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2)
겐테 박사는 서울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서울의 로케이션은 아주 독특하다.
사방에 뾰족하고 높고 힘찬 산들이 민가가 들어선 곳까지 뻗어 내려오면서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이 서울의 모습이다. 이런 전망(view)을 가진 서울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장 아름답고도
꼽는 군주국 도시 명단에 들어가야 할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서울을 페르시아 수도 테헤란과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와 비교해보면 비슷한 점이 많다.
그러나 서울에는 (…) 잘츠부르크처럼 웅장하고 엄숙한 기사의 성채가
없고, 테헤란의 (…) 위엄 넘치는 다만반드(Damavand) 산처럼 거대한 산도 없다. 그러나 서울보다 고도가
약 300미터 높을 뿐인 남산에서 내려다보면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44-45)
성종 19년(1488)에
명나라에서 온 동월이라는 사신은 <조선부>에서
서북쪽에서 들어오며 한양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찬미했다.
“임진강 나루를 건너 파주에 이르러 한성을 바라보니 저 높이 서기(瑞氣)가 어리었다. 벽제관을
지나 홍제원에 당도하니 여기가 조선의 서울인데 동편으로 우뚝하다. 높은 삼각산에 받쳐 있고 울창한 푸른
소나무 그늘에 덮여 있다. 북쪽은 천 길로 이어져 내려서 그 기세는 진정 천군(千軍)을 누를 만하고 서쪽을 바라보니 한 관문(關門)이 있는데 오직 말 한 필 드나들 만하다. 산은 성 밖을 둘렀는데 날쌘 봉황이 날아가며 번뜩이는 것 같고 소나무 아래에 흰모래는 마치 쌓인 눈에 햇볕이
내리쬐는 듯하다.”
(48)
단적으로 말해 한양도성은 전란을 대비해 쌓은 성곽이 아니라 수도 한양의 권위와 품위를 위해 두른 울타리다. 집에 담장이 있고, 읍에 읍성이 있듯이 수도 서울에 두른 도성이다. 영어로 말해서 포트리스(fortress)가 아니라 시티 월(city wall)이다. 만약에 전쟁을 대비해 성곽을 축조했다면 석벽을
사다리꼴로 높이 쌓고 성곽 둘레에 해자를 깊게 파서 두르는 등 겹겹의 방어시설을 구축했어야 했다. 도성이
울타리이기 때문에 숭례문을 비롯한 관문도 사람들이 드나드는 통행문 이상의 기능을 하지 않았다. 동대문을
옹성처럼 두른 것은 전투를 의식해서가 아니라 풍수상 허하다는 서울의 동쪽 지세를 보완한다는 의미였을 뿐이다.
(64)
풍경 뻬레스트로이까 – 북악산 개방에 부쳐(황지우)
뉴욕에도 도쿄에도 베이징에도 베를린,
모스끄바에도 없는 산(山)
단 하루도 산을 못 보면 사는 것 같지가 않은,
산이 목숨이고 산이 종교인 나라에
오늘
싱싱한 산 한 채가
방금 채색한 각황전(覺皇殿)처럼
사월 초순 첫 초록 재치고
솟아올랐네.
저 권부의 푸른 기와집 그늘에 가려
지난 반세기 마음의 위도에서 사라졌던 자리에서
오늘 이제는 육성으로 이름 불러도 될
그대 백악이여,
금지된 빗금을 넘어 그대가
사람 만나러 내려올 때
솟아난 것은 한낱 돌덩어리가 아닌
우리네 마음의 넉넉한 포물선이었구나.
이렇게 풀어버리니 별것도 아니었던 두려움이,
홍련사에서 숙정문 지나
창의문에 이른 길 따라,
혼자 보기엔 너무 아까운 아름다움이 되었으니
아무나 그 문들 활짝 열어
그대 슬하에 감추인 말바위며 촛대바위를
순우리말로 되찾아오네.
하여 차출된 팔도 머슴애들의 사투리를
잘 짜 맞춘 성곽이
산허리를 재봉틀질한 것 같은
역사의 긴 문장이 되고
그 쉼표마다 돌아서 내쉰 한숨이
이렇듯 위업이 되었음에랴, 하지만.
이렇듯 풀과 꽃과 나미가 되돌아온 자리에
제 빛깔과 향기가 이름을 되물려 주는 것만으로도
이보다 더 한 위업이 있을까!
아, 이제 가물면 북문(北門)을 열어주고
물 넘치면 그 문 닫아둘 수 있는 산,
동네 처자들 숙정문 세 번 가면
안 되는 사랑도 이루어진다는 그 소문난 산,
파리에도 런던에도 하노이, 시드니에도 없는 산,
봄비 그치고 송진처럼 물방울 맺힌 나뭇가지 사이로
마침내 사람 눈을 만난 북악산
그 언저리 허공 어디쯤
붉은 낙관(落款) 한 점
꾸욱 눌러두고 싶네.
(125)
인조반정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연산군 때 “탕춘대 절벽 밑 좌우로
흐르는 물을 가로질러 돌기둥을 세워 옆으로 긴 누각을 지었다.”고 했고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성종 때
문신인 성현(成俔)은
<용재총화>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도성 밖에 놀 만한 곳으로는 장의사 앞 시내가 가장 아름답다. 시냇물이 삼각산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나오고 골짜기 안에는 여제단(厲祭壇)이 있으며 그 남쪽에는 무이정사(武夷精舍, 무계정사를 말한 듯함)의 옛터가 있는데 길 앞에는 돌을 수십 길이나
쌓아올린 수각이 있다. 또 절 앞 수십 보 앞에는 차일암(遮日巖)이 있는데, 바위가 절벽을 이루어 시내를 베고 있는 것과 같으며 그
바위 위에는 장막을 칠 만한 우묵한 곳이 있는데 바위는 층층으로 포개져 계단과 같다. 흐르는 물소리가
맑은 하늘 아래 천둥 번개가 치는 듯해 귀가 따갑다. 물이 맑고 돌이 희어서 선경(仙境)이 완연하다.”
(151)
석파(이하응)는 난초 그림뿐만
아니라 시도 잘 지었고, 글씨도 잘 썼고 독서도 많이 했다. 그가
즐겨 사용한 문자도장에는 이런 멋진 문구가 있다.
讀未見書 如逢良士
讀己見書 如遇故士
“아직 보지 못한 책을 읽을 때는 어진 선비를 만나듯 하고
이미 본 때를 읽을 때는 옛 벗을 만나듯 한다.”
(152)
유주학선 무주학불(有酒學仙 無酒學佛)
“술이 있으면 신선을 배우고 술이 없으면 부처를 배운다.”
인생의 여유와 허허로움을 느끼게 하는 명구가 아닐 수 없다. 석파정에서
동쪽으로 건너다보이는 북악산 아래에는 추시가 지내던 백석동천 별서가 있다. 이제 백석동천으로 발을 옮기자니
사제지간에 이렇게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왠지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어쩌면 별서의 팔자였는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든다.
(168)
현진권은 자신이 역사소설로 돌아선 이유에 대해 <문장> 1939년 12월호에
<역사소설문제>를 기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사실을 위한 소설이 아니오. 소설을
위한 사실인 이상 그 과거가 현재에 가지지 못한, 구하지 못한 진실성을 띄었기 때문에 더 현실적이라고
믿습니다. 현재의 사실에서 취재한 것보담 더 맥이 뛰고 피가 흐르는 현실감을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비현실적이라는 둥 도피적이라는 둥 하는 비난의 화살은 저절로 그 과녁을 잃을 것입니다.”
(176-177)
나는 이 집의 돌기와 지붕을 얹은 긴 콩떡 담장에서 우리나라 한옥 담장의 미학을 본다. 중국의 담처럼 바깥과 철저히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환경과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다. 비탈을 오르는 돌담의 기와 지붕이 계속 높이를 달리하는 것도 즐겁다. 이
돌담이 있음으로 해서 이 동네 거리가 얼마나 고상해지고 품격이 높아지는가 생각하면 내 주장에 수긍할 것이다. 돌담도
사괴석(四塊石)으로 권위 있게 쌓은 것이 아니라 막돌을 얼기설기
쌓고 흰 강회로 마감한 콩떡 담장인지라 더 정감이 간다.
(196)
그런 경운궁이 다시 역사의 주무대에 등장한 것은 1897년 2월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1895)을 겪은 고종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지 1년
뒤에 경복궁이 아니라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 조선왕조의 마지막 법궁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그해 10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경운궁은 황궁이 되었다.
…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되고 뒤를 이은 순종황제가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경운궁에 상황(上皇)으로 남은 아버지께서 덕에
의지해 장수하시라는 뜻으로 덕 덕(德) 자, 목숨 수(壽) 자, 덕수(德壽)라는 이름을
지어 바쳤고 이후 덕수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283-284)
그런가 하면 대한문의 한(漢) 자를
중국의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 중국을 숭상하는 뜻이 있다는 주장, 혹은 조선도 중국처럼 큰 나라라는
뜻이라는 설도 나왔다. 반대로 이 글자를 놈이라는 뜻으로 해석해 이토 히로부미가 ‘큰 놈이 드나드는 문’이라는 뜻으로 바꾸도록 강요했다는 주장도 생겼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낭설이다. 1907년에 편찬된 <경운궁 중건도감 의궤>에 실려 있는 이근명(李根命)의 <대한문
상량문>에 그 내력이 소상히 밝혀져 있는바, 대한은
‘큰 하늘’이라는 뜻으로 새로 태어난 대한제국이 하늘과 함께
영원히 창대하라는 염원을 담은 것이다.
(381)
‘성균’이란 음악에서 ‘음을 고르게 주율하는 것’을 뜻하며
<주례(周禮)>의 <대사악(大司樂)>에서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성균의 법을 관장하여 국가의 학정(學政)을 다스리고 나라의 자제들을 모아 교육한다.”
그리고 주소(注疏, 각주)에서는 그 뜻을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성(成)이란 그 행동의 이지러진 것을 바르게 하는 것이고, 균(均)이란 습속의 치우침을 균형 있게 하는 것이다.”
(387-389)
“모든 선비들이 학문에 힘쓰고 품행을 깨끗이 해 세상에 나오면 왕조의
존경 대상이 되고, 들어앉아서 유림(儒林)의 표상과 기준이 된다면 국가적으로는 그것이 큰 디딤돌이 되어 굳이 까다로운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법은 엄해질
것이요, 비단결같이 꾸미지 않아도 문장은 유려할 것이며, 노래와
춤이 아니어도 백성들은 즐길 것이고, 사냥 연습이 아니고도 병력은 강해질 것이며, 꼭 100년이 안 되어도 예악(禮樂)이 흥성해질 것이다.”
이렇게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서두를 시작한 정조는 나라에서 학생들을 예우하는 뜻을 이렇게 말했다.
“요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한결같이 지금 선비들의 처신이 예만
못하고, 학문도 지금 선비들은 예만 못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지껄이는 소리에 불과하다. 지껄이는 자 역시 지금의 선비가 아니란 말인가.
선비를 만들고 뛰어난 인물을 장려하는 것이 왜 괜한 일이 일이겠는가. 선비로서
자신을 아끼는 것과 남들이 아껴주는 것 모두가 국가에서 그들을 어떻게 대우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학생들에게 열심히 공부에 임할 것을 부탁하는데 그것은 의례적인 훈시가 아니라 술잔을 내려주며 하는 격려였다.
“이제 먹을 것과 함께 은술잔을 내린다. 제생(諸生)들은 술잔
속에 ‘아유가빈(我有嘉賓)’이라
새겨져 있는 것을 아는가? ‘나에게 아름다운 손님이 있다’는
이 말은 <시경> ‘녹명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빈객과 자리를 함께하는 것이란 그 얼마나 좋은
일인가. 밤새도록 자리를 뜨지 않고 갖옷 없이도 추위를 느끼지 않으며 또 피곤도 느끼지 않는다. 이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영재를 육성하는 데 일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새긴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부탁하는 말로 끝맺는데 그 비유의 뜻이 자못 사람을 긴장하게 만든다.
“아! 제생들아! 그대들은 나의 이 말로 하여 혹 느슨하게 생각하지들 말고 한 치 한 푼이라도 오르고 또 올라 마치 100리 길을 가는 사람이 항상 90리를 절반쯤으로 생각하듯이 하라. 그리하면 자만하고 싶어도 자만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계속해야 할
것이 학업이고 무궁무진한 것이 덕이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바라는 것은 제생들이 그렇게 계속
노력하여 무궁한 발전을 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제생들이여! 감히
노력하지 않아서 되겠는가.”
정조의 ‘100리 길을 갈 때 90리를
절반쯤으로 생각하라’는 말에 나는 그간 80리만 가도 다
간 기분으로 살았던 것 같아 조금 뜨끔했다.
(409)
먼 옛날로 돌아가서 600여 년 전,
수도 한양의 도시계획 마스터플랜을 설계한 삼봉(三峯) 정도전은
동네마다 이름을 지으면서 성균관 일대는 ‘가르침을 숭상한다’는
의미로 숭교방(崇敎坊)이라고 했다. 오늘날 대학로가 있는 성균관 옆 동네가 동숭동(東崇洞)인 것은 숭교방의 동쪽이라는 뜻이다.
(448)
성균관이 강학공간인 명륜당(明倫堂)과
향사공간인 대성전(大成殿)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교(敎)와 학(學)이 분리되지 않아 유학(儒學)이면서
동시에 유교(儒敎)임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그 때문에 불교와 마찬가지로 유교의 성현을 모시고 예를 올리는 종교공간을 갖고 있는데 이를 문묘(文廟)라 한다. 불교에
사찰이 있듯이 유교엔 문묘가 있고, 사찰에 대웅전이 있듯이 문묘엔 대성전이 있고, 사찰에 관음전, 지장전이 있어 보살을 모시듯이 문묘엔 동무(東廡), 서무(西廡)가 있어 역대 성현들을 모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