 때만 예측 가능하게 진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파동은 보어 자신의 양자적 사고의 기초인 대응원리에 맞아야 한다. 양자 시스템의 특징에 대한 실질적 설명은 결국 고전물리학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확률 구름을 관찰하지 않는다. 우리는 불확실한 것을 측정하지 않는다. 실험은 구체적인 측정값을 도출한다. - P293

마이트너는 과학학술지 <자연과학 검토>에 논문을 발표할 때 성만 적어서 제출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논문의 저자가 남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브로크하우스 출판사 역시 저자를 남자로 예상하여 백과사전 원고를 의뢰하는 편지에 "미스터 마이트너"라고 적었다. 마이트너가 자신이 여자임을 밝혔을 때, 출판사는 원고 의뢰를 없던 일로 되돌렸다.
프라하대학교가 그녀에게 강사직을 제안하지 않았더라면, 마이트너는 오토 한의 실험실에서 "무급 객원연구원"으로 시들어갔을 터였다. 프로이센 과학아카데미는 그제야 마이트너가 어떤 사람인지 기억해냈다. 마이트너는 1913년 서른다섯 살에 카이저 빌헬름 화학연구소에 정식으로 채용되었다. 그녀는 "과학의 경이로움"에 기뻐했고, 마침내 스스로 커피 살 돈을 벌게 되었다.
- P432

보어는 이따금 고등연구소 옆 아인슈타인 집에 들렀고, 두 노신사는 옛날처럼,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양자역학에 대해 다퉜다. 옛날의 결투가 더는 아니다. 오히려 소중한 루틴에 가깝다. 외로운 시간을 보내는 아인슈타인에게 이것은 위로이다. 그는 홀로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너머에 있는 한 이론을 찾고 있다. 그의 사교 범위는 괴델과 몇몇 다른 친구들로 축소되었다. 두 번의 결혼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한 아들과는 사이가 벌어졌고 다른 한 아들은 정신적으로 아프고, 딸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아인슈타인이 1955년 4월에 생을 마감할 때, 그의 연구실 칠판에는 아무 결과도 도출하지 않는 공식들이 가득 차 적혀 있었다. - P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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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역사법칙은 물리법칙만큼 절대적이에요. 오류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면 그 이유는 물리에서 다루는 원자만큼 많은 사람을 역사가 검토하지 않았고 그래서 다양한 개인차가 나타났기 때문이에요. 셀던은 1000년의 성장기 전반에 걸쳐서 위기가 여러 차례 나타날 것이며 각각의 위기는 우리 역사를 예정된 방향으로 이끄는 새로운 전환점이 될 거라고 예언했어요. 바로 그런 위기가 우리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새로운 위기가 나타나야 하는 거고요.”

베이타가 힘주어 강조했다.

지금 당장! 마지막 위기를 겪은 게 벌써 1세기인데, 지난 1세기 동안 제국에서 일어난 모든 문제점이 파운데이션에서 그대로 되풀이되고 있어요. 타성! 우리의 지배계급은 하나의 법칙만 알고 있어요. 바뀌지 않는 전체주의 법칙! 그들은 하나의 통치 방법만 알고 있어요. 무력이라는 방법. 그리고 불평등! 그들은 하나의 욕망만 추구해요. 자신의 재물을 지켜야 한다는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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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감한 진실
존 르 카레 지음, 유소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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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아빠가 아주 가끔씩 읽는 존 르 카레의 소설을 한편 이야기해줄게. 지은이 존 르 카레가 실제 첩보활동을 했었다는 이력은 여러 번 이야기했으니 지은이에 대한 소개를 건너 뛰고 바로 책 이야기를 할게. 오늘 이야기할 책은 <민감한 진실>이라는 소설이란다. 존 르 카레의 소설들은 모두 첩보, 스파이에 관한 소설이란다. <민감한 진실>도 마찬가지고

주인공 폴 앤더슨. 외무부에서 20년 넘게 일한 베테랑. 어느날 갑자기 국방성의 퍼거스 퀸으로부터 호출을 받고 갔더니 첩보원 제안을 받았단다. 그리고 받은 가명이 폴 앤더슨이었어. 폴은 왜 자신을 뽑았냐는 질문을 했지만, 답은 받지 못하고 곧바로 임무 관련된 이야기를 했어. 작전명은 야생동물작전. '윤리적 결과'라는 방위사업체의 보호를 받고 있는 엘리엇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연락이 올 거라고 했어. 며칠 뒤 엘리엇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미션을 받았어. 지브롤터에 가서 젭이란 인물을 접선하라고 했단다.

그렇게 폴은 지브롤터로 가서 젭을 만났단다. 젭은 영국 군인으로 다른 요원들과 함께 일하고 있었어. 그들의 임무는 '알라딘'이라고 부르는 폴란드인을 감시하는 거였어. '알라딘'은 무기 밀거래를 하는 사람으로 지하드의 테러리스트 펀터라는 사람과 거래를 한다고 했어.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어. 그리고 그 임무는 큰 어려움 없이 성공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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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토비 벨이라고 하는 유능한 젊은 외교관이 있었어. 어느 날 토비는 국방성 퍼거스 퀸의 개인 비서로 발령을 받았어. 토비의 외무부 상관인 자일스 오클리는 토비를 따로 불러 피거슨 퀸에 대해 이것저것 꼬치꼬치 물어보았고, 피서슨 퀸을 보좌하면서 특이한 일이 있으면 연락 달라고 했어. .. 일종의 내부 스파이라고 할까. 그런데 어느 주말에 그런 특이한 일이 일어났어. 퍼거스 퀸이 비공개 약속을 잡았는데, 보안 장치를 모두 끄고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었어.

피거스 퀸은 이 약속을 토비에게 준비해 달라고 했단다. 토비는 자일스에게 연락을 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아 이 일에 대해 행동지침을 받지 못했어. 그래서 토비는 혹시 모를 일에 대해 대비를 했단다. 퍼거스 퀸 몰래 약속장소에 도청장치를 설치했어... 그래서 토비는 그 모임에 대해 알게 되었단다. 퍼거스가 만난 사람들은 폴 앤더슨과 젭이라는 사람이었어. 아까 지브롤터에서 임무를 수행했던 그 사람들.. 그런데 이 시점이 지브롤터에서 임무를 수행하기 전인지, 후인지 명확하지 않구나. 이 만남을 토비는 자신의 외무부 상사 자일스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자일스가 말을 싹 바꾸었단다. 자신은 특이한 일이 있으면 연락 달라고 한 적이 없다고 말이야. 뭐지?

….

3년 뒤.. 크리스토퍼 프로빈과 수제너 프로빈 부부는 콘월 지역으로 새로 이사 와서 정착했단다. 크리스토퍼는 오랜 공직 생활 후 은퇴를 하고 콘월로 온 것이란다. 어느날 지역 행사에서 그들에게 한 가죽상이 접근을 했는데, 자신이 젭이라면서 크리스토퍼에게 인사를 했단다. 폴 아니면서... 크리스토퍼는 아니라고 하면서 돌아왔는데, 프로빈 부부가 산 가방 안에 쪽지가 한 장 들어 있었어. 그들이 삼 년 전에 작전 수행했던 야생동물작전의 진실이 적혀 있었어. 그들이 죽인 것은 테러리스트들이 아니고, 죄 없는 여자와 아이였다고 말이야.

크리스토퍼는 그 쪽지를 보고 당황했어. 그래, 크리스토퍼가 폴 앤더슨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던 그 사람 맞아. 폴은 모른 척 했던 젭을 다시 만나기로 했단다. 폴을 만난 젭은 그날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주었어. 그들이 알라딘이라고 부르는 테러리스트를 잡으러 간 곳에는 난민 여자와 그녀의 어린 딸만 있었고 그들은 총격에 의해 죽었단다. 그럼에도 영국정보국은 이 작전이 성공했다고 홍보를 했지. 사실 이 정보를 제공한 것이 '윤리적 결과'라는 방위산업체로부터 받은 것인데, 부패한 정치인 퍼거스 퀸이 방위산업체와 결탁한 것이었어. 이 작전은 겉으로는 성공한 것으로 알려졌고, 진실은 은폐되었고, 이 작전에 참가했던 군인들은 돈으로 입막음을 했단다.

..

 

2.

젭은 이 진실을 폭로 하려다가 불명예제대를 하게 된 것이란다. 그럼에도 젭은 이 사실을 폭로하려고 애썼고, 폴을 만나게 되어 함께 하자고 했던 거야. 충격적인 사실을 접한 폴은 당황하면서도 젭과 함께 회고록을 쓰자는 데 동의했고, 다음 약속을 잡았어. 그런데 젭이 사라졌단다. 폴은 그 전부터 알고 지내던 토비에게 편지를 해서 만나자고 했단다. 중요한 내용은 편지에 적지 않았어. 위험한 진실이니까.. 토비가 콘월로 폴을 찾아왔어. 폴은 토비에게 야생동물작전에 대해서 물어보니 모른다고 했단다.

폴은 젭이 알려준 사실을 토비에게 이야기를 해주고 도와달라고 했단다. 폴은 젭에게 연락을 하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젭의 담당의사라는 사람한테 연락이 왔단다. 그 담당의사는 젭이 머무르고 있는 정신병원의 의사라면서 젭이 정신이상상태에서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전에 이야기한 것을 무시하라고 전해달라고 했다는 거야. 하지만 젭과 직접 통화는 안 되었단다. 그 의사가 뻔한 거짓말을 한 거지. 폴의 딸, 에밀리는 현직 의사로 일하고 있는데, 에밀리가 인맥을 통해서 확인한 바로 폴에게 전화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칭해서 거짓말을 한 것이 드러났어. 그렇다면 젭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

토비는 아는 사람을 통해서 젭의 집주소를 알아내어 찾아갔더니, 폴과 만나기 하루 전에 자살했고 이미 화장까지 마쳤다는 거야. , 자살한 것이 아니고 자살 당한 것이 확실하군. 토비는 젭의 소식을 에밀리와 폴에게 알렸단다. 폴은 런던 외무부에 와서 야생동물작전에 대해 대놓고 물어보았지만, 젭이 이야기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했어. 야생동물작전은 성공한 것이 맞고 젭이 최근에 자살했다고 했어. 토비가 이렇게 들쑤시고 다니는 것을 알게 된 그의 상사 자일스는 토비에게 연락을 해서 몸 조심하라고 했단다. 충고인지, 경고인지... 그뿐만 아니었어. 토비는 계속 경고와 위협을 받았단다.

젭의 아내로부터 알게 된 젭의 동료 쇼티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사리에 쇼티와 엘리엇 등 관련자들이 모두 나와서 토비에게 경고를 했고, 토비는 자신의 집에 침입한 괴한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단다. 이렇게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때론 엄청 큰 용기를 가지고 있어야 해. 이런 토비에게 도움을 주는 있으니 에밀리였단다. 토비와 에밀리는 서로 호감을 갖는 단계가 되었어. 둘은 이 사실을 고발하기로 마음 먹는 단계에서 소설을 끝이 났단다.

소설이 깔끔하게 결론 짓지 않고 열린 결말로 끝이 났단다. 왜 열린 결말로 끝을 냈을까. 폴과 토비와 에밀리는 과연 이 사건의 진실을 온 세상에 퍼트릴 수 있을까. 아니면 젭처럼 자살을 당하거나 사고사를 당하는 것은 아닐까. 국가가 자신의 잘못을 은폐하려는 것은 비단 영국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란다. 우리나라도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잘못을 숨기는 일들을 하고 있을지 몰라. 아니, 현정권은 자신의 잘못을 숨기지 않고 떳떳하게 하고 있으니 더욱 문제인 것 같구나. 국가 중요 요직에 친일파들을 임명하면서 어찌 저렇게 떳떳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구나. 이쯤 되면 여당도 등을 돌릴 것 같은데얼마나 더 타락하는지 지켜보자.

 

PS,

책의 첫 문장: 영국령 지브롤터의 특색 없는 호텔 2층에서 유연하고 민첩한 50대 후반의 남자 한 사람이 초조하게 침실을 서성이고 있었다.

책의 끝 문장: 한데 합창이 울부짖음으로 발전하고 바깥 거리에서 자동차 브레이크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토비는-아무도, 에밀리조차도-더 이상 그 소리가 어느 방향에서 들려오는지 확실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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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밖의 개구리가 보는 한국사 - 하버드대 출신 한국학 박사에게 듣는 우리가 몰랐던 우리 역사
마크 피터슨.신채용 지음, 홍석윤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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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우물 밖 개구리

유튜브를 보다 보면 외국의 유명 대학의 교수들이 우리나라에 대한 강의를 하는 영상이 가끔 올라와 보곤 했단다. 그 어떤 노교수의 유튜브를 보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의 문화, 역사 등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셨어. 어떻게 우리나라에 대해서 잘 아실까? 검색을 해보니 하버드 대학교에서 한국학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하는구나. 그 분의 이름은 마크 피터슨이라는 분이었어.

그 분의 동영상을 보다 보니 책장에 꽂혀 있던 책들 중에 마크 피터슨 교수님이 쓰신 책들이 보였고, 그 중에 하나가 오늘 너희들에게 이야기해줄 <우물 밖의 개구리가 보는 한국사>라는 책이란다. 마크 피터슨 교수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이름도 우물 밖의 개구리란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면, 한국 밖의 외부인 시각으로 한국 문화를 보겠다는 의미라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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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처음에는 유튜브 시청자들이 불쾌해할까 봐 걱정을 많이 했다. 나는 나 자신을 우물 밖의 개구리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이 말은 상대적으로 당신들 모두는 어떤 문제를 넓은 시각으로 보디 못한다는 의미의 우물 안의 개구리라고 지칭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바로 내가 하려는 말이기도 하다. 다행히 이 말이 오만하거나 모욕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 유튜브 채널에는 비한국인으로서의 우물 밖의 개구리 관점을 설명한다는 내 생각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댓글들이 많이 올라온다. 그들은 내 생각을 흔쾌히 받아들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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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한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서 마크 피터슨 교수는 다르게 생각하신다는 것이야.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을 정리한 것이 바로 이 책이란다. 이 책은 역사학자 신채용 님과 대담 식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지은이는 공저로 되어 있단다.

우리나라와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것 중에 대표적인 것이 우리나라가 침략을 많이 받은 희생의 역사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나라가 그 어느 나라보다 다른 나라의 침략을 많이 받았다고들 알고 있단다. 아빠도 학창 시절에 그렇게 배웠으니 말이야. 하지만 마크 피터슨 교수는 한국은 한국의 역사는 침략 받은 희생의 역사가 아니고 오랫동안 평화를 유지해온 평화와 안정의 역사라고 주장하신단다. 그러면서 우리나라가 오랫동안 평화의 역사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들을 이 책에서 설명해 주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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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

나는 한국 역사를 관통하는 주요 주제는 평화와 안정이라는 점을 주장할 것이다. 이는 한국 역사를 흔히 희생의 역사라고 말하고 가르치는 것과는 정반대다. 이를 위해 나는 한국 역사를 일본 역사와 많이 비교해볼 것이다. 예를 들어 어느 장에서는 천 년 이상 동안 필기시험(과거제도)를 통해 정부 관료들을 채용해온 한국의 전동에 찬사를 보낼 것이다. 이를 일본의 사무라이 역사와 비교해보라. 그들은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가며 자리를 계승했고 그것이 실패하면 자결했다. 일본의 역사는 삶과 죽음, 살인과 권력 장악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일본에서 권력을 장악하는 자는 라이벌을 가장 성공적으로 죽인 사람이다.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한 다이묘가 마침내 천황까지 통제한다. 일본의 역사는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 투성이다. 바면 한국에서의 권력은 최고의 문장력 및 학식으로 과거 시험에서 장원 급제한 최고의 학생에게 돌아간다.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면 한국에서는 문자 그래도 펜이 칼보다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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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피터슨 교수가 우리나라가 침략을 받은 것이 적다고 하면서 몽골의 침략과 임진왜란과 일제 침략, 이 정도가 큰 침략이었고, 다른 침략들은 성격이 다르거나 규모가 작은 것들이라고 했어. 특히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반기를 든 조선 정부와 동맹을 맺기 위해 침략한 것으로 이 때 희생된 사람들도 많지 않다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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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1627년과 1636년에 일어난 만주족(후금, 청나라)의 두 차례 침략(정묘호란과 병자호란)도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침략으로 언급되지만 사망자 수는 수백만 명 정도가 아니라 수천 명에 그쳤습니다. 이 침략의 목적은 백성을 죽이고 약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국에 새로 들어온 청왕조가 조선을 동맹국으로 삼기 위해 벌인 전쟁이었지요. 그 전쟁이 두 차례의 침략으로 이어진 이유는 조선이 동맹국이 되는데 동의했으면서도 비밀리에 명나라와 접촉해 청나라를 공격하는 방안을 모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조선과 명나라의 밀약을 알게 된 만주족은 다시 조선을 침략해 왕(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을 받아냈지만 이번에는 청 왕도에 대한 조선 왕의 충성을 담보하기 위해 왕의 세 아들을 인질로 잡고 조선에서 철수했지요. 그들은 조선에 군대를 남겨두거나, 총독을 임명해 조선 조정을 통제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 그대로 완전히 조선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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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들에 공감이 가더구나. 그런데 마크 피터슨 교수는 어떻게 이렇게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그는 1965년 선교사로 처음 한국에 왔다가 한국에 매력에 푹 빠져서 한국에 대해 연구를 하였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한국학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까지 땄다고 하는구나. 1965년 처음 한국에 발을 디딘 이후로도 여러 차례 장기간 한국에 머물렀다고 하셨어. 그러니 한국 문화도 그렇게 잘 아시고 우리 말도 그렇게 잘 하시는 거구나.

 

1.

그렇다면 마크 피터슨 교수가 우리나라의 역사가 평화와 안정의 역사라고 생각하는 근거들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이야기해줄게. 먼저 특정 성씨들이 많다는 거야. 다른 나라들은 나라가 바뀌면 기존 왕의 성씨들은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어 왕의 성씨들이 줄어들게 되는데, 우리나라는 김씨, 이씨, 박씨 등 옛 나라의 왕의 성씨들이 오늘날까지 많다고 하면서 이것은 나라가 바뀔 때 평화적으로 바뀌고 복수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하셨어.

아빠는 두 가지 의문이 들었어. 고려 시대의 왕의 성씨 왕() 씨의 인구는 적고, 조선 시대 초기 왕() 씨 성을 숨기기 위해 성을 전() 씨나 전()으로 바꾸었다고 알고 있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하실까. 그런 반문을 예상하셨는지, () 씨가 오늘날 적은 것에 대해서는 고려 시대에서 왕 씨가 많이 않았다고 하는구나. 지금의 숫자가 고려 시대의 왕 씨의 비율에 비해 그리 적은 것이 아니라고 했단다. 하지만 왕() 씨 성을 전() 씨나 전() 씨로 바뀐 것에 대한 언급은 없었단다. () 씨 성을 전() 씨나 전() 씨로 바꾼 것은 혹시 아빠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또 한 가지 김 씨, 이 씨, 박 씨가 많은 이유가 조선말기 신분제도가 해체되면서 족보를 가짜로 만들면서 김 씨, 이 씨, 박 씨 성으로 많이 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에 대한 이야기도 언급이 없어 아쉬웠단다.

두 번째로 우리나라가 평화의 역사를 가질 수 있는 요인은 압록강이라는 큰 강이 국경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했어. 이민족들은 그 큰 강을 쉽사리 넘지 못하기 때문에 침략이 적었다는 거야. 신발을 벗은 온돌 문화도 평화의 역사의 근거로 들었어. 도망 갈 일이 없어 신발을 벗고 지냈다고 하는데, 이것은 근거가 조금 약해 보였단다. 도굴되지 않은 무덤들이 많다는 것도 왕을 높게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고, 봉건제도가 없는 것도 일찍이 왕 중심의 중앙집권체제의 안정된 체제를 가지고 있다고 했어. 또 하나 문치에 의한 통치가 오랫동안 평화를 유지할 수 있던 힘이라고 이야기하셨어.

=====================

(83)

나는 한국이 안정적으로 평화적인 문치의 역사를 유지해온 핵심적인 이유가 몇 가지 있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인이 아닌 선비에 의한 정부였다는 점을 누차 강조해왔습니다. 모든 관리들은 과거 시험을 통해 등용되었으니까요. 정말이지 한국의 역사는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진리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과거 시험은 유교적 철학적 문제에 관한 것이었지요. 비록 그 제도가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지만 한국은 중국보다 그 제도를 훨씬 더 완벽하게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거듭 강조하지만 한국은 중국처럼 그렇게 많은 침략을 받지 않았습니다. 한국이 겪은 침략과 중국이 겪은 침략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그 횟수가 적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중국이야말로 한국보다 훨씬 더 큰 침략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지요.

=====================

 

2.

그 밖에 우리나라 문화에 대해서도 많이 이야기를 해주셨단다. 우리나라는 한()의 민족이라는 말을 많이들 한단다. 한 맺힌 일들이 많아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것이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단다. 하지만 마크 피터슨 교수가 말씀하시기를 그것은 일제 감정기 식민사관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는구나. 약간 충격적이란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었어.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한()의 민족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심지어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였으니까 말이야. 이것이 다 교묘한 식민사관이었다니….

=====================

(108)

최근에는 ()’이라는 개념이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신 박사님도 그것이 일본의 강제 점령에서 나온 식민지 역사관의 일부라고 말씀하셨는데, 맞습니다. 나는 식민사관에 의한 역사 해석이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어떤 맥락에서는 식민사관이 한국 역사에 대해 지나치게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고, 조선 시대 당파 논쟁도 자신들의 시각대로 극단적인 대립으로 해석했지요. 한국 역사를 식민지 과점으로 보는 시각이 분명히 있다는 주장은 기본적으로 옳은 지적입니다. 한국 역사의 왜곡은 일부는 식민사관을 가진 악의적인 일본 역사학자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생긴 것이고, 일부는 유럽에서 들어온 시대에 뒤떨어진 이데올로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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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유교를 기반으로 한 생활문화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시각으로 이야기하셨어.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자유롭고 개방적인 한국식 유교 문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확 바뀌었다고 했어. 그건 널리 상식으로 알려져 있으니 새로운 것이 없었지. 그런데 그렇게 유교가 변하게 된 시점에 대해서는 시각 차이가 있단다. 보통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유교가 변했다고 생각을 하는데, 마크 피터슨 교수는 그 때가 아니라고 하셨어. 임진왜란이 끝나고도 2~3세기가 더 흐른 다음에 변화가 생겼다고 했어. 그 때 중국식 유교가 유입되면서 자유롭고 개방적인 한국식 유교가 폐쇄적인 유교가 변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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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여기서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사항은 이런 변화가 임진왜란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1592, 1627, 1636년의 전쟁 이후에 조선이 사회 경제적으로 크게 변화했다고 말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전쟁 후에 한국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전쟁 이전 상태의 사회와 정부를 복원하는 것이었지, 어떤 변화된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언급하는 조선의 사회적 경제적 이념적 변화는 그로부터 2~3세기 지난 뒤에 찾아왔는데, 이 점이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조선의 이런 변화가 일본인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주장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 한국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지요. 백성들을 전쟁터에서 남겨 놓고 도망간 불명예스러운 왕, 한양을 떠날 때 백성들이 돌을 던졌던 그 왕이 돌아와 다시 왕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조정의 관리들과 정부도 이전과 같이 재건되었고, 농부들도 다시 그들의 농토로 돌아갔으며, 그리고 가장 놀랍게도 노비들도 다시 노비로 돌아왔습니다.

=====================

….

마크 피터슨 교수는 우리 옛 문학의 한 장르인 시조(時調)도 사랑하신다면서 정몽주의 단심가 등을 즉석에서 읊으실 수 있을 정도였어. 그러면서 우리나라 내에서 시조가 쇠퇴하고 있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셨단다. 오히려 외국에서 시조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면서 시조에 관련된 행사들이 많이 열리고 있다고 했어. 이런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는데, 이것은 나라에서 좀더 신경을 썼으면 좋겠구나. 그런데 지금 정부에는 기대하기 어려우니, 다음 정권에서

=====================.

(246)

국제사외는 이제 막 시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한국 국내에서보다 해외에서 시조를 더 많이 쓰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한국 밖에서 시조 운동이 활발하게 성장하고 있으니 이제 국내에서도 시조를 한국 문화의 살아 있는 전통으로 부흥시키고, 교육 시스템 내에서뿐만 아니라 방과 후 생활 속에서도 시조를 쓰는 훈련을 계속함으로써 학생들이 더 창의적이 되기 위한 길을 마련해주어야 합니다. 시조 만세, 만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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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대략적으로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봤는데, 우물 안에서 틀에 고정된 역사 공부로 각인된 우리나라의 역사사관을 깨는 새로운 시각이 좋았단다. 그것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또 하나의 역사가의 역사관으로 생각하면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도 왜곡된 역사관으로부터 얻은 지식일 수도 있으니 말이야. 아직도 우리나라에 일본 식민 사관에 물든 역사학자들이 무척 많으니 말이야. 이번 정부에서 그런 친일 사관을 가진 자들이 국가 정부 요직에 계속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답답하기 그지없구나. 도대체 이런 친일 정권이 어떻게 멀쩡할 수가 있는가? 3, 아니 3일도 너무 길다

 

PS,

책의 첫 문장: 처음 한국 문화를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싶었다.

책의 끝 문장: 이 책은 한국의 역사가 놀랄 만큼 문민적이고, 안정적이며, 평화롭고, 독특하다는 증거를 많은 분야에서 제시하고 있다!

 



요즘 일부 한국인들은 미래를 걱정한다. 오랜 원한이 맺힌 일본이나 중국의 침략 가능성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런 우려에 대한 내 대답은 ‘한국인은 한국어로 말한다’라는 것이다. 그 말의 의미는 한 나라의 모든 문화적 사안 중에서 언어가 단연 문화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중국은 수 세기 동안 한국을 속국으로 삼아왔으면서도 한국인의 언어를 파괴하지 않았다. 반면 일본은 한국인의 언어를 파괴하고자 노력했고 마침내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본이 전쟁에 패해 한국을 떠나자마자 한국인들은 곧바로 한국어를 사용했다. 그들은 일본어로 말하라고 강요받았을 때도 한국어를 썼다. 그들은 공적으로 일본어를 말하도록 강요받았지만 사적인 공간에서는 여전히 한국어를 사용했다. - P13

한국사에 대한 나의 가장 기본적 시각은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한국사에 대해 전반적으로 매우 왜곡된 관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의 가난과 억압으로 왜곡되었고 외부의 영향, 특히 일본에 의해 때로는 고의적으로 때로는 부지불식간에 왜곡되어온 것이다. 나는 한국을 희생자라고 보는 일반적 서술이 매우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국이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전반 대부분 기간에 일본의 희생물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런 인식은 일본으로부터 해방되고도 끝나지 않았다. 일본의 식민지 점령보다 더 큰 피해를 초래한 한국의 분단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존재하는 피해의식의 요인이 되었다. 희생이 한국 역사에서 강력한 주제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한국 역사의 유일한 주제는 아니다. - P35

조선 왕실 사위들의 족보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신채용 박사는 <선원록>이라는 왕실의 족보를 통해 왕실 사람들과 주요 정치 세력 사이의 관계를 연구했습니다. <선원록>은 세계 어느 왕실의 왕족 족보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정말 웅장한 족보입니다. 조선의 왕실보다 족보를 더 소중하게 기록하고 보존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왕실의 족보는 그 나라 족보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지요. 더구나 한국의 모든 왕실은 어느 왕조에서나 자신들의 족보를 인쇄물로 남겼습니다. 족보는 왕실의 권위를 나타냈으니까요. - P230

물론 한국사 교육에서도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적4어도 한국사의 핵심 문제들에 대해서는 전반적인 방향 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나는 그런 여러 가지 문제들을 개략적으로 설명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한국 역사를 희생의 역사로 보는 관점이다. 물론 20세기만 보면 한국은 분명 희생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은 더 이상 20세기가 아니다. 그리고 20세를 너머 한국 역사를 보면 한국의 전 역사를 희생의 측면으로 보는 것도 사실이 아니거니와 비생산적이기도 하다.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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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9-26 09: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피터슨 교수님 유명한 분이시죠. 유튜브도 하시는 것 같더라구요.

bookholic 2024-09-27 09:10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유튜브를 통해서 알게 되었어요...^^
피터슨 교수님께서 오래오래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마힐 2024-09-26 14: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크 피터슨 교수님을 통해서 갇혀 있는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길 희망해 봅니다. bookholic님 자녀분들 덕분에 제가 덩달아 같이 공부 합니다. ㅎㅎ 오늘도 좋은 글 올려 주셔서 감사 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bookholic 2024-09-27 09:1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마크 피터슨 교수님 같은 분들 분들에 또다른 관점을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마크 피터슨 교수님께서는 최근 친일인사들의 역사 단체 수장을 맡는 것을 어찌 생각하실지 궁금하네요..
 
와일드 시드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조호근 옮김 / 비채 / 2019년 8월
평점 :
품절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작년에 옥타비아 버틀러의 대표작 <>을 재미있게 읽고 그의 다른 작품들을 두어 권 더 구매했단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주로 SF 소설을 썼는데, 이번에 읽은 <와일드 시드> SF 소설이란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흑인 여성 작가로 <>에서도 흑인과 여성이라는 주제가 책에 녹아 있었는데, 이번에 읽은 <와일드 시드>도 그런 내용을 의식하고 읽게 되더구나. 그래서 옥타비아 버틀러의 소설들은 다른 SF 소설과 다른 영역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는 페미니스트, 흑인, 거대 도시에 사는 은둔자, 그리고 열 살 때의 꿈을 잊지 않고 여든 살이 되어서도 계속 글을 쓰고 있기를 꿈꾸는 작가이다.” 이 말은 옥타비아 버틀러가 한 말이란다. 그렇게 오랫동안 글을 쓰시면서 사셨으면 좋았을 텐데, 58세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지셨다고 하더구나.

….

 

1.

주인공의 이름은 도로. 보통명사 도로와 똑같아서 잠깐 딴 생각을 하고 책을 읽으면 보통명사 도로인줄 아는 경우도 있으니, 이 책을 읽게 된다면 유의해야 함. 주인공 이름을 '도오로'로 번역해도 괜찮았을 텐데... 아무튼 도로는 초인이란다.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어. 소설의 시작 시점인 1690년 기준으로 도로는 삼천 년을 넘게 살아왔단다. 그런데 독특한 것은 한 육체로 그렇게 살아온 것이 아니라, 다른 육체를 죽이고 그 육체에 자신의 혼이 들어가는 방식이란다. 마치 오래된 옷을 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 입는 것처럼 말이야.

도로는 세계 이곳 저곳에 자신과 비슷한 종족을 만들기 위해 부족을 키웠는데, 아프리카에 만들어 놓은 일족이 모두 사라지는 일이 일어났어. 1690년대 아프리카라면 한창 노예 사냥을 하던 시기였는데, 아마도 노예 상인들이 그들을 납치해 간 것 같았단다. 이곳 저곳 자신의 일족들을 찾으러 다니다가 도로는 아냥우라는 여자를 만났단다. 아냥우도 초인이었어. 아냥우도 300년 넘게 살았으며, 자신의 모습을 바꿀 수 있었단다. 사람뿐만 아니라 표범이나 돌고래 같은 동물로도 바꿀 수 있었어. 이 소설의 장르가 SF라는 점을 명심하자꾸나.

도로는 아냥우에게 함께 가자고 했어. 그리고 함께 강력한 동족을 만들자고 했어. 일종의 청혼 같은 거지... 아냥우는 고민을 하다가 도로가 싫지 않았는지 알겠다고 했단다. 도로와 아냥우는 또 다른 도로의 일족이 있는 곳을 갔단다. 도로에게는 아들 아이작이 있었고, 아냥우에게는 손자 오코예가 있어서 함께 길을 갔단다. 오코예는 노예로 팔릴뻔한 것을 도로가 구해주었단다. 그들은 배를 타고 다른 대륙으로 갔단다. 그 대륙은 얼마 전에 유럽인들에게 발견된 아메리카 대륙이었던 거야.

....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그들은 도로의 일족들이 살고 있는 휠러라는 마을에 도착했단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왔기 때문에 아냥우도 그곳 사람들에 맞게 옷도 드레스로 바꿔 입었단다. 그리고 휠러 사람들의 풍습에 따르려고 했단다. 아냥우에게 있어 이해 가지 않는 것 중에 하나는 사람들이 우유를 먹는 것이었단다. 짐승이 먹는 것을 왜 사람들이 먹냐면서 말이야. 생각해 보니, 그렇네.

...

한편, 휠러에 와서 도로가 아냥우에 대한 태도를 바꿨어. 사실 도로는 아냥우를 데리고 온 것은 그저 자신의 배필로 데리고 온 것이 아니었단다. 도로는 오직 우수한 능력을 가진 이들을 낳는데 첫 번째 목적을 두고 있단다. 그렇게 데리고 온 외지인을 그들은 와일드 시드(wild seed)라고 불렀단다. 이 소설이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출간될 때는 제목을 wild seed를 번역하여 <야생종>으로 출간한 적도 있었단다. 아무튼 도로의 목적으로 우수한 후속은 낳는 것이기 때문에 아냥우를 자신과 이미 잠자리를 가졌지만, 자신의 아들 아이작과 결혼시키려고 했단다. 도로를 남편으로 생각하고 왔던 아냥우는 도로의 그런 비도덕적인 행동에 결혼을 거부하려고 했단다.

 

2.

시간은 흘러 1741년이 되었어. 소설의 시작 시점으로부터 50년이 흘렀지. 도로와 아냥우는 여전히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나이를 먹었어. 도로가 자신과 똑같은 초인의 능력을 가진 후손을 낳으려고 노력을 했지만, 다른 범상한 능력을 가진 이들은 많았지만 그처럼 영생하는 하는 이는 아직 없었어. 삼천 년 넘게 노력해서 없으면 없는 거지, ... 다른 범상한 능력은 가진 이들을 보면, 생각을 읽을 줄 아는 사람, 다른 사람을 치유해 줄 수 있는 사람 등이 있었단다. 50년 전에 아냥우가 아이작과 결혼을 거부했지만 결국 결혼하게 되었단다. 아이작은 도로와 달리 아냥우에게 잘 대해주었단다. 그래서 아냥우도 아이작을 믿고 사랑하게 되었어. 하지만 아이작은 점점 늙어갔지. 아지작은 아냥우를 도와주려다가 그만 죽고 말았단다. 아냥우는 더 이상 도로의 폭력성과 권위를 참지 못하고 도망가기로 했단다.

....

시간은 또 흘러 1841.. 백 년이 흘렀어. 1741년 때 이야기했던 이들은 모두 죽고 사라지고, 도로와 아냥우만 여전히 살고 있었어. 도로는 여전히 자신을 따르는 일족을 만들고 여러 우수한 야생종들을 데리고 와서 또 후손을 만들었어. 도로는 왜 자신의 후손을 만드는 일에 집착을 할까. 도로는 한편 도망간 아냥우를 추격하하게 되는데 결국 다시 만나게 되었어. 그들이 떨어져 있던 100년의 시간 동안 아냥우도 나름 자신의 일족을 만들어 평화롭게 살고 있었어. 하지만 도로가 다시 와서 갈등을 빚었지만, 도로도 아냥우를 대하는 것이 예전 같지 않았단다. 이해하려고 했고, 그런 변한 도로를 본 아냥우도 진정한 사랑의 감정이 싹텄어. 교배가 아닌 진정한 사랑 말이야. 그러나 아냥우는 사는 게 지쳤다고 자살하기로 했단다.

도로뿐만 아니라 아냥우의 일족들은 아냥우의 자살을 만류하게 되고, 아냥우는 도로에게 약속을 하나 하면 자살하지 않겠다고 했어. 도로가 다른 사람들에게 행하는 폭력을 하지 않고 살인도 하지 않는다면 자살하지 않겠다고 했단다. 결국 아냥우는 자살하지 않았어. 도로도 진정한 사랑을 얻은 다음 제대로 된 사람이 되는 모양이구나. 그런데 그 진정한 사랑을 얻는데 삼천 년이 넘게 걸린 거야? 그런데 그 사랑이라는 것이 영원할까? 그 사랑이 변하고 식는다면 예전의 도로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을까? 백 년도 못사는 사람들도 성격 변하기 쉽지 않은데 삼천 년 넘게 산 사람의 성격이 과연 변할까. 아빠는 부정적으로 본단다. 소설은 도로와 아냥우가 이해와 사랑으로 끝을 맺었지만, 그 이후의 삶에는 큰 기대가 안 가더구나.

....

이 소설은 남성 우월주의를 빗댄 소설처럼 보이기도 하는 소설이었어. 옥타비아 버틀러의 전작 <>을 재미있게 봐서 기대치가 높은 상태에서 <와일드 시드>를 봐서 그랬는지 아빠는 별로였단다. 도로가 왜 이렇게 자손 번식에 집착했는지도 모르겠고 말이야. 그런데 도로와 같은 능력이 있다면 어떨까.. 자꾸 다른 사람의 몸을 옮겨 타야 영생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쌓이는 죄책감으로 정신질환이 걸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어. 그냥 아냥우처럼 자신의 몸으로 영생하는 것이 훨씬 좋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가끔씩 되고 싶은 동물이나 사람이 되어도 좋고.. 그러고 보니 아냥우의 능력이 더 뛰어난 것 같은데, 왜 도로를 제압하지 못했을까? 그렇게 도망다니지 말고 거대한 동물이나 포악한 동물이 되어 도로를 제거했으면 된 거 아닌가? .. 이래저래 기대에 조금 못 미친 소설이었어.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도로는 자신의 종자(seed) 마을 한 곳을 수습(收拾)하러 떠난 여행길에서 우연히 그녀를 발견했다.

책의 끝 문장: 그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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