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유길준은 <서유견문> 14장 개화의 등급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개화란 온갖 사물을 깊이 연구하고 경영하여, 날로 새롭고 더 새로워지도록 기약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그 진취적인 기상이 웅장하여 사소한 태만함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개화하는 일을 주장하고 힘써 실행하는 자는 개화의 주인이며, 개화한 자를 부러워하여 배우기를 기뻐하고 본받기를 즐거워하는 자는 개화의 빈객이다. 또 개화한 자를 두려워하고 미워하면서 부득이하여 따르는 자는 개화의 노예라 할 것이다.”


(35)

1902년부터 1903년까지 서울 주재 이탈리아 총영사로 일한 카를로 로제티도 1904년 이탈리아에서 출간한 <꼬레아 꼬레아니>에서 한국인들의 폭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에서는 많이 먹는 것이 큰 자랑거리의 하나이며,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는 누가 더 많이 먹는가를 내기하는 것이 매우 흔한 일이다. 이 경우 그들이 먹어치우는 엄청난 양은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러한 한국인의 체질로 인하여 상류층에서 가장 즐기는 오락이 바로 잔치라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혼령들을 위한 제사는 제쳐두더라도 결혼식 잔치에서부터 친척의 기일날에 이르기까지 즐거운 연회가 항상 함께 한다.”


(73-74)

서재필은 자서전에서 영은문은 조선이 중국의 명청 양국을 상국으로 섬길 때에 생긴 것인데, 우리가 중국의 노예라는 표라고 볼 수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본국에 돌아와서 제일 먼저 눈에 뜨인 것이 영은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더러운 표, 부끄러운 이 문을 없애야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였다. ……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다 독립문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때마침 내가 가진 화첩 중에 파리의 개선문이 생각나서 그 규모를 축소해 그 모양만은 똑같이 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그때 독일공사관에 근무하는 스위스 사람에게 설계도를 부탁 작성하였다. 그리하여 심()모라는 목수가 시공하였는데 총공사비는 1500여 원이 들었다.”


(128)

처음에 전화는 텔리폰이란 말을 음역(音譯)해서 덕진풍(德津風)이라고도 했고 의역(意譯)해서 전어기(傳語機)라고도 했다. 다리풍, 어화통, 전어풍 등으로도 불렸다. 영어 텔레폰의 차음이거나 신조어다.  당시 일반인들은 하늘의 전기바람은 비구름을 말리고 땅의 덕진풍은 땅 위의 물을 말린다며 전기와 전화를 싸잡아 경원시했다. 진용옥은 덕진풍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지만, 텔레폰의 한역이므로 덕률풍(德律風)’이 맞다고 주장했다.


(243-244)

또 전인권은 이 당시 종로는 조선의 아크로폴리스였으며, 이들의 투쟁은 단기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만민공동회는 종로에 연단을 만들고 신분과 나이의 구별 없이 어린이조차 연단에 올라 연설을 하는 등 한국의 직접적 민주주의또는 대중의 정치적 의사표현의 원형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


(255)

윤치호가 현실에 굴복해 변절했을망정, 그에게 국가, 사회를 생각하는 그런 정신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윤치호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즉시 관직을 버리고 애국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1906년에 결성된 대한자강회의 회장에 추대되었고, 1907년에 조직된 비밀단체 신민회의 주도 멤버로 활약했다. 그는 그런 활동을 하다가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게 된 것인데, 출감 후 그는 <매일신보> 사장과의 회견에서 이후 일선동화(日鮮同化)를 위해 노력할 것을 천명했다.


(273-274)

1899 5 26일에 일어난 전차 소각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종로 2가에서 전차가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를 치어 죽이자 아이의 아버지가 도끼를 들고 전차에 달려들었다. 전차가 멈추지 않고 지나가려 하자 이를 지켜보던 군중들이 차장과 운전수를 향해 돌진했다. 그들이 도망가자 군중은 방치된 전차에 돌을 던져 파괴하고 그 위에 석유를 붓고 불을 질렀다. 또한 뒤에 달려오던 다른 전차도 전복시키고 태워버렸다.


(369)

1902년부터 1903년까지 서물에 주재한 이탈리아 총영사 카를로 로제티는 1904년 이탈리아에서 출간한 책에 다음과 같이 썼다.

장례식의 주된 분위기는 분명 슬픈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바로 자신들의 감정을 가장하려는 극동 아시아 모든 민족의 기질인 것이다. 상여꾼들은 종종 청중의 웃음을 자아내는 노래를 부르며 보조를 맞춰 행진하고, 가족을 둘러싼 친지들은 농담이나 웃음짓으로 가족을 흥겹게 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쓰는데, 우리 관점에서 볼 때는 매우 어색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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