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내 책에는 내가 가슴으로 외우는 단락들이 있다.

가슴으로(by heart), 이것은 내가 가벼이 쓰는 표현이 아니다.

내 심장(heart)은 약하고 믿을 수 없다. 내가 간다면, 그건 심장 때문일 것이다. 나는 심장에 되도록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무언가 심장에 영향을 줄 것 같으면, 방향을 다른 데로 돌린다. 예를 들어, 내 위장, 혹은 폐, 폐는 잠시 작동을 멈출 수는 있겠지만 아직까지 다음 숨을 쉬지 못한 적이 없다. 거울 앞을 지나다 내 모습을 일별할 때, 혹은 정류장에 있는데 아이들이 내 뒤에 와서, 누가 똥냄새를 풍기는 거야? 하고 말할 때 날마다 겪는 작은 모욕들 나는 그것들을 대개는 간에서 받아낸다. 다른 피해들은 또다른 곳에서 받는다. 모든 상실한 것들에서 받는 타격은 췌장이 전담한다. 상실한 것들이 너무 많은데 비해 그 장기는 너무 작은 게 사실이다.


(72)

엄마는 아빠를 사랑하는 마음을 둘이 처음 만났던 여름만큼 생생하게 유지했다. 그러기 위해 인생을 외면했다. 때로 엄마는 물과 공기만으로 며칠을 버티기도 했다. 알려진 고등 생명체 중 그렇게 생존이 가능한 유일한 존재로서, 엄마의 이름을 딴 생물종이 하나 있어야 마땅하다. 언젠가 줄리언 삼촌이 해준 얘기에 따르면, 조각가이자 화가인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머리 하나를 그리기 위해 때로는 몸 전체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나뭇잎을 그리기 위해서는 전체 풍경을 희생해야 한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한계를 지우는 것 같을지 몰라도 시간이 좀 지나면, 하늘 전체를 다루는 척할 때보다 무언가의 4분의 1인치 정도밖에 안 되는 부분을 다룰 때, 우주에 대한 어떤 느낌을 붙잡을 가능성이 더 크다.

엄마는 나뭇잎이나 머리를 택하지 않았다. 엄마는 아빠를 택했고, 어떤 느낌을 붙잡기 위해 세상을 희생했다.


(111)

인간의 최초 언어는 손짓이었다. 사람들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이 언어는 전혀 원시적이지 않았으며, 손가락과 손목의 섬세한 뼈를 이용한 무한한 조합의 동작으로 현재 우리가 쓰는 말 가운데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없었다. 손짓 하나하나가 복잡하고 미묘했으며, 그 움직임을 통해 발휘되었던 섬세함은 그때 이후로는 완전히 상실되었다.


(113)

우리가 손짓의 언어를 완전히 잊어버린 것은 아니다. 말을 하며 손을 움직이는 습관이 그 언어의 잔재다. 손뼉을 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엄지를 치켜세우고 하는 모든 것이 고대의 손짓이 남긴 유물이다. 예를 들어 서로 손을 잡는 것은 함께 있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기억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너무 어두워 앞이 보이지 않는 밤중에는 뜻을 전하기 위해 서로의 몸에 대고 손짓을 할 필요를 느낀다.


(165-166)

누군가가 막대기 두 개를 맞대고 비비다가 처음으로 불꽃을 일으킨 순간이 있었던 것처럼, 처음으로 기쁨이 느껴진 순간, 처음으로 슬픔이 느껴진 순간이 있었다. 한동안 새로운 감정들이 계속해서 발명되었다. 욕망은 일찍이 생겨났고 후회도 마찬가지였다. 완고함이 처음으로 느껴졌을 때, 그것은 연쇄 작용을 일으켜 한편에서는 원망이, 다른 한편에서는 소외와 외로움이 생겨났다. 반시계 방향의 어떤 골반 동작이 황홀경의 탄생을 촉발했을 것이고, 번개의 일격이 최초의 경외심을 일으켰을 것이다. 아니면 앨마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의 몸이 그랬는지도 모른다. 어불성설 같지만, 놀라움의 감정은 초기에 바로 탄생하지 않았다. 그것은 충분한 시간이 흘러 사람들이 모든 것의 기본 양태에 익숙해지고 난 후에야 생겨났다. 그리고 실제로 충분한 시간이 흐르고 누군가가 최초로 놀라움의 감정을 느꼈을 때, 다른 곳의 다른 누군가는 최초로 짜릿한 향수를 느꼈다.


(166)

사람들이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느끼고 싶은 욕망도 커졌다. 이따금 심하게 상처를 받으면서도 그들은 더 많이, 더 깊이 느끼고 싶어했다. 사람들은 감정에 중독되었다. 새로운 감정들을 발견하려고 발버둥을 쳤다. 예술은 바로 이런 식으로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종류의 기쁨이 새로운 종류의 슬픔과 함께 만들어졌다. 예컨대, 있는 그대로의 삶에 대한 영원한 실망, 예상치 못한 유예가 주는 안도감, 죽음에 대한 두려움.


(193)

그때부터 나는 나 자신이나 부모님이 죽을 거라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엄마였다. 세상은 엄마라는 힘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평생을 공상에 잠겨 살았던 아버지와 달리 엄마는 인정사정없는 이성의 추진력으로 우주를 헤쳐나갔다. 엄마는 우리가 벌이는 모든 싸움의 재판관이었다. 엄마의 꾸짖는 말 한마디면, 우리는 구석으로 가 숨어 울면서 순교자의 고난을 겪는 자신을 상상하게 되었다. 그렇긴 하지만, 엄마의 입맞춤 한 번이면 우리는 다시 왕자가 되었다. 엄마가 없다면 우리의 삶은 혼란 속에서 분해되고 말 터였다.


(196)

그애의 몸을 의식하게 된 바로 그 순간에 내 몸에 대해서도 의식하게 되었기 때문에. 거의 숨이 멎을 것 같은 감각이었다. 찌릿찌릿한 느낌이 온 신경에 불붙듯이 퍼져나갔다. 그 모든 일이 삼십 초도 안 되는 순간에 일어났을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가자, 나는 아동기의 종말이 시작되는 곳에서 나타나는 신비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일 분의 절반도 안 되는 그 순간에 내 안에서 생겨난 기쁨과 고통을 모두 소진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였다.


(199)

그것으로, 간단히 말하자면, 죽음에 대한 내 집착은 막을 내렸다.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생각하지 않게 된 것뿐이다. 앨마를 생각하지 않는 여분의 시간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 시간에 죽음을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을 말하자면, 나는 벽을 세워 그런 생각을 차단하는 법을 배웠다. 세상에 대해 새롭게 배우는 것들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떤 곳으로부터 영원히 떠나왔음을 이해했다. 그렇긴 하지만. 그 벽은 또한 유년기의 고통스러운 생생함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주었다. 목덜미에 죽음의 숨결을 느끼며 숲속에, 굴에, 지하실에 숨어 지내는 동안에도 나는 진실을, 내가 곧 죽으리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심장마비를 겪고 나서야, 나를 유년기에서 분리해준 벽의 돌들이 마침내 허물어지기 시작하고서야 죽음의 공포는 되돌아왔다. 그리고 그것은 예전 어느 때 못지않게 무서웠다.


(269)

몽상에 빠져 있다가 내려야 할 정류장을 놓쳐서 열 블록을 되돌아 걸어가야 했는데, 한 블록씩 지날 때마다 불안은 커지고 확신을 줄어들었다. 앨마가 실제 살아 있는 앨마가 정말로 나온다면 어떡하지? 책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지? <사랑의 역사>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다면 어떡하지? 들어본 적은 있지만 잊고 싶다면? 그동안 앨마를 찾느라 너무 바쁜 나머지, 정작 그녀가 발견되기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340)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때가 있었고, 내 인생에 대해 생각한 때도 있었다. 최소한 삶을 꾸리기는 했다. 어떤 종류의 삶? 그냥 삶. 나는 살았다. 쉽지는 않았다. 그렇긴 하지만. 절대로 견딜 수 없는 것이란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375)

정말이지, 별로 말할 것은 없다.

그는 위대한 작가였다.

그는 사랑에 빠졌다.

그것이 그의 삶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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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동물들은 해가 뜰 무렵과 해가 질 무렵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다고 한다. 빛과 어둠이 서로 섞여들 때 눈에 가장 잘 띄는 것이다. 경험으로 보아도 그런 것 같다. 때문에 아침과 저녁 시간은 최대한 놓치지 않으려고 애쓴다. 물론 동물들과 마주치는 시간이 꼭 아침과 저녁 때만인 것은 아니다. 그 시간은 일정하지 않다. 그 만남은 우연에 기대는 행운이라 더 기쁘다.


(123)

어벙이를 꺼내 녀석과 만나게 하자 녀석들은 신이 나서 난리법석이다. 한참 서로를 핥아대다 몸을 기대고 뛰어다니는 것이 이산가족 상봉보다 못할 것이 없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고기를 주자 깡패 녀석은 금세 악마로 돌변한다. 고기를 끌어안은 채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린다. 하루 종일 굶주렸을 테니 그럴 만도 했다.


(273)

나무가 아닌 숲을 보아야 한다. 발자국 하나하나를 쫓기보다 발자국의 전체적인 방향을 보며 속도를 높였다. 이곳은 모래언덕이 커다란 파도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어느 쪽으로 방향을 잡아도 언덕을 올랐다가 평지로 내려왔다가 다시 언덕을 올라야 한다. 늑대들도 마찬가지다. 언덕을 올랐다가 다시 평평한 초지를 지나야 한다. 풀밭에서는 발자국이 보이지 않는다. 그럴 때는 다음 언덕에 올라 동쪽이나 남쪽의 모래비탈로 가보면 다시 발자국이 나타났다. 일종의 조각그림 맞추기였다. 문제는 시간을 어떻게든 단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해가 지면 일단 멈추었다가 내일 다시 시작해야 했다. 발걸음이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374)

몽골의 초원이나 숲속을 헤매다보면 대자연 안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금세 깨닫게 된다. 사람의 손이 타지 않은 대자연을 낭만적인 눈으로 아름답게만 보는 것이 순진한 태도일 것이다. 저 자연 안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생각일지도 모른다. 자연 안에서 우리는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곳은 생태계라는 숨 막히는 질서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는 곳, 용서와 배려와 관용 따위는 처음부처 없는 곳이다. 잠자리가 모기를 잡아먹는 것부터 늑대가 사슴을 물어뜯는 것까지, 초 단위 분 단위로 사냥과 죽음이 벌어지는 곳이다.


(375)

늑대의 삶은 우아하지도 파워풀하지도 않다. 놈들의 삶은 늘 고달프다. 엄격한 계급구조와 힘겨운 사냥, 이웃 무리와의 갈등…… 육식동물의 세계는 초식동물의 그것보다 훨씬 버겁다.

인류가 수렵과 채집을 하던 시기, 개는 늑대에 더 가까웠다. 가축을 기르고 농경생활이 시작되면서 늑대는 지금 개의 모습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잉여 생산물과 그 찌꺼기로 생존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사람이나 다른 가축들에게 공격적인 녀석들은 모두 제거되었고, 녀석들에게 남아 있던 늑대의 본성 역시 철저하게 억제되었다. 그러면서도 늑대의 특성 중 일부는 교묘히 이용했는데, 제 영역과 무리를 지키려는 성질이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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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그 전문성을 취사선택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된다는 것을 시민들에게 설명해야 합니다. 전문가를 뽑는 게 아니라 어떤 전문적 의견이 나한테 좋은가를 선별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시장에 가면 구두 장인들이 여럿 있지만 내 발에 맞는 구두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은 내가 제일 잘 안다는 거예요. 전문가들이 만들어낸 정책 중에 내가 선택해야 된다, 최종적으로는 탁월한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같은 보통사람들이 결정해야 된다는 것이요. 우리가 말입니다. 법률이든 정책이든 결국 내가 혜택을 입고 내가 피해를 입으니 내가 결정해야 한다, 그렇게 접근해서 설명해야 되지 않나 싶습니다.


(30-31)

숙의민주주의나 시민의회를 가장 싫어하는 건 제가 보기에 관료집단인 것 같아요. 그로 인해 권력이 가장 줄어드는 것이 관료이니까요. 행정관료는 물론이고 판사, 검사도 결국 관료입니다. 물론 선출직 정치인들도 자기 권한이 침해 당한다고 생각하지만 관료집단보다는 덜한 것 같아요. 그리고 그걸 넘어설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드는 게 정치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한국 정치인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시민들에게 권력을 진정으로 돌려주는 것입니다. “대신해서 잘 결정해주겠다가 아니라요. 그런 측면에선 진보적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이 몹시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32)

민주주의 이야기할 때 흔히 자유민주주의라고 그러잖아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된 것이죠. 그런데 불완전하게 결합되어 있어요. 실은 자유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반대했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이 소위 부르주아혁명 이후 권력을 잡은 부르주아들인데, 이 사람들은 노동자들이 권한을 갖는 것을 거부했어요. 영국에서는 1830년대 이후 100년 동안 투쟁한 후에야 노동자들이 보통선거권을 쟁취합니다. 자유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마지못해서 받아들였어요. 그런데 최근에 전세계적으로 극우세력 증오정치가 활성화되면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다시 분리될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즉 자유 없는 민주주의가 될 수 있어요. 포퓰리즘으로 분명히 사람들 표를 받기는 했는데 결과가 사람들의 자유를 박탈하는 경우가 있잖습니까? 미국의 트럼프가 그렇고, 유럽에서도 그런 사례들이 있습니다. 스위스에서도 주민투표로 이슬람식 첨탑을 가진 사원을 못 짓게 했습니다. 민주주의 방식이기는 하지만, 이슬람교 사람들의 기본권을 박탈한 사례입니다. 이게 자유 없는 민주주의입니다. 또하나는 자유는 있는데 민주주의는 없는 경우입니다. 박정희, 전두환 때죠. 민주주의는 없는데 대신 경제활동의 자유는 있었죠. 말하자면 부르주아 자유주의 같은 것입니다.


(37)

대의정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으니까. 정치체계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과 정당이 하나의 이익집단이 되어버렸어요. 자기들 이익을 우선시하고 있어요. 스포츠로 치면 링 위에 복서 두 명이 엉켜서 서로 껴안거나 반칙만 하고 있는 거예요. 심판이 나와서 떼어놓고 경기를 제대로 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정치에서 선거 매커니즘이 작동하지 않으면 국민들이 나설 수밖에 없어요. 시민들이 나서서 떨어져라, 공정하게 경기를 하라고 명령해야 합니다.


(40)

1958 3월 하와이 마우나로아 관측소에서 세계 최초로 측정한 이산화탄소 농도는 313pp이었다. 1992년의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 평균은 357pp,. 산업화 이전 지구 평균 이산화탄소 농도는 대략 280ppm. 산업화의 엔진에 발동이 걸리고 200여 년 동안 33pm이 높아졌는데, 관측이 시작되고 리우회의까지 34년 만에 44ppm이 증가했다. 2013 5월 마침내 마우나로아 이산화탄소 측정값은 400ppm을 넘어섰다. 리우회의로부터 20여 년간 43ppm이 증가한 것이다. 마우나로아 관측소가 발표한 2020 11월 평균 이산화탄소 측정값은 412.89ppm, 2019 11 410.25ppm이었다.


(46)

새로운 기후 신세계는 아마도 독재와 풀뿌리 민주주의 두 갈래 길이 가장 유력할 것이다. 현명한 독재자가 강력한 권력을 휘둘러 온실가스 배출 넷제로의 국가로 급속하게 전환할 수도 있다. 이런 기후독재정치를 많은 사람들이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플라톤이 주장하는 철인정치는 말이 좋아 철학자 정치지 왕이나 절대자가 하루아침에 마음을 바꾸는 일은 역사상 부지기수이다. 젊을 때 근본 사회주의였던 사람이 어느 순간 정반대 태극기 부대원으로 변신하는 것을 보면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70)

그러므로 생태주의가 오늘날의 환경운동을 넘어서서 혁명적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카스토리아디스에 따르면, 현대인들의 삶에 대한 심리사회적 태도에서 심원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삶의 목적이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것밖에 없다는 사고방식-터무니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모멸적인-은 기각되어야 한다. ‘합리적이라고 하는 자본주의적 가정들, 무한한 확장이라는 개념은 폐기되어야 한다. 특히 그런 심오한 변화는 풀뿌리 수준에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점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개별적 개인이나 단체들은 기껏해야 가능한 방향을 그려 보여주고 사회가 변화하도록 자극을 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생태주의적, 즉 본질적으로 혁명적인 운동은 사회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는 것이다.


(74)

그저 정말로 문제가 되는 사안들에 대해서 민중이 모여 진정한 토론을 하는 세상-바로 이것이 시민의회가 약속하는 것이고, 이것은 세계 전역에서 가속적으로 도입되고 있다. 이들 의회는 투표가 이니라 추첨을 통해서 구성된다. 이들은 미디어 앞에서 가식적으로 행동하고, 상대방에 대해서 비열한 비판을 일삼고, 로비스트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대신, 진정한 숙의기구로서 기능한다. 이 아이디어는 엉뚱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실은 서구문명 그 자체만큼 역사가 긴 정치제도이다. 그리고 이것이 시행된다면 역사상 가장 민주적인 시대가 열릴 것이다.


(87)

지금부터 그리 멀지 않은 미래의 어느 날을 그려보자. 우편으로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우리 공동체에 봉사하도록 선택되었습니다.” 기분이 어떨 것 같은가? 운 좋게도 우리는 추측할 필요가 없다. 시민의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압도적으로 그 경험이 긍정적이었다고 말한다. 배심원 의무와 마찬가지로 압도적 다수의 시민들이 사안의 무게를 인식하고 자신의 책임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어느 집단에나 가끔 있기 마련인 미치광이도 잘 제어한다. ‘평민들에게 의사결정을 맡기는 일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주장들(민중의 무지하다, 민중은 비이성적이다, 민중은 쉽게 조종당한다!)은 과거에 흑인, 여성, 무산자 백인 남성들에게 투표권을 주어선 안된다고 했던 이유와 정확히 같다. 그런 주장은 그때에도 틀렸고 지금도 틀렸다. 사람은 어름으로 취급하면 어른처럼 행동한다.


(100-101)

요컨대,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처음에는 권력이 통합되어 있었지만 정치적 영역과 경제적 영역으로 나뉘게 되었고, 그리고 1970년대에 브레턴우즈체제가 종식된 이후에는 경제영역도 산업영역과 긍융영역으로 나뉘고 또 증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권력은 금융역역의 손에 남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제가 했던 질문 기억하세요? 왜 정치인들이 20, 30, 40년 전보다 무능해 보이는 것일까요? 그 답은 정치영역이 완전히 힘을 잃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제 힘을 갖고 있는 영역은 경제영역이고, 특히 금융영역입니다. 젊고 유능하고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라면 (이념이나 역사관은 그다지 없다고 한다면) 어떤 길을 밟을까요? 미국 대통령이 되려고 할까요, 골드만삭스 CEO가 되려고 할까요? 후자이겠죠.


(119)

<역사 정치 교육 및 학교 교육의 목표, 목적 및 실천으로서의 민주주의> 권고안을 살펴보면 독일 학교는 살아있는 민주주의의 장소로서 서로의 존엄성을 자원으로 하여, 타인에 대한 관용과 존중이 행해지고, 시민적 용기가 강화되고, 민주적 절차와 규칙이 지켜지고, 갈등이 비폭력적으로 해결되는 곳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독일의 학교에서는 지식도 민주적으로 배워야 하며, 학교에서 겪는 다양한 경함 역시 민주주의를 익히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여긴다. 그래서 학교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은 독일 기본법에 근거하여 경쟁과 성취에 따른 비교보다는 민주주의의 장점과 혜택을 경험하고 자유, 정의, 연대 및 관용과 같은 민주주의의 기본가치가 경시되거나 무시되어선 안된다는 것을 체험한다. 다만 이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자유와 의견을 존중함에 있어 무조건적인 중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46)

패전국 일본의 처지는 전혀 달랐다. 유럽과는 달리 동아시아의 전후처리는 미국이 독주했다. 전승국들이 대등하게 분할해서 점령한 독일의 경우와는 달리 일본은 미국이 사실상 단독으로 점령했다. 이를 위해 미국은 일본도 독일처럼 분할 지배하자던 소련의 요구를 물리쳤고, 대신 민주 쪽으로 남하해 오던 소련군에게 한반도 38도선 이북을 마음대로 떼어주며 무마했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남북 분단이 거기서 시작됐고, 일본 패전의 짐을 엉뚱하게 일제의 피해자인 한반도와 오키나와가 뒤집어쓴 형국이 됐다. 한반도 주변에는 영국도 프랑스도 없었다. 장제스 국민당의 중국도 연합국 대접을 받긴 했으나 아무런 힘이 없었고, 그마저 국공내전에서 밀리면서 공산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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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열여덟살 때 나는 개인공간 침해라는 게 뭔지 몰랐고 누군가가 접근하는 것을 꺼리거나 거부할 권리가 나에게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때는 누가 친절과 애정을 베푼답시고 다가오면 그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빨리 가버리기를 속으로 빌거나 가능한 순간이 오면 내가 얼른 예의 바르게 자리를 뜨는 게 최선이었다.


(102)

그렇지만 한편으로 깨어 있고 귀를 세우고 루머건 현실이건 전부 주시한다고 해서 일어날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이미 일어난 일에 개입하거나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도 없다. 아는 것은 힘이 아니고 안전이나 안도감도 아니고, 어떤 사람에는 힘, 안전, 안도감의 정반대 것일 수도 있다. 예민하게 깨어 있다보면 자극이 계속 쌓여 고조되기 마련인데 그런 스트레스를 해소할 출구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걸으면서 책을 읽는 것은 알지 않으려고 일부러 하는 행동이다. 경계하지 않으려고 경계하는 것이다.


(129-130)

누구나 사는 게 힘들다는 거. 자기만 힘든 게 아닌데 왜 특별 대접을 해줘야 하니? 힘든 일도 기쁜 일도 마찬가지로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자기를 추슬러 존중을 받을 것이지. 그런 사람도 있단다, 딸아. 고통을 한껏 누리는 사람보다도 오히려 더 정신병을 일으킬 이유가 많은 사람, 고통스러운 이유가 더 많은 사람도 있어. 그런데도 어둠에 굴복하거나 한탄에 빠지지 않고 용기 있게 자기 갈 길을 가고 굴복하지 않는 사람들 말이야.”


(137)

그러니까 빛나는 것은 나쁘고, ‘너무 슬픈것도 나쁘고 너무 기쁜것도 나쁘니 따라서 이도 저도 아닌 채로 살아야 했다. 또 생각도 하지 말아야 했다. 적어도 생각이 겉으로 드러나게 하면 안되므로 다들 자기 생각을 저 아래 깊이 안전하게 감추었다. 엄마와 아빠로 말할 것 같으면 아빠는 너무 우울한 얼굴쪽으로 갔고 엄마는 너무 강력하게 위를 바라보는쪽으로 가서 아빠는 주기적으로 신경쇠약을 일으켜 병원에 가야 했고 그 결과 엄마는 위를 바라보는것을 잊어버리고 아빠가 또 자기를 여기에 버려두고 가버렸다고 화를 냈다. 여러해 동안 나나 동생들은 아빠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사실, 그것도 그냥 병원이 아니라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140)

고양이는 개처럼 사람을 따르지 않는다. 사람한테 관심이 없다. 사람의 자존감을 북돋워주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고양이는 제 갈 길을 가고 제 할 일을 하고 사람에게 굴종하지 않고 사람에게 미안해하는 일도 없다. 고양이가 사과하는 건 본 적이 없는데 설령 고양이가 사과를 한다고 하더라도 틀림없이 진심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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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우선 헌법만 해도 그렇지요. 온통 한자말과 일본 말법으로 되어 있는데다가 아주 새까맣게 한문글자로 써 놓았으니, 누가 이 헌법을 읽겠습니까? 읽어도 알 수 없으니 법이란 본래 이렇게 어렵게 되어 있는 것이라고 치부해 버리고는 읽다가도 내던져 버리지요. 법률의 조문이란 정말 이렇게 어려운 말로 써야 하는 것일까요? 그래서 고시 공부하는 사람이나 머리 싸매고 읽어야 하는 것으로 되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법은 모든 국민이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법을 바로 지키고, 법이 바로 서고, 사회가 밝아집니다. 모든 국민이 알아야 하는 법을 알 수 없는 글로 써 놓았다면 그 글이 잘못되었으니 마땅히 고쳐야지요. 쉬운 우리말로 누구든지 읽을 수 있게 모든 법률의 조문을 다시 써야 우리 사회가 제대로 됩니다. 더구나 헌법은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이 되는 틀을 짜놓은 법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국민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하겠습니까?


(12~13)

헌법은 그 나라가 서 있는 근본조건이 되는 커다란 원칙을 밝혀 놓은 법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국민이면 누구든지 우리나라 헌법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런데 우리 헌법은 그 문장이 중국글자를 섞어서 썼을 뿐 아니라 말법이 일본 말법으로 되어 있는 대문이 많아서 국민 모두가 읽을 수 없고, 읽는다고 하더라도 그 뜻을 쉽게 알아볼 수 없는 대문이 많다. 여기에 헌법을 쉬운 우리말 우리글로 다듬고 바로잡아 본 까닭이 있다. 헌법을 이와 같이 우리글 우리말로 고쳐 쓰면서 안타깝게 생각한 것은 왜 법을 만들고 법조문을 글로 쓴 사람들이 쉬운 우리말로 쓰지 못했을까?’ 하는 것이다. 만약에라도 헌법을 쉬운 말로 써 놓으면 법에 권위가 없어진다고 생각했다면 이것은 분명히 우리말과 우리 백성들을 업신여기는 태도라도 나는 본다.


(58)

(2) 모든 국민은 일할 의무를 진다. 국가는 일할 의무의 내용과 조건을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법률로 정한다.

(3) 일하는 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한다.

(4) 여자가 일할 때는 특별한 보호를 받으며, 고용, 품삯과 일하는 조건에서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5) 어린 사람이 일할 때는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


(60)

(1) 모든 국민은 사람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

(2) 국가는 사회 보장, 사회 복지의 증진에 힘쓸 의무를 가진다.

(3) 국가는 노인과 청소년의 복지 향상을 위한 정책을 실시할 의무를 진다.


(62)

(3) 국가는 주택 개발 정책들을 펴서 모든 국민이 알맞고 기분 좋은 주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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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1-18 13: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이오덕 선생님 책 좋아하는데 이런 책도 있군요. 아이랑 같이 읽어야겠어요 *^^*

bookholic 2021-01-19 00:09   좋아요 1 | URL
저도 이오덕 선생님의 책을 좋아해서 알게 된 책이랍니다~~^^
이오덕 선생님 덕분이 헌법도 다 읽어보고~~
우리집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나중에 크면 저도 같이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군요.
쌀쌀해진 날씨에 감기, 코로나 조심하시고 행복한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