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기존 학계의 지배층이 동물계를 수컷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남성들이었고 또 많은 분야에서 지금도 그렇다는 사실이 문제를 악화시켰다. 연구에 영감을 주는 질문 역시 남성의 관점에서 던져졌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암컷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수컷은 사건의 중심이자 모델 생물이 되었으며, 암컷이 존재하는 토대이고 종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반면 엉망진창인 호르몬에 좌우되는 암컷은 주요 사건과는 상관없이 주변부에서 산만하게 얼쩡대는 이상치이므로 수컷과 동일한 수준의 과학적 검토를 받을 필요조차 없었다. 암컷의 몸과 행동은 조사되지 않았다. 그로 인한 데이터 공백이 급기야 자기실현적 예언이 되었다. 암컷은 언제까지나 수컷의 노력을 보조하는 무기력한 존재로 취급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연구된 적이 없으니 들이밀 결과가 있을 리가 없다.


(54-55)

X 염색체와 비교했을 때 Y 염색체는 가장 약한 녀석이다. 제대로 크지도 못했고 유전물질도 훨씬 적게 갖고 있다. 그러나 염색체에서는 크기보다 그 안에서 무엇을 암호화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실제로 Y 염색체에는 SRY(Sex-determining Region of the Y, Y 염색에의 성결정 지역)라는 아주 중요한 성결정 유전자가 자리 잡고 있다.


(74)

조직개념은 테스토스테론의 전능함만을 강조해왔지만 에스트로겐 역시 강력한 호르몬이라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에스트로겐은 앞에서 본 것처럼 개구리의 성을 전환하는 능력과 함께 테스토테론만큼이나 발생 초기에 동일한 조직에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드러났다. 또한 크루스는 에스트로겐을 차단하여 발생 중인 도마뱀 암컷의 성을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에스트로겐은 분명 암수의 성 발달을 조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또한 이후에도 성적 행동을 활성화하는 근본적인 책임을 맡고 있다. 여성성 호르몬은 정소와 정자를 만드는 데 필요할 뿐 아니라 일부 종에서는 수컷의 교미 행동을 자극한다고 밝혀졌다.


(122)

동물의 왕국에서 암컷은 수컷에게 빼앗긴 성적 운명의 통제권과 알의 친자 결정권을 되찾기 시작했다. DNA 검사 기술로 도마뱀에서 뱀, 바닷가재까지 다른 암컷들의 정절이 속속 철회되었다. 일처다부의 경향은 모든 척추동물에서 발견되었고 무척추동물에서도 예외가 아닌 표준으로 선언되었다. 한편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함께하는 진정한 성적 일부일처는 극히 드물어 지금까지 알려진 종의 7퍼센트 미만에서 확인되었다.


(133-134)

여성의 성적 취향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400~500만 년 동안 어떻게 변해왔는지 추측의 영역이다. 인간은 오늘날 사회적으로 일부일처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건 동부요정굴뚝새도 마찬가지다. 데이비드 M. 버스 같은 진화생물학자는 모든 여성이 아이들을 가장 잘 부양하기 위해 궁극적으로 일부일처를 추구한다는 생각을 즐길지도 모르지만, 만약 정절이 여성의 타고난 자질이라면 왜 그렇게 많은 문화에서 여성의 성생활을 통제하려고 애를 쓰겠냐고 허디는 묻는다. 통제 수단이 비방의 말이든 이혼이든 심하게는 할례이든 간에, 그 이면에는 여성을 방치하면 성적으로 난잡해진다는 보편에 가까운 의심이 깔려 있다. 허디가 지지하는 새로운 관점은 여성이 가진 성적 성향의 잠재력을 억제하고 제한하기 위해 가부장적 사회 체계가 진화했다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는 여성의 정절이 대단히 유연하게 작용한다. 처한 환경과 다양한 선택지에 따라 달라질 뿐, 아무리 유행하는 패러다임이라도 배우체의 숙명으로 여성의 정절을 예측할 수는 없다.


(243)

옥시토신은 근본적으로 엄마가 되는 실질적인 생리 과정과 연관되어 있어요.” 로빈슨이 내게 설명했다. 이 호르몬은 부드러운 근육 수축제로 작용하여 포유류에서 자궁이 아기를 밀어내도록 자극한다. 옥시토신이라는 명칭도 그리스어로 신속한 출산이라는 뜻에서 왔다. 또한 옥시토신은 유두에서 젖이 나오는 것도 촉진한다. 분만의 물리적 과정은 혈류에 있는 옥시토신에 의해 자극된다. 그러나 출산 중에 자궁경부가 확장되고 질이 늘어나면 그때부터 뇌에서는 전능한 옥시토신이 물밀듯이 쇄도한다. 그 결과 이 천연 아편제는 초보 엄마가 세상에 갓 나온 아기와 유대감을 형성하도록 단단히 준비시킨다. 아기가 젖을 빨기 시작하면 엄마의 뇌는 옥시토신에 흠뻑 적셔져서 아기를 돌보는 일에 중독이 된다.


(250-251)

엄마가 된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진화적 영향력을 가진 대단히 까다로운 일이다. 이처럼 어미가 아닌 다른 개체와의 사이에서 형성되는 유연한 애착 관계는 엄마로 하여금 유일한 부모상이 되어야 한다는 책임을 덜어주고 훨씬 넓은 범위의 돌봄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버려진 새끼를 입양한 회색물범의 경우처럼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애초에 공동 양육이 진화한 종도 있다. 이는 이중 업무’, 소위 투잡을 뛰어야 하는 동물의 어미에게 엄청난 이점이다.


(299)

영화 <마다가스카르>에서 아프리카의 이 커다란 섬은 줄리언 대왕이라 불리는 알락꼬리여우원숭이가 지배한다. 블록버스터 애니메이션들이 사실주의적 묘사로 유명한 건 아니지만 줄리언 대왕이 실제 마다가스카르 출신이라는 점에서 독자는 그를 신뢰할 만한 인물로 판단해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영화 속 줄리언 대왕의 설정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다. 실제로도 마다가스카르에는 알락꼬리여우원숭이가 많이 살지만 그들의 리더는 왕이 아니라 여왕이다. 영화 제작진은 자신들이 만든 영화에서 남성을 지배자로 내세우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꼈을지 몰라도 알락꼬리여우원숭이 사회를 지배하는 성은 단연 암컷이다.


(343)

결국 인류 과거에 대한 가장 적절한 재구성은 침팬지와 보노보의 특징을 섞은 형태일 것이다. 그것이 침팬지에 더 가까웠는지 보노보에 더 가까웠는지는 영원한 논쟁거리가 될 수 있고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그게 아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기에 바꿀 수 없다. 그러나 미래는 다르다. 보노보 사회가 영감을 준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보노보 이야기는 우리에게 남성이 공격적으로 여성을 지배하는 것은 유전적으로 프로그래밍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 행위와 능력은 환경적, 사회적 요인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여성에게 힘을 부여한 핵심적인 요소는 압제적인 가부장제를 무너뜨리고 좀 더 평등한 사회를 꾸려나가는 데 필요한 자매결연의 힘이다. 여기에서 자매란 가족은 물론이고 친구까지 모두 아우른다.


(360)

진경한 완경(完經)은 생식기관의 노화와 신체의 노화가 분리될 때 일어난다. 다시 말해 일반적으로 생식기관은 몸의 다른 부분보다 더 빨리 늙는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동물원에서 폐경을 경험한 고릴라는 공짜 식사와 건강 관리로 수명이 인위적으로 연장되었다. 야생에서 고릴라 암컷은 35~40년을 살지만 사육 상태에서는 60년까지도 살 수 있다. 몸과 뇌가 난소의 나이를 넘기는 것이다. 5000종의 포유류 중에서 야생에서 자연적으로 완경에 이른다고 알려진 종은 이빨고래류 4종과 인간뿐이다.


(379)

레이산알바트로스는 스테로이드에 심각하게 중독된 갈매기처럼 보인다. 22종의 알바트로스 중에서 체구가 가장 작을지 모르지만 날개를 활짝 펴면 농구계의 거인 르브론 제임스도 꼬마처럼 보일 정도다. 이 바닷새의 특별한 체격은 역동적인 활공에 최적화되어 해양의 상승기류를 타고 하늘 높이 올라 날개 한 번 움찔대지 않고 푸른 지구를 수천 킬로미터나 항해할 수 있다. 알바트로스는 물갈퀴 달린 발로 한 번도 땅을 밟지 않고 바다에서 몇 년을 보낼 수 있다. 지구력만큼 이길 자가 없는 이들은 선원과 시인과 신화 창조자들에게 똑같이 신성시되었다.


(425)

저는 학계의 테러리스트예요.” 러프가든이 농담처럼 내게 말했다. “영욱에서 다윈은 일개 과학자가 아닌 국가의 영우이죠. 다윈의 업적을 칭송하는 것은 영국 정체성의 일부입니다. 그 바람에 영국 진화생물학계는 보수적인 성향이 아주 강하게 되었지요.”


(435)

동물의 왕국을 흑백 안경을 쓰고 보는 바람에 다윈과 그의 발자취를 따른 많은 과학자들이 성의 차이점만을 강조하게 되었다는 게 크루스의 입장이다. 유사성을 연구함으로써 배울 것이 더 많은데 말이다.

사람들은 사실 수컷과 암컷의 형질 대다수가 비슷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수컷이든 암컷이든 모두 뇌가 있고 심장이 있고 몸이 있어요. 서로 다른 성 사이에는 차이점보다 유사점이 더 많아요.”


(441)

과학이 동물의 암컷을 얼마나 왜곡해왔는지를 책으로 쓰겠노라 처음 마음먹었을 때, 그 이야기가 이렇게 커질 줄도 몰랐고 내 대상이 이토록 문화적으로 오염되어왔는지도 몰랐다. 나는 막연하게 과학이란 당연히 과학적일 것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이성적이고 증거에 기반하여 실험을 통해 추론되고 오염되지 않은 지식이라고 말이다. 내가 대학에서 복음처럼 배운 진화생물학의 기본 개념들이 편견에 의해 왜곡되어왔다는 것은 충격적 깨달음이었다. 그 덕분에 자신의 편견에 맞서게 되었고 과연 우리가 개인적 인지의 족쇄에서 벗어나 동물의 세계를 진정 공정한 눈으로 볼 수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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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키프로스섬은 솔로몬왕 시절에 구리 생산지로 유명했어. <키프로스>라는 이름도 그리스어로 <구리>를 뜻하는 쿠프로스에서 왔지. 이 섬도 이스라엘 못지않게 외세의 각축장이 됐어.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현대에 들어서는 영국까지 눈독을 들였지. 2차 세계 대전 직후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엑소더스호를 타고 이스라엘 땅으로 향하던 중 영국군에 의해 유럽으로 강제 송환됐는데, 그들 중 일부는 다른 불법 체류자들과 함께 이 섬에 수용됐지. 이 사건은 나중에 미국 배우 폴 뉴먼이 주연한 영화 <엑소더스>로 만들어지기도 했어.”


(213-214)

등검은말벌의 벌집은 제거하지 않으면 이듬해에 네 개로 늘어납니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번식하는 거죠. 2005, 그러니까 토냉스시에 최초로 등검은말벌 여왕벌이 유입된 지 딱 1년 만에 로트에가론 지방 전체로 등검은말벌이 퍼져 꿀벌 군락의 30퍼센트가 파괴됐어요. 2006년에는 아키텐 지방에까지 피해가 확산되더니, 2009년에는 급기야 프랑스 전역에서 등검은말벌이 발견됐어요. 이때부터 사람의 사망사고도 잇따랐죠. 등검은말벌의 침에 쏘이면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 혈관 부종으로 이어져요. 침을 한번 박아 넣으면 빼지 못하고 죽는 꿀벌과 달리 등검은말벌은 여러 번 침을 쓸 수 있어요. 그러는 사이 우리 몸에 많은 양의 벌 독이 주입돼 사망에 이르게 되는 거예요. 프랑스에서만 매년 1백여 명이 등검은말벌에 쏘여 사망한다는 통계가 있어요.”


(218)

꿀벌은 개미, 등검은말벌과 함께 말벌에서 분화돼 나왔죠. 고릴라와 침팬지, 인간이 같은 조상을 둔 영장류 동물인 것과 같아요. 원시 말벌을 조상으로 둔 개미와 꿀벌, 등검은말벌은 일종의 <사촌 형제>인 셈인데, 먹이가 이들을 저마다 다르게 진화시켰다고 이해하면 돼요. 꿀벌은 식물성, 등검은말벌은 동물성, 개미는 잡식성이죠. 이 세 막시류 곤충은 여러 가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커다란 공통점이 있어요. 군집 생활을 하며 한 마리의 여왕을 중심으로 계급 체계가 짜여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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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우리가 태어나는 이유는 세 가지 때문이다.

1. 배우기 위해

2. 경험하기 위해

3.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23-24)

지금처럼 계속 미래에 관심을 가지게. 저 나무는 시간을 상징한다고 한번 생각해 봐. 뿌리는 과거를, 줄기는 현재를, 가지는 미래에 해당한다고 말이야. 과거는 땅에 묻혀 있어 보이지 않지. 그래서 우리가 실제로 보는 대상이 아니라, 머릿속에만 떠올리는 대상인 거야. 과거는 땅속 깊이 뻗어 있는 긴 뿌리들 속에 흩어져 있어. 이런 과거와 달리 현재는 단단하고 선명하지. 하나의 줄기 속에 들어 있거든. 미래는 나뭇잎이 달린 무수한 가지들로 이루어져 있어. 실현 가능한 미래의 시나리오를 의미하는 무성한 나뭇잎들은 서로 경쟁하듯 자라나. 그러다가 햇빛과 수액이 부족한 나뭇잎은 말라 죽게 되지. 나뭇가지 전체가 꺾여 떨어지는 경우도 있어. 이건 어떤 미래의 방향들이 사라지게 된다는 의미지. 하지만 하나뿐인 줄기에서 뻗어 나와 살아남은 다른 나뭇가지들은 눈에 보이는 단단하고 통합된 현재의 연장선에서 계속 자라게 되네. 나무는 계속 자라나. 하지만 이 미래의 나뭇가지들은 굵고 단단해질 수도, 가늘어져 꺾일 수도 있네.”


(88)

,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군요. 여러분은 그 누구의 말에도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해서는 안 됩니다. 내 말도 예외는 아니에요. 난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에요. 세계를 바라보는 내 관점은 부모와 사회로부터 받은 교육의 영향을 받았어요. 내 관점은 당연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어요. 이 말은 우리 모두가 그러한 존재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절대적인 객관성을 주장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적어도 여기 모인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있어요. 경계를 늦추지 마세요. 여러분의 생각을 조작해 거짓을 믿게 하려는 사람들이 곳곳에 존재한다는 걸 명심하세요.”


(225)

사람들이 새로운 것에 전형적으로 보이는 반응이 어떤지 알아? 이렇게 다섯 단계를 거쳐 반응한대. 1. 조롱한다. 2. 말도 안 되는 가설이라며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공격한다. 3. 가능성까지는 인정하지만 여전히 개연성은 낮다고 본다. 4. 진실임을 받아들이고 나서 왜 미처 그런 생각을 못 했는지 궁금해한다. 5. 너무도 명백한 진실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처음엔 그것을 의심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과 인간이 유인원이 후손이라는 것도 이런 단계를 거쳐 받아들여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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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당신이 구닥다리인 척, 고루한 척, 타락한 척하시는 거 저는 알고 있어요. 저는 당신이 부리는 이런 호기 따위는 하나도 신경 쓰지 않아요. 요즘 들어 때를 만난 유행이기도 하고요. 당신에게는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거나, 아니면 고통스러운 병일 테지만, 당신이 원하면 언제고 사라져버릴 겁니다. 당신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인데, 마음속 공허로 고통받고 있기 때문이죠. 공허에 귀를 기울이고 또 당신이 허락하기만 한다면, 당신의 그 공허를 채워줄 여인이 나타날 겁니다. 하지만 이는 제 관심사에서 벗어난 일이에요. 저는 예술가에게 말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 안의 남성이 불행한 단 하나의 이유는 예술가가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42-43)

저는요, 절대 저 자신을 해치지 않아요! 저는 타인을 좋아하는 만큼 저를 좋아합니다. 맹세컨대 저는 온 마음을 다해 저 자신을 좋아합니다! 제 팔레트, 제 영광의 도구가 저에게 고통의 도구라고 말한 이유는 제가 고통 없이 일하는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무질서 속에서, 제 몸이나 마음의 죽음이 아니라 제 신경이 소지된 후 안정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이게 답니다. 테레즈, 제 말 어디에 합리적이지 않은 부분이 있던가요? 저는 오로지 피곤에 빠졌을 때만 제대로 작업합니다.”

 

(48)

당신 속에 있는 그 힘과 제가 전쟁을 해야 하는지, 또 행복해지고 차분해지라고 당신을 설득하면서 사람들이 당신에게서 신성한 불을 없애버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열망은 정신에 대한 지속적인 조건이 될 수 없으며, 열망이 제 열에 들뜨면서 생생하게 표현되었을 때, 열망은 저절로 쓰러지거나 우리를 부수고야 말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모든 연령대가 각각의 특별한 힘과 징후를 가지고 있지 않나요? 우리가 소위 대가들의 다양한 방식들이라고 부르는 것, 그것은 그들 존재의 연속적인 변화가 만들어낸 표현이 아니었던가요? 서른 살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모든 걸 갈망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요? 무엇이건 어떤 관점에 관한 확신을 당신은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당신의 환상의 나이에 있습니다. 그러나 조만간 빛의 시기가 올 겁니다. 당신은 진보하기를 바라지 않나요?”

 

(93)

테레즈, 저는 말입니다.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건 당신이지 저 자신이 아닙니다. 제가 당신을 알게 된 이후, 당신은 제가 행복을 믿고 행복의 맛을 느껴보게 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제가 버릇없는 아이 같은 이기주의자가 되지 않은 게 당신 잘못은 아닙니다. 그렇지요! 저는 이보다는 나은 사람이지요. 저는 당신의 사랑이 제게 행복이 될 것인지를 지금 묻고 있는 게 아닙니다. 저는 오로지 사랑이 삶이 될 거라는 것, 그리고 좋건 나쁘건, 제게 필요한 게 바로 이런 삶 아니면 죽음이라는 것만 알 뿐입니다.

 

(159)

이제 정말 지긋지긋합니다. 우리 서로에게 솔직해집시다. 우리는 더 이상 서로 사랑하지 않아요. 서로 사랑한 적이 한번도 없다고요! 서로를 속여왔던 겁니다. 당신은 그저 연연이 있었으면 했던 거고, 아마 당신에게 저는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아무것도 아니었을 테지요! 당신에게 필요했던 건 하인이나 노예였다고요. 불행한 저의 성격, 제가 진 빚, 저의 권태, 무분별한 생활에서 느끼는 저의 무기력함, 진정한 사랑에 대한 저의 환상이 저를 당신의 재량에 맡기게 될 거라고, 제가 다시는 정신을 차릴 일이 없을 거라고 믿게 만든 겁니다. 이렇게 위험한 계획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려면 조금 더 행복한 성격, 더 큰 인내심, 더 많은 융통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 많은 재능이 당신에게 필요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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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1 09: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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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1 10: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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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1 10: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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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유길준은 <서유견문> 14장 개화의 등급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개화란 온갖 사물을 깊이 연구하고 경영하여, 날로 새롭고 더 새로워지도록 기약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그 진취적인 기상이 웅장하여 사소한 태만함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개화하는 일을 주장하고 힘써 실행하는 자는 개화의 주인이며, 개화한 자를 부러워하여 배우기를 기뻐하고 본받기를 즐거워하는 자는 개화의 빈객이다. 또 개화한 자를 두려워하고 미워하면서 부득이하여 따르는 자는 개화의 노예라 할 것이다.”


(35)

1902년부터 1903년까지 서울 주재 이탈리아 총영사로 일한 카를로 로제티도 1904년 이탈리아에서 출간한 <꼬레아 꼬레아니>에서 한국인들의 폭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에서는 많이 먹는 것이 큰 자랑거리의 하나이며,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는 누가 더 많이 먹는가를 내기하는 것이 매우 흔한 일이다. 이 경우 그들이 먹어치우는 엄청난 양은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러한 한국인의 체질로 인하여 상류층에서 가장 즐기는 오락이 바로 잔치라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혼령들을 위한 제사는 제쳐두더라도 결혼식 잔치에서부터 친척의 기일날에 이르기까지 즐거운 연회가 항상 함께 한다.”


(73-74)

서재필은 자서전에서 영은문은 조선이 중국의 명청 양국을 상국으로 섬길 때에 생긴 것인데, 우리가 중국의 노예라는 표라고 볼 수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본국에 돌아와서 제일 먼저 눈에 뜨인 것이 영은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더러운 표, 부끄러운 이 문을 없애야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였다. ……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다 독립문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때마침 내가 가진 화첩 중에 파리의 개선문이 생각나서 그 규모를 축소해 그 모양만은 똑같이 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그때 독일공사관에 근무하는 스위스 사람에게 설계도를 부탁 작성하였다. 그리하여 심()모라는 목수가 시공하였는데 총공사비는 1500여 원이 들었다.”


(128)

처음에 전화는 텔리폰이란 말을 음역(音譯)해서 덕진풍(德津風)이라고도 했고 의역(意譯)해서 전어기(傳語機)라고도 했다. 다리풍, 어화통, 전어풍 등으로도 불렸다. 영어 텔레폰의 차음이거나 신조어다.  당시 일반인들은 하늘의 전기바람은 비구름을 말리고 땅의 덕진풍은 땅 위의 물을 말린다며 전기와 전화를 싸잡아 경원시했다. 진용옥은 덕진풍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지만, 텔레폰의 한역이므로 덕률풍(德律風)’이 맞다고 주장했다.


(243-244)

또 전인권은 이 당시 종로는 조선의 아크로폴리스였으며, 이들의 투쟁은 단기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만민공동회는 종로에 연단을 만들고 신분과 나이의 구별 없이 어린이조차 연단에 올라 연설을 하는 등 한국의 직접적 민주주의또는 대중의 정치적 의사표현의 원형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


(255)

윤치호가 현실에 굴복해 변절했을망정, 그에게 국가, 사회를 생각하는 그런 정신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윤치호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즉시 관직을 버리고 애국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1906년에 결성된 대한자강회의 회장에 추대되었고, 1907년에 조직된 비밀단체 신민회의 주도 멤버로 활약했다. 그는 그런 활동을 하다가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게 된 것인데, 출감 후 그는 <매일신보> 사장과의 회견에서 이후 일선동화(日鮮同化)를 위해 노력할 것을 천명했다.


(273-274)

1899 5 26일에 일어난 전차 소각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종로 2가에서 전차가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를 치어 죽이자 아이의 아버지가 도끼를 들고 전차에 달려들었다. 전차가 멈추지 않고 지나가려 하자 이를 지켜보던 군중들이 차장과 운전수를 향해 돌진했다. 그들이 도망가자 군중은 방치된 전차에 돌을 던져 파괴하고 그 위에 석유를 붓고 불을 질렀다. 또한 뒤에 달려오던 다른 전차도 전복시키고 태워버렸다.


(369)

1902년부터 1903년까지 서물에 주재한 이탈리아 총영사 카를로 로제티는 1904년 이탈리아에서 출간한 책에 다음과 같이 썼다.

장례식의 주된 분위기는 분명 슬픈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바로 자신들의 감정을 가장하려는 극동 아시아 모든 민족의 기질인 것이다. 상여꾼들은 종종 청중의 웃음을 자아내는 노래를 부르며 보조를 맞춰 행진하고, 가족을 둘러싼 친지들은 농담이나 웃음짓으로 가족을 흥겹게 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쓰는데, 우리 관점에서 볼 때는 매우 어색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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