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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7권 - 간토대학살에서 광주학생운동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8월
평점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어느덧 한국 근대사 산책 7권이구나. 7권의 부제는 <간토대학살에서
광주학생운동까지>란다. 일제 시대에 일어난 사건들이
다 억울하고 가슴 아픈 사건들이긴 한데, 간토대학살이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아닌가 싶구나. 일본 도쿄와 그 주변 지역을 한자로 관동(關東)이라고 하는데 관동을 일본말로 간토라고 한단다. 그래서 간토대학살은
관동대학살이라고 해. 1923년 일어난 관동 대지진 이후 사람들의 불안과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일본정부
지휘아래 자경단이 만들어지고 그 자경단이 조선인들을 마구 죽인 사건을 이야기한단다. 7권의 이야기를
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시작하였단다.
…
1920년대 중반이 되었는데, 일제가
우리나라를 침략한지도 10년이 훌쩍 넘어서면서 독립의 희망은 점점 보이지 않던 시기였단다. 의열단원은 계속된 의거를 일으키면서 우리의 독립운동은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단다. 1923년 김익상, 오성륜, 김상옥의
의거가 이어졌어. 하지만 그들의 단발성 폭력적 의거가 무슨 효과가 있냐고 목소리도 나왔는데, 이런 의열단의 흔들리는 입지를 굳게 세워준 이가 단재 신채호였단다.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으로 의열단에 힘을 실어주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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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4)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잡고 끊임없는 폭력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强盜) 일본의
통치의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서 사회를 약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 고유적
조선의, 자유적 조선 민중의, 민중적 경제의, 민중적 사회의, 민중적 문화의 조선을 건설하기 위하여…… 우리 2000만 민중은 일치하여 폭력 파괴의 길을 매진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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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반하여 일제 점령의 세월이
길어지다 보니 변절자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이광수와 최남선도 그 대열에 합류하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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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최남선은 1928년 10월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의 촉탁으로 임명되었고, 12월에는 조선사편수회 위원이 되었다. 한국 최고의 단군 연구가이자
조선학의 제창자인 최남선이 식민사학의 총본산으로 들어갔으니 논란이 없을 리 만무했다. 정인보(1893~?)는 “최남선이는 죽었다”며
조문(弔文)을 썼으며, 일부
사람들은 종로의 명월관에 모여 굴건(屈巾), 제복(祭服) 차림으로 제상(祭床)을 차려놓고 대성통곡을 하면서 최남선 장례식을 지냈다. 최남선은 이후
일본에 가서 조선인 대학생의 학병을 권유하는가 하면 중추원 참의, 만주 건국대 교수, 만주 <만선일보> 고문
직책을 맡는 등 노골적인 친일 행각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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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똑똑한 친일파 양성을
위해 경성제국대학을 만들었단다. (1924년 5월) 이 대학을 통해서 친일세력을 길러내고자 했고, 일제 치하에서 출세하려는
자들은 경성제국대학을 목표로 했단다. 이런 경성제국대학이 해방 후 서울대가 되는데 연관성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서울대학교의 설립년도를 검색해보면 1946년으로 나오지만, 당시 경성제국대학을 포함하였다고 했거든. 경성제국대학 출신들은 광복
후 서울대 출신이라고들 했다고 하는데 그 연관성에 대해서는 쉽게 단절하지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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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공식적인 서울대학교사는 개교를 1946년으로 잡고 있지만 한편으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사>, <서울법대백년사>에서 볼 수 있듯이 경성제국대학을
그 뿌리로 간주하는 이중적 인식의 대학사를 가지고 있다. 즉, 국립
서울대학교의 설립 주체는 명백히 대한민국 정부임에도 불구하고, 법학부와 의학부는 개별적인 단과대학사를
통해 경성제국대학을 그 모체로 간주하고 동문의 범위를 경성제국대학 출신자에게까지 확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국립
서울대학교는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이라는 자부심을 가지면서도 스스로의 대학 정체성에 대한 치열한 반성과 고찰을 가지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다. 서울대학교가 그동안 이루어낸 많은 업적들에도 불구하고 대학 정체성의 반성 부재에서 비롯된 식민지적 엘리트 의식은
여전히 왜곡된 형태로 남아 서울대학교를 중심축으로 하는 현재의 대학교육 체제와 문화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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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20년대 국내 사회의 흐름을 좀 이야기해줄게. 1920년대에 전세계적으로 유행인 사회주의가 우리나라에도 유행했단다. 사회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등 단체가 만들어졌고, 당시 우리나라 공산주의자의 대표격인 박헌영의 인기도 높았대. 기독교가 점점 세를 확장해가면서 기독교와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반기독교의 대립도 심화되었대. 1926년 6월 10일에는
조선의 부끄러운 마지막 왕 순종이 죽고 장례식이 있었단다. 이 때를 맞춰 좌우가 합작하여 다시 한번
독립 만세운동을 기획했으니 6.10 만세 운동이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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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땅에 들어와 사는 일본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근대 문물들도 많이 들어오게 되었고, 돈 있는 친일파들 중심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대중화를 이루게 되었단다. 대표적으로 축음기가 유행하였고, 가수들도 인기를 끌었는데 <사의 찬미>를 부를 윤심덕이 당시를 대표하는 가수였단다. 신파극과 무성영화도
많이 인기를 끌었다는구나. 문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1925년 8월에는 KAPF라는 진보적 문학예술단체도 생겨났고, 1926년 6월에는 <개벽>이라는 잡지가 창간되었고, 그 잡지에 이상화 시인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저항시를 발표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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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141)
<개벽> 1926년 6월호 발표된 이상화(1901~1943)의 시(詩)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다. 정끝별은
“이 시의 매력은 굳세고 비장한 의지와 어우러진 섬세한 감각에 있다.
가르마 같은 논길, 입술을 다문 하늘과 들, 삼단
같은 머리를 감은 보리밭, 살진 젖가슴 같은 흙 등 빼앗긴 들을 온통 사랑스런 여성의 몸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니 온몸에 햇살을 받고 이 들(판)을 발목이 저리도록 실컷 밟아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야말로 내 나라 내 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관능적인 연애시의 옷을 입은 지극한 애국애족의 저항시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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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규가 영화 <아리랑>을 만들어 많은 사랑을 받았고, 백성들은 노래 아리랑을 부르며 나라 잃은 서글픔을 달랬단다. 나운규의 <아리랑>이 성공하면서 영화 산업의 붐을 일어났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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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시대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지고 참다 못한 소작농들이 소작쟁의를 일으키기도 했대. 1929년에는 423 건, 1930년에는 716건의
쟁의가 일어났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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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절 전화도 어느 정도 대중화를
이루었다고 하는구나. 그러면서 전화를 이용한 범죄들도 성행했다. 그때도
보이스 피싱이 있었나 보구나. 스포츠 종목도 많이 유행했는데 축구도 유행을 했고, 당시에도 승부에 예민들 하셔서 심판의 판정에 시비가 붙어 응원단들이 패싸움을 하기도 했다는구나. 축구는 인기가 좋아서 대학에도 축구팀을 만들었는데, 국제대회에서
우승한 일본의 대학 축구팀이 우리나라에 와서 연희전문대학과 한판 벌였는데, 4대 0을 지고 나서 부랴부랴 일본으로 도망을 갔다고 하는구나. 그때도
한일전은 질 수가 없지. 당시 이 경기를 본 백성들은 얼마나 기분이 좋았을까. 나라 빼앗긴 설움을 잠시나마 잊지 않았을까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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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287)
1927년부터는 사학의 명문 연희전문과
보성전문의 맞대결이 연보전(훗날의 연고전)이 세인의 관심을
끌었으며 이후 정기전을 갖게 되었다. 1927년 9월 상하이에서
열린 제8회 극동올림픽대회에서 필리핀을 누르고 우승한 일본 와세다대학 축구 팀이 경성에 들러 17일부터 19일까지 3차전을
갖기로 했다. 첫 경기 상대는 연희전문이었는데, 와세다대학
팀이 0대 4로 대패하고 말았다. 크게 놀란 와세다대학 팀은 남은 경기 일정을 취소하고 도망치듯 일본으로 떠나고 말았다. 박경호, 김덕기는 “이
같은 소식을 접한 국민은 잠시나마 피지배민족으로서의 설움을 잊을 수 있었다”며 “와세다 팀을 완전히 제압한 사실에 대해 국민들은 극동올림픽 쟁패전은 ‘우리의
승리’라고 외치고 승리감을 만끽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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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뿐만 아니라 야구도 인기가
있었어. 1922년 미국 프로야구올스타 팀이 서울에 방문했었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조선 대표와 시험도 했대. 23대 3으로 미국 프로야구올스타 팀이 이기긴 했는데, 조선의 야구팀도 무려 3점이나 뽑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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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 모던 걸, 모던 보이가 유행하고 미용실이라는 것도 생겨나서 여자들도 단발 머리로 자르는 이들이 있었고, 남자들은 장발이 유행하기도 했대. 박가분이라는 화장품이 크게 인기를
얻었고, 다방과 카페도 유행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우리나라는 점점 일본 식민지화가 되어 갔단다. 이대로 일본에 동화되어 하나가 되면 안될 텐데 말이야.
2.
한동안 뜸했던 의열단의 의거는 1926년 12월 28일
나석주 의거의 성공으로 건재함을 알렸어. 나석주는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었고,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여 7명을 죽이고 자신도 죽고 말았단다. 장진홍이라는 분은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던져 터트렸고, 조명하라는
분은 타이완에서 육군대장을 독 묻은 칼로 공격했단다. 그 육군대장은 이 사건의 후유증으로 8개월 뒤에 죽었어. 안타까운 것은 조명하 의사가 그보다 먼저 사형으로
돌아가시고 말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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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독립운동은 좌우의 합작
노력이 있었대. 그래서 만들어진 것인 1927년 2월 15일 결성된 신간회란다. 신간회는
민족주의, 사회주의를 모두 아우르는 단체였고, 신간회와 함께
여성단체인 근우회도 결성되었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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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서 일본인 학생이 우리나라
여고생을 희롱하고 모욕을 준 일이 있어났어. 이를 본 우리나라 남학생들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싸우게
되었는데 집단 싸움으로 번지게 되었어. 이 일로 경찰서에 갔는데, 경찰은
무조건 우리나라 학생들한테 잘못을 빌라고 했대.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학생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는데
그것이 바로 1929년 11월 3일에 일어난 광주학생 항일운동이었단다. 이 운동은 전국의 학생들을
자극하여 1930년 3월까지 전국 각지에서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났단다. 이 날을 기념하여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지정했단다. 아빠의 학창 시절 왜 학생의 날은
쉬지 않는 거냐고 투덜거렸던 것이 생각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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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최현배를 중심으로 한글을 만든 날을 기념하여 가갸날을
지정했어. 당시에는 훈민정음 반포일이 정확히 몰라서 음력 9월 29일로 했다는구나. 1928년에 가갸날을 한글날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던
광복 후인 1946년부터 10월 9일을 한글날로 지정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단다. 한 동안 한글날에 쉬지
않아서 마음이 아팠는데, 다시 쉬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구나.
…
대충 여기까지가 한국 근대사
산책 7권의 이야기란다. 빼먹은 부분도 많은데, 늘 그렇듯이 이해 바라고… 이제 한국 근대사 산책은 3권이 남았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조선에서 먹고살 길이 없어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 조건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늘 죽음의 공포와도 싸워야 했다.
책의 끝 문장: 1930년대에 일제는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으로 한국을
전시 체제의 소용돌이로 몰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