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에서 다산까지
김형효 지음 / 청계(휴먼필드)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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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효의 글을 읽는 것은 대단히 흥미롭다. 철학을 공부하면서 이런저런 난해한 책들에 어느정도 단련이 되었지만 그래도 문장 연결이 안되는 책들이 어디 한두권이던가. 특히 번역서를 읽을때면 한글 문장을 읽으면서 그 난해함에 혀를 내둘렀던 일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러나 김형효는 그런 난해한 문법을 쓰지 않는다. 철학의 풀어쓰기라고나 할까. 그의 박학다식함이야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을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이미 철학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알것이다. 그러나 그 박학다식함이 좋은 책을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요는 철학의 풀어쓰기가 이루어져야 하고 문장의 힘이 받쳐 주어야 좋은 책이 된다. 

제목에서 암시하는 것처럼 이 책은 한국철학자들 다섯명의 사상을 정리한 글이다. 원효, 지눌, 퇴계, 율곡, 다산. 각자의 호불호가 다르니 딱히 어떤 글이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나는 지눌과 율곡 쪽으로 좋았고 특히 지눌의 글을 읽으면서는 지눌을 더 공부하고 싶다는 열망을 불태우기도 했다. '성성적적', 깨어 있으되 요란스럽지 않고 고요하되 혼미하지 않는다는 불교의 오랜 법어들이 선승 지눌의 글을 통해 나오면 가슴에 화인처럼 박힌다. 이런 말들이야 흔하다. 남명이 자신을 드러내되 드러내지 않으며 살아야 한다고 말한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 사상의 비교철학적 해석이라는 설명처럼 이 책은 각 사상가들의 사상을 서로 비교하고 있고, 때로는 서양 철학자들의 사상과도 비교한다. 몇년동안 서양철학을 공부해 오다가 한국철학책을 읽으니 머리 속에는 여전히 서양철학의 이론들이 맴돌고, 한국사상에 내가 서양사상을 접목시키는 재미도 누릴 수 있다. 김형효도 칸트를 전공한 서양철학자이지만 이제는 어느 한분야에 그를 얽매여 놓기에는 폭이 너무 넒다. 학위를 받기 위한 전공이 세월을 넘어 그 전공까지 넘을 수 있으니 김형효의 학문의 깊이가 새삼스레 위대해 보이는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김형효의 독특한 해석에 때로 의문이 생겨 주변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하고, 난상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해석이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김형효만의 독자적인 해석법이다. 플라톤의 이데아와 퇴계의 리의 연관성을 가지고 토론하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 고정불변이라고 흔히 알고 있는 이데아와 변하는 리가 분명히 닮은 꼴이 있음을 확인하고 플라톤의 이데아를 다시 공부하면서 이데아 역시 불변이 아님을 확인한 것은 큰 수확이었다. 플라톤은 후기에 가서 고정불변이라고 주장했던 이데아를 퇴계의 리처럼 스스로 활동해서 현상으로 드러남을 말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플라톤과 퇴계는 거의 같은 사상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눌은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이었는데 그것은 내가 하이데거에 끌리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역시 끌리는 것은 하나라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우연스러웠던 일은 지눌을 읽고 돌아서서 경북 청도의 적천사라는 절에 갔었는데 거기서 지눌의 흔적을 발견한 일이다. 지눌이 심었다는 은행 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작은 절인데 그 절의 고요함이 지눌의 선풍에서 유래한 것 같아서 좋았다.  

무려 600페이지가 넘는 책인데 단 한장도 허투루 넘길수 없는 책이다. 순서는 원효, 지눌, 퇴계, 율곡, 다산 이런식으로 시대순으로 되어 있지만 읽는 것까지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 나는  공부 때문에 퇴계를 먼저 읽었고 그 다음엔 율곡, 지눌, 원효를 읽다가 미처 덜 읽고 다산을 읽었다. 내 관심가는대로 아무렇게나 읽어도 별 무리가 없다. 이 한권의 책을 읽고 나면 한국사상에 대해서 폼을 잡아가며 아는척해도 좋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개탄스러웠던 것은 근대 이후 우리에게는 여기 책에 나오는 사상가들만한 사상가가 배출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항간에서는 다석이나 함석헌등을 거론하기도 하지만 다산 이전의 사상가들에 비하면 허술하기 짝이 없다. 흔히 동양 철학은 정밀하지 못하다고 하지만 그 맥락을 짚어가다 보면 그 말은 오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별로 부담스럽지 않은 책이지만 간혹 용어의 개념에서 혼란을 느낄수도 있다. 그럴때는 컴퓨터에서 개념을 찾아가며 읽으면 된다. 마치 직접 저자를 마주하고 강의를 듣듯이 쉽게 술술 풀어가는 것이 이 책의 매력이라면 매력이겠다. 한국철학의 기초부터 섭렵하고 싶다면 한국사상연구소에서 출간한 '자료와 해설 한국의 철학사상'을 먼저 읽고 이 책을 읽어도 좋다. 거기에는 한국의 철학사상사가 방대한 인용문과 함께 제시되어 있어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냥 지적 욕심으로 읽는 것이라면 그냥 이 책만 읽어도 충분하다.  

해체 사상가이기도 한 김형효의 글들은 어려운 철학서이면서도 묘한 매력을 뿜어낸다. 사상의 체득과 문장의 힘이 어우러진 탓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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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다보면 이런저런 일들로 주변 사람들로부터 서운 일을 많이 당한다. 그것이 배신이라고까지 생각되는 일이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온전히 삼키기가 어렵다. 그러나 사람살이라는 것이 내가 남을 배신하기도 하고, 남이 나를 배신하기도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 버리면 더 이상 타인의 배신 따위는 마음에 담아 두지 않게도 된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타인으로 인해 상처를 받으며 산다. 설령 그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이 소설 <열정>은 묘한 느낌을 주는 소설이다. 자신의 분신처럼 생각하는 친구가 자신의 아내와 간음을 하고, 급기야 자신을 죽이기까지 하려고 했다고 생각하는 장군은 자신을 떠나버린 친구를 평생 기다린다. 자신의 아내였던 크리스티나는 친구가 떠나버리자 장군의 옆 성에서 7년을 혼자서 보내다가 결국은 병으로 죽는다. 사냥터에서 친구가 자신을 죽이고자 했던 날, 느낌으로 친구의 열정을 감지한 장군은 사냥터에서 돌아와 곧바로 친구의 집으로 간다. 그러나 이미 친구는 열대 지방으로 떠나 버린 후, 거기서 우연히 크리스티나를 만난 장군은 한순간에 그 모든 사실을 알아 버린다. 친구가 자신의 아내와 사랑을 했고, 그래서 사냥터에서 자신을 죽이려다 말았다는 것을. 

 이후 장군은 성의 문을 닫아 건다. 이후 성에는 단 한번도 파티가 열리지 않았고, 어떤 손님이 와도 장군은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그러면서 친구는 평생동안 그 친구만 기다린다. 진실을 알기 위해서, 정말 친구가 자신을 죽이고 싶어 했는지, 정말 자신의 아내와 친구가 사랑했었는지. 그 모든 것들은 장군은 친구로부터 직접 듣기를 원한다. 젊은이였던 장군은 어느덧 백발의 노인이 되고, 이제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감지한다. 

 드디어 장군의 성으로 친구가 찾아 오겠다고 기별이 온 날, 장군은 친구가 떠나 버린 그날 그대로 간직해 두었던 성에서 친구가 떠난 이후 처음으로 손님맞이 준비를 한다. 모든 것은, 식탁의 음식까지 친구가 떠난 마지막 날 그대로이다. 둘은 그날과 똑같은 음식을 먹고 그날과 똑같이 꾸며진 거실의 난로 앞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독백처럼 이어지는 장군의 말, 정말 친구는 자신을 죽이고자 했는지, 아내와 친구는 정말 사랑을 했었는지, 그래서 한때 자신은 증오와 배신감, 복수의 열정으로 시간을 보내었는데 이제는 모두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친구에게 담담히 밝힌다. 그것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설령 그것이 진실이라 하더라도 이제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독백처럼 말하는 곁에서 친구는 침묵한다. 장군의 이야기가 끝나자 친구는 끝까지 침묵하면서 성을 떠난다. 

 우리도 그런 순간이 많지 않았는가. 젊은 날 한때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것 같은 일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이 되어 버리는 것을, 그러나 그것은 그 당시에는 우리를 증오와 복수심으로 들끓게 한다. 죽음을 앞두게 되면 그런 것들로 하찮게 여겨지기 시작한다는 장군의 말을 나는 받아 들일수 있을 것 같다. 

이 소설은 결말 부분의 장군의 독백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문체는 사소한 일들에 들떴던 일상속의 우리들을 성찰의 시간으로 돌려 놓는다. 장군의 말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타인을 보게 되고, 타인을 재단하려 했던 우리를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소설의 제목이 <열정>이라는 것에 많은 의문을 품었다. 열정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이 답은 장군의 말 속에 있다. "어느날 우리의 심장, 영혼, 육신으로 뚫고 들어와서 꺼질줄 모르고 영원히 불타 오르는 정열에 우리 삶의 의미가 있다고 자네도 생각하나? 그것을 체험했다면, 우리는 헛산 것이 아니겠지?"  

그렇다. 영원히 불타오르는 정열에 우리의 삶의 의미가 있다고 나도 생각한다. 그 정열로 인해 우리는 삶을 이어가며, 그 정열이 가라앉는 날, 드디어 우리의 삶은 삶보다는 죽음을 향해 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정열에 헛된 열정을 태우지 말기를. 무엇으로부터 배신당하거나 타인으로부터 받은 상처에 괴로워하는 날, 이 소설을 읽는다면 마음 한 켠 저 멀리서 그 들뜸을 가라앉히는 그 무엇이 찾아 올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나날의 삶을 헛사는 것이 아니라고 위안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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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속에 무언가를 접어놓아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그것이 얼마나 자주, 또는 얼마나 뜸하게 불쑥불쑥 나타나 사람을 몽상에 잠기게 하는지를. 그래서 마음속에 접어놓은 것이 많은 사람은 행복하다. 그 접어놓은 것이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혹시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 하더라도 내 마음 속에 접어 둔 사람 하나 있다는 것은 근사한 일이다.

책을 읽고 책장의 가장 아래 칸에 넣어 두었던 책,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의 스밀라는 내 책장의 가장 아래 칸으로 떨려 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주자주 나를 몽상에 잠기게 만들었다. 이 책을 손이 잘 닿지 않는 책장 맨 아래 칸으로 넣은 이유는 두 번 끄집어 낼 일이 잘 없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서재를 쥐방구리 드나들듯이 드나드는 딸아이의 눈에 띄지 않는다면 아마 오랫동안 먼지를 뒤집어 쓰고 숨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아이가 읽기에는 어렵고, 추리소설을 두 번이나 꺼내서 읽을 일이야 뭐 있을라구 싶었다. 그렇지만, 물론 책 자체가 다시 나온 것은 아니지만 책의 주인공인 스밀라는 어느 책보다도 자주 내 기억 속으로 드나들었다.

나는 남성적이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는데 언제부턴가 그런 소리를 잘 듣지 않게 되었다. 도시에서의 팍팍한 삶을 견디고, 나이가 주는 삶의 중압감을 이겨내기 위해서 가장 먼저 말수가 줄었고, 쓸데없이 나대는 성질도 바뀌었고, 그러다보니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경우가 많아졌다. 남성적이라는 소리가 어느 날부터인가 점잖다는 소리로 바뀌었고, 더 심하게는 조용하다는 소리까지 듣게 되면서 이걸로 내 청춘은 영영 끝인가 했었다. 점잖다는 소리도, 조용하다는 소리도 내가 듣고 싶은 소리는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주관이 강하고, 에너지가 넘치고 싶었는데 내 몸은 자꾸만 뒤로 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태도에 대한 아쉬움 속에서 발견한 스밀라는 여전히 에너지가 넘치고, 때로는 원시적이기까지 한 야생적인 힘이 넘치는 매력적인 아가씨이다. 학교를 몇 번이나 퇴학당하고, 덴마크의 부자 아버지보다는 그린란드의 사냥꾼인 어머니를 더 좋아하는 여자, 이 여자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소리는 ‘갇힌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아버지로부터 도망치고, 덴마크의 도시로부터 도망치는 서른이 넘은 여자, 이 여자는 어느 날 친구처럼 지내는 동네 꼬마의 죽음을 목격한다. 3층 건물의 지붕에서 떨어져 죽은 것처럼 보이는 꼬마는 그러나 스밀라의 눈에는 자살로 보이지 않는다. 그린란드에서 자랐으므로 눈과 얼음에 대해서는 동물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스밀라의 눈에 보인 지붕위의 눈 자국이 꼬마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했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이 소설은 추리 소설이다. 꼬마의 죽음을 파헤쳐 가는 과정에서 스밀라는 덴마크 빙정석 주식회사가 얽혀 있는 거대한 음모를 찾게 되고, 이론과 실천적인 용기까지 갖춘 스밀라는 그 음모 속으로 직접 몸을 던진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 가장 크다. 지루하거나, 내내 보던 책이 너무 딱딱하거나, 뭔가 일상을 바꿔 보고 싶을 때 나는 소설을 본다. 소설에서 무슨 교훈을 찾는다거나 하는 건 내 체질이 아니다. 소설은 그냥 소설다우면 그만이다. 소설답다는 것은 욕구불만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주고, 한나절 정신없이 빠져들 수 있고, 무엇보다 일상을 잊어버릴 만큼 재미있으면 된다. 내가 가장 충족시키지 못하는 욕구불만 중의 하나는 바로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다. 돈과 시간과 자유만 있다면 나는 이 밤에라도 차를 몰고 가거나,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세계를 돌아다니고 싶다. 구석구석 빼놓지 않고 모조리 돌아다니다가 지치면 집으로 털레털레 돌아오고 싶은 욕구불만,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이 욕구불만을 나는 소설에서 많이 해결한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덴마크와 그린란드는 지도를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했다. 북극해를 끼고 있고 빙산이 있는 그린란드는 소설에 묘사된 것처럼 여자들도 남자들과 같이 사냥꾼이 될 수 있고, 남자들과는 오직 사냥으로만 평가받는다. 덴마크의 부자인 아버지가 반해 버린 위대한 사냥꾼이었던 스밀라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살고 싶어하던 도시로 가지 않고 결국 사냥터에서 실종되지만 그것이 그곳에서는 당연한 삶이다. 덴마크령의 그린란드인들은 도시에서는 하층 계급으로 살지만 그린란드에서는 땅의 주인이 된다.

안개가 어는 것은 어떤 풍경일까.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정말 궁금했던 것은 안개가 얼면 어떤 풍경이 그려질까 하는 것이었다. 안개가 언다는 것,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은 자세한 문자의 설명으로도 그려지지 않는다. 지도에 묘사된 빙산 공동묘지라는 곳, 빙산들의 묘지라니, 빙산들이 어느정도의 크기로 부서져야 공동묘지에 입성할 자격을 주는지 모르겠지만 빙상 공동묘지라니 생각만 해도 풍경은 또 얼마나 근사한가. 이런 생각들로 사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스밀라가 따라가는 범죄의 현장보다는 스밀라가 타고가는 배가 지니가는 바다쪽으로 더 마음이 끌렸다. 사진에서 본 빙산과 극 사진들이 머릿속을 바쁘게 돌아다녔지만 결국 내가 상상한 것은 몽상의 작품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읽고, 이 소설을 자주 생각했고, 여성적이면서도 남성적이고, 도회적이면서도 야생적이고, 다정다감하면서도 인간의 아킬레스를 칼로 자를 줄 아는 스밀라에게 반해 버렸다. 자신을 바꾸려 하지 않고 세상 속으로 스며들거나, 아니면 그 세상을 버리거나,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찾아가는 스밀라를 통해 가면을 쓰고 사는 내 삶을 보게도 됐다. 그러다 보니 자주 소설이 꽂혀 있는 책장의 맨 아래칸으로 눈이 가게 됐고, 나중에 우리 아이가 눈이 밝아 나이보다 좀 더 빨리 이 소설을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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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시학 동문선 문예신서 183
가스통 바슐라르 지음, 곽광수 옮김 / 동문선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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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많은 책들을 어떻게 읽느냐의 문제는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문제보다 더 어렵다. 나의 한 책의 독서에 대한 역사를 더듬어 보아도 그것은 과거의 시간과 나의 행적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은 예전에 읽었던 낡은 책들은 전혀 처음으로 읽는 것처럼 새롭게 읽을때가 있다. 문제는 어떻게 보느냐인 것이다.

현상학과 해석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나는 넓게 펼쳐 놓았던 공부의 범위를 좁히면서 깊이 파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읽게 된 책이 바슐라르의 책이다. 현상학을 더듬어 가며 세계를 이해하는 법을 배우고 의미를 부여하게 되면서 책들은 완전히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내가 섣불리 단정하고 규정지었던 많은 일들과 문자들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하면서 사실 문제는 좀 더 복잡해졌다. 단순함에서 복잡함의 세계로 진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철학적 현상학을 원하지 않았던 나는 내가 결국 추구하고 있는것이 문학적이면서 철학적인 현상학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고, 그것은 자칫하면 철학으로부터도, 문학으로부터도 외면받을 일임을 알면서도 그 길로 들어서기로 했다. 타인의 시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의 시선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더듬다가 마주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미 그 전에 바슐라르의 대략적인 사상을 거쳐 온 후라 책을 읽는 것이 별로 어렵지는 않다. 바슐라르까지 더듬어 온 사람이라면 별로 부담없이 읽을 수있는 책이기도 하다. 그동안 나는 워낙에 난해한 철학서들에 진저리를 낸터라 오히려 이 책은 재미있고 즐겁게 읽을수 있기조차 하였다. 그러면서 내가 깨달았던 것은 우리시대의 많은 시론서들이 바슐라르의 이론을 차용하고 있거나 거기에 기대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지식인들인양 하는 사람들이 이 바슐라르의 책에 나오는 몇가지 주장들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마치 자신의 이론인양 써먹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 『공간의 시학』은 그런 바슐라르의 책 가운데서 공간, 즉 우리 삶에서 항상 마주치게 되는 공간에 대한 생각들을 펼쳐 놓고 있다. 가령 여기서 인용되는 집이나 상자, 새집, 조개껍질 따위, 도는 구석이라는 공간이나 세미화 속의 공간, 더 넓게 말하자면 안과 밖, 원등이 저자의 현상학적인 시각으로 보여지고 있다. 이런 공간들을 명상하면서 저자는 이 책의 서문에서 “행복한 공간의 이미지”를 검토하려고 했다고 실토한다. 집이라는 공간, 상자나 서랍, 옷장등의 공간, 새끼를 낳기 위해 짓는 새집등은 모두 행복을 창조하기 위한 공간인 것이다. 또한 저자는 “상상력에 의해 파악된 공간은 기하학자의 측정과 숙고에 내맡겨지는 무관한 공간으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 공간을 우리들이 사는 것이다. 그 공간의 실제성에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상상력의 모든 편파성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바슐라르의 현상학이 상상의 현상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어진다는 것을 알면 이런 주장들은 한결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우리 문학의 숱한 모티프가 되는 이런 공간에 대한 바슐라르의 명상은 물론 우리들이 느끼는 동양적인 공간과 다소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일치한다. 우리가 굳이 공간이라는 것을 만들고 그 속에서 살고 싶어하는 이유는 거친 세상과 단절되어 행복하고 편안한 삶을 추구하기 때문인 것이다. 힘들여 집을 짓고, 기분이 우울하면 공간 속으로 숨어 드는 것은 그곳에서 우리 삶의 위안을 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의미들을 이해하고 나면 문학작품들을 해석해 내기가 한결 쉬워진다. 작품 해석에 어떤 규범이 있어야 한다는데는 별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순전히 자의적이고 주관적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에도 동의하므로 그런 의미에서 바슐라르의 논의는 의미가 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 바슐라르의 대부분의 책을 구입했다. 내 공부의 목표점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아서 여기서 어떤 과제를 찾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전의 역사를 더듬어 몽상의 시학과 물과 꿈을 더듬어 읽으면서 나는 시를 쓸때처럼 행복한 기분에 젖어든다. 그리고 약간의 몽환적인 기분에도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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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 시대의 사랑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7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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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보다 좀 더 나이가 들어 이제는 사랑 따위를 입에도 올리지 않을것 같은 나이가 되면 과연 사랑은 우리의 곁을 영원히 떠나 있을까. 예언컨데 우리가 지금 불혹의 나이를 넘기고 있어도 마음은 여전히 10대를 거슬러 20대, 30대를 지나고 있듯이 사랑도 아마 영원히 과거형이나 현재형, 또는 미래형으로 이야기되고 있을 것이다. 20대의 불같은 열정을 품은 사랑은 아니라 해도 여전히 가슴 속에는 사랑의 불꽃이 일렁거리고 있을 것이며, 우리는 그 사랑이 주는 고독감에 때로 하루를 우울하게 보낼지도 모른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좋아한 것은 그의 유명한 소설 '백년동안의 고독' 때문이었다. 어릴적 멋모르고 읽었던 소설이지만 나는 이 소설에 깊은 영감을 얻었고, 라틴아메리카인들의 자유로우면서도 우수에 찬 삶, 삶에 대한 깊은 애착은 카리브해를 떠도는 공기처럼 내 마음을 떠돌고 있었다. 비규격적이고 난해하면서도 엄격성을 지니고 있던 소설에서의 라틴아메리카인들은 무엇보다도 삶을 사랑하는 것 같았고 사랑에 목숨을 걸 줄도 아는 유쾌한 민족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때 마르케스란 이름은 내게 자유의 상징이었고, 지금도 그 이름은 자유로운 사유의 대리인으로 내 영혼을 활보한다.  영화 '일 포스티노'를 통해서 드러나는 카리브해의 푸른 바다색과 열정적인 사람들, 그 바닷가에서 시를 쓰며 체제에 저항하던 파블로 네루다, 오토바이 한대에 의지해 라틴아메리카를 여행하는 체 게바라와 더불어 마르케스는 항상 한번도 가보지 못한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작가였다.

 이국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지리하면서도 끝도 없는 멀미를 느끼게 한다. 방학이 시작되자 나는 한때 멀미를 일으켰던 영어를 극복해보고자 하루의 대부분을 영어 공부에 매달리고 있는데 그러다 보면 가끔은 이 낯선 문자의 숲에서 길을 잃기도 한다. 자연스럽게 체득되어야 할 언어를 암기를 통해 습득하려니 때로는 미친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이렇듯 지리멸렬한 시간 속에서 나는 바닷바람을 쐬이는 심정으로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펼쳤다. 항상 이렇다. 복잡한 터널 속에서 허둥거리고 있을때 나는 소설을 보거나 시를 읽는다. 그러다 터널속을 되돌아보면 그 터널이 명료해질때가 있는데 그러면 다시 나는 터널속에서 전투태세에 돌입하는 것이다. 그렇게 손에 든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1권을 읽을때까지, 이거 뭐 어쩌자는 거야, 도대체 마르케스가 뭘하자는 거지, 라는 의문점에 시달렸다. 당연히 이국의 언어에 대한 멀미처럼 아련한 멀미도 느꼈다. 마르케스의 자전적 겯향이 강하다는 설명을 어디선가 본듯도 하여, 마르케스가 이런 사랑을 했구나 라는 막연한 심정으로 읽었다. 그리고 이 나이에 연애 소설이라니, 너무하지 않은가 하면서 스스로에 대해 코웃음을 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소설은 흔한 대중연애소설처럼 가볍지는 않다. 때로 라틴아메리카인들의 삶의 습관을 내밀히 들여다보는 재미도 있고, 사람들은 이렇게 쉽게 사랑을 하는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습적인 사랑은 사실은 순전한 겉모양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우리 주변 사람을 돌아보건대 성인군자연하는 그들도 사실은 이 소설처럼 모두들 은밀한 사랑을 하는건 아닐까 하면서 괜히 주변 사람들을 의심해 보게도 한다. 그러다가 1권을 읽었으니 끝장을 내자는 심정으로 2권을 읽었고, 2권의 후반부에 가서야 드디어 이 소설이 많은 문학평론가들이나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는 이유를 겨우 알아낼 수 있었다. 

 십대에 우연히 알게된 한 소녀를 사랑하게 된 남자는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을 그 여자 곁에서 맴도는데, 사실 그 여자는 한때의 사랑이었던가 싶었던 모호한 실체를 부정하면서 그 사랑을 잊어 버린다. 그리고 결혼생활이란 행복보다는 안정이 더 중요하다는 남편의 말에 따라 살다가 남편이 우연히 사고로 죽자, 오랫동안 그 여자 주변을 맴돌던 남자는 다시 그 여자에게 구애의 손길을 뻗친다. 당시 라틴아메리카에는 콜레라가 유행했는데 선박회사의 사장이었던 이 남자는 그 회사에서 가장 좋은 배를 타고 여자와 강 여행을 떠난다. 돌아오는 길에 많은 짐들과 손님들 때문에 지쳐하는 여자를 보고 남자는 당시 배 안의 승객에 콜레라 환자가 있으면 노란색 깃발을 달던 관습에 따라 배에 노란 깃발을 달고 항해한다. 배에는 그 남자와 여자, 선장과 중간에서 탄 선장의 애인, 승무원 몇 뿐, 어느 항구에도 설 이유가 없고, 누군가를 태울 이유도 없다. 누구도 곁에 오기를 꺼리는 노란 깃발을 단 배를 타고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온 남자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현실적인 고통에 맞서 선장에게 다시 배를 돌릴 것을 요구한다. 그러한 왕복여행을 언제까지 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 선장에게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목숨이 다할때까지"

 이미 오십을 넘어 당시의 평균수명으로 볼때는 죽음이 가까운 나이인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은 아마도 그렇게 시작될 것이다. 평생을 바라보았으나 젊은날에는 한번도 사랑을 해보지 못했던 불행한 사랑이었지만 남자는 한번도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소설에 나오는 여러가지 형태의 사랑은 우리의 고정관념으로 볼때 비도덕적이다. 그러나 나는 감히 말하건대 문학작품에서 윤리의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문학을 모르는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다. 어떤 이들은 비윤리적이어서 소설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말하는데, 그러한 기준을 적용해 버리면 그 소설은 하나도 재미가 없다. 우리 삶에서도 그러하지 않은가. 윤리적인 삶은 안정감은 주지만 재미를 주지는 않는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윤리니 비윤리니 하는 것들의 기준조차 모호하기 그지없다.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참을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유명한 소설을 독파한다는 마음으로, 이왕 시작한 거 끝장 내겠다는 심정으로 읽다 보면 세상의 모든 일들이 그러하듯이 언젠가는 끝이 나게 되어 있다. 나는 영어 단어를 외우거나 문장을 해석하다가 분명이 어제 외운것이 깜깜하게 기억이 나지 않아 짜증을 견딜수 없을때마다 이 책을 펴고 읽었다. 며칠동안 영어 단어와 연애소설을 왕복하는 사이 어쨌든간에 영어책의 페이지수도 넘어가 있었고, 소설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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