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4)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잡고 끊임없는 폭력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强盜) 일본의 통치의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서 사회를 약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 고유적 조선의, 자유적 조선 민중의, 민중적 경제의, 민중적 사회의, 민중적 문화의 조선을 건설하기 위하여…… 우리 2000만 민중은 일치하여 폭력 파괴의 길을 매진해야 하리라.”


(58)

최남선은 1928 10월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의 촉탁으로 임명되었고, 12월에는 조선사편수회 위원이 되었다. 한국 최고의 단군 연구가이자 조선학의 제창자인 최남선이 식민사학의 총본산으로 들어갔으니 논란이 없을 리 만무했다. 정인보(1893~?)최남선이는 죽었다며 조문(弔文)을 썼으며, 일부 사람들은 종로의 명월관에 모여 굴건(屈巾), 제복(祭服) 차림으로 제상(祭床)을 차려놓고 대성통곡을 하면서 최남선 장례식을 지냈다. 최남선은 이후 일본에 가서 조선인 대학생의 학병을 권유하는가 하면 중추원 참의, 만주 건국대 교수, 만주 <만선일보> 고문 직책을 맡는 등 노골적인 친일 행각을 벌였다.


(77)

공식적인 서울대학교사는 개교를 1946년으로 잡고 있지만 한편으로, <서울대학교 의과대락사>, <서울법대백년사>에서 볼 수 있듯이 경성제국대학을 그 뿌리로 간주하는 이중적 인식의 대학사를 가지고 있다. , 국립 서울대학교의 설립 주체는 명백히 대한민국 정부임에도 불구하고, 법학부와 의학부는 개별적인 단과대학사를 통해 경성제국대학을 그 모체로 간주하고 동문의 범위를 경성제국대학 출신자에게까지 확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국립 서울대학교는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이라는 자부심을 가지면서도 스스로의 대학 정체성에 대한 치열한 반성과 고찰을 가지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다. 서울대학교가 그동안 이루어낸 많은 업적들에도 불구하고 대학 정체성의 반성 부재에서 비롯된 식민지적 엘리트 의식은 여전히 왜곡된 형태로 남아 서울대학교를 중심축으로 하는 현재의 대학교육 체제와 문화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140-141)

<개벽> 1926 6월호 발표된 이상화(1901~1943)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다. 정끝별은 이 시의 매력은 굳세고 비장한 의지와 어우러진 섬세한 감각에 있다. 가르마 같은 논길, 입술을 다문 하늘과 들, 삼단 같은 머리를 감은 보리밭, 살진 젖가슴 같은 흙 등 빼앗긴 들을 온통 사랑스런 여성의 몸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니 온몸에 햇살을 받고 이 들()을 발목이 저리도록 실컷 밟아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야말로 내 나라 내 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관능적인 연애시의 옷을 입은 지극한 애국애족의 저항시다고 평가했다.


(158-159)

김려실은 나운규가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걸 지적하면서, 이런 의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가 <아리랑>을 통해 정말 관객에게 호소하고 싶었던 것은 동포여, 저항을 계속하라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검열 때문에 그 뜻을 직접적으로 영화에 표현할 수는 없었고, 그래서 <아리랑>의 영웅 영진은 정신 이상자로 설정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역설적이게도 <아리랑>은 저항은 뜻을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표현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221)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거의 외우다시피 했던 민태원(1894~1935) <청춘예찬>이다. 삶이 고달픈데도 청춘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하는 의아심을 갖고 그 내용을 음미했던 학생들도 많았으리라.

이성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다. 청춘의 끓는 피가 아니더면, 인간이 얼마나 쓸쓸하랴? 얼음에 싸인 만물은 죽음이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따뜻한 봄바람이다. 풀밭에 속잎 나고, 가지에 싹이 트고, 꽃 피고 새우는 봄날의 천지는 얼마나 기쁘며, 얼마나 아름다우냐? 이것을 얼음 속에서 불러내는 것이 따뜻한 봄바람이다. 인생에 따뜻한 봄바람을 불어 보내는 것은 청춘의 끓는 피다. 청춘의 피는 뜨거운지라, 인간의 동산에는 사랑의 풀이 돋고, 이상의 꽃이 피고, 희망의 놀이 뜨고, 열락(悅樂, 기뻐하고 즐거워함)의 새가 운다.


(229-231)

강점기 노동파업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건 1919 1월에서 4월까지 벌어진 원산총파업이다. 이는 그 규모와 지속성, 그리고 강인성과 투쟁성이란 점에서 식민지 시기 한국 노동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분수령을 이루는 중요한 사건이다. 원산총파업은 원산항에서 하물의 하역, 운반에 종사하는 부두노동자를 주축으로 조직된 원산노동연합회에 의해 지도되었는데, 1921년 설립된 원산노동회를 원산노동연합회의 전신으로 볼 수 있다. 경철과 군대를 동원한 일제의 극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90여 일이나 지속된 원산총파업은 3.1운동, 광주학생운동과 함께 일제하 대표적 민족해방운동으로 기록되고 있다.


(286-287)

1927년부터는 사학의 명문 연희전문과 보성전문의 맞대결이 연보전(훗날의 연고전)이 세인의 관심을 끌었으며 이후 정기전을 갖게 되었다. 1927 9월 상하이에서 열린 제8회 극동올림픽대회에서 필리핀을 누르고 우승한 일본 와세다대학 축구 팀이 경성에 들러 17일부터 19일까지 3차전을 갖기로 했다. 첫 경기 상대는 연희전문이었는데, 와세다대학 팀이 0 4로 대패하고 말았다. 크게 놀란 와세다대학 팀은 남은 경기 일정을 취소하고 도망치듯 일본으로 떠나고 말았다. 박경호, 김덕기는 이 같은 소식을 접한 국민은 잠시나마 피지배민족으로서의 설움을 잊을 수 있었다와세다 팀을 완전히 제압한 사실에 대해 국민들은 극동올림픽 쟁패전은 우리의 승리라고 외치고 승리감을 만끽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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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우주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구는 그 많은 행성들 중 어쩌다 생긴 하나에 불과했고, 그중에서도 아주 작은 행성이었으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고 해도 별 상관 없는 행성이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안에서 존재의 이유조차 알 수 없도록 우연히 생긴 생명체였다. 사랑과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만든 것은 인간이다. 이 땅을 외롭게 만든 것은 오롯이 인간의 짓이라는 걸 상기할 때마다 나는 그저 이 행성을 떠나야만 그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35-36)

그리고 어느 곳이든 네가 나아가는 곳이 길이고, 길은 늘 외롭단다. 적당히 외로움을 길 밖으로 내던지며 나아가야 한다. 외로움이 적재되면 도로도 쉽게 무너지니까. 알겠니?

나는 이곳에 오기 전까지 아버지에게 카림한테서 들었던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설령 보지 않은 것을 보았다고 거짓말했더라도, 내 출발지가 그곳이었음은 변하지 않으니까. 나는 아버지에게 보지 않은 것은 쓸 수 없다고 말했지만 결국 보지 않은 우주를 꿈꿨다. 나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을 향해 가고 있고, 긴 주행을 마친 아버지는 현재만이 존재하는 세계에 정착했다.


(93)

엄마는 원장과 눈을 마주 보고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엄마가 자주 하는 우기기의 비법인데, 말이 안 되는 주장을 펼칠 때일수록 당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구는 네모난데 왜 동그랗다고 하는 거예요? 라는 말을 내뱉은 학자처럼 말이다. 원장은 그럴 수도 있나? 하다가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고 엄마의 계략에 넘어갔다. 세상이 이렇게 얼렁뚱땅 생겼다는 걸 엄마를 통해 배웠다. 세상은 치밀해 보이지만 사실 대체로 엉성하고 얼렁뚱땅 넘어간다는 것을.


(153)

이 사랑은 어떤 물질로 이루어진 사랑일까. 나를 꽉 끌어안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이 미적지근한 온도의 사랑은. 엄마가 내게 마지막으로 알려준 것은 온도였다. 이 온도를 기억하고 있다가, 이런 온도의 존재를 만나야 한다고.


(235)

내가 가족들을 가능 늦게 만났잖아. 늦게 태어났으니까. 그 단단한 결속력, 나는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에 쌓았을 추억. 그런 걸 감내하고 버텨야 하는 자리라고, 막내가. 그런 의미로 애교란 살아남기 위한 생존수단인 셈이지. 나는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라는 어필. 마치 강아지나 고양이가 주인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 애교를 부리듯이. 언니는 그럴 필요가 없었겠지. 언니가 태어났을 때는 언니 혼자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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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중세에는, 하나의 건물이 완전한 경우에는, 땅속에도 바깥과 거의 같은 정도의 건물이 있었다. 노트르담처럼 말뚝 위에 세워져 있지 않다면, 궁궐이나 요새나 성당은 으레 이중의 토대가 있게 마련이다. 대성당에는, 밤낮으로 파이프오르간과 종소리가 울리고 불빛으로 넘쳐흐르는 지상의 홀 아래에, 낮고 캄캄하고 신비롭고 빛 없고 소리 없는, 말하자면 또 하나의 지하 대성당이 있었다. 궁궐이나 성에는, 감옥이 있었고, 때로는 분묘가 있었으며, 또 때로는 그 두 가지가 다 있었단다.


(171)

신부는 숨이 막혀 또 잠시 말을 끊었다. 그러고 나서 계속했다.

벌써 반쯤 홀린 나는 무엇엔가 매달려서 추락을 막으려고 해봤어. 나는 사탄이 이미 내 앞에 파놓은 함정을 생각했어. 내 눈 아래 있던 여자는 하늘이 아니면 지옥에서밖에 올 수 없는 그런 초인적인 미인이었어. 거기에 있는 것은 약간의 우리 흙으로 만들어진, 그리고 내면에서 여자의 넋의 가물거리는 빛으로 희미하게 밝혀진 하잘것없는 처녀가 아니었어. 그것은 천사였어! 그러나 암흑의 천사, 불꽃의 천사였어. 광명의 천사는 아니었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당신 옆에서 염소 한 마리가, 마술사의 야연의 짐승 한 마리가 웃으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았어. 한낮의 태양은 그 염소의 뿔을 새빨갛게 만들어주고 있었어. 그때 나는 악마의 함정을 보는 듯했고, 당신이 지옥에서 왔다는 것을, 당신이 지옥에서 온 것은 오직 내 영혼을 멸망시키기 위해서라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어. 나는 그렇게만 믿었어.”


(225)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마음속을 파고 들어가면서, 자연이 거기에 얼마나 널따란 자리를 정열에게 준비해 놓았는지 보았을 때, 그는 한결 더 고통스럽게 비웃었다. 그는 자기 마음의 밑바닥에서 자신의 모든 증오를, 자신의 모든 악의를 휘저어 보고, 환자를 진찰하는 의사와 같은 냉철한 눈으로 그 증오는, 그 악의는 부패한 사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간의 모든 미덕의 원천인 이 사랑은 신부의 가슴 곳에서는 끔찍한 것으로 변한다는 것을, 그리고 자기와 같이 생긴 인간은 신부가 됨으로써 악마가 된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리고 그는 소름 끼치게 웃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는, 자신의 숙명적인 정열, 결국 한 여자에게는 교수대를, 한 남자에게는 지옥을 가져다주어 그 여자는 사형수가 되고 자기는 영벌 받는 사나이가 되는 결과밖에 초래하지 못한 그 부식적이고 유독하고 증오에 넘친, 빙탄 같은 사랑의 가장 끔찍한 면을 생각하고는 다시 창백해졌다.


(432-433)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 이건 정말 사실이오. 그래. 내 가슴을 태우고 있는 이 불이 바깥으론 조금도 나오지 않는단 말인가! ! 아가씨, 밤이고 낮이고, 정말 밤이고 낮이고 내 가슴은 타고 있는데, 그래 조금도 가엾지 않소? 이건 밤이고 낮이고 꺼질 줄 모르는 사랑이란 말이오. 고통이란 말이오. ! 나는 너무도 괴로워하고 있어. 가련한 소녀여! 이건 동정을 살 만한 일임에 틀림이 없어. 당신도 보다시피 이렇게 나는 당신에게 가만가만 얘기하고 있잖소? 난 당신이 나에 대한 그 공포심을 버리게 되길 얼마나 바라고 있는지 몰라. 요컨대,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 남자의 잘못은 아니잖소? ! 세상에 이럴 수가! 아니 그래, 당신은 영원히 나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건가? 나를 언제까지나 미워하겠다는 건가! 그래 모든 것은 끝장났단 말인가! 바로 그런 까닭에 나 자신이 성미가 고약해지고 스스로 악독해진 거야. 당신이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아! 내가 우리 두 사람의 저승의 경계에 서서 떨면서 당신에게 얘기하는 동안에도, 당신은 아마 딴생각을 하고 있는 거겠지! 뭣보다도 그 장교 얘기는 내게 하지 마오! 아니 그래! 내가 당신의 무릎 아래 몸을 던지고, 당신의 발이 아니라(당신은 그걸 원치 않을 테니까) 당신의 발 아래 있는 흙에 입을 맞추고, 어린애처럼 흐느껴 울고,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당신에게 말하기 위해, 내 가슴에서 말이 아니라 내 염통과 오장육부를 뽑아낸다 하더라도 모두가 헛일이란 말인가. 모두가! 그러나 당신의 마음 속에는 다정하고 너그러운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고, 이 세상에 다시없는 유순한 빛으로 당신은 반짝이고 있고, 아리따움과 상냥함과 자비로움과 사랑스러움이 온몸에 가득 차 있소. 그런데, , 슬프도다! 당신은 오직 나에게만은 심술궂기만 하오! ! 무슨 얄궂은 숙명일까?”


(466)

여러분은 저를 가엾게 여겨주실 거예요. , 나리들? 이집트 계집들이 제 딸을 훔쳐 갔어요. 그년들은 십오 년이나 그 애를 감추고 있었어요. 저는 그 애가 죽은 줄로만 믿고 있었어요. 상상을 좀 해보세요. 좋은 친구 양반들, 제가 그 애를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는 걸 말이에요. 저는 십오 년간을 여기서, 이 지하실에서, 겨울에 불도 없이 지냈어요. 그건 참 힘든 일이에요. 이 조그맣고 가련한 사랑스러운 신짝! 제가 하도 울부짖었더니 하느님께서 제 소원을 들어주셨어요. 오늘 밤, 하느님은 제 딸을 돌려주셨어요. 하느님의 기적이지요. 제 딸은 죽지 않았어요. 여러분은 어 재를 제게서 뺏어 가지 않겠지요. 저는 확신해요. 그것도 저라면, 아무 말 않겠어요. 하지만 제 딸은 열여섯 살짜리 어린애라고요! 햇빛 볼 시간을 그 아이에게 남겨주세요! 저 애가 여러분에게 무슨 짓을 했다는 거예요? 전혀 아무 짓도 한 게 없어요. 저도 역시 마찬가지고요. , 여러분이 알아주신다면, 제겐 저 애밖에 없다는 걸, 저는 늙었다는 걸, 성모마리아께서 제게 보내주신 축복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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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은 아직 오늘날에도 장엄하고 숭고한 건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이 늙어가면서도 아무리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최초의 돌을 놓은 샤를마뉴와 최후의 돌을 놓은 필리프오귀스트에 대한 경의를 저버리고, 세월과 인간들이 동시에 이 존경할 만한 건축물에 가한 무수한 풍화와 훼손 앞에서 한숨을 쉬지 않고 분개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209)

대개 어느 나라에서나, 특히 프랑스에서는, 중세의 경이로운 예술이 그렇게 취급되어 왔던 것이다. 그 파괴에서 세 가지 상해를 구별할 수 있는데, 그 세 가지 모두가 저마다 다른 깊이로 상처를 입히고 있으니, 우선, 세월은 눈에 띄지 않게 여기저기 표면에 구멍을 내고 도처에 녹이 슬게 해놓았고, 다음으로 정치적, 종교적 혁명은 그 자체의 성격상 맹목이요 분노인지라, 소란스럽게 그것에 달려 들어, 조각물과 세공품의 풍부한 복장을 찢고, 원화창들을 도려내고, 아라비아식 장식과 작은 상()들의 목걸이들을 부서뜨리고, 자기들의 주교관을 위해 혹은 자기들의 왕관을 위해, 조상들을 뽑아내 버렸으며, 끝으로, 갈수록 기괴망측해지고 어리석어진 유행이었으니, 건축양식의 필연적인 타락 과정에서, 르네상스의 무정부주의적인 화려한 탈선 이래로 갖가지 유행이 바뀌었다. 유행은 혁명보다도 더 많은 해독을 끼쳤다. 유행은 뿌리째 뽑아내고, 예술의 뼈대를 침식하고, 형식에서나 상징에서, 논리에서나 미()에서, 건물을 베고 자르고 무너뜨리고 죽여놓았다. 그런 뒤에 유행은 고쳐 만들었는데, 세월이나 혁명은 적어도 그런 야심은 없었던 것이다.


(229-230)

그 꼭대기에 숨을 헐떡거리면서 도착하는 구경꾼에게 그것은 맨 먼저 눈부신 지붕과 굴뚝과 거리와 다리와 광장과 종루 들이었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눈을 사로잡았다. 깎아지른 듯한 합각머리, 뾰족한 지붕, 성벽 모퉁이에 매달린 소탑, 11세기의 피라미드식 석조 건물, 15세기의 판암 오벨리스트, 아성의 꾸밈없는 둥근 탑, 성당의 장식 네모탑, 큰 것, 작은 것, 육중한 것, 경쾌한 것 등등. 눈길은 오랫동안 그 미궁 속에 깊이깊이 잠겨 드는데, 거기에는 저마다 제 나름의 독창성과 동기와 특성과 아름다움이 없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고, 전면에 물감 칠과 조각을 하고, 바깥으로 뼈대가 불거지고, 문이 반궁륭이고, 위층들이 앞으로 불쑥 나온, 작디작은 가옥에서부터 당시에는 탑이 즐비했던 장엄한 루브르 궁에 이르기까지, 예술에서 오지 않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256)

그런데 현재의 파리는 아무런 공통성도 없다. 그것은 여러 시대의 견본들의 집합체인데, 가장 아름다운 것들은 사라져버렸다. 수도는 가옥들로만 커져가고 있거니와, 무슨 가옥들이 그 모양인가! 파리는 이대로 가다가는 오십 년마다 새로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파리의 건축물의 역사적 의의는 날마다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기념적인 대건축물들은 더욱더 드물어져가고, 집들 속에 잠겨서 차츰 삼켜져가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선조는 돌의 파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우리 자손은 회반죽의 파리를 갖게 될 것이다.


(262)

보통, 낮에 파리에서 풍겨 나오는 소음은 도시가 이야기하는 것이요, 밤에는 도시가 숨을 쉬는 것인데, 지금 여기서는 도시가 노래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종탑들의 총 합주에 귀를 기울이고, 오십만 인구의 중얼거림을, 강물의 영원한 하소연을, 바람의 끊임없는 숨결을, 거대한 파이프오르간 상자처럼 지평선 언덕에 흩어져 있는 네 숲에서 멀리 들려오는 장중한 사중창을 그 모든 것 위에 퍼뜨리고, 마치 반음 속에서처럼, 중앙의 종소리가 가진 너무도 거칠고 날카로운 모든 것을 거기에서 부드럽게 하고, 그리고 말하라, 이 세상에서 이 종소리와 인경 소리보다도, 이 음악의 도가니보다도, 300척 높이의 돌 피리 속에서 한꺼번에 노래하는 이 수만의 청동 목속리보다도, 이제 하나의 오케스트라에 불과한 이 도시보다도, 폭풍 같은 소리를 내는 이 교향악보다도, 더 풍부하고, 더 즐겁고, 더 금빛이고, 더 눈부신 것을 그대는 알고 있는지를.


(324)

그 반면 연금술은 가지가지의 발견을 하였소. 다음과 같은 결과들에 나리는 이의를 내세우시렵니까? 1000년 동안 땅 아래 갇혀 있던 얼음은 바위 수정으로 변해 가고 있습니다. 납은 모든 금속들의 선조입니다. (왜냐하면 금은 금속이 아니고 빛이니까요.) 납은 각각 200년의 기간만 있으면 차례차례로 납의 상태에서 적비소(赤砒素)의 상태로, 적비소에서 주석으로, 주석에서 은으로 옮아 갑니다. 이러한 것들이 사실이 아닙니까? 그러나 <작은 열쇠>를 믿고, 충만한 선을 믿고, 별들을 믿는다는 것은, 옛중국 사람들과 더불어, 꾀꼬리가 두더지로 변하고, 밀알이 잉어과의 물고기로 변한다고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일이란 말입니다!”


(332-333)

내 판단으로는, 그 사상에는 두 가지 면이 있었다. 그것은 첫째 신부로서의 사상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요인, 인쇄물이 대한 성직의 공포였다. 그것은 구텐베르크의 빛나는 인쇄기에 대한 성직자의 두려움과 경탄이었다. 그것은 인쇄된 말에 놀라는 강단과 수사본이요, 구두의 말과 필기의 말이었다. 천사 레지옹이 600만의 날개를 펴는 것을 보는 참새의 당황과도 비슷한 그 무엇이었다. 그것은 해방된 인류가 웅성거리는 소리를 벌써 듣고, 미래에 지성이 신상을 서서히 무너뜨리고, 여론이 믿음의 자리를 빼앗고, 세계가 로마를 뒤흔드는 것을 보는 예언자의 외침이었다. 인쇄기에 의해 발산된 인류의 사상이 신정(神政)의 그릇에서 증발하는 것을 보는 철학자의 예언. 청동의 파성추를 살펴보고 탑이 무너지리라고 말하는 군인의 공포. 그것은 하나의 힘이 바야흐로 다른 힘을 이어받으리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인쇄기가 성당을 죽이리라는 것을 뜻하고 있었다.


(337)

모든 문명은 신정(神政)으로 시작되고 민주주의로 끝난다. 통일성에 뒤이어 오는 이 자유의 법칙은 건축술에 쓰여 있다. 왜냐하면, 이 점은 강조해 두거니와, 벽돌 공사가, 신전을 건축하고 신화와 성직의 상징체계를 표현하고 그 돌의 책장들에 율법의 신비로운 일람표들을 상형문자로 옮겨 쓰는 데만 효력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모든 인류 사회에는, 신성한 상징이 자유사상 아래 닳아 없어지고 인간이 성직자를 피하고 철학과 제도들의 부속물이 종교의 얼굴을 갉아먹는 시기가 오게 되므로, 건축술은 인간 정신의 이 새로운 상태를 재현할 수 없을 것이고, 그 책장들은 표면은 가득 차 있되 이면은 텅 비어 있을 것이고, 그 작품은 온전하지 못할 것이고, 그 책은 불완전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342)

이렇게, 구텐베르크에 이르기까지, 건축술은 주요한 문자요 보편적인 문자이다. 동양에서 시작되고 그리스 로마의 고대에 의해 계속된 이 화강암 책은, 중세가 그 마지막 페이지를 썼다. 게다가 우리가 앞서 중세에서 관찰한 특권계급의 건축술의 뒤를 이은 이 민중의 건축술이라는 현상은, 인류의 지성에서, 역사상의 다른 위대한 시대들과 유사한 모든 운동과 함께 재현된다. 그리하여 여기서 모두 설명하자면 여러 권의 책이 필요할지도 모를 하나의 법칙을 간추려서 서술어 본다면, 원시 시대의 요람인 저 고대의 동양에는 인도의 건축술 다음에 아라비아 건축술의 풍만한 어머니인 페니키아의 건축술이 왔고, 고대에는 이집트 건축술(에트루리아 양식과 키를롭스 건축술들은 이집트 건축술의 변종에 불과하다) 다음에 그리스식 건축술이 왔고(로마 양식은 그리스식의 연장에 불과하되, 카르타고식 둥근 지붕을 이고 있는 점만이 다르다), 근대에서는 로마네스크 건축술 다음에 고딕 건축술이 왔다.


(347)

그러므로 인쇄술이 발명된 때부터 얼마나 건축술이 시나브로 여위어가고 오그라져가고 발가벗겨져 가는지 보라. 물은 줄어들고 진()은 밭아 들고 시대와 국민의 생각은 건축술에서 물러가는 것을 사람들은 얼마나 절감하고 있는가! 냉각은 15세기에는 거의 지각할 수 없다. 인쇄술은 아직 너무도 허약하여, 고작 해봤자 강력한 건축술의 잉여생명력을 우려먹는다. 그러나 16세기부터는 건축술의 병이 눈에 보이고, 건축술은 이미 절대적으로 사회를 더 이상 표현하지 못하고, 비참하게도 고전 예술이 되고, 갈리아의 건축술, 유럽의 건축술, 토착의 건축술에서 그리스와 로마의 건축술이 되고, 진정하고 근대적인 건축술에서 의()고대적 건축술이 된다. 이러한 쇠퇴를 사람들은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그러나 화려한 쇠퇴다. 왜냐하면 고딕의 낡은 천재가, 마인츠의 거대한 인쇄소 뒤로 저물어가는 이 태양이, 아직 얼마 동안은 그 마지막 햇살로 라틴의 홍예와 코린트의 원주들로 이루어진 그 모든 잡동사니의 건축물 더미를 비춰주고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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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시의 말에 늦잠을 자던 알료샤가 슬그머니 목을 빼고 바라보았다. 세 여자의 대화 속에 레닌이나 스탈린이란 단어만 나오면 잔뜩 긴장하던 알료샤였다. 하지만 고리키라는 이름이 나오면 슬며시 미소를 띠었다. 세 여자가 고리키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면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했다. 알료사뿐만이 아니었다. 혁명 소설가 고리키에 대한 러시아인의 특별한 사랑은 석류 알갱이처럼 붉고 투명한 연어알절임과 당근 빛깔이 나는 묽은 야채수프를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일상적인 것 같았다. 세 여자가 열차 식당칸에서 고리키 이야기를 하자 주변의 러시아인들도 알아듣고는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소련은 역시 레닌의 나라였다. 관공서 어디를 가도 1년 전에 사망한 레닌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150-151)

내가 보기엔 당신네 공산당도 오십보백보요. 나는 사서삼경도 못 읽는 촌부이지만 당신네들이 자유시에서 조선인 독립군을 수천 명이나 학살했다는 얘기를 들었소. 당신네들은 이번에 중국인 지주들을 때려죽이자는데, 아니 지금 우리가 못사는 게 정녕 그 사람들 때문이란 말이오? 오히려 반대가 아니오? 그 사람들 아니면 우리는 벌써 첫해에 굶어 죽었을 거요. 일본 놈들을 물리치자는 말까지는 알아듣겠지만 그 이상은 도통 이해를 할 수가 없소이다. 나는 자기네가 권력을 잡으면 다 될 것같이 떠드는 사람들 하나도 못 믿겠소이다. 어느 놈 할 것 없이 백성의 고통을 팔아서 권세를 누리려는 것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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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모모 2023-11-07 09: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어봐야겠어요. 글귀가 인상적이네요. 소개해주셔서 감사해요^^

bookholic 2023-11-07 20:54   좋아요 0 | URL
네.. 잘 모르고 있던 분을 새로 알게 된 점도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