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2)

겐테 박사는 서울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서울의 로케이션은 아주 독특하다. 사방에 뾰족하고 높고 힘찬 산들이 민가가 들어선 곳까지 뻗어 내려오면서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이 서울의 모습이다. 이런 전망(view)을 가진 서울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장 아름답고도 꼽는 군주국 도시 명단에 들어가야 할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서울을 페르시아 수도 테헤란과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와 비교해보면 비슷한 점이 많다.

그러나 서울에는 (…) 잘츠부르크처럼 웅장하고 엄숙한 기사의 성채가 없고, 테헤란의 (…) 위엄 넘치는 다만반드(Damavand) 산처럼 거대한 산도 없다. 그러나 서울보다 고도가 약 300미터 높을 뿐인 남산에서 내려다보면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44-45)

성종 19(1488)에 명나라에서 온 동월이라는 사신은 <조선부>에서 서북쪽에서 들어오며 한양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찬미했다.

임진강 나루를 건너 파주에 이르러 한성을 바라보니 저 높이 서기(瑞氣)가 어리었다. 벽제관을 지나 홍제원에 당도하니 여기가 조선의 서울인데 동편으로 우뚝하다. 높은 삼각산에 받쳐 있고 울창한 푸른 소나무 그늘에 덮여 있다. 북쪽은 천 길로 이어져 내려서 그 기세는 진정 천군(千軍)을 누를 만하고 서쪽을 바라보니 한 관문(關門)이 있는데 오직 말 한 필 드나들 만하다. 산은 성 밖을 둘렀는데 날쌘 봉황이 날아가며 번뜩이는 것 같고 소나무 아래에 흰모래는 마치 쌓인 눈에 햇볕이 내리쬐는 듯하다.”


(48)

단적으로 말해 한양도성은 전란을 대비해 쌓은 성곽이 아니라 수도 한양의 권위와 품위를 위해 두른 울타리다. 집에 담장이 있고, 읍에 읍성이 있듯이 수도 서울에 두른 도성이다. 영어로 말해서 포트리스(fortress)가 아니라 시티 월(city wall)이다. 만약에 전쟁을 대비해 성곽을 축조했다면 석벽을 사다리꼴로 높이 쌓고 성곽 둘레에 해자를 깊게 파서 두르는 등 겹겹의 방어시설을 구축했어야 했다. 도성이 울타리이기 때문에 숭례문을 비롯한 관문도 사람들이 드나드는 통행문 이상의 기능을 하지 않았다. 동대문을 옹성처럼 두른 것은 전투를 의식해서가 아니라 풍수상 허하다는 서울의 동쪽 지세를 보완한다는 의미였을 뿐이다.


(64)

풍경 뻬레스트로이까 북악산 개방에 부쳐(황지우)


뉴욕에도 도쿄에도 베이징에도 베를린,

모스끄바에도 없는 산()

단 하루도 산을 못 보면 사는 것 같지가 않은,

산이 목숨이고 산이 종교인 나라에

오늘

싱싱한 산 한 채가

방금 채색한 각황전(覺皇殿)처럼

사월 초순 첫 초록 재치고

솟아올랐네.


저 권부의 푸른 기와집 그늘에 가려

지난 반세기 마음의 위도에서 사라졌던 자리에서

오늘 이제는 육성으로 이름 불러도 될

그대 백악이여,

금지된 빗금을 넘어 그대가

사람 만나러 내려올 때

솟아난 것은 한낱 돌덩어리가 아닌

우리네 마음의 넉넉한 포물선이었구나.


이렇게 풀어버리니 별것도 아니었던 두려움이,

홍련사에서 숙정문 지나

창의문에 이른 길 따라,

혼자 보기엔 너무 아까운 아름다움이 되었으니

아무나 그 문들 활짝 열어

그대 슬하에 감추인 말바위며 촛대바위를

순우리말로 되찾아오네.

하여 차출된 팔도 머슴애들의 사투리를

잘 짜 맞춘 성곽이

산허리를 재봉틀질한 것 같은

역사의 긴 문장이 되고

그 쉼표마다 돌아서 내쉰 한숨이

이렇듯 위업이 되었음에랴, 하지만.

이렇듯 풀과 꽃과 나미가 되돌아온 자리에

제 빛깔과 향기가 이름을 되물려 주는 것만으로도

이보다 더 한 위업이 있을까!


, 이제 가물면 북문(北門)을 열어주고

물 넘치면 그 문 닫아둘 수 있는 산,

동네 처자들 숙정문 세 번 가면

안 되는 사랑도 이루어진다는 그 소문난 산,

파리에도 런던에도 하노이, 시드니에도 없는 산,

봄비 그치고 송진처럼 물방울 맺힌 나뭇가지 사이로

마침내 사람 눈을 만난 북악산

그 언저리 허공 어디쯤

붉은 낙관(落款) 한 점 꾸욱 눌러두고 싶네.


(125)

인조반정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연산군 때 탕춘대 절벽 밑 좌우로 흐르는 물을 가로질러 돌기둥을 세워 옆으로 긴 누각을 지었다.”고 했고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성종 때 문신인 성현(成俔) <용재총화>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도성 밖에 놀 만한 곳으로는 장의사 앞 시내가 가장 아름답다. 시냇물이 삼각산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나오고 골짜기 안에는 여제단(厲祭壇)이 있으며 그 남쪽에는 무이정사(武夷精舍, 무계정사를 말한 듯함)의 옛터가 있는데 길 앞에는 돌을 수십 길이나 쌓아올린 수각이 있다. 또 절 앞 수십 보 앞에는 차일암(遮日巖)이 있는데, 바위가 절벽을 이루어 시내를 베고 있는 것과 같으며 그 바위 위에는 장막을 칠 만한 우묵한 곳이 있는데 바위는 층층으로 포개져 계단과 같다. 흐르는 물소리가 맑은 하늘 아래 천둥 번개가 치는 듯해 귀가 따갑다. 물이 맑고 돌이 희어서 선경(仙境)이 완연하다.”


(151)

석파(이하응)는 난초 그림뿐만 아니라 시도 잘 지었고, 글씨도 잘 썼고 독서도 많이 했다. 그가 즐겨 사용한 문자도장에는 이런 멋진 문구가 있다.

讀未見書 如逢良士

讀己見書 如遇故士

아직 보지 못한 책을 읽을 때는 어진 선비를 만나듯 하고

이미 본 때를 읽을 때는 옛 벗을 만나듯 한다.”


(152)

유주학선 무주학불(有酒學仙 無酒學佛)

술이 있으면 신선을 배우고 술이 없으면 부처를 배운다.”

인생의 여유와 허허로움을 느끼게 하는 명구가 아닐 수 없다. 석파정에서 동쪽으로 건너다보이는 북악산 아래에는 추시가 지내던 백석동천 별서가 있다. 이제 백석동천으로 발을 옮기자니 사제지간에 이렇게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왠지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어쩌면 별서의 팔자였는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든다.


(168)

현진권은 자신이 역사소설로 돌아선 이유에 대해 <문장> 1939 12월호에 <역사소설문제>를 기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사실을 위한 소설이 아니오. 소설을 위한 사실인 이상 그 과거가 현재에 가지지 못한, 구하지 못한 진실성을 띄었기 때문에 더 현실적이라고 믿습니다. 현재의 사실에서 취재한 것보담 더 맥이 뛰고 피가 흐르는 현실감을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비현실적이라는 둥 도피적이라는 둥 하는 비난의 화살은 저절로 그 과녁을 잃을 것입니다.”


(176-177)

나는 이 집의 돌기와 지붕을 얹은 긴 콩떡 담장에서 우리나라 한옥 담장의 미학을 본다. 중국의 담처럼 바깥과 철저히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환경과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다. 비탈을 오르는 돌담의 기와 지붕이 계속 높이를 달리하는 것도 즐겁다. 이 돌담이 있음으로 해서 이 동네 거리가 얼마나 고상해지고 품격이 높아지는가 생각하면 내 주장에 수긍할 것이다. 돌담도 사괴석(四塊石)으로 권위 있게 쌓은 것이 아니라 막돌을 얼기설기 쌓고 흰 강회로 마감한 콩떡 담장인지라 더 정감이 간다.


(196)

그런 경운궁이 다시 역사의 주무대에 등장한 것은 1897 2월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1895)을 겪은 고종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지 1년 뒤에 경복궁이 아니라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 조선왕조의 마지막 법궁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그해 10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경운궁은 황궁이 되었다.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되고 뒤를 이은 순종황제가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경운궁에 상황(上皇)으로 남은 아버지께서 덕에 의지해 장수하시라는 뜻으로 덕 덕() , 목숨 수() , 덕수(德壽)라는 이름을 지어 바쳤고 이후 덕수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283-284)

그런가 하면 대한문의 한() 자를 중국의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 중국을 숭상하는 뜻이 있다는 주장, 혹은 조선도 중국처럼 큰 나라라는 뜻이라는 설도 나왔다. 반대로 이 글자를 놈이라는 뜻으로 해석해 이토 히로부미가 큰 놈이 드나드는 문이라는 뜻으로 바꾸도록 강요했다는 주장도 생겼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낭설이다. 1907년에 편찬된 <경운궁 중건도감 의궤>에 실려 있는 이근명(李根命) <대한문 상량문>에 그 내력이 소상히 밝혀져 있는바, 대한은 큰 하늘이라는 뜻으로 새로 태어난 대한제국이 하늘과 함께 영원히 창대하라는 염원을 담은 것이다.


(381)

성균이란 음악에서 음을 고르게 주율하는 것을 뜻하며 <주례(周禮)> <대사악(大司樂)>에서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성균의 법을 관장하여 국가의 학정(學政)을 다스리고 나라의 자제들을 모아 교육한다.”

그리고 주소(注疏, 각주)에서는 그 뜻을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이란 그 행동의 이지러진 것을 바르게 하는 것이고, ()이란 습속의 치우침을 균형 있게 하는 것이다.”


(387-389)

모든 선비들이 학문에 힘쓰고 품행을 깨끗이 해 세상에 나오면 왕조의 존경 대상이 되고, 들어앉아서 유림(儒林)의 표상과 기준이 된다면 국가적으로는 그것이 큰 디딤돌이 되어 굳이 까다로운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법은 엄해질 것이요, 비단결같이 꾸미지 않아도 문장은 유려할 것이며, 노래와 춤이 아니어도 백성들은 즐길 것이고, 사냥 연습이 아니고도 병력은 강해질 것이며, 100년이 안 되어도 예악(禮樂)이 흥성해질 것이다.”

이렇게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서두를 시작한 정조는 나라에서 학생들을 예우하는 뜻을 이렇게 말했다.

요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한결같이 지금 선비들의 처신이 예만 못하고, 학문도 지금 선비들은 예만 못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지껄이는 소리에 불과하다. 지껄이는 자 역시 지금의 선비가 아니란 말인가.

선비를 만들고 뛰어난 인물을 장려하는 것이 왜 괜한 일이 일이겠는가. 선비로서 자신을 아끼는 것과 남들이 아껴주는 것 모두가 국가에서 그들을 어떻게 대우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학생들에게 열심히 공부에 임할 것을 부탁하는데 그것은 의례적인 훈시가 아니라 술잔을 내려주며 하는 격려였다.

이제 먹을 것과 함께 은술잔을 내린다. 제생(諸生)들은 술잔 속에 아유가빈(我有嘉賓)’이라 새겨져 있는 것을 아는가? ‘나에게 아름다운 손님이 있다는 이 말은 <시경> ‘녹명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빈객과 자리를 함께하는 것이란 그 얼마나 좋은 일인가. 밤새도록 자리를 뜨지 않고 갖옷 없이도 추위를 느끼지 않으며 또 피곤도 느끼지 않는다. 이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영재를 육성하는 데 일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새긴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부탁하는 말로 끝맺는데 그 비유의 뜻이 자못 사람을 긴장하게 만든다.

! 제생들아! 그대들은 나의 이 말로 하여 혹 느슨하게 생각하지들 말고 한 치 한 푼이라도 오르고 또 올라 마치 100리 길을 가는 사람이 항상 90리를 절반쯤으로 생각하듯이 하라. 그리하면 자만하고 싶어도 자만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계속해야 할 것이 학업이고 무궁무진한 것이 덕이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바라는 것은 제생들이 그렇게 계속 노력하여 무궁한 발전을 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제생들이여! 감히 노력하지 않아서 되겠는가.”

정조의 ‘100리 길을 갈 때 90리를 절반쯤으로 생각하라는 말에 나는 그간 80리만 가도 다 간 기분으로 살았던 것 같아 조금 뜨끔했다.


(409)

먼 옛날로 돌아가서 600여 년 전, 수도 한양의 도시계획 마스터플랜을 설계한 삼봉(三峯) 정도전은 동네마다 이름을 지으면서 성균관 일대는 가르침을 숭상한다는 의미로 숭교방(崇敎坊)이라고 했다. 오늘날 대학로가 있는 성균관 옆 동네가 동숭동(東崇洞)인 것은 숭교방의 동쪽이라는 뜻이다.


(448)

성균관이 강학공간인 명륜당(明倫堂)과 향사공간인 대성전(大成殿)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교()와 학()이 분리되지 않아 유학(儒學)이면서 동시에 유교(儒敎)임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그 때문에 불교와 마찬가지로 유교의 성현을 모시고 예를 올리는 종교공간을 갖고 있는데 이를 문묘(文廟)라 한다. 불교에 사찰이 있듯이 유교엔 문묘가 있고, 사찰에 대웅전이 있듯이 문묘엔 대성전이 있고, 사찰에 관음전, 지장전이 있어 보살을 모시듯이 문묘엔 동무(東廡), 서무(西廡)가 있어 역대 성현들을 모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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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철 2020-08-17 08: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읽고 쓰고 잊는다...
황지우님의 시 잘 읽고 복사해 갑니다.
감사합니다.

읽고 복사하고 저장해두고 잊는다.
 

군대이야기는 지루해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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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쓸모 - 자유롭고 떳떳한 삶을 위한 22가지 통찰
최태성 지음 / 다산초당 / 201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최태성이라는 분이 쓴 <역사의 쓸모>라는 책을 읽었단다. 이 책은 우연히 알게 되었어. 이 책이 출간할 때쯤 인터넷 서점 알라딘 이벤트로 이 책의 맛보기 형식의 책자를 준 적이 있었단다. 그것을 읽은 것은 아니야. 그저 이 책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지. 시간이 좀 지나서 알라딘 중고서점에 갔다가 이 책이 있길래 이 책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던 때가 떠올라 책을 펼쳐 보았단다. 역사학자의 교양 역사쯤으로 생각했는데, 역사서보다 에세이에 가까웠단다. 읽기도 편했고, 역사 속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에 대한 소개도 좋았단다.

책날개에 있는 지은이 약력과 책 중간 중간에 나오는 지은이 자신의 이야기를 읽고 이 사람 또한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을 오랫동안 하면서, EBS에서 강의도 하셨대. 그러면서 학생들의 후기를 받기도 했는데, 형편이 안되어 제대로 된 강의를 받지 못한다는 안타까운 내용도 있었대. 그리고 그는 결심했지. 무료로 역사를 가르치는 일을 하겠다고 말이야. 그래서 무료 인터넷 강의 사이트를 개설해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고 하는구나. 그것이 20년이나 되었대.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그 꾸준함과 성실함을 유지하기 쉽지 않은데 말이야. 그 뿐만 아니라 여러 강연도 많이 하고 방송출현도 많이 하는 유명한 사람이 되었어. 사실 아빠는 지은이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 줄 몰랐어.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사람이거든. 책을 읽고, 유튜브에서 그의 강연을 한번 봤단다. 역사 강의아주 액티브하고 에너지 넘치는 강의를 하고 계시더구나. 책도 재미있어서, 너희들 고모 생일 선물에 이 책도 포함을 시켰어.


1.

많은 역사서에서 역사를 왜 배우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한단다. 오랫동안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지은이 최태성님도 그런 질문을 던져보았단다. 여럿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사람을 만나 그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점이라고 했어. 다소 뻔한 이유일 수도 있지만, 아빠도 많이 공감하고 그렇게 만나 역사 속 인물을 통해 아빠의 삶의 방식을 바꾸려고 노력도 많이 했단다.

====================

(39-40)

역사는 무엇보다 사람을 만나는 공부입니다. 고대부터 근현대까지의 긴 시간 안에 엄청나게 많은 삶의 이야기가 녹아 있어요. 그 이야기를 읽다 보면 절로 가슴이 뜁니다. 가슴 뛰는 삶을 살았던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고민과 선택과 행동에 깊이 감정을 이입했기 때문이죠. 그런 사람들을 계속 만나다 보면 좀 더 의미 있게 살기 위한 고민, 역사의 구경꾼으로 남지 않기 위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아무리 힘든 세상에서도 자신의 삶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법을 배우게 될 테죠. 그게 바로 역사의 힘입니다.

====================

그렇게 역사를 통해서 만난 사람들 중에 아빠가 좋아하는 사람들.. 존경하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좋겠구나. 그 중에 정약용도 있단다. 천재여서 부럽고, 자식 사랑함에 남달라 본받을 만하고, 어려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 그리고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생각의 소유자.. 다른 사람들은 그를 또 다르게 평가를 하겠지만, 아빠는 위에서 이야기한 모습으로 정약용을 보았고, 그의 그런 모습을 배우려고 한단다. 정약용의 호 중에 하나 여유당에 대한 이야기도 있는데, 한글로만 보면 여유로워 보이지만, 이는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단다. 아빠도 본받고 싶은 마음이란다.

====================

(71)

그가 조정에서 물러난 뒤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 추측할 수 있는 증거가 있어요. 자신의 생가에 걸어 놓은 현판이죠. ‘여유당(與猶堂)’이라고 쓰인 현판인데, 얼핏 들으면 이제 좀 여유를 갖고 편하게 살겠다는 뜻인가?”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어요. 실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글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함이여, 겨울 냇물을 건너듯이

()함이여, 너의 이웃을 두려워하듯이.”

이 글귀는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고,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처럼 두려워하며 경계하라는 의미예요. 안 그래도 눈엣가시인데 무엇 하나라도 트집을 잡아보려는 무리가 눈에 불을 켜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사방을 경계하고 신중하게 하루를 보내라는 의미로 그런 글자를 써둔 거예요. 정약용은 매일 현판을 쳐다보면서 오늘 하루도 행동거지 하나하나 조심해야지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

아빠가 정약용이 자식에 대한 사랑도 깊다고 이야기했잖아. 그가 아이들에게 당부한 말도 좋아서,  가슴에 새겨 본단다.

====================

(79)

마지막으로 정약용이 자식들에게 당부했던 말을 전하며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진실로 너희들에게 바라노니, 항상 심기를 화평하게 가져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다름없이 하라. 하늘의 이치는 돌고 도는 것이라서, 한번 쓰러졌다 하여 결코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

그리고 역사서를 읽다 보면 모르고 있던 새로운 인물을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있어. 이름은 들어봤지만,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 몰랐던 김육. 그는 대동법을 통해 백성들을 편의를 도모해 주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박상진이라는 분. 이 분은 이름조차 처음 들어본 분이란다. 1910년대 독립운동가였어. 그의 직업은 판사였어. 그가 그냥 판사를 했다면 호위호식하며 잘 살았을 거야. 하지만 그의 선택은 의열투쟁이었단다. 친일파를 처단하는 등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하던 그는, 그만 체포되어 사형을 당했다고 하는구나. 인터넷 찾아보니 1884년에 태어나셨고, 1921년에 돌아가셨으니 채 사십이 되지 않았단다. 앞으로 그의 이름을 꼭 가슴속에 기억해야겠구나.

====================

(207-8)

박상진이 판사를 꿈꾼 사람이라면 그런 판단을 내리지 못했을 거예요. 판사라는 꿈을 드디어 이룬 셈인데 그걸 내던지기가 얼마나 어려웠겠어요. 하지만 박상진의 꿈은 판사가 아니었어요. 그의 꿈은 명사가 아니었습니다. 법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늘 다하고만 사는 평범한 이에게 도움을 주고, 정의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사람이 되려고 판사가 된 것입니다. 이게 그의 꿈이었어요. 명사가 아닌 동사의 꿈이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판사라는 직업이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정의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진짜 꿈이었으니까요. 그 꿈을 향해 나아간 것뿐입니다.

====================


2.

역사를 읽다 보면 우리 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되기도 한단다. 우리나라에 이런 자랑스러운 일이 있었다니힘들고 어려운 시절도 많았지만, 그 속에서 극적인 일들도 많았고, 훌륭한 분들도 많았고 말이야. 그런 극적인 일들을 찾아서 일반인들에게 소개해 주는 것도 역사가들이 할 일이 아닌가 싶구나. 이 책에서 여러 에피소드들을 소개해 주었단다.

그 중에 1919 9 1일 프랑스 파리에서 날아온 전보 한 통. 수신인은 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 위원부. 발신인은 리첸코. 러시아의 항구도시 무르만스크에 떠밀려간 우리 노동자 500여명. 영국 소속 철도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소련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면서 영국 철도회사가 철수를 한 거야. 우리 노동자 500여명이 갈 곳을 잃게 된 것이지. 임시정부에서 구제를 요청했지만, 강대국들이 그들을 보살펴줄 리 없었단다. 우여곡절 끝에 30여 명이 프랑스로 올 수 있었어. 파리에 임시정부 파리위원부가 있었는데 그들의 노력으로 구제할 수 있었어. 프랑스의 쉬프 지역에 정착을 했는데, 그들은 아주 열심히 일을 했다는구나. 그리고 돈 번을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했대. 또 일을 너무 열심히 해서 프랑스에서 노동헌신상을 타기도 했다는구나. 그들의 마음속에 들어가보았어. 일제 침략으로 고향을 버리고 만주로, 연해주로 피신 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러시아 서북쪽 끝까지 갔다가 다시 우여곡절 끝에 영국으로 갔다가 다시 프랑스로울컥해지는 감정

….

마지막으로 역사를 배우면 좋은 점 하나 더 소개하고 마칠게. 결론은 역사 공부를 열심히 하자.

====================

(292)

이 시대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그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역사를 공부한 사람은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할 것입니다. 과거보다 현재가 나아졌듯이 미래는 더 밝을 거라고, ‘보다 우리의 힘을 믿으며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면 된다고. 역사를 통해 혼란 속에서도 세상과 사람을 믿고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다시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건 역사지만 결국은 사람을, 인생을 공부하는 것이라고.

====================


PS:

책의 첫 문장 : 요즘 영화나 드라마에는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인물이 심심치 않게 등장합니다.

책의 끝 문장 : 저의 삶에 함께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삼국유사>에도 그리스 신화, 로마 신화처럼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정말 많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요. 우리가 시험을 위한 공부로 <삼국유사>를 접했기 때문에 몰랐을 뿐이죠.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를 비교하며 차이점을 표로 그리면서 외우느라 정작 그 이야기에는 소홀했던 겁니다. 기전체의 관찬 사서, 기사본말체의 사찬 사서 등 형식적인 내용을 공부하느라 이야기 자체의 재미를 놓친 것이죠. - P21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다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하게 됩니다. 그리고 겸손을 배우죠. 역사는 사람뿐만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던 나라의 흥망성쇠를 들여다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가끔은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천하를 호령하던 인물이 쓸쓸하고 비참하게 죽는가 하면, 사방으로 위세를 떨치던 대제국이 한순간에 지도에서 사라져버리기도 하니까요. 역사에서 이런 일은 너무나 비일비재합니다. - P104

누군가와 처음 만나서 이야깃거리가 없을 때 역사를 화제에 올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요.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효과적입니다. 처음 관계를 맺을 때 상대와 나 사이에 연결 고리를 찾으려고 많이 노력하잖아요. 그래서 출신 학교를 묻고, 지역을 묻고 하는데 그것보다는 역사적 사실로 다가가는 게 훨씬 더 그럴듯해 보이지 않겠어요? 역사는 꽤 유용한 소통의 도구입니다. 어떤 이야기를 꺼내서 상대와 나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야 하는지 고민된다면 역사에서 답을 찾아보세요. 분명 같은 경험이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좋은 연결 고리가 있을 겁니다. - P164

이원익은 스물두 살에 과거에 급제해서 명종, 선조, 광해군, 인조 네 임금 밑에서 무려 여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던 인물입니다. 한 번 되기도 힘든 영의정을 여섯 번이나 했다니 그 권세가 얼마나 대단했을까 싶지요? 그런데 그는 오두막에서 일반 백성들과 다름없이 살았습니다. 영의정은커녕 양반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가난했어요. - P235

역사를 공부하면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맥락이 잡힙니다. 역사에서 인간의 자유는 늘 이기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이것이 바로 역사의 수레바퀴예요. 역사를 통해 우리는 사회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역사의 수레바퀴 안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문제란 별로 없습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변화의 움직임도 알고 보면 역사에서 그 문제의 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좀 더 폭넓게 사회 문제를 이해하고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되죠.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순간, 문제의 핵심을 바라보고 해결하는 원동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가 또 한 발자국 나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요? -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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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0-04-24 1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아 읽고 싶어지네여~~

bookholic 2020-04-25 00:15   좋아요 0 | URL
사람마다 취향이 다를 수 있으니....
조심스럽게 추천해 봅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십시오~~~
 














(13)

평생 죽음을 의식했던 뭉크는 예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자신의 심장을 열고자 하는 열망에서 태어나지 않은 예술은 믿지 않는다. 모든 미술과 문학, 음악은 심장의 피로 만들어져야 한다. 예술은 한 인간의 심혈이다.”

(87)

색을 표현해야 하는 화가가 색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는 건 어쩌면 저주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반 고흐는 그것을 영삼의 원천으로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부를 수 있는 가장 순도 높은 고음의 노랑을 찾아냅니다.

노란 높은 음에 도달하기 위해서 나 스스로를 좀 속일 필요가 있었다.”

그는 이 말을 알코올 중독 수준이 너무 심각하다며 자신을 나무란 의사에게 했다고 합니다. 활활 타오르는 노랑을 보기 위해 자신을 속이며 압생트를 계속 마셔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예술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던질 수 있었던 반 고흐가 생명을 활활 태우며 꽃피운 대표작이 바로 <해바라지>입니다.

(116-117)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미술 천재 클림트. 고전주의 양식을 따라 그리기만 해도 마음 편히 먹고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타협하지 않고, 시대의 반항아로 살았습니다. 예술가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새로운 예술의 시대를 빈에도 꽃피우기 위해, 스스로 황금빛 창을 들고 아테나 여신이 되기를 자처했습니다. 그리고 온갖 반발과 저항을 이겨내고, 결국 새로운 예술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그의 분리주의 정신은 곧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라는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또 다른 거장들을 탄생시키는 인큐베이터가 되었습니다.

(130)

자기신뢰야말로 용기의 초석이고, 자기신뢰는 위험이란 요소와 친하게 되어 있습니다. (중략) 용기란 고뇌하며 위험에 맞서는 정신을 의미합니다. (중략) 삶은 거센 물결과 고통을 헤치고 나아가는 투쟁이자, 끝없이 밀려드는 적들과의 투쟁이라고 했지요. 인간은 누구나 자연이 각자에게 선사한 것을 즐기기 위해 홀로 투쟁해야 합니다.”

이것이 열아홉 살 에곤 실레의 정신입니다. 자신이 자연에게 준 것을 삶에서 즐기기 위해 스스로를 믿고, 용기를 내, 위험을 기꺼이 껴안으며 투쟁하는 것. 그 의지는 끝내 그만의 솔직하고 뜨거운 예술 세계로 실체를 드러냅니다.

(163)

예술가의 삶은 기나긴 고난의 길이다! 우리를 살게 만드는 것도 바로 그런 길이리라. 정열은 생명의 원천이고, 더 이상 정열이 솟아나지 않을 때 우리는 죽게 될 것이다. 가시덤불이 가득한 길로 떠나자. 그 길은 야생의 시를 간직하고 있다.” – 폴 고갱

(288)

삶에서처럼 예술에서도 사랑에 뿌리를 두면 모든 일이 가능합니다.” – 마르크 샤갈

(326)

예술가만이 유일하게 창조 행위를 완성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작품을 외부세계와 연결시켜주는 것은 관객이기 때문입니다. 관객은 작품이 지닌 심오한 특성을 해독하고 해석함으로써 창조적 프로세스에 고유한 공헌을 합니다.”

뒤샹은 작품에 무한한 의미를 부여하는 관객의 역할을 간파했고, 작품은 예술가와 관객이 함께 창조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관객을 관찰자가 아닌 창조자로 보았죠. 과거의 어떤 예술가가 관객을 이렇게 보았던가요? 그는 작품에 어떤 의미를 의도적으로 담기보다 의미를 열어두기로 합니다. 그리고 관객이 스스로 자유롭게 해석하며 의미를 창조하기를 원합니다. 이제 전시장은 작품을 중심으로 예술가와 관객이 함께하는 생각의 놀이터가 됩니다. 관객이 작품을 보며 자유롭게 생각의 놀이를 펼치는 창조자가 되는 순간입니다.

(333)

어느덧 거장의 칭호를 받는 79세 뒤샹은 한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예술가로 살며 가장 만족스러웠던 것은 무엇이었나?” 그는 이렇게 답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 그림이나 조각 형태의 예술 작품들을 만드는 데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차라리 내 인생 자체를 예술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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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너무 몰랐다 - 해방, 제주4.3과 여순민중항쟁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랜만에 도올 김용옥님의 책을 읽었단다. 도올 선생님은 고전 강의를 재미있고 신랄하게(?) 해서 많은 사람에게 유명해진 사람이란다. 정치적 이슈에 대해서도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지식인이자 철학자란다. 도올 선생님의 강의를 많이 보지는 않았지만, 오래 전에(거의 이십 년이 다 되어가는구나.) 불교 강의를 감명 있게 본 적이 있단다. 그 이후 도올 선생님의 책들을 여럿 찾아 읽은 적이 있단다. 한동안 도올 선생님의 책들을 읽지 못했는데, <우린 너무 몰랐다>라는 책의 평이 좋아서 읽어보았단다.

역사 이야기더구나. 그것도 현대사에 관한 역사 이야기. 도올 선생님이 이런 현대사에 대한 책을 쓴 적이 있던가. 알아보니 도올 선생님이 해방 후 제주4.3사건과 여순민중항쟁에 대한 강의를 했었고, 그것을 기반을 책을 쓰신 것이더구나. 아빠가 책을 난 다음에 유튜브를 통해 그 강의를 찾아 보기도 했지만,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도올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더구나. 분명 책을 읽는 것인데, 음성지원이 되는 듯한 신기한 경험. 재미있으면서도 슬프고 억울하고 답답했단다.

제주4.3사건과 여수민중항쟁은 조정래 선생님의 <태백산맥>을 비롯하여 여러 책을 통해 접해서 내용은 대충 알고 있었는데, 도올 선생님이 시원하게 정리해주신 그런 기분이었단다. 도올 선생님은 역사 강의도 참 잘하시는구나.


1.

제주4.3사건과 여순민중항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1945년 해방 이후의 이야기와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먼저 해주고, 도올 선생님이 현대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주셨단다. 자신이 직접 연출하고 나레이션도 하고 출현도 한, EBS 다큐멘터리 <도올이 본 한국독립운동사 10부작>에 대한 뒷이야기도 해주었어. 아빠도 십여 년 전에 그 다큐를 몇 편 봤던 기억이 있단다. 그리고 이 책에 직지심경과 고려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단다. 읽을 때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어서 좋았는데, 다시 너희들에게 이야기를 해주려고 하니, 이 책에 왜 고려시대와 직지심경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있었는지 모르겠구나. 승리한 자들의 역사 왜곡을 이야기하면서 고려 역사에 대한 왜곡을 이야기를 했는데, 이 책의 주제라고 생각하는 제주4.3사건과 여순민중항쟁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잘 모르겠구나. 한 가지 연관성은 둘 다 역사 왜곡에 의해 후세에 잘못 알려졌다는 점. 그것 치고는 고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단다. (그래서 나쁘다는 건 아니고, 좋긴 했는데 연관성이 무엇이었는지…)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 정도전은 고려에 관한 역사서를 썼는데, 조선 건국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고려를 너무 깔아내려 기술하였다고 하는구나. 도올 선생님은 정도전에 관한 책도 쓰신 분이었지만, 이런 역사 왜곡은 정도전의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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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나는 개인적으로 정도전과 깊은 인연이 있다. 그 직계 장손과도 친하게 지냈고, 그에 관해 책도 썼고, 강연도 많이 했다. 그리고 조선왕조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처럼 자격 있는 혁명가를 찾기도 힘들다. 그는 맑스나 레닌과 같은 진짜 혁명가이다. 이론과 실제를 다 갖춘, 혁명을 위하여 자기의 삶을 불사른 멋진 사나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전체대의를 위해 생각을 해볼 때, 그가 저지른 오류도 적지 않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오류는 고려대제국의 실태와 그 가치를 근원적으로 훼멸시킨 것에 관한 것이다. <고려국사>는 용서할 수 없는, 왜곡의 사서이다. 그것이 정도전 개인의 오류로 끝났으면 다행이겠지만, 향후 조선민족의 역사 인식 전체에 너무도 끔찍한 악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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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이제 본격적으로 해방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전에도 아빠가 해방, 그러니까 광복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여러 번 갑작스러운 해방이 우리나라에게 결코 좋은 조건이라고 한 적이 있었잖아. 그 점을 도올 선생님도 지적을 했어. 일본의 갑작스러운 항복 선언과 갑자기 맞이하게 된 해방. 다행이 해방을 착실하게 준비하고 있었던 이가 있었으니, 여운형이었단다. 여운형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줄여서 건준을 통해 해방 후 나라가 나아갈 길을 준비하고 있었어. 해방이 되자마자 여운형의 건준을 중심으로 체계를 잡아가려고 했지. 하지만, 일본을 굴복시킨 미국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단다. 미국이 일본을 점령시키고 우리나라 땅을 차지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서울에 일본 깃발을 내리고, 미국 깃발을 올렸다고 하니 말이야.

주한미군군정 군정 총독으로 하지라는 사람이 왔는데, 이 사람은 우리나라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하는구나. 그와 별개로 해방과 함께 전국에 인민위원회라는 자치기구가 생겨나기 시작했어. 오늘날까지 인민이라고 하면 북한에서 국민 대신 쓰는 말이라서 공산주의와 연관된 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고,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금기어처럼 되어버렸지만, 인민이라는 말은 아주 오래 전 고전에도 나오는, 보통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였단다. 그러니까 인민위원회라는 말이 보통 사람들이 만든 위원회로 문제되는 조직은 아니었어.

하지만, 해방 후 정세는 국민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흘러갔어. 남한에는 미국 말을 잘 듣는 사람, 북한에는 소련 말을 잘 듣는 사람이 권력을 잡아가고 있었단다. 아주 교묘하고 악랄하게 말이야. 남한에는 미국에서 박사까지 딴 뼛속까지 친미파인 이승만이, 맥아더에게 구애를 했어. 그리고 이승만, 맥아더, 하지 이렇게 셋이 도쿄에서 3자회담까지 했단다. 이 모임 이후 맥아더는 이승만을 추켜 세우기 시작했고, 남한에 귀국한 이승만은 일인자가 되어가기 시작했고, 자신의 길을 방해하는 이는 몰래 죽여버렸단다. 도올 선생님은 이승만을 거룩한 사기꾼이라고 이야기하더구나.

북한에서는 스탈린의 총애를 받은 젊은 김일성이 권력구도에 앞서 갔단다. 사실 소련이 한반도 문제에 끼일 여지는 없을 수도 있었어. 그런데 제2차세계대전 막바지에 미국이 소련에게 참전요청을 했고, 소련은 눈치를 보다가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떨어지고 나서 참전을 했대. 그리고는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난 다음, 한반도 문제에 간섭을 한 것이지. 소련도 참 영악한 면이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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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우리는 해방이라는 원점의 성격으로부터 다시 문제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 해방을 맞이하는 건준이라고 하는 슬기로운 주체세력이 있었고 그것은 전국의 인민위원회 조식의 구심점이 되었지만, 해방을 가능케 한 물리적 주동세력은 미국과 소련이라고 하는, 세계사의 무대를 분할하는 양대 신흥세력이었다는 것은 이미 갈파한 바와 같아. 해방의 주체가 우리민족이 아닌, 미국과 소련이었다고 한다면 이 해방정국 공백의 새로운 모델링의 결말은 이미 명약관화하다. 그것은 미국에 붙어 미국말을 잘 듣는 놈이 이남을 먹을 것이요, 소련에 붙어 소련말을 잘 듣는 놈이 이북을 먹을 것이다. 이 두 놈은 모두 토착세력이 아닐 것이고 소련과 미국에서 자기세력을 키웠거나, 소련과 미국의 지도자들에 특별한 총애를 받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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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 되었지만, 어떻게 나라꼴은 더 안 좋은 쪽으로 가는지 모르겠구나. 패전은 일본이 했는데, 왜 우리나라가 두 쪽으로 갈려져야 하는지그것을 돌이킬 수 없어, 왜 오늘날까지 오고 말았는지이 시절의 역사를 읽을 때마다 안타까움이 그지 없구나. 도올 선생님은 맥아더의 큰 실수 중에 하나로 천황을 존속시킨 것이라고 이야기하더구나. 아빠도 동의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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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동아시아역사에 대하여 맥아더가 저지른 가장 큰 오류는, 인류사의 근원적 진보에 공헌할 수 있는 결정적 찬스를 놓친 죄악에 가까운 오류는 전후에 일본의 천황제를 존속시킨 것이다. 천황제를 존속시키는 것이 미국의 일본지배를 쉽게 만들고, 동아시아에 있어서 공산주의의 팽창을 막을 수 있는 확실한 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히로히토는 1945 9 27일 맥아더의 SCAP 헤드쿼터를 두 발로 찾아가 목숨을 구걸했다. 그리고 미국의 이해관계에 전적으로 부속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것은 미국이 나치정권의 독일국가를 근원적으로 해체시킨 것과는 사뭇 다른 방식의 전후처리였다. 일본국가가 근원적 변화가 없이 존속하도록 하면서 몇 명의 전범만 코스메틱한 효과로 처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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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튼 해방 후 정세를 간단히 이야기를 하면, 1945 8 15일 해방을 하고, 1945 9 9일 미군정을 시작했으니, 우리나라의 해방은 단 25일뿐이었던 것이란다.


3.

그러면 왜 임시정부요인들은 서둘러 귀국하지 않았을까. 시대감각과 정치감각이 떨어졌다고 도올 선생님은 평가했단다. 임시정부요인들과 여운형의 건준은 미군정을 인정하지 않았대. 이미 남한은 미군정의 손에 넘어갔는데 말이야. 여운형은 미군정과 별개로 조선인민공화국을 창설했지만, 미군정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인민위원회를 불법으로 규정했어.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형국. 거기에 여운형까지 암살당했으니 그야말로 우리나라는 혼란의 시기였단다.

해방 후 또 하나의 중요한 이슈가 신탁통치에 관한 것이었단다. 동아일보의 가짜 뉴스와 우파 세력의 정쟁적 이용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신탁통치를 찬성하면 나쁜 놈, 반대하면 좋은 놈이란 프레임이 만들어졌다고 하는구나. 오늘날까지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 그러나 신탁통치의 내용을 제대로 보고, 그대로만 이루어진다면 나라의 기능이 가능하게 하는 방법이었대. 좌익은 이 신탁에 대한 내용을 잘 알아보고 나서 찬탁을 한 거라는구나. 우익 쪽에서도 신탁에 대한 내용을 정확히 이해한 송진우 같은 분은 신탁 통치를 찬성했대그런데 그 또한 암살을 당했다는구나. 우익은 신탁에 대한 내용을 잘 알아보지도 않고, 정치적으로만 이용해서 반탁을 하였다는구나. 친일 세력을 기반을 한 한민당뿐만 아니라 임정도 반탁의 입장이었어.


4.

, 이제 제주4.3사건을 알아보자꾸나. 제주의 옛 이름은 탐라. 신라시대 외세의 침입을 막고자 지은 황룡사구층탑에도 탐라가 있었다고 하는구나. 그 이야기는 옛날에는 한 나라였다는 소리야.. 그러다가 고려 고종 때 처음으로 한반도 대륙 질서 속에 편입이 되었고, 이후 제주목사들이 관리를 했는데, 하나같이 대부분 날강도였다고 하는구나. 임금한테 바쳐야 할 공물도 많았고 말이야. 그것이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 후까지 이어졌대.

제주에도 해방 후에 인민위원회가 만들어져서 그들을 중심으로 자치가 잘 이루어지고 있었어. 1947년 북국민학교에서 3.1운동 28주년 기념식에 3만명 가까이 모였대. 이 기념식은 인민위원회가 주도를 했어. 이 기념식은 단순히 3.1운동만을 기념하는 것은 아니었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온전한 통일을 기념하는 시위도 함께 했단다. 평화적인 시위였지. 하지만, 이 시위에 미군정 경찰이 투입되어 총격을 가해 제주도민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당했어. 이 사건에 대한 진실 규명할 것을 요구했으나, 정당방위로 마무리했단다.

이것을 주도한 것이 경무국 국장 조병옥이었단다. 이후 제주도는 총파업에 들어갔단다. 당시 제주도 초대 도지사 박경훈은 도민들 편에 섰다가 해임당했어. 그리고 제주도 시위를 막기 위해 투입한 이들 중에 서북청년단이 있었단다. 북한에서 토지개혁 이후 땅을 빼앗기고 남한으로 이들로 공산당에 치를 떨던 이들이었는데, 완전 깡패나 다름없었어. 이들은 열렬한 이승만 지지 세력으로 조병옥과 장택상이 후원해졌어. 서북청년단이 제주에 투입하면서 대대적으로 제주도민을 탄압했단다. 이것이 1948 4.3 제주민중항쟁까지 이어지게 되었어. 오랫동안 4.3 제주민중항쟁은 빨갱이의 짓이라는 둥 남로당이 개입했다는 둥 왜곡된 기록이 더 제주도민들을 아프게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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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3)

4.3은 결코 무장봉기가 아니다. 억눌린 민중이 소총 몇 자루 가지고 경찰서를 습격한 사건을 민중항쟁의 핵심적 사태로 인지하는 것은 전적으로 오류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민중항쟁의 가냘픈 호소일 뿐이다. 그들을 결코 무장대라고 불러서도 아니 되는 것이다. “무장대가 되려면 무력을 계속해서 공급받을 수 있는 루트가 확보되어 있어야 한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이나, 월맹의 호치민과 같이 지속적으로 무기를 공급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4.3사태 이후의 토벌이라는 것은 무장 대 무장의 전쟁이 아니라, 그냥 정부병력의 민간학살일 뿐이다. 4.3의 의미를 침소봉대할 수 없다. 산으로 피신 간 사람들은 무장투쟁을 위해 간 것이 아니라, 단지 학살을 피하기 위한 도피였을 뿐이다. 한 번도 제대로 싸워본 적이 없다. 또한 사가들이 오해하는 거대한 오류 중의 하나가 무장대의 무장봉기남로당과 관련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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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제주도민의 시위를 진압하려는 이들이 9연대였고, 9연대장인 김익렬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은 이 사건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했단다. 하지만, 이승만과 조병옥의 마음에 안 들었던 거지. 그래서 김익렬을 해임시키고, 박진경이라는 사람을 9연대장에 앉히게 된단다. 그가 취임사에서 한 말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게 했어. “제주도민 30만명을 모두 죽여도 좋다.”

, 이런 미친 사람이 있나. 그의 이런 말이 거짓이 아니었어. 그가 취임하고 나서 한달 만에 제주도민 오천 명이 학살당했대. 그리고 그 일로 대령 승진을 했다는구나.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었지. 하지만, 그래도 군대 내부에도 양심세력이 있었어. 박진경의 만행을 보다 못한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 등은 박진경을 죽였단다. 그리고 그들은 도망가지 않고 순순히 체포 당했어. 그들이 재판에서 한 말을 읽고 나서 어찌나 울컥하던지. 이런 분들이 계셨다니, 그동안 그들의 존재조차 몰랐다니.. 그분들의 이름을 꼭 기억해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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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40)

박진경의 도민학살을 견디다 못해 그의 암살을 기획한 것은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였다. 그리고 그 거사에 동조한 양회천 이등상사, 신상우 하사, 강승규 하사, 배경용 하사, 이정우 하사(입산 미체포), 황주복 하사, 김정도 하사의 이름도 같이 기억되어야 한다. 문상길 중위는 충청도 사람으로 육사 3시다. 3중대장이었으며 독실한 기독교이었다. 그의 최후진술은 다음과 같다.

이 법정은 미군정의 법정이며, 미군정장관인 딘 장군의 총애를 받던 박진경 대령의 살해범을 재판하는 사람들로써 구성된 법정이다. 우리가 군인으로서 자기 직속상관을 살해하고 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죽음을 결심하고 행동한 것이다. 재판장 이하 전 법관도 모두 우리민족이기에, 우리가 민족반역자를 처형한 것에 대해서는 공감을 가질 줄로 안다. 우리에게 총살형을 선고하는 데 대하여 민족적인 양심 때문에 대단히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 법정에 대하여 조금도 원한을 가지지 않는다. 안심하기 바란다. 박진경 연대장은 먼저 저 세상으로 갔고, 수일 후에는 우리가 간다. 그리고 재판장 이후 모든 사람들도 저세상에 갈 것이다. 그러면 우리와 박진경 연대장과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저세상 하느님 앞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인간의 법적은 공평하지 못해도 하느님의 법적은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

….

제주4.3사건은 계속된 탄압으로 7년 넘게 이어지다가 1954년이 되어서야 끝이 났단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왜곡된 역사는 계속되어, 제주4.3사건과 연루된 사람들의 가족들을 제대로 살 수가 없었어. 민주 정부가 들어선 1990년대말과 2000년대 초에 들어서야 진실 규명이 시작되었고, 그들이 억울한 누명이 벗겨지게 되었단다.

5.

간단히 이야기하면, 여순민중항쟁은1948 10 19일 여수와 순천 지역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을 말한단다. 앞서 제주4.3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제주 9연대장이었던 김익렬이라는 사람이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가 밉보여서 해임되었다고 했잖아.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해임된 것이 아니라, 14연대장으로 좌천이 되었단다. 그런데 그 14연대가 있는 곳이 어디냐? 바로 여수였단다. 김익렬이 여수에 있는 14연대장으로 오면서 제주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준 거야. 그러니까 14연대에 있는 군인들은 제주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 알고 있었지.

그런데, 말이야. 어느날 명령이 떨어졌어. 제주도민들을 토벌하라고 14연대에 명령이 떨어진 거야. 제주도의 실상을 다 알고 있었는데, 그들을 죽이라고? 못하겠다고 했지. 14연대는 명령 거부를 했어. 양심에 따라 행동한 거지. 그러면서 경찰과 충돌이 일어났고, 그들은 산속으로 피했어. 이 소식을 접한 이승만이 얼마나 열 받았겠니.. 여수 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토벌 명령을 내렸어. (, 이승만 같은 사람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었다니우리나라가 무엇을 잘못을 했길래 이런 벌을 받는 것인지…)

토벌대가 여수에 왔을 때 14연대는 그곳을 떠나고 없었고 민간인들만 남아 있었어. 토벌대는 민간인들을 죄다 모으고 14연대를 도와주었던 민간인들을 색출했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지목을 당하면 총살을 당해야 했단다. 수천 명이 그렇게 죽었다고 했어. 이것이 여순반란이라고 잘못 이름 붙여진 여순민중항쟁의 진실이었던 것이란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여순반란이라고 알고 있어. 제주4.3사건은 진실규명이 많이 되었지만, 여순민중항쟁에 대한 진실규명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단다. 이 또한 우리 현대사의 아픔인데 말이야. 여순민중항쟁도 얼른 진실규명이 되어 억울한 이들의 한을 풀어주었으면 좋겠구나.


PS:

책의 첫 문장 : 요즈음 내가 가깝게 왕래하는 친구로서 박소동이라는 인물이 있다.

책의 끝 문장 : 남국이라고는 하나 시월도 이미 기울어 찬서리가 사정없이 내리는 밤, 꿇어 앉은 알무릎 밑에 모래알이 아프게 상안되면서{“상감과 같은 뜻, 들이박힌다}, 사람들은 일헤반(7 1/2) 동안의 서글픈 꿈에서 깨어, 경각을 모를 위태로운 자기 생명을 조마조마 어루만지는 것이었다.(<민주일보> 1948 11 3~5)


내가 말하려는 하는 것은, 구례가 비록 우리 현대사에서는, 피아골 공비의 이미지와 겹치는 불운한 벽지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문화, 예술의 중심지였고, 당대사를 다룬 걸작 역사서가 탄생할 만큼의 정보가 오가는 물류의 교차로였다는 것이다. 무지한 미군놈들이 함부로 총구를 들이댈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 고을 한 고을마다 축적된 문명의 심도는 이루 헤아릴 길이 없다. 아메리카의 산천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문명, 문화의 서기가, 풀 한 포기에도 자욱하다. 정유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선조에게 심한 고문을 당하고도 칠천량해전의 참상을 연민하며 백의종군 하겠다고 쓸쓸한 심사를 달래며 거쳐간 곳이 구례이며(구례에 지금도 백의종군로가 남아있다. 구례군민들의 지극한 간호와 위로로 이순신은 고문의 여독을 좀 풀 수 있었다), 해방 후 지방 건준조직이 최초로 결성된 곳도 구례다. - P27

우리가 중국의 속국인 듯한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쿠데타사건 이후로 과도하게 조선왕조를 스스로 비하시키고, 제후국으로서의 모든 프로토콜을 엄수하게 된 이후의 사태이다. 조선왕조의 성립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비극적인 사건이다. 이성계는 고려제국에서 본다면 아웃사이더적인 인물이었고, 그의 군사쿠데타는 정통성이나 정당성을 확보하기 힘들었다. 우리는 정도전이나 조준 같은 개국공신들의 인식체계를 통하여 고려말 사회를 "필망(必亡)"의 혼란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공민왕의 반원 개혁정치를 잘 도와 새로운 세상을 도모했더라면, 친명이 그토록 비굴한 사대나 이념적 굴종으로 발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새로운 정권 이씨조선은 개국초기의 혼란상이나 정통성 부재의 현실, 그 모든 것을 철저히 명에 대한 굴종적 아이덴티티를 통하여 극복하려 했다. - P60

여순민중항쟁이야말로 세계사를 선도한 조선민중의 정의감의 발로였으며, 여순민중항쟁을 빌미로 6.25동란을 위시한 향후의 모든 세계사적 비극이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나타났고, 우익반공파시즘의 가치체계가 설칠 수 있었는가 하며, 또 반면 우리 민중의 심오한 내성의 양심 속에서 인류사에 새로운 희망을 던질 수 있는 민주의 촛불이 켜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어마어마한 세계사적 사건을 해방 정북의 복잡하고 중층적인 인식체계로부터 접근해야만 합니다. 나는 이 접근을 시도하기 전에 여러분과 함께 다음과 진실을 외쳐야만 하겠습니다. 여순은 민중항쟁이다! - P103

여러분들은 해방정국에서 "좆됐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나의 말을 기억할 것이다. 이들은 좆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8월 15일부터 움츠러들었고 소리 없이 지냈다. 그런데 움츠러든 사람들은 누에의 굴신작용처럼 반드시 펼 날을 기약하게 마련이다. 오늘날 촛불혁명 때문에 움츠러든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이들 좆됐다파들은 대체로 가문이 좋고 지체가 높고 지식이 많았고, 영어를 잘했고 서구유학파들이고 기독교도들이 많았다. 이들은 건준에 가담하지 않았고 "건준+인민위원회" 세상의 형국을 불쾌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에게 희소식이 날아왔다. 와! 미군이 온다! 드디어 미국이 입성한다. 이들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야! 이제 움츠리고만 있을 수 없다. 기지개를 펴자! 이들은 본시 서양파들이었기 때문에 미군의 입성, 미국이 조선의 최대의 권좌를 차지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모래밭에서 죽어가는 물고기에게 물을 부어 연못을 만들어주는 것과 똑같았다. - P173

이 미군정의 미곡수집령이야말로 1946년 전국적인 10월봉기의 주요 원인이었으며 제주 4*3과 여순민중항쟁의 가장 근원적인 요인이다. 이것은 남로당의 정치적 공작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남로당은 그러한 대중동원조직체계나 지지기반을 갖지 못했다. 그것은 몇몇 지식인들이나 지식인 반열에 들고 싶어하는 허영끼 있는 인간들의 픽션에 불과했다. 민중에게 절실한 것은 오직 "쌀’이지 공산이념이 아니었다. -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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